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순으로 정리한 고구려사 연표.
논란이 있는 경우는 가장 합리적인 것이나 통설을 취하되 이설을 주석처리 한다.
월일까지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는 월일까지 기록한다.
1 건국 이전
2 건국 이후
- 기원전 37년 고구려 건국, 추모왕 즉위. 말갈 복속[2]
- 기원전 36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함.[3][4]
- 기원전 35년 봄 3월 황룡(黃龍)이 골령(鶻嶺)에 나타남.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5]
- 기원전 34년 여름 4월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7일 동안이나 사람들이 색깔을 분별하지 못했다. 가을 7월 졸본성과 궁궐 완성했다.[6]
- 기원전 32년 가을 8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날아 들었다. 겨울 10월 오이와 부분노가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7]
- 기원전 28년 가을 9월 난새가 왕대에 모였다. 겨울 11월 부위염이 북옥저를 격멸하고, 그 지역을 성읍으로 만들었다.[8]
- 기원전 24년 가을 8월 추모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곳의 왕 금와를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고, 그의 신묘를 세웠다. 겨울 10월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9]
- 기원전 19년 여름 4월 추모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오니, 추모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추모왕이 붕어하였다. 이 때 추모왕의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10]유리왕이 즉위했다.[11]
- 기원전 18년 가을 7월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9월 서쪽 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다.[12]
- 기원전 17년 가을 7월 골천에 이궁을 지었다. 겨울 10월 왕비 송씨가 죽었다. 유리왕이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취를 삼았는데, 한 사람은 화희이니 골천 사람의 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치희이니 한 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사랑을 차지하려 했으므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다. 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을 지어 각각 따로 살게 하였다. 그 후,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떠나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두 여인은 다투다가 화희가 치희를 욕하며 말했다. "네가 한인의 집에 살던 비첩으로서 어찌 무례함이 이토록 심한가?"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집으로 도망가버렸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 갔으나, 치희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왕이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꾀꼬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느끼는 바 있어 노래를 불렀다. "꾀꼬리도 이리저리, 암수가 서로 의지하며 노는데, 외로운 나는,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13]
- 402년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하자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도주함.[14] 후연의 평주를 함락시킴.[15]
3 멸망 이후
4 연대 불명
5 기타 사건
6 이모저모
- 삼국사기 기록으로만 보면 태조왕은 고구려 700년 역사의 1/7 이상을 혼자 쌈싸먹은 도인.
실제로는 장수왕이 쌈싸먹었지만 - 통일중국과의 전쟁인 고구려-수 전쟁과 고구려-당 전쟁은 598년부터 668년까지 정확히 70년간 지속되었다. 중간에 휴지기가 있었다지만 가히 70년간 전쟁이 지속된 대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