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Notre Dame de Lourdes
영어: Our Lady of Lourdes
1 개요
1858년 2월 11일부터 프랑스의 시골인 루르드에서 일어난 성모 발현으로, 성모 마리아가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Marie Bernarde "Bernadette" Soubirous, 1844년 1월 7일 ~ 1879년 4월 16일)에게 총 18번 나타난 발현을 말한다. 당시 14살의 가난한 소녀였던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보고에 따르면, 여동생과 친구와 같이 땔나무를 모으던 중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마사비엘 동굴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부인'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사후 54년이 지난 193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사후 오래도록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축일은 4월 16일. 한국 가톨릭에서 과거 표기인 '벨라뎃다(베르나데트)'를 세례명으로 쓰기도 한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당시 베르나데트가 성모 마리아를 본 것이라고 믿고 있다. 1862년 교황 비오 9세는 그 지역 주교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루르드의 성모를 공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2 성모 발현 경위
1858년 2월 11일,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투아네트, 잔 아바디 등 또래의 다른 두 소녀와 함께 땔감으로 쓸 나무와 수프 재료로 쓰일 살이 조금 붙은 뼈 등을 모으러 돌아다녔다. 마사비엘 동굴 근처에 있는 가브 강을 건넌 두 소녀를 따라 베르나데트도 강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었을 때, 폭풍우 같은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강변의 나무와 수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마사비엘 동굴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발끝까지 내려온 하얀 드레스에 하늘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와 어깨를 덮었으며, 팔에는 묵주를 두르고 있고 발아래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모습을 한 여인이 나타났다. 베르나데트는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 기도를 바쳤다. 베르나데트가 묵주기도를 끝마치자, 여인은 베르나데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순식간에 사라졌다.
베르나데트는 이 일을 자기만이 아는 비밀로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귀가하던 도중에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여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그녀의 부모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부모의 힐난 섞인 질문을 받고서, 베르나데트와 여동생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체벌을 받았다.
그로부터 3일 후, 베르나데트는 다른 2명의 소녀와 같이 동굴을 다시 찾았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르나데트가 탈혼 상태에 빠진 것에 놀라 두 소녀가 몹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녀들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베르나데트는 아직도 황홀경이 없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2월 18일, 베르나데트는 부인에게서 "너는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이 동굴에 오너라."라는 말을 들었다. 부인은 이어서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지 못하지만 다음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경찰과 시 당국까지 포함한 지역 전체의 관심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부모와 경찰은 베르나데트가 더는 마사비엘 동굴로 가지 못하도록 조치했지만, 베르나데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계속 동굴을 찾았다.
2월 25일, 부인은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베르나데트에게 가서 마신 다음에 씻으라고 지시했다. 베르나데트는 부인이 지시한 대로 손으로 땅을 깊이 파헤친 후 그 물을 마시고 목욕하였다. 주변 사람들은 드디어 베르나데트가 미친 줄 알았지만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나왔다. 그리고 성모님을 뵌 소녀가 파서 나온 물이니 영험한 효과(…)가 있을 거라며 마시고 바른(…) 사람들이 치유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온갖 종류의 병을 앓는 환자들이 대거 몰려와 이 샘물을 마시거나 몸에 뿌렸다. 그 후, 많은 기적 사례가 보고되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샘물을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된 것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환자는 사고 후 오른손이 기형으로 변한 여성이었다.
군중의 수가 점점 많아지자 프랑스 정부는 루르드를 점차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는 동굴을 울타리로 막고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한 다음 누구라도 이곳에 접근하는 자는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루르드는 어느새 프랑스의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동굴은 나폴레옹 3세 황제의 개입으로 1858년 10월 4일에 다시 일반에 개장되었다. 이와 같은 논쟁에서 교회는 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로 하였다.
3월 25일, 밤중에 베르나데트는 어둠을 틈타 동굴에 겨우 도착하였다. 동굴 주위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가브 강가에 무릎을 꿇고 동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베르나데트는 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3번이나 되풀이하여 부인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부인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마침내 4번째 물음에 그녀는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는 부인의 대답을 들었다.
4월 7일 일요일 부활절 날, 베르나데트를 관찰한 의사는 그녀가 탈혼 상태에 빠졌을 때, 촛불에 손을 뻗었는데도 화상을 전혀 입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7월 16일, 베르나데트는 동굴에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부인의 미소를 보고 감탄한 그녀는 나중에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라고 회고했다.
지금까지 모든 과정 동안,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교회는 전국적인 질문들에 직면하자, 1858년 11월 17일에 루르드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발족하기로 하였다. 교황청의 이런 발현조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깐깐했으나 결국 1860년 1월 18일, 지역 교구장은 "동정 마리아께서는 참으로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나타나셨다."라고 발표하였다.
이 과정은 '소년' 잡지에 황미나가 그린 적도 있다. 당시 교구 사제인 뻬이라말 신부는 베르나데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움이 거의 없다시피 한 시골 소녀인 베르나데트가 그 귀부인에게 들었는데, 그분은 자신을 임마꿀레 꽁셉시옹(Immaculata Counceptio: 나는 원죄없는 잉태이다)이라 밝혔다고 말한다. 그것을 보고 그녀가 거짓으로 그런 어려운 말을 꾸며낼 수 없다며 신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교황청에서 성모무염시태 교리를 믿을 교리[1]로 반포하고 2년 후에 일어난 발현이며, 그 발현의 요지가 바로 교황청과 일치하는 것이기에 빠르게 이 발현의 성모를 공경해도 좋다는 선포가 났다. 본래 가톨릭 내부에서는 성모몽소승천과 더불어 성모 마리아의 양대 믿을 교리 급의 신심이었고 가톨릭 내부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기에 다들 그런가 보다 하고 믿었으나, 다른 종교에서 자꾸 태클이 들어오자 아예 반포를 한 것으로, 이전에 없던 교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후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프랑스 느베르(Nevers)의 사랑의 자매 수녀회에 '마리 베르나르드(Marie-Bernarde)'라는 수도명으로 입회해, 지병인 결핵으로 35세에 요절할 때까지 조용히 수도생활을 했다.
오늘날 루르드는 파티마와 더불어 성모 공경의 근거지로서, 매년 세계 각국에서 4-600만 명의 순례자가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순례지 가운데 한 곳으로 자주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다. 농담 삼아 신자들 사이에서는 파티마는 이미 모든 예언이 완료되었지만 루르드의 치유는 현재도 진행형이라며 이곳이 더 강세라고도 한다. 물론 농담으로 하는 소리.
근래의 교황들 역시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였다.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요한 23세는 주교 시절에 루르드를 찾아왔으며, 비오 12세는 교황 재위 시에 루르드를 찾았다. 비오 12세는 또한 루르드의 성모 발현 100주년을 기념해 회칙 《루르드의 성지 순례(Le Pelerinage de Lourdes)》를 발표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루르드를 총 3번 방문하였으며, 1992년 5월 13일에는 루르드의 성모 축일인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정했다. 베네딕토 16세는 2008년 9월 15일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을 맞아 루르드를 찾아 미사를 집전하였고 1년 간 루르드 성모 발현과 관련된 전대사를 내렸다.
3 기적수
떡고물만 바라고 정작 신앙은 뒤로 미뤄버리는 경우가 지난 역사에서 수도 없었던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장려하고 있지는 않지만, 루르드 샘물은 기적의 샘물로 불리며 루르드에서 성모신심을 고취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발현 이후, 난치병을 앓는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서 자신들의 치유를 갈망하며 그 물을 마시거나 몸을 씻고 있다. 그리고 루르드 당국은 루르드 샘물을 마시거나 목욕하러 찾아오는 사람 모두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매년 순례자들이 마시거나 떠가는 샘물의 양은 1만m³나 된다. 직접 가보면 무슨 약수통 같은 통에 그것도 여러 통을 퍼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나눠줄 땐 스포이트로 한 방울씩.
1858년 루르드의 시장 앙셀름의 의뢰에 따라 루르드 샘물에 대한 성분 분석이 이루어졌고 그 일은 툴루즈에 사는 교수가 맡았는데, 조사 결과 샘물을 마셔도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산소, 질소, 탄산 석회, 마그네시아, 극소량의 탄산철, 알칼리성 탄산염 또는 규산염, 칼륨과 나트륨의 염화물, 극소량의 칼륨과 소다의 황산염, 극소량의 암모니아, 극소량의 아이오딘 등의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본질상,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특별한 화학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사람들은 지하 100m 천연 암반수라도 기대한 건가…
성모 발현 이후 루르드에서는 지금까지 7천여 건의 기적 치유 사례가 보고됐다. 그러나 현재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기적은 총 67건이다. 교황청의 기적 인정 사례의 깐깐함을 생각하면 67건이라는 숫자도 대단한 거다.
루르드 샘물의 기적 치유 심사는 1882년 설립된 루르드 의무국에서 실시한다. 이 의무국은 전 세계 모든 의사들에게 열려있으며, 의사들은 기적으로 병이 나은 사람들을 조사하거나 의무국 내 문서를 매의 눈으로 살펴볼 수 있다.
루르드 의무국에서는 이전에 불치병 판정을 받은 이들이 치유된 사례를 조사하고 완치 확인서를 발급하지만, 결코 기적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또 이곳에서는 정신적 원인일 가능성이 있는 질병이 아닌 오직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고 의학적으로 입증된 기질적 질병의 치유 사례만을 제한적으로 조사한다.
기적 치유로 인정받으려면 매우 심각하고 치료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질병으로, 회복단계가 아니며, 효과적인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충족해야 한다. 또 치유는 즉각, 완전하게, 영구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한국에서는 황미나 작가가 이곳을 순례하고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고 하며, 본인의 그 기억을 얼마 전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보에 기고하기도 했다.
4 성모상
성모상이 특이한데 보통 성모발현의 모습에 따라 성모상이 만들어지곤 한다. 파리 뤼뒤박의 기적의 패와 관련된 성모상은 발현 당시의 모습대로 양손을 자비롭게 아래로 내린 모습이며, 루르드의 성모상은 묵주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모습이다.
특이한 점은 이 묵주가 천주교 신자들이 흔히 아는 5단 묵주가 아니라 6단 묵주라는 것이다. 6단 묵주인 이유는 일설에 따르면 베르나데트가 성모님의 분부대로 묵주기도를 하겠다고 한 뒤 5단을 바치고, 그 뒤 1단만 본인의 구원을 위해서 바쳐도 되겠냐고 묻자 성모 마리아가 맘씨도 좋으시게 그러라고 선선하게 허락했다는 말에 따른다. 그래서 루르드에 가면 6단 묵주를 팔고 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에서는 아직 이 6단 묵주에 대한 신심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에, 한국에서 이 성물을 만들어 팔지는 못한다. 한때 천주교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의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가 6단 묵주를 성당 성물방에서 보급하였으나, 아직 허가되지 않은 신심을 자제하라는 주교의 명에 순명하여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루르드 성모상이 5단 묵주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교황청에서 인정한 성모 발현이라도 공적이 아니라 사적 신심이라서 성모상 모습에는 큰 상관은 없지만 엄밀하게는 오류다. 한편 감곡 성당에 모셔진 성모상은 100년도 더 전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만들어진 성모상이라서 6단 묵주를 든 모습이다.
5 한국과의 관련
천주교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곳의 초대 부임 신부인 임 가밀로 신부가 바로 루르드 출신의 신부다.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해 사제가 된 임 가밀로 신부는 이 루르드의 신심을 바탕으로 신앙을 키웠고, 조선으로 파견될 때 다른 곳이 아닌 이 루르드의 성모상을 조선으로 모셔왔다. 그래서 감곡성당의 성모상은 6단 묵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또 감곡성당이 지어지게 된 우여곡절과 그 뒤에 이어진 여러 소위 기적에 가까운 사례들로 결국 성모순례지가 되었는데, 루르드 성모발현 150주년을 기념하여 전 세계에 루르드와 관련된 곳을 조사하던 중 이 감곡성당도 선정되었고 교황청에서 전대사 성당으로 지정도 받았다. 루르드 성모발현 150주년 기념 전대사 기간은 끝났지만 매 성모 관련 축일과 1년에 한 번 본인이 순례하겠다고 마음을 가지고 순례했을 경우 받는 전대사는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유효하며 이는 문서로도 확인 가능하고 감곡성당에 가면 전시도 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경내에 위치한 성모당은 루르드의 굴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구조물 상단에 보면 EX VOTO IMMACULATE CONCEPTIONI라는 라틴어 문장과 1911, 1918이라는 숫자가 새기어져 있는데, 라틴어 문장은 원죄 없으신 잉태에 바친 기도에 힘입어라는 뜻이고, 1911과 1918은 각각 초대 주교였던 드망즈 주교가 대구대교구를 위해 허원[2]을 바치며 성모당의 건립을 맹세한 해와 그 허원이 이루어진 연도를 의미한다.
서울대교구 신내동성당에도 루르드 레플리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