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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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 수석코치
강철 (姜喆 / Kang Chul)
생년월일1971년 11월 2일
국적대한민국
176cm
선수 커리어유공 코끼리/부천 SK(1993~2000)
상무(군복무)(1996~1998)
LASK 린츠(2001)
전남 드래곤즈(2001~2004)
지도자 커리어전남 드래곤즈(2005~2008/코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U-23(2007~2008/코치)
부산 아이파크(2008~2010/코치)
포항 스틸러스(2011~2015/수석코치)
FC 서울(2016.6~/수석코치)
행정 커리어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 부위원장(2016)
선수시절 포지션왼쪽 풀백
국가대표54경기 1골
199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안정환
FW
샤샤
MF
서정원
MF
고종수
MF
데니스
MF
고정운
DF
강철
DF
김주성
DF
마시엘
DF
신홍기
GK
이운재
2000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최용수
FW
김도훈
MF
안드레
MF
신태용
MF
전경준
MF
데니스
DF
강철
DF
이임생
DF
김현수
DF
마시엘
GK
신의손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2016년 현재는 FC 서울의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

선수시절 영리함과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한 활약으로 팬들에게 많은 인상을 남겼다. 특이하게 학창 시절에는 스트라이커였다고 하며, 아시아 학생 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과 MVP를 수상했을 정도로 공격적인 재능을 선보였다.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것은 대학 진학 후 주전 풀백을 보던 선수가 부상당해 땜빵용으로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2 선수 시절

2.1 클럽

1993년 부천 SK에 입단한 이후 계속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발레리 니폼니시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이른바 "니포 축구"의 일원으로 K리그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이런 활약으로 1999년과 2000년에 2년 연속으로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뒤 2001년 최성용과 함께 오스트리아LASK 린츠로 이적했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는 못하고 4개월만에 국내로 복귀했다. 하지만 친정팀인 부천 SK가 아닌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해 부천 팬들의 공분을 샀다.[1] 이후에는 전남 드래곤즈에서 2004년에 은퇴. 특이하게도 부천 시절과 전남 시절 모두 주장 완장을 차면서 특유의 리더십을 보여준 바 있다.

2.2 국가대표

대학 재학중이던 1989년에 만 17세 7개월로 국가대표팀에 입성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걸었다. 이 때 기존의 국가대표팀 선수들과 나이차이가 제법 나서 "삼촌"이라고 불렀다고... 비록 A매치에서 활약하지는 못하고 훈련만 소화한 것이었지만 당시 같이 대학 무대에서 명성을 떨치던 홍명보도 받지 못했던 대우였다.

하지만 1990 FIFA 월드컵 직전 대표팀에서 낙마하고 그 자리에 대학 무대에서 맹활약하던 홍명보가 발탁되면서 월드컵 무대를 밟지는 못했다. 비록 월드컵에는 출전하지 못했으나 대신 1991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출전했다. 여담으로 당시 국가대표팀은 남북단일팀으로 구성되었는데, 북한의 최철과 윤철, 대한민국의 박철과 함께 "철 4총사"로 불렸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 강철은 몸을 아끼지 않는 수비를 선사했고, 단일팀은 첫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잡는 이변을 일으키며 8강에 진출했다.

이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도 대표팀으로 발탁되었지만, 대표팀은 서정원정재권 등 수준급의 공격 자원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두골만을 득점하는 부진 끝에 3무로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다.

유독 FIFA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는데, 1994 FIFA 월드컵 당시에는 대회 직전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좌절되었고, 이후 1996년 상무에 입대해 1997년 전역했으나 당시 K리그 소속이 아니었던 상무에서 2년을 보낸 탓에 몸상태가 정상이 아닌지라 1998 FIFA 월드컵에도 나오지 못했다. 이후 거스 히딩크가 감독으로 부임해 한 때 주장 완장까지 차는 등 대표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지만 결국 2002 FIFA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반면 AFC 아시안컵1996년2000년에 모두 참가했으며,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도 발탁되었다. 다시 말해 국가대표팀으로 뛸 수 있는 대회에서 다 뛰었는데 결국 유독 월드컵만 못 나온 셈이다. 대표팀에서의 기록은 54경기 1골. 이외에 2000 시드니 올림픽에도 출전한 경력이 있어 선수 생활 동안 두 번이나 올림픽에 참가한 진귀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2]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홍명보 땜빵 격으로 뛰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2000 시드니 올림픽 당시 홍명보가 부상으로 와일드카드에서 낙마하자 대회 며칠을 앞두고 바로 시드니로 합류했던 사건. 허나 다른 사람도 아닌 홍명보의 땜빵이었고, 홍명보는 부상도 거의 없었기에 당시에 축구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인지도가 지극히 낮다.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전남 드래곤즈 코치를 거쳐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던 박성화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활약했으며, 올림픽 이후에는 부산 아이파크의 코치로 있었다가 현재는 포항 스틸러스에서 수석코치를 역임하였다. 은퇴 후 스카우터로 스탭직을 시작했기에 선수 보는 눈이 좋다는 평가가 있다. 황선홍 감독 부임 후 성적이 좋지 않았을 무렵에는 강철과 윤희준이 '수비축구의 원흉'으로 찍혀서 퇴진 압력을 받은 적도 있다.[3] 하지만 유한 성격의 황선홍 감독 대신 총대를 메고 팀의 기강을 잡는 역할을 하는 등 팀의 중심역할을 했고 황선홍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으면서 같이 수석코치직도 내려놓았다. 이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2016년 6월 황선홍 감독이 중국으로 떠난 최용수 감독 대신 FC 서울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강철 코치의 스태프 커리어도 금방 끝났다. 최용수 감독을 따라 중국으로 간 김성재 코치를 대신해 FC 서울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1. 어느 정도였냐면 이 때 부천 팬들이 경기장에서 강철의 유니폼을 태우는 화형식까지 했을 정도였다.
  2. 강철 이외에 이런 기록일 갖고 있는 한국 선수는 이천수, 최태욱, 김동진, 김정우 정도밖에 없다.
  3. 하지만 황선홍 감독 체제에서 강철과 윤희준 두 코치가 수비전술을 만들다시피 한 점을 생각해보면 그런 평가는 좀 성급한 면이 있다. 2012년의 고비를 넘긴 이후에 탄탄한 수비를 바탕으로 시즌 더블을 일구어냈으니 결과적으로는 틀린 비판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2014시즌 15시즌을 거치면서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포항의 세트피스 수비/공격을 보면 여전히 의문부호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