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어

1 소개

한반도 중부와 북부, 만주 일대를 거점으로 했던 고대국가 고구려에서 쓰였던 언어를 일컫는다.

고구려의 정체성을 다룰 때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한국어 자체가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언어 자료가 대단히 빈약하지만, 신라어향가나 기타 금석문이라도 좀 남아있어서 그나마 여러 가지를 유추할 수 있지만, 고구려어는 그 자체로 쓰인 문장 이상의 자료가 없으며, 삼국사기 지리지 지명에 관한 자료와 중국의 사료, 일본서기 등에 기록되어 있는 인명, 지명 자료가 전부이다. 우선 광개토대왕과 관련이 있는 광개토왕릉비 등에 간간히 보이는 이두 식 표기를 통해 기본 어순 등은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중국어와는 전혀 다르고 한국어를 포함한 알타이 제어에 속한다는 것은 확실하나, 그 밖에는 단어 비교 정도라 벽에 부딪히고 있다.

2 특징

중국 사서에 일관되게 부여, 고구려, 옥저, 등의 언어가 비슷하고 말갈, 읍루 등의 언어와는 뚜렷하게 다르다고 하는 점으로 보아 만주어 등이 포함된 퉁구스어족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양서(梁書)에 고구려어와 백제어가 서로 통한다고 기록되어 있다.[1]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언어가 유사하다고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 외에 정확하게 어휘를 나타내는 기록들이 너무 적어서 학계에서는 아직 확실하게 판단하지 않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현대 한국어의 조상 언어, 혹은 한국어의 생성에 강하게 영향을 주었던 언어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일본의 많은 연구자들은 퉁구스어족이라고 주장하거나[2] 일본어족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많고[3], 중국 측에서는 동북공정에 입각한 퉁구스어족 주장을 내세우는 일이 많다.만만한게 퉁구스어냐

3 계통 연구

3.1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언어는 같았는가 달랐는가!?

정확하진 않으나 삼국의 언어 차이는 삼국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데 큰 어려움은 없는 정도였다 카더라.

세종대왕 제위 15년인 1433년 기록을 보면 고대 한국의 삼국시대 언어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구절이 보인다.

세종 61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9월 12일(신묘)
예조에서 민속 노래의 가사를 채집 기록하는 법마련이 없음이 마땅치 않다고 아뢰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성악(聲樂)의 이치는 시대 정치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관습 도감(慣習都監)의 향악(鄕樂) 50여 노래는 모두 신라·백제· 고구려 때의 민간 속어[俚語]로서 오히려 그 당시의 정치의 잘잘못을 상상해 볼 수 있어서, 족히 권장할 것과 경계할 것이 되옵는데, 본조가 개국한 이래로 예악이 크게 시행되어 조정과 종묘에 아악(雅樂)과 송(頌)의 음악이 이미 갖추어졌사오나, 오직 민속 노래들의 가사를 채집 기록하는 법마련이 없사오니 실로 마땅하지 못하옵니다. 이제부터 고대의 노래 채집하는 법[採詩之法]에 의거하여, 각도와 각 고을에 명하여 노래로 된 악장이나 속어임을 막론하고 오륜(五倫)의 정칙에 합당하여 족히 권면할 만한 것과, 또는 간혹 짝 없는 사내나 한 많은 여자의 노래로서 정칙에 벗어난 것까지라도 모두 샅샅이 찾아 내어서 매년 세말에 채택(採擇)하여 올려보내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관습도감은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1475년 악학도감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존재한 음악의 실기를 담당하던 부서이다. '속어'는 말 그대로 일반사람들이 쓰는 속된 말을 뜻하고, '향악'의 원래 뜻은 "당악이 들어오기 이전 삼국 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음악을 말하며 대개 한국 고유의 음악"을 뜻하므로, 당시 즉 15세기 중반의 공식관청에 신라 통일 이전 삼국의 언어(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가 보존되고 있었음을 명확히 알려주는 구절임이 분명하다. 또한 15세기의 조선 학자들이 삼국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말은 즉, 삼국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으니 조선의 학자들이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를 같은 계통의 언어로 파악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당시에 전대되던 50여곡 이외에 15세기에 전국에 존재하던 삼국의 노래를 포함하는 속요를 채집하는 방안을 내었고, 세종이 그대로 시행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이 50여곡 외에 더 많은 자료를 채집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보다도 이 분은 대체 안하신게 뭐냐 파도파도 업적만 나오시는 대왕니뮤

즉, 저 당시 관습도감에 존재하던 '향악 50여곡'만 찾을 수 있어도 삼국의 언어(그것도 일반어)에 대한 작은 혹은 결정적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어, 백제어의 계통 논란에 확실히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료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3.2 일본어랑 관계?

고구려언어의 계통에 관한 문제는 근대적 역사학이 들어온 구한말일제강점기 시기에 시작되어 당시 일본 학자인 신무라 이즈루(新村出)가 고구려어의 지명에 관한 어휘와 일본어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이래, 여러 가지 가설과 연구가 횡행하기 시작됐다. 특히 많은 일본의 학자들은 고구려어의 부여어족을 퉁구스계 어족으로 분류하여 오늘날 한국어로 내려오는 신라어 및 여타 삼한의 언어와 분리되는 언어로 보았다. 이에 더불어 이들은 고구려어가 일본어와 유사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비교언어학에서 동계어의 중요한 증거의 하나인 수사의 유사성을 내세웠다.[4]

수사고구려어한국 한자음중세 중국어음[5]고대 일본어현대 일본어
3미츠
5于次우차휴치이투이츠츠
7難隱난은난이은나나나나츠[6]
10토워토-

하지만 이 주장에는 여러 문제가 있는데, 우선 이 중 수사 3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한반도 남부에서도 '밀=推=密=三'의 상관 관계가 도출되기도 한다.[7] 그리고 수사 3은 현재 '密 발음설'과 '悉(siet)/史(s^ïei) 발음설'로 나누어져 있기도 하며 5의 '우차/이투'의 대응도 억지로 갖다 붙인 면이 강하다.[8]

또한 중요한 점은, 애초에 삼국사기 지리지의 한반도 중부의 옛 고구려 지명이 반드시 예맥계 고구려어로 표기되었다는 기본 전제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9] 오히려 한반도 중부의 옛 고구려 지명들은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썼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이 이유로 지명을 가지고 고대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감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은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와 고구려어가 강한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언정 고구려어와 백제어, 신라어가 뚜렷하게 차이를 보인다는 근거도 없다. 애초에 삼국(三國)의 언어가 서로 유사하다는 옛 중국의 기록이나 고조선삼한의 당시 한반도 북부지역과 남부지역간의 관계를 염두했을때 일부 일본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맥계 언어와 한(韓)어의 관계를 어무런 관계가 없다고 속단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언어학에는 언어동조대라는 개념도 있다.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의 관계를 비교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기에는 현재 사료가 매우 부족하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한들 이게 실재로 동계어라서 유사성을 가지는 건지, 단순히 차용한 건지 판단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일본 학자들 외에도 일본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학자로는 미국의 크리스토퍼 벡위드(Christopher I. Beckwith)라는 학자가 있다. 벡위드는 『고구려어 - 일본을 대륙과 연결시켜 주는 언어』라는 책을 통하여, 일본어와 고구려어를 '부여어족'이라는 동계로 놓고 한국어는 철저히 떼어놓는 주장을 했는데,[10] 여기에서 그는 고구려어와 한국어(신라어) 간의 유사성과 한국어와 일본어 간의 유사성은 단순한 차용으로 보고 기존 학설을 비판했다. 이에 따라 명백한 기초어휘까지 입맛대로 차용이라고 하는가 하면 한자음 재구에도 문제가 있었다.[11] 또한 일본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간의 영향마저도 무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국어학자인 정광 선생에 의해 번역 출간되면서 대차게 까였다. 한편, 일본어와 알타이어간의 연관성을 찾는 일본학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일본어족설을 한국어일본어의 원류라는 증거, 또는 영향을 미친 증거로 보나, 일본에서는 반대로 한계의 신라어와 부여계의 고구려어를 분리해 놓고, 부여족과 일본인은 동계 민족이며, 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본의 주장을 확대해 놓고 보면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억지적인 역사적 연고권 주장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대해 동족 드립(=연고권 주장)을 칠 수 있는 셈이다.[12] 저명한 언어학자인 이기문 교수도 신라어와 고구려어가 상당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많다.[13] 어쩌면 한일 양국어의 유사점은 고구려어 및 부여어계(부여,백제)를 매개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고구려왜(倭) 사이에 서로 동류의식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점이 확실하고, 유사점 말고 차이점도 많기 때문에 어떠한 주장도 현재로서는 증거 부족으로 기각될 뿐이며, 소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3 한국어랑 관계?

부여어족을 신라어와 분리하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 학계, 특히 북한 학계에서는 두 언어가 같은 계통의 언어로 보거나, 최소한 고구려어가 현대 한국어에 영향을 끼친 언어로 보고 있다. 당장 상술한대로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어 포함 부여 계통의 언어들이 말갈 계통의 퉁구스어족과는 구분된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고구려어와 백제어는 서로 통한다고까지 전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 부여계 언어가 과연 신라어와도 같은 계통의 언어인가에 관한 문제는 요태까지 그래와꼬 아패로도 개속 추측 밖에 나올 수 없는게 삼국시대의 언어에 관해 남아있는 자료가 너무 없다. 후술되는 약간의 고구려어 어휘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고구려어의 거의 전부가 될 정도(…). 수사라고 알려진 것들도 확실한 게 아니라 그저 그렇게 추정되는 것들뿐이다. 결국 자료의 부족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비교언어학적으로 다른 언어와 비교해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긴 해도 기존의 금석문이나 최근 발굴되고 있는 목간들을 통해 여전히 추측의 영역이긴 해도 의미있는 연구 성과들이 이뤄지고 있다. 일단 광개토대왕릉비같은 금석문은 변체한문으로 적혀져 확실히 한국어와 비슷한 어순 구조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으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백제어의 수사가 적혀있는데, 이들의 한자음 재구가 신라어 및 현대 한국어와 일본어 수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상당한 유사함을 보이고 있어 백제어와 같았다는 고구려어가 신라어와도 같은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수사 뿐만 아니라 왕을 의미하는 어휘에서도 부여어족과 한(韓)어가 비슷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
한자鞬吉支/於羅瑕居西干
발음건길지 / 어라하거서간
왕(王)가이긔 / 가
존칭 접미사支(ki)

동아시아의 여러 언어의 권위자로 유명한 러시아계 미국인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은 여러가지 연구를 통해 고구려의 관직명, 지명 등에서 한국어와 연관된 단어들이 보이며[14] 고대 한국어는 만주 지역의 민족들이 쓰던 언어가 점차 한반도로 남하하여 형성된 언어라는 가설을 내세웠다. 그는 한반도 중남부의 지명들이 일본어와 유사한 면이 보인 점에서 원래 한반도 중남부에는 일본어계 언어의 사용자들이 있었는데, 점차 고구려어가 남하하여 퍼지면서 한반도 중남부의 일본어를 밀어내고 한국어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15] 특히 보빈은 당대 실제로 사용되었던 고구려어를 보다 정확하게 실증하기 위해 고구려어와 긴밀한 교류를 가졌던 말갈어-여진어-만주어(이하 만주어 라인이라 칭한다.)를 비롯한 퉁구스어족의 각종 언어들[16] 및 당대 중국어 등에 남은 고구려어의 흔적 등을 심도있게 연구하였는데, 그의 가설에 의하면 만주어 라인은 퉁구스 제어와 같은 계통에 속하면서 고구려어의 영향도 짙게 받았으므로 퉁구스 제어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만주어 라인에서만 발견되는 단어를 비교분석하면 고구려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만주어 라인에서는 퉁구스 제어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면서 한국어의 영향으로 보이는 각종 언어적 특징이 다수 발견되었으므로 고구려어는 한국어와 긴밀한 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17] 따라서 그는 고구려어, 일본어 동계 어족 설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며 고구려어는 현대 한국어와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 다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들이 있으나, 보빈의 전공과 연구실적상 벡위드의 주장보다 훨씬 공신력이 있기 때문에 결국 벡위드도 보빈의 연구 결과를 일부 수용해 삼국시대 전기는 몰라도 후기에는 삼국의 언어가 서로 유사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18]

보빈의 가설에 의하면 한반도 남부에 일본계 고대 종족이 일부 존재했다고 추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는 임나일본부설에서 비롯된 거부감이 들 수 있겠으나, 보빈은 그 정도로 확고한 일본어 문화권이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근대에 와서 명확하게 민족이 형성되기 전에는 여러 종족이 거부감 없이 뒤섞여사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흔하게 있어왔던 일이며, 특히 삼한과 일본열도 사이에는 곡옥, 청동거울, 세형동검, 고인돌 등의 고고학적 교류 흔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애초에 빙하기 이후, 항해기술이 발달하기 전인 고대시대에 대륙에서 일본열도로 대규모로 건너가기 위한 가장 유력한 방법은 연안항해인데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한반도를 거쳐갈 수밖에 없다. 여러 국가 형성 초기단계의 제민족 이동과정에서 (민족적인 의미의 일본인이 아닌)일본계 고대 종족이 일부 한반도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사실이며, 반대로 (민족적인 의미의 한국인이 아닌)한국계 고대 종족 또한 충분히 일본열도에 건너가서 살았을 수 있다.[19]

참고로 언어학은 아니지만 형질인류학을 통한 분석으로는 중국 학회의 부여인들의 유골에 대한 분석이 있다. 부여가 선비족들에게 개발살났을 때 대량의 인구가 포로로 끌려가서 선비족 치하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위의 링크는 바로 그 부여 인들의 유골에 대한 중국 학회의 연구 성과에 대한 포스트이다. 간단히 결론만 말하자면 유골에서 추출할 수 있는 합리적인 자료를 모아서 통계 분석해보았을 때 부여인들의 인골은 현대 한국인들과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비족, 거란족과 같은 몽골계 종족의 인골과 여진족, 만주족과 같은 퉁구스계 종족의 인골의 데이터는 여타 종족들의 인골의 데이터와 비교할 때 충분히 구분 가능할 정도의 편차치를 보여 왔고, 중국 학계의 형질인류학은 오랜 연구를 통해 상당한 수준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신뢰도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형질인류학을 통한 연구는 표본의 부족에 따른 한계가 있다.[20]

4 고구려어 어휘 일람 모음

앞에서도 말했듯이, 대부분이 지명 어휘이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쓰였던 고구려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냥 참고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좋다.

4.1 임병준의 고구려말 어휘 일람(2000)

  • k, t, p 등은 거센소리의 표기가 아니다.
표기발음백제, 신라말고려어중세국어현대국어
tara山, 高珍阿, 梁, 等良달-(附), 따ㅎ(地)양달, 다람쥐, 다락
kuru忽, 屈, 骨***골ㅎ(洞, 州)골, 고을
加尸kara***把敢大갈-(耕), 가래갈-, 가래
加支kati菁→茄******가디(茄)가지
押, 岬kusi嶽, 串菅, 古尸, 岬, 串古尸곶(串), 골(菅)곶, 봉곳
加火kapɐrɐ中(←唐)***戞噴가(中)가운데
加兮阿kakia******(닛-(連))(잇-)
甘彌kamamɐi******鷲, 黑鷹***
甲, 甲比kapa******(구무)(구멍)
皆(次)kəsi居西, 居瑟,吉支***항것(主), 긔자(王)***
pa(ki)******보-(見)보-
居尸kasi≠心音***가삼가슴
𢈴kaŋ𢈴*********(광(倉庫))
呑, 旦tɐrɐ************
木根, 斬pərəki******블휘(根)뿌리
木根, 斬pərəki******버히-(斬)베-
古斯kusi(ri)***區戌구슬(玉)구슬
馬, 勿, 買mərə/mɐrɐ/mɐi水, 川勿, 買***沒, 悶믈(水), 물
骨尸kurusi******곯-(膿)곯-, 곪-
內, 奴, 惱na/nu******나라(國), 누리(世)나라, 누리
骨衣kutə(rə)居柒***거츨-(荒)거칠-
功木kumuku固麻, 熊只, 甘蓋***고마(熊), 곰
滅烏mɐraka******야지(駒)망아지
aka幼, 少******-아지-아지
mɐrɐ***말(馬)
屈火kupəre屈阿火, 求佛***굽-(曲)굽-
別, 平吏pɐrɐ平原夫里, 火, 伐***벌(野)벌, 벌판
nɐrɐsi*********(나란하-)
今勿kəmərə今勿***검-(黑)검-
乃勿namərə***那勿납(鉛)
內米numərə************
taka***둑(堤), 언턱둑, 언덕
豉鹽sirama*********(시리-)
買尸mɐiri******마날(蒜)마늘
巴衣,波兮pakərə/paki******바회(巖)바위
斤尸kərə***乞, 根글(文)
伐力pɐrəkə***파라하-(綠), 프르-파랗-, 푸르-
夫斯, 扶蘇pasi/pasu***봇(樺)***
於斯nɐrɐsi******날ㅎ(斤, 刃)날, 칼날
nɐrɐ위치자리토씨******날/늘
沙伏, 沙非sapə(rəkə)所比質背싯븕-(赤), 새배(曉)붉-, 새벽
沙熱sanara******사날-(凉)서늘하-
i맺음법씨끝******-이-이
密(三)miri龍(←玄)密, 推, 彌知, 三米立미르(龍)미르(龍)
suru***車衣술위(車)수레
suru******수리(端午)수릿날
首泥, 述尒sunərə******수늙(嶺)***
安市, 安十arasə***安良, 阿乙알ㅎ(丸, 卵)
鳥斯含tusikəmə***吐吉톳기(兎)토끼
於支nɐrɐki******날개(翼)날개
淵, 於乙əri***烏沒, 五悶우믈(井)우물
肖巴supa酒(←豊)述, 舒發, 舒弗酥孛, 數本수울(酒)
波旦, 波豊patɐrɐ/patərə波珍把剌바랄, 바다(海)바다
於斯əsi******엇-(橫)엇-
金, 豉鹽\siru******쉬-(休)쉬-
釗, 斯由\siru金, 鐵舍輪, 省良, 實於歲, 遂쇠(鐵)쇠, 시루(熟鐵)

4.2 그 외 고구려어 어휘 모음

참고로 일본어 위키백과는 일본인들이 만선사관의 영향을 받어 고구려어를 만주의 언어랑 엮는 글이 올라와 있는 경우가 많고, 중국어 위키백과는 중국인들이 동북공정에 입각한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냥 참고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좋다. 다만 특이한 점으로는 여러 언어들을 대조해서 비교하고 있다는 것인데 튀르크어, 몽골어, 상고 일본어, 중세 일본어, 현대 일본어, 백제어, 신라어, 중세 한국어, 현대 한국어, 만주어, 퉁구스어, 여진어, 어웡키어(에벤키어) 등이 올라와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올라온 고구려어 어휘 모음
중국어 위키백과에 올라온 고구려어 어휘 모음

  1. 南史 百濟:言語服章略與高麗同(남사 백제전: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 梁書 百濟: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양서 백제전: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
  2. 단순히 만주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넘어서, 무작정 한국을 까기 위해서 그러는 경향이 있다.이쯤되면 답이 없다
  3. 아래에 있는 일본인의 고구려어 연구를 근거로 주장하는 일이 많다.
  4. 상당히 일찍 갈라진 인도유럽어에도 1, 2, 3과 같은 기본 수사는 상당히 비슷하다. 예를 들어 3을 가리키는 수사는 영어 Three, 프랑스어 Trois, 스페인어 Tres, 러시아어의 Tri, 그리스어 Tria, 산스크리트어 Tri.
  5. 박스터-사가트의 재구.
  6. 참고로 퉁구스어로 7은 'Nadan'이다.
  7. 삼국사기 지리지 가운데, 현풍(玄風)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일대의 옛 행정구역이었다. 신라 때에는 추량화현(推良火縣) 또는 삼량화현(三良火縣)이라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현효현(玄驍縣)으로 고쳐서 화왕군(火旺郡: 昌寧)에 속하게 하였다.
  8. 만요가나에 따르면 次는 t나 ch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 si의 음가를 갖는다.
  9. 지명이 가진 특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외국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런던(London)고대 로마 시기의 론디니움(Londinium)에서 파생되었으며, 서아시아의 많은 오래된 도시들의 지명이 옛날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0. 즉, 현대 한국어와 고구려어 사이에는 차용 이외에는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다.
  11. 국명 신라(新羅)가 Silla라고 발음되는 것을 한국어의 틀이 아닌 중국어 틀에서 해석하려 하여 新(신)의 한자음이 고대에 'Sir'로 발음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신라가 斯羅(사라), 斯盧(사로), 尸羅(시라) 등의 여러 표기가 있었으며, 한자어가 아니라, 우리말을 한자로 적었을 뿐인 것도 몰랐으며 'n+r→ll'의 자음동화현상도 보지 못했다. 이외에도 무턱대고 단어의 어원을 한자어 기원으로 몰아가려는 경향도 보인다.
  12. 다만 한국과 어떻게든 엮이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자들은 이런 주장도 꺼리는 편이다.
  13. 이것은 정치적 해석의 문제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고구려어와 신라어가 별개 언어라는 주장이 대차게 까이고 있다.
  14. 보빈의 주장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왕비를 가리키던 어륙 및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던 어라하는 동일 계통의 단어로 추정되며, 일어서다라는 한국어 단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15. 이 가설에 따르면, 원래 제주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탐라는 일본어인 타(田)+무라(村) 혹은 타미(民)+무라(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어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던 건 오히려 초기 신라어이며 이마저도 삼국시대 중후기를 거치며 삼국의 언어 모두가 유사한 모습으로 수렴하였다고 한다.
  16. 말갈족-여진족-만주족 라인을 비롯해 퉁구스 계통의 여러 종족이 사용한 언어가 포함된 어족. 위 라인에 대해 첨언하자면 보통 말갈어->여진어->만주어 순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본다.
  17. 대표적인 예가 만주어로 부처를 가리키는 푸치키(puciki). ~기 혹은 ~지를 통해 무언가를 존칭하는 형태는 고대 한국어에서 흔하게 쓰였으며, 퉁구스계통의 언어에는 이러한 형태의 존칭접미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18. 위에도 적시했다시피 벡위드는 자음동화 무시나 무리한 한자음 재구 등을 통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저널을 찾아보면 알 수 있는데 벡위드는 중국티베트어족 언어들을 전공으로 공부하다가 중앙아시아 제어로 연구 분야를 확장해나간 케이스이고, 보빈은 일본어 전공으로 시작해서 동북아 제어들로 연구를 확장시켜나간 케이스이다. 적어도 일본어에 관련해선 보빈의 연구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19. 보빈은 가야와 관계가 깊은 한국계 왕조가 일본열도에 일정 기간 존재했을 것이라 추정했으며 여기에서 섬을 가리키는 일본어인 시마가 유래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20. 한국의 토양은 산성토양이라 유골의 부식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