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평가

1 실질적 평가

광개토대왕은 한국사에서 대표적인 정복왕으로 평가된다. 세종대왕과 한국사의 명군 or 성군 대표로 다룰 정도

종종 광개토대왕이 넓힌 땅이 좁고, 상대한 적들이 약체라며 평가절하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 광개토대왕이 넓힌 땅은 영역화하지 않고 복속하는 선에서 끝난 비려, 숙신, 신라를 제외하더라도 꽤 넓은 편이다. 먼저 백제로부터 얻은 한강 유역의 대강 현재의 경기도+강원도 되는 땅과 후연으로부터 얻은 요동과 영토 전체를 집어삼킨 동부여(현재의 삼강평원 일대)를 도합해보면 대충 아무리 작아도 한반도에서 함경도를 제외한 정도의 땅은 나온다. 고구려의 북쪽으로는 비려나 동부여같은 세력을 제외하고 이미 고구려가 속국 북부여를 통해 장악한 송눈평원 이북으로는 긁어먹을 자원이 적기 때문에 최대한 진출한 것이라고 볼수있다. 나중에 고구려의 필요에 따라 북만주의 지두우나 실위같은 세력에게 간섭하기는 한다.

사실 비려, 숙신의 경우 그 주권에 고구려가 얼마나 침투했느냐에 따라 자치주 정도까지 볼 여지가 있다. 외교권등 주요 권한을 고구려에 위임하고 기본적인 자치권만 행사했다면 고구려의 자치주라고 봐도 상관없다. 어쨋든 사료의 부족으로 그 지배 방식을 알기 힘들다. 비교적 사료가 풍부한 신라의 경우 군사, 정치등에 개입했던것 같으며 중원고구려비에 의하면 고구려는 신라를 자신들의 내지로 인식했던것 같다.

또한 상대한 적들이 약체라는 것도 백제, 후연의 상황에 대한 디테일한 파악과 고구려 북방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먼저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대보다 포스가 후달리긴 했으나 딱히 쇠퇴했던 흔적은 또렷하지 않고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이전 진사왕은 왕권강화를 성공적으로 이루고 고구려와의 전선에서도 결코 수세는 아니였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자마자 진사왕의 백제에 대해 펼친 파상적인 공세로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된 것이다.

내분 또한 광개토대왕의 공세를 견뎌내지 못한 진사왕의 입지가 약해지면서 이를 틈탄 아신왕이 재기를 도모해 일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아신왕이 즉위하고 백제는 별다른 내분없이 진씨와 왕실의 유대아래 고구려에 적극적인 반격을 가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실패하고 결국은 레알 내분이 터저 아신왕과 진씨가 실각하고 친고구려적인 해씨가 집권하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백제의 내분이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을 도운적은 없고 오히려 광개토대왕의 공세로 인해 촉발된것.

후연의 경우 확실히 396년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는등 북위와의 전선에서 열세였고 중원까지 상실하는 바람에 397년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차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할수있다. 하지만 오히려 후연은 중원을 상실하고도 과거 전연의 출발지였던 요서를 기반으로 재기를 도모하여 북위로부터 일부 실지를 수복하는데 성공하고 400년에는 고구려의 땅까지 빼앗는데 성공한다. 후연이 보여준 이러한 모습으로 보아 후연이 쇠퇴했다 한들 적어도 고구려 정도는 상대할 힘이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요서땅이 중원에 비해 좁다고 해도 후연의 전신인 전연이 그 땅을 발판으로 팽창했음을 생각해보면 결코 무시할만한 입지는 아니다.

결국 아무리 막장이 된 후연이더라도 백제보다는 강했고 (백제보다 훨씬 많은 군사를 무리없이 동원했고 일단 중원을 지배했던 국가라 백제와는 클래스가 다르다.) 이는 광개토대왕에게 쉽지않은 상대였을 것이다. 실제로 후연과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407년에는 후연을 정벌하기 위해 5만 대군을 동원한다. 백제를 정벌할때 최대 동원병력이 4만임을 상기하자. 물론 남북조 시대가 끝난 뒤 나온 통일 제국들에 비하면 딸리는게 맞지만.

비려, 숙신, 동부여의 경우 비려는 전연과 북위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훗날의 거란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소수림왕대 고구려의 변방으로부터 북변 8부락을 빼앗을 정도로 강세였다. 이는 결코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허접한 유목민들이 아니였음을 보여준다. 다만 숙신은 딱히 강세를 보였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숙신은 실제로 광개토대왕이 직접 출병하지 않고 군대를 보내 처리하는데 광개토대왕이 가장 손쉽게 처리한 상대였을 것이다.

동부여는 영역이 64성 1400촌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였다.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수도에 이르자 왕이 항복하고 광개토대왕의 은혜가 동부여 전국에 퍼젔다는 식으로 별 고난없이 정복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 미사여구일 뿐이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미화하는건 정복의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암튼 광개토대왕은 별볼일없는 쭉정이같은 상대들을 툭툭 쓸어뜨리며 쥐꼬리만한 땅을 넓힌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2 역사적 의의


광개토대왕대에 만주와 한반도의 여러 경쟁세력들을 극복한 것으로 인해 고구려는 중원의 패자 북위,몽골의 패자 유연과 함께 요동지역의 패자로 등극한다. 이는 최초로 만주를 하나로 통일한 정권이 등장하는 계기였다. 이전까지는 항상 비슷한 세력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광개토대왕 이후로 만주에는 고구려말고는 북만주의 좁쌀만한 부족국가들만 남게된다.

나중에 거란이나 물길,돌궐이 등장하여 만주의 주권을 위협하지만 고구려는 이를 어찌저찌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통일보다는 배타적 패권을 휘두르는 국가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신라는 물론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남부마저도 고구려의 통제권에 놓여 백제나 왜[1]가 중국에 사신을 맘대로 못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사군(중국)이 동이지역을 통제하던 것을 고구려가 바톤터치했다는 견해도 있다. 넓게 보면 광개토대왕대에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것과 신라에 고구려 문화를 침투시킨 것은 삼국통일 의식의 기반이 형성되는 계기가 볼수도 있다. 실제로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바탕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고 이때문에 백제와 고구려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가 나중에 삼한일통을 정당화하려 이용한 고구려=마한 드립도 고구려가 마한의 고토인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것이 배경이다.

가끔 삼국 초기의 정복군주들과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은 크고작은 부족국가들을 처묵한것이고 광개토대왕은 그 부족국가들이 수십, 수백개 모인 국가들을 상대한 것이라 차원이 다르다. 애초에 역사적 인물들이 누구는 병신이오, 누구는 위인이오 칼로 자르듯이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정복군주로서의 면모를 살펴보아도, 광개토대왕은 독보적이다. 한국사 전체를 살펴볼때 남북국시대 이후로는 이렇다할 정복전쟁이 없었다. 기껏해야 발해, 고려, 조선이 반항적인 여진족을 토벌하는 수준. 시대적으로 팽창할 상황이 아니다. 광개토대왕은 이합집산의 정복국가시대라는 시대적인 상황을 100% 활용하여 200%의 결과를 낸 것이다. 이게 어찌보면 기회주의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기회마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날려먹는게 역사에서는 다반사다. 어차피 역사적인 업적이라는 것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개 이런 기회를 타고난다.

일생을 전방위적인 정복사업에 투신하여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군주는 일단 한국사 전반에서도 드물지만, 정복전쟁이 가장 잦았던 삼국시대에서도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모습을 보였다. 비슷한 레벨로 비교되는 근초고왕이나 진흥왕의 정복전쟁도 괄목할 만한 것이지만 그들이 이룩한 국가는 그들의 사후 하나같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축소되어 풍비박산나거나 기적적으로 살아나지만 광개토대왕이 이룩한 고구려의 패권은 장수왕의 경영과 함께 최소 1세기 이상 유지된다.

3 중원 정복과 삼국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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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민우 '태왕북벌기' 中...

많은 한국인들이 고대 신라의 삼한일통에서 만주를 상실한 기억과 근대 식민지 시절의 아픈 기억때문인지 광개토대왕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중국을 정복하거나 삼국을 통일했을까? 하고 상상을 하곤 한다. 발해가 고구려의 뒤를 이어 만주부근의 영토를 유지하긴 했지만, 기록부족으로 한국의 역사라는 인식이 약하고[2] 그나마도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한 뒤에 고려에 유민들이 흡수된 뒤에 한민족은 만주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삼국통일에 대해선 장수왕대에도 결국 그렇게 못했던 것 보면 광개토대왕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한반도가 그리 쉽게 먹을 땅이 아니며, 장수왕도 수없이 백제와 신라 나제동맹 연합을 백 년 가까이 공격해 한강 유역까지는 차지했지만 결국 완전 정복은 자비 마립간 등의 우주방어에 번번히 막혔다. 산악이라는 천연의 방벽에 농업생산력도 받쳐줘 인구밀도도 높다. 실제로 조선 시대 4군 6진을 개척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한반도 전역을 완전히 장악한 적이 없다.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당시 고구려의 인구는 69만호였고 백제의 인구는 76만호였다.[3]

이처럼 한반도를 비롯한 일대 지역은 기름진 평야가 많고 산악 지형이 많아 외적을 방어하기 용이 하면서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쉬운 천혜의 지형이라 세계사를 통틀어 봐도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중의 하나였다.[4]

고대부터 현대까지 국력의 기반은 경제력이고 경제력은 인구 수에서 나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잠재력이 높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산악지형이 많다는 것은 외적방어라는 이점이 있지만 그 만큼 그 지역내에서 하나의 통합된 정권이 나오기 힘들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한반도 내에서 삼국은 서로가 주도권을 쥔적은 있어도 쉽사리 통일은 하지 못했었고 기껏한 통일 마저도 통일이라고 하기 힘든 결과물이었다. 그렇기에 한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만약에 삼국이 온전한 의미의 통일을 이루었으면 막대한 인구수와 생산력을 갖춘 막강한 강대국이 탄생했을 것이라며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의 세계관을 오해한 결과다. 고구려의 세계관은 자기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나라와는 대등하게 교린하고 자기보다 하수인 나라들에게는 상국 대접 받는 것이었다. 즉 애당초 고구려라는 나라가 정복을 중시하는 제국을 지향한 나라가 아니란 것이다. 위에서 알아본 광개토 태왕의 정복활동은 모두 이러한 고구려의 세계관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중요한 점은 정복과 통치는 별개이다. 실제 역사상에서도 방대한 영토들을 제대로 통치를 못해 순식간에 와해된 국가는 역사상 한두개가 아니다. 예를 들어 몽골이라든지. 마케도니아라든지. 소련이라든지. 유고슬라비아라든지. 대콜롬비아공화국이라든지. 터키라든지. 지금이야 한민족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 백제는 말그대로 남남으로 보는 성격이 강했다. 물론 고조선과 진(辰)의 관계등의 교류적 입장에서의 동질의식도 있었다 할수 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한민족이라는 의식이 형성된 건 빨라야 6세기 이후의 삼국시대 말기였다. 그 전까지는 동질의식이 있었어도 흔히 일반적으로 타인을 보는것과 같은 별개의 존재의 성격도 복합적으로 갖고 있었다. 그나마 확실한 민족적 동질성향이 보편화된 것이 바로 6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때가 되어서야 삼한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묶어서 통칭하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완전히 통합된 건 고려시대 말기부터였다. 당장 후삼국시대에 각 지역의 호족들이 삼국 부흥이라는 기치를 얼마나 쉽게 내걸었고 또 거기에 얼마나 쉽게 호응했나를 생각해 보자. 거타지 설화 같은 내용을 보면 심지어 9세기 중반에도 '백제' 해적이라고 가리킬 만한 대상이 등장한다. 경남에서는 가야의 부흥이라는 명분도 호응을 얻었다.무신정권 시대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부흥운동이 수 차례 있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 떡밥구호가 삼국통일 이후 수백년이 지난 고려 중후기까지도 백성들에 먹혔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 생전에는 한반도 남부인들은 잡아다가 묘지기로 부려먹는 존재에 불과했다. 사실상 정복보다는 그냥 두들겨 패고 말 고분고분히 듣게 만드는게 이익이었다. 그래서 백제와 신라,가야를 신하로 부리고 점진적으로 잡아먹는 그랜드플랜을 세워둔 모양이였으나 백제 개로왕의 반발과 신라의 이탈로 실패한다. 하지만 이때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한 덕에 신라에 고구려와 서역의 문화가 이식되고 이는 후세에 한국이 고구려 계승을 주장할 근거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실제 역사에서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5만 대군을 가야에 파견하자 후연이 쳐들어오는 걸 못막아내는 걸 보면 5만 대군은 고구려가 요동지방의 전선까지 후연에게 양보하며 쥐어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후연을 상대로한 서방의 전선과 백제등 삼한을 상대로 한 남방의 전선을 공동으로 상대하기에는 고구려의 역량이 부족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후연과 백제가 서로 눈치를 봐가며 각자 고구려의 서쪽과 남쪽을 공격하여 고구려가 특정 방면으로 진출하는것을 방해하는 효과를 거둔다. 애초에 하나의 나라가 동서남북의 여러 전선을 유지하는게 매우 힘든 일이다. 그 거대한 당나라마저도 티베트와 신라를 저울질하느라 고생했던 점을 기억하자.

즉위 17년 후연이 사실상 망하고 고구려의 종족 내지는 하국으로 전락하면서 광개토대왕은 그가 죽기까지 5년간 성을 쌓고 지방을 순행하는 등 굳히기에 힘썼고, 이는 광개토대왕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장수왕대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이는 재위 초의 격렬한 정복활동과 상당부분 대비되는 것이다. 이를 보면 딱히 정복활동을 연장할 생각은 없던 모양이다.

아니면 새로운 정복활동을 준비하다가 죽은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장수왕이 한강유역을 먹고 신라까지 마무리하러 내려왔던 것을 볼 때 고구려 내에서도 저거저거 뒤통수가 간지러운데 언제고 정리해야 되겠다 식의 사고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물론 장수왕이 막히긴 했지만, 대왕의 이른 죽음과 막강한 전투력 및 전기를 판단하는 능력을 고려해 볼 때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하는 생각은 들기 마련이다. 다만 여기에 백제의 국력회복이나 신라의 성장도 생각해야 한다. 특히 5~6세기 고구려, 백제 사이의 한강유역 영유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중심적인 if시나리오에 너무 힘을 실어주면 설득력을 얻기가 힘들 수 있다. 물론 재미야 있지만.

한편, 태왕북벌기에서는 고구려 장수가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정복활동을 보며 이분이라면 중원 정복도 불가능하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나온다.

한편 중국 방면의 정복활동은 요서, 아무리 영향권을 뻗쳐도 현 북경까지가 끝인 것이 확실하다. 후연 정벌에서 요서까지만 진출하고 더이상 중국 방면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못한것도 되고 안한것도 된다. 당시 중원의 상황은 막장의 끝으로 돌진하고 있는 오호십육국시대인지라, 도저히 먹고싶은 생각이 안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당시 중원은 명말처럼 내분으로 무주공산이 되어 무혈입성할수 있던게 아니라 난폭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날고 기는 유목민 북방민족또는 막장들이 서로 잡아먹으려고 발악하는 시기라 광개토대왕이라고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기회가 아주 없던건 아니고 북위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가 기회이긴 했으나 이때 고구려는 북연동부여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때라서(...)

무엇보다 당시 중원에서 날고 기던 오호 군웅들이 전진이나 북위 때에 와서야 황제를 칭했음을 상기하자. 외부 침략자인 그들이 중원을 재패하려면 무엇보다 화북의 세족들의 지지와 호응이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침략자인 그들이 중원 세족들의 호감을 얻기란 쉽지않았다. 오호군웅이 '천왕'의 칭호에 안주한 것은 민심을 얻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까지 자그마치 1세기가 소요되었다. 그 사이 무수한 세력과 나라가 명멸해 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의 중원진출은 단순히 땅따먹기 정복에서 국한 될 사항이 아닌 것이다. 또 고구려의 천하관이라는 고구려의 세계관 입장에서는 난하 서쪽의 만리장성을 넘는다는 건 무의미했다. 고구려 스스로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라는 언급이 나오는 언급등을 보면 결과적으로 그 이상의 땅을 취하는 것의 무리한 확장 자체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더욱이 고구려의 통치방식은 아직 기록적인 부분이 미흡하여 논란이지만 자치를 해주면서 군사주둔과 동화정책을 하는데 필요한 역량을 중국문명이 확실한 지역에서 할수 있는가의 회의적 입장을 갖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그간 고구려의 동화정책의 형태나 간접지배의 직접지배화 과정이 먹힌건 바로 고조선과 부여와 같은 같은 동질적인 문화-문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구려는 계승의식과 함께 이 부분을 활용했었다는 것이 대표적이기 때문이다. 신라만 하더라도 내지인식을 다진 것을 감안하면 고구려가 신라-가야를 정복지역인 남남으로 본것도 있지만 동질의식을 갖고 있는 것도 고조선과 진(辰)의 관계가 동질의식을 갖고 있었던 점에서도 감안해본다면 고구려로서는 충분히 기존의 동화지배화 정책을 추진할수 있었던 기반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난하 서쪽은 전혀 다른 문명의 발상지와 사상을 갖고 있는 상황에 처했을때의 고구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인구를 기반으로 무력으로 정복은 했어도 그곳에 대한 통제력을 제대로 미치는데 소요되는 역량문제의 정치적 한계를 생각해볼수 밖에 없는 셈이고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 된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국력적 한계는 둘째치고 역으로 고구려의 문명이 훼손되어서 중국에 동화될 경우의 가치문제를 판단해본다면 안전한 형태의 국경선과 영토체제를 갖추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북연을 그렇게 존속시켰고 나중에 요서지역에 대한 입장을 봐도 난하와 조양 서쪽으로는 영토확장의 목적을 보이지 않았던 점은 이러한 사실을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로마카이사르 조차도 라인강 이북으로 넘어가려고 하지 않고 안정적인 국경선을 구축하는 정치적 판단을 함으로서 로마의 영토안정화와 문명안정화를 꾀했던 사례만 봐도 이와 유사하다 못해 거의 똑같은 수준에 가깝다고 하겠다.

게다가 고구려는 오랜시간 이민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공격했지만 결국 중국문명에 흡수되는 것을 봤고 그렇게 동화되는 것 또한 지켜본 나라다. 중국이 막장시기이긴 하나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릴수 있는 문제로 생각하여 오히려 경계를 제대로 긋는 형태의 기준으로 봤을 가능성도 크다. 실제로 북연의 존재가 완충지대 역할을 하게 하도록 조치했던 점은 이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수천년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화북, 혹은 그 너머 중원까지 장악한 이민족 왕조 중 현대까지 독립국가로 명맥이 이어진 사례는 몽골 하나밖에 없다. 고구려가 화북이랑 중원을 잘못 먹었다가 문화가 훼손되고 한족에 동화되기라도 했으면 오늘날 우리는 고구려라는 이름을 그리 중요하게 기억하지 못했을수도 있거나 심지어는 중공 일부의 주장대로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로, 한민족은 중국 변방의 한 소수민족으로 전락했을 수도 있다.

4 조선 문인들의 평가

4.1 권근

옛날 진 양공(晉襄公)이 검은 상복(墨衰) 차림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진(秦)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는데, 춘추에서 이를 비난하였다. 고구려 왕 이련(伊連)이 세상을 떠나자 3개월을 넘지 못하여 그 아들 담덕(談德)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쳐서 격파하였으니, 그 애통함을 잊고 꺼려하지 않음이 너무 심하다.

무릇 적병이 성문 밖에 쳐들어와서 종묘와 사직의 존망이 달려있다면 부득이 전쟁을 하는 것은 의당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백제의 군사가 고구려 변경을 침범하지도 않았는데 담덕이 바야흐로 복중(服中)에 있으면서 감히 자신의 상사(喪事)도 집어치우고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남의 나라를 쳤으니 이것이 인자(人子)의 애통한 마음이 있는 자이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대대로 원수지간이다. 진사(辰斯)가 이련 6년에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침략하였고 다음 해에 또 도압성(都押城)을 쳐서 빼앗았는데 이련이 보복하지 못하고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담덕이 왕위를 계승하자 몇 달도 지나기 전에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쳐서 그 수치를 씻었으니 이는 어버이를 빛나게 한 것이요, 꺼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적국과 은혜가 있든지 혹은 원한이 있든지 간에 후손에 이르기까지 두고 두고 갚는 것은 아니다. 구부(丘夫)근초고왕(近肖古王)에게 부왕(父王)을 죽인 원한을 갚지 못한 것은 죄가 될 수 있거니와 담덕과 진사에 있어서는 이미 2세(世)가 지난 후인데 어찌 또 보복을 한단 말인가?

당초 침류왕이 세상을 떠나고 진사왕이 즉위하였는데 이련이 조문하여 위로하지는 않고 남의 상중(喪中)을 틈타서 갑자기 침범하였으니 이는 간악한 짓이다. 진사왕이 은인자중하여 곧 보복하지 않고 반드시 삼년상이 끝나기를 기다린 연후에 고구려의 남쪽 변방을 공격하였으니 이는 곧은 것이 백제에 있고, 굽은 것이 고구려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사왕이 두 번을 이기고 이련은 끝내 보복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또한 그 죄를 자복(自服)한 것이다.

담덕이 이에 그 욕심을 징계하고 원한을 풀며 화친을 도모하여 선군(先君)의 허물을 뉘우치고 분쟁을 그치게 하는 아름다움을 이룩했다면 그 어버이를 빛나게 함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런데 의리(義理)와 시비(是非)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보복으로써 일삼았으니 전란이 어떻게 그칠 수 있겠는가?

- 《삼국사절요

4.2 안정복

적인이 침공해 와서 군부(君父)를 살해하면 그의 신자(臣子)된 자로서는 창을 베개삼고 아침을 기다려 피를 뿌리며 싸움에 나가서 오직 원수 갚을 것을 결심하여야 하며, 설사 자기 몸으로 하지 못했으면 아비는 이러한 마음을 아들에게 전하고 아들은 이러한 마음을 손자에게 전해서, 비록 백대에 가서라도 기어코 복수를 해야 하며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의 침공을 받아서 죽었는데 그의 두 아들들이 못나서,???,???:누가 못나다고? 서로 이어 왕이 되었지마는 복수할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 그의 손자 광개토대왕에 와서야 부왕(父王)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 10여 성을 점령하였다. 비록 백제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체를 가져다가 조부의 무덤 앞에 제사 지내지는 못하였으나, 이번의 한 일은 또한 의롭다 할 만한데, 권씨의 논평이 이러함은 무슨 까닭인가?

고국원왕이 죽은 지 겨우 22년이 지났다. 그런데 권씨의 말대로 한다면 조부의 원수를 보복해서는 아니 되며, 22년의 일을 오랜 세대가 지났다는 핑계로 잊어야 옳겠는가? 주자(朱子)는, 당시 송(宋)나라가 양자강 남쪽으로 옮겨간 뒤이고 휘종흠종이 포로가 되어 간 지 50~60년으로 오래 되었으며[5], 효종(孝宗)이 휘종과 흠종의 두 황제에게는 촌수(寸數)가 먼 처지이지만 말하기를, "국내의 정치하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며, 휘종·흠종의 원수 갚는 마음을 하루라도 늦추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주자의 마음은, 군부(君父)의 원수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세대가 오래 지난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즉 권씨가 말한 것처럼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원수만을 갚으려고 마음먹었다.'하여 비난하겠는가? 슬프다!

- 《동사강목》

4.3 최보

광개토(廣開土)는 영웅의 위의로 특출한 재주가 있어, 능히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하였다.

- 《동사강목》

5 근대 역사학자들의 평가

5.1 신채호

광개토대왕은 야심이 충만하고 무략(武略)이 절등한 인물이지만, 기실은 동족에 대한 사랑이 많아서 백제를 정벌함은 왜와 연결함을 미워하여 공벌함이요 그 땅을 탈취하려는 공벌이 아니니... 대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방의 강성한 선비(鮮卑)를 정벌하려는 것이니 북방의 전쟁이 비로소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것... 광개토대왕의 영토 개척이 서쪽으로 더 확대될 수도 있었는데, 북연北燕에서 고구려인의 후손인 고운(高雲)이 즉위함으로써, 동족을 사랑하는 대왕이 전쟁을 그만둔 결과...

- 《조선상고사》

5.2 다른 나라의 역사학자들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타케미츠 마코토는 그를 관대하고 온화해서 백제 백성들에게까지 사랑받는 왕이라 평가하고 있다. 참고로, 타케미츠 마코토는 광개토대왕을 다루고 있는 인문서적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낸 사람이다.

중국의 동북지방(만주) 역사 연구에 있어 큰 업적을 남긴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진위푸(金毓黻)는 그의 저서 동북통사에서 요동 지역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며 광개토대왕이 이 지역을 차지한 것을 고구려에 있어 큰 공로로 평가하고 있다.

6 현대 국내 정치인들의 평가

광개토대왕에 대해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사람이 거의 없으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오만원권 지폐 초상에 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 바 있다. 10만원권 지폐 떡밥이 나올 때마다 광개토대왕이 최유력자로 손꼽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

개인으로는 신사임당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율곡 선생이 이미 5천원권 초상 인물이기 때문에 모자(母子)에게 치우친 면이 있어 우리 역사상 가장 진취적 기상을 갖고 국운을 개척했던 광개토태왕이 바람직하다.
  1. 왜가 중국 황제에게 고구려의 방해로 사신을 못보내니까 고구려 좀 쓸어달라고 부탁하는 상표문을 보낸적도 있다.
  2. 사실 고구려나 백제도 발해 못지 않게 기록이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3. 물론 멸망 당시 특히 고구려의 경우에는 인구수에 대한 논란이 있다.
  4. 사실 한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인구수로는 세계적이게 상위권이다. 조선시대 조선의 인구수는 세계적인 기준으로도 상위권이었고 앞으로 통일되면 성립될 통일 한국의 인구도 세계적인 기준으로 매우 많다. 당장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앞지른다!!
  5. 정강의 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