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권

대구 FC No.81
최원권 (崔源權 / Choi Won-Kwon)
생년월일1981년 11월 8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서울특별시
포지션풀백, 미드필더[1], 윙어
학교동북중-동북고
신체조건175cm / 70kg
프로입단2000년 안양 LG 치타스
소속팀안양 LG 치타스/FC 서울(2000~2010)
광주 상무(군복무) (2009~2010)
제주 유나이티드(2011~2013)
대구 FC(임대) (2013)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2014)
대구 FC (2014~ )
스태프대구 FC 플레잉코치 (2016~ )
국가대표4경기 / 0골
별명보거스[2]
종교개신교

대한민국대구 FC의 축구선수.

1 프로 활약

어릴 적에는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체육시간에 축구시합을 하다가 축구부에 발탁되어,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축구 명문 동북중, 동북고에 진학하다 보니 각종 대회에서 준우승 내지는 3위권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는데[3] 준우승을 하고도 혼났었다고...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2000년 안양 LG 치타스에 입단하여 K리그에 데뷔했다. 2000년 4월, 수원 원정경기[4] 여담인데 그 당시 최원권의 첫 슛을 막은 선수는 김병지선수였다. 그 해 아디다스 컵을 포함하여 4경기를 뛰는데 그쳤고, 2001년에서야 리그에서 14경기를 뛰며 경기 출전횟수를 늘리기 시작하였다.

주로 윙어로 활약하였으나 풀백으로 주 포지션을 변경[5]하여, 2001년 K-리그 준우승에 기여했다. 22경기 출전해 4도움을 기록했다. 이 시기에 안양은 슈퍼컵, 리그컵에도 우승했다. 2002년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6] 준우승, K-리그에서는 준우승을 했는데 20경기에 출장해 2도움을 기록하였다.컵 대회 우승도 있지만 큰 대회나 리그에서는 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2004년 안양 LG 치타스서울특별시로 연고를 이전하고 구단 명칭을 변경한 FC 서울에서 계속 활약하였다.
2006년 3월 25일 제주전에서 프로 통산 도움 해트트릭을 기록했다.하지만 이번 시즌 도움도 3개다. 2008년 K리그 준우승에 기여한 후 광주 상무로 입대하게 된다. 제대 후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게 되므로 FC 서울에서의 마지막 시즌이다. 안양/서울에서 168 경기에 출장 3득점, 14도움을 기록했다.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2005년 포항 스틸러스트레이드되었으나, 선수 본인의 반대와 포항 코치진에서의 반발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당시 포항에는 오범석도 있어서 최원권이 간절하진 않았던 듯.

2009년 군 복무를 위해 광주 상무에 입대하여,주 포지션인 풀백 역할 뿐만 아니라 중앙 미드필더로도 뛰며 멀티 플레이어로서 활약하였다. 전반기에 광주 상무가 1위로 치고 나갔으나, 곧 DTD를 시전하였다. 광주에서 50경기 8골 5도움을 기록하는 등,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제대했다.

제대 직후, 2011 K리그를 앞두고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게 되었다. 세부 계약 조건은 알려지지 않았다. 2012시즌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일본 팀과의 연습경기에 지지 않아, 박경훈 감독의 방울뱀 축구가 좀 더 완숙해진 것 같다는 인터뷰를 했다. 한동진, 마철준을 제외하면 고참이 없는 등, 젊은 선수들이 제주의 주축이 되어잇기에, 팀을 잘 이끌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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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시즌 출전 기회가 줄어들자 대구FC이진호와 맞임대로 임대이적했다. 대구 FC 입단 당시 표정이 좋지 않아 대구팬들에게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결국 최호정과 로테이션으로 출전하여 12경기 출장에 그치고 복귀했다.

2014년 초 경주 한국수력원자력으로 이적한다. 이적 기사가 나지 않은 듯. 조용하게 이적했다. K리그 클래식에서는 모르겠지만 K리그 챌린지에서는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이 많다. 7월 31일 대구 FC로 다시 이적하였다.

2015년 키프로스 전지훈련에 합류했다. 노병준과 함께 대구FC의 고참으로서 챌린지에서 베테랑이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했다.

2016년 플레잉코치로 합류하였다.

2 국가대표팀 활약

2003년에 올림픽 하계 대표팀 예비명단에 포함되었다. 본인 말로는 프로 계약 때보다 더 기뻤다고.[7] 2004년 당시 올림픽대표는 대한민국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2003년 12월 4일 동아시아 축구선수권 대회에서 A매치 데뷔를 가졌다. 다만, 활약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리그에서의 활약과는 다르게 국가대표팀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좁은 시야를 보여주었다. 오만과의 경기오만 쇼크가 아니다. 5:0으로 승리한 경기다.에서 골문 앞에 안정환이 있었으나, 오만 선수에게 날아갔다. 다행히 오만 선수의 자책골로 당시 경기에 첫 골이 들어갔다.

다만, 이 이후로 국가대표팀에 소집 된 적이 없다.

3 기타

성격이 제법 더려운 편으로 알려져 잇다. 국내 축구 팬들 중에서는 마음에 안들어하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사실 플레이 스타일로 보았을 때 윙백보다는 플레이 메이커로 놓는 게 어울려 보인다고 한다. 혹자는 이관우를 윙백에 배치해 놓으면 어떻게 될 거 같냐는 말까지 했다. 어떻게 되긴 망하는 거지.최원권은 리그에서 윙백 자리에서 뛰고 있기 때문에 그냥 일단은 그 자리에 익숙한 것이라고.그러고보니 포지션 변경을 시킨 사람은 조광래였지...

자신과 절친한 후배인천 유나이티드의 서성철의 여동생이 논현동 고시원 살인 사건으로 희생되자, 구단 홈페이지에 서성철이 다음 아고라에 쓴 청원 글을 올려 팬들의 관심을 촉구하였다.

2012년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던 당시, 결혼에 골인하였다, 아내와는 선수와 팬의 관계로 교류하다가 결혼에 성공한 케이스다.

300경기 출장이 목표라고 한다. 2013시즌까지 총 274경기에 출장했다.

은퇴 후의 목표는 축구하는 선교사라고 한다. 고양 Hi FC가면 되겠네. 그라운드의 기도하는 축구선수대표팀의 누군가가 생각난다.라고. 선교사는 목표이고, 축구는 좋아하는 거니까 두 개를 다 하고 싶다고... 인터뷰에서는 태국[8]을 에로 들며 메이저 대회에 나가지 못하니 그곳에서 선수를 키워 K리그에 역수출해보고 싶다고 한다.

  1.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기도 했다. 2015년 K리그 챌린지 2라운드 서울이랜드FC와의 경기 후반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다.
  2. 보거스는 내 친구의 그 보거스다!
  3. 우승을 한 번도 못했다고 한다. 콩라인?
  4. 지지대 더비였다. 당시 교체 투입되었으나 결과는 5-4로 패배했다.
  5. 이 당시 감독은 짐작할 수 있다 시피 조광래이다.
  6. 지금은 AFC 챔피언스 리그로 이름을 변경했다.
  7. 그때 최태욱, 이천수 최조작, 조재진 등을 친해졌고 스스로를 치킨패밀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8. 다만 태국도 최근 투자를 거듭해 동남아시아에서는 강호로 자리 잡았고, 제이리그J-리그와 협약을 맺어 선수 교류를 추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