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오호십육국시대
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 ||||
기원전 206 ~ 220 | 한(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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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 265 | 삼국(三國) | 위(魏) | 촉한(蜀漢) | 오(吳) |
265 ~ 436 | 진(晉) | 서진(西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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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 ~ 619 | 수(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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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 | |||||
북주 | |||||
수(隋) |
北燕
1 개요
오호십육국 때의 나라 중 하나. 후연의 북쪽 지방을 분할 차지(?)해서 북연이라 부른다. 폭군인 모용희를 처벌한 모용운(慕容雲)이 세운 나라.
모용운은 모용보의 양자고, 모용희 사후 즉위했으니 후연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용운은 원래 고구려 왕족인 고씨 출신이고, 모용운(고운) 이후 즉위한 풍발과 풍홍은 둘 다 한족이니 후연과 달리 선비족 왕조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체로 한족 왕조로 분류하는 편이지만, 창업 군주의 종족적 정체성을 강조해[1] 고구려계 왕조로도 보며, 중국판 위키피디아에서는 분류표에 북연의 민족을 高句麗、漢으로 표기한다.#
어느 때부터 북연으로 볼지 논란이 있는 탓에 종종 후연과 헷갈리기도 한다. 고운이 죽고 풍발이 즉위한 시점부터 북연이라고도 보고, 모용보가 용성으로 달아나 후연의 영역이 북쪽에 해당하는 요서 지방으로 줄어든 시점부터 북연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모용운(고운)의 통치시키만 뚝 떼어 후연과 북연 사이의 대연 시기를 구분하자는 주장도 있다. 어쨌건 통설은 모용운부터를 북연으로 본다.
북연의 건국자 모용운(이하 고운)은 북연을 건국하며 모용씨 일족을 쫓아냈고, 자신도 모용씨를 버리며 본래의 성이던 고씨로 갈았다.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고운의 할아버지인 고화가 고구려 왕족이던 것에 근거해 종족의 연을 맺었다. 이런 성격 때문에 북연은 친고구려적 성향을 보였고 건국과 멸망 모두 고구려와 연관한다.
고운은 즉위 뒤 그럭저럭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러나 후연 멸망시 반란의 실질적 주도자였던 풍발의 배신[2]으로 죽고 풍발이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거란과 해 무리에게 귀선왕을 책봉하고 그들에게 교역을 허용, 농업을 권장했다. 유연과도 혼인 동맹을 하는 등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망을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북위에게도 사신을 파견하여 이후의 화근을 무마하려 했으나 북위에게 서쪽 변경의 백랑성이 털리는 등 북위의 위협이 가시화했다.
마지막 황제인 풍홍은 북위가 쳐들어오자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다. 고구려는 갈로의 지휘아래 2만 대군을 용성에 보냈다. 북위군은 북연의 수도인 용성을 접수하러 왔다. 초반에는 친고구려파를 누르고 선수를 친 친북위파가 용성을 접수해 성문을 열었으나, 북위군은 이를 못 믿어 안 들어가서 역사에 남을 실수를 저질렀다. 그 틈을 노린 고구려군이 용성에 들어가 북위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점차 버티기 힘들었는지 지배층과 수만 백성들을 고구려로 이주시킬 준비를 한 뒤 약탈하고 성에 불을 질렀다. 끝내 북위군은 용성 빈 터만 얻었다(...).
자신의 신하, 백성들과 함께 고구려에 망명한 풍홍은 자기는 황제니까 고구려 왕이 자기에게 신하의 예를 다하라는 둥 온갖 오버질을 하다가 유송으로의 망명을 계획했고, 빡돌은 장수왕이 풍홍을 그 일족과 함께 처형시켰다. 이후 풍홍은 소성제라는 시호를 받았다.
여기서 드러나듯이 고구려는 여하간(국력의 차이는 빼고) 황제국이 아닌 왕국이었고, 북연은 명목상이나마 황제국으로서 고구려를 제후국으로 여겼다. 북연이 고구려의 신하나라니... 하는 생각은 얼토 당토 안한 이야기. 풍홍의 무리는 막 국운을 일신하던 장수왕에게 거슬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당연히 처형 크리. 이런 북연과 고구려의 관계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글을 보자.#
그렇게 북연은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끼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고 북연을 정복했던 북위 태무제 탁발도는 뒷날 용성에 진수한다. 모용씨는 위진남북조 말기에도 활약했고 풍씨는 북위 황실의 외척을 한다. 중원의 변경으로서 나름 번성했던 요서는 거란족, 해족의 놀이터이자 고구려와 중원 여러 나라 사이의 완충지대로 바뀐다. 6세기 초에 취덕흥이 연의 부흥을 내세우며 일으킨 반란이나 오대십국시대에 연이라는 이름의 세력이 잠깐 나온 점을 빼면 그나마 제대로인 연나라는 북연이 마지막이다.
2 왕사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1대 | - | 혜의황제(惠懿皇帝) | 고운 | 정시(正始) 407 ~ 409 | 407 ~ 409 | - |
2대 | 태조(太祖) | 문성황제(文成皇帝) | 풍발 | 태평(太平) 409 ~ 430 | 409 ~ 430 | 장곡릉(長谷陵) |
3대 | - | 소성황제(昭成皇帝) | 풍홍 | 태흥(太興) 431 ~ 436 | 430 ~ 436 | - |
- 북연/왕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