목차
1 소개
FC 서울은 1983년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으로 창단하여 그 후 LG 치타스, 안양 LG 치타스 이렇게 구단명칭과 연고지가 바뀌어 오늘에 이르며 이 시절 동안 K리그를 3차례(1985년, 1990년, 2000년) 우승하였다. 2004년 FC 서울로 개명하면서 대기업 구단 중 처음으로 기업명을 구단명칭에서 완전히 배제했는데 이로 인해 축구팬이 아닌 사람들은 과거에 럭키금성, LG 치타스, 안양 LG 치타스 이런 구단들이 있었던 것은 들어봤던것 같은데 이 구단들이 현재의 FC 서울 구단인지 모르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연고 이전과 관련한 문제 때문에 FC 서울 안티들은 이 시기를 현 FC 서울의 역사에서 빼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하고 있는데 구단도 과거 역사를 연혁에 표시하고 있고 프로축구연맹에서도 역사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둘을 갈라야 한다면 울산 현대의 강원도 연고 시절, 제주 유나이티드의 이전 연고지(서울, 부천) 시절, 성남 FC의 시민구단 전환 이전의 역사도 모두 말소해야 한다.
2 시기별
2.1 럭키금성 황소
럭키금성 황소 | ||||||
1984시즌 | 1985 시즌 | 1986 시즌 | 1987 시즌 | 1988 시즌 | 1989 시즌 | 1990 시즌 |
1983년 12월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이라는 명칭으로 창단하였고 연고지는 서울을 요구했으나 전국 연고지 안배에 따라 대한축구협회에 의해 충청도를 배정 받았다. 첫해에는 8개팀 중 7위를 기록하였으나 1985시즌 태국 출신 외국인 선수인 피아퐁의 대활약에 힘입어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 기세를 몰아 1986 시즌에는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990년에 서울 연고지로 이전하였으며 그 해 우승을 차지하여 럭키금성이라는 이름으로 두번째 우승이자 한국 프로축구 사상 서울 연고팀으로 첫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1990년에는 LG 트윈스도 MBC 청룡 시절을 포함, 창단 사상 처음으로 우승에 성공해, 신문 기사에 우승! 또 우승! 이라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였다. 럭키금성 리즈시절
럭키금성 시절 선수로 활약한 이용수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의 경기 영상
럭키금성 시절 피아퐁 선수 경기 영상
2.1.1 당시 주요 선수
- 이용수 (1984)
- 피아퐁 (1984-1986)
- 한문배 (1984-1986)
- 조영증 (1984-1987)
- 박항서 (1984–1988)
- 정해성 (1984–1989)
- 강득수 (1984–1989)
- 김현태 (1984–1991, 1994, 1996-1997)
- 최진한 (1985–1991)
- 조민국 (1986–1992)
- 구상범 (1986–1993)
- 이영진 (1986-1995, 1997)
- 최순호 (1988-1990)
- 윤상철 (1988-1997)
2.2 LG 치타스
LG 치타스 | ||||||
1991 시즌 | 1992 시즌 | 1993 시즌 | 1994 시즌 | 1995 시즌 |
서울 연고 동대문운동장을 홈구장으로 하는 두번째인 1991 시즌부터 LG 치타스라는 명칭으로 구단명칭을 개명하였다. 간혹 LG 치타스 시절이 동대문 시절의 전부인 줄 알지만 동대문 시절 첫번째인 1990년에는 럭키금성 황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1]
LG 치타스 시절에는 1회 컵대회 였던 아디다스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1993시즌에 준우승을 차지한 게 최고 성적으로 그 외 시즌에는 암흑기에 버금갈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 연고지의 LG 치타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1996년부터 안양 LG 치타스가 되었다.
1993시즌 스타팅 11 사진
파일:W4tASYf.jpg
2.2.1 당시 주요 선수
2.3 안양 LG 치타스
안양 LG 치타스 | |||||||
1996 시즌 | 1997 시즌 | 1998 시즌 | 1999 시즌 | 2000 시즌 | 2001 시즌 | 2002 시즌 | 2003 시즌 |
홈구장은 안양종합운동장, 애칭은 아워네이션(Ournation). 메인 서포터는 RED. 특히 안양은 수원과 지지대 더비라는 K리그의 대표 더비를 이룰만큼 두터운 팬층을 가졌던 구단이다. 다만 그만큼 팬들의 성향도 꽤나 강한 편. 수원과의 더비 라이벌 관계에서 보여준 열정이나 홍염으로 대표되는 응원문화도 꽤나 해외축구 못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프로축구연맹과 대한축구협회에서는 타구단인 성남 FC, 제주 유나이티드 그 외 울산 현대 축구단 등등과 마찬가지로 연고지 이전과 상관없이 공식적으로 안양 LG 치타스 역사를 현재의 FC 서울의 역사의 일부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만 이전 안양 팬들과 일부 K리그 팬들 중에 받아들이지 않는 팬들이 있다.[2]
파일:Attachment/c0054344 46c8f8a4301d5.jpg
구단이 연고이전 한 이후에도 소수의 서포터가 남아 국가대표 경기나 K리그 경기가 있는 경기장에 걸개를 걸며 안양 창단을 희망하고 있다. 위 사진은 K리그의 최대 흥행매치인 수원과 서울의 경기에서 걸개를 건 안양팬들. [3]
2004년 이 사과문과 함께 안양 LG 치타스라는 명칭은 사라졌다.
여담으로 연고 이전 당시 안양공고출신 이며 데뷔도 안양 에서 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동진은 당시 연고 이전에 적극 찬성을 하였으며 이 때문에 아직까지 안양 사람들에게 금지어가 되었다.
정조국 역시 연고 이전에 적극 찬성 하여 역시 안양 사람들에겐 금지어 이다.
2.3.1 당시 주요 선수
- 서정원 (1992-1997)
- 최용수 (1994-2000, 2006)
- 이영표 (2000-2002)
- 신의손 (2000-2004)
- 최태욱 (2000-2003, 2010-2013)
- 김동진 (2000-2006, 2011)
- 최원권 (2000-2010)
- 박용호 (2000-2011)
- 이정수 (2002-2004)
- 김치곤 (2002-2009)
- 이을용 (2003-2004, 2006-2008)
- 정조국 (2003-2010, 2012, 2014-현재)
2.3.2 울트라스
이 당시 가장 거대했던 울트라스로 RED가 있었다. 지금도 가끔씩 울트라스하면 회자되는 단체인데 일단 경기 시작하면 홍염부터 까고 본다. 어찌나 홍염을 사용하는지 안양 축구의 상징하면 홍염으로 각인될 정도였다. 그리고 호전성 또한 엄청났는데 다른팀 서포터즈들이 원정가기 꺼려할 정도로 호전성이 강했다. 그리고 지지대 더비가 일어나는 날은 경기장 인근에서 반드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그랑블루와 충돌이 있었다.
연고이전으로 팀을 잃은 뒤에도 시민구단 창단을 계속해서 시도했지만 2010년 이전까지는 시의 냉담한 반응에 눈물지어야만 했다. 그러다 2012년 말 고양에 있던 축구팀을 얻어왔고 새로운 팀에서 예의 호전성을 다시 보이고 있다. 서울과 안양의 경기가 벌어질 경우 유래없는 폭력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2.3.3 안양 LG 치타스 서포터스 사고
대구 FC 창단 직후 대구와의 경기를 불전동차 홈경기라며 서포터스 홈페이지에 올려서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아픔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홈페이지에 3일간 노출 되었으며 LG 치타스 홈페이지와 대한프로축구협회 홈페이지가 수많은 항의 글로 다운되기도 했다.
관련뉴스
3 관련 항목
- ↑ 프로야구 LG 트윈스는 1990년부터 LG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축구단은 1년 늦게 사용하였다.
- ↑ 성남 일화 천마가 별 7개에 대해서는 아무말이 없지만 FC 서울의 5회 우승 횟수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FC 서울 팬들의 주장에 대해 FC 서울 안티 진영에서는 성남은 일화의 기업 축구단으로써 7회 우승을 내세웠으며 서울은 서울의 이름을 걸면서 안양 시절과 충청도 시절 우승도 서울에서 한것처럼 위장하고 있다며 억지논리를 만들어 까댔지만 이것도 옛말...성남 일화가 성남 FC로 시민구단이 된 이후에도 과거 서울 동대문 연고지 시절과 천안 연고지 시절 역사와 기록을 모두 승계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성남 FC 7회 우승과 FC 서울의 5회 우승은 아무 차이가 없는것이다. 즉 FC서울 5회 우승이 문제면 성남 FC의 7회 우승도 똑같이 문제라는 것으로 축구팬들의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 ↑ 당시 안양 서포터들이 서울 서포터들에게 라면국물을 뿌리고, 서울 서포터들은 강제로 걸개를 철거하려고 하는 등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