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學大師
(1327 ~ 1405)
속가의 성은 박(朴), 법명은 자초(自超)이다. 1327년 9월 20일에 태어났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 천도를 도왔다고 한다.
야사 등지에서는 그가 귀주성 전투의 영웅인 박서의 5세손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박서의 본관인 죽산 박씨 족보에도 그가 박서의 후손이라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그의 출생지에 관해서도 경상남도 합천이라는 설과 충청남도 서산이라는 의견이 분분하다. 따라서 어렸을 때 그의 신분은 굉장히 미미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가 후 원나라 대도에서 유학했을 당시 공민왕의 스승인 나옹 혜근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별볼일 없는 출생 신분 때문에 나옹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업신 당했고, 곧바로 나옹에게서의 수학을 포기한다.
그가 33세되 던 해인 1360년(공민왕 7)에 스승인 나옹 혜근을 다시 만나고, 더불어 함주로 가서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의 묘자리를 잡아주어 이 때부터 무학과 이성계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1384년(우왕 10)부터에 두 사람은 사제 지간을 맺을만큼 본격적으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통해 역성혁명을 꾀하려던 이유 중 하나로 그가 어머니가 노비인 서얼이기에 신분 상승을 꾀함이었다는 설도 있듯이, 무학대사 역시 일종의 신분 상승을 목표로 이성계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설도 있다.
야사가 상당히 많은데 세간에 알려진 이성계의 세 서까래 꿈 해몽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얘기(猪眼觀之卽猪 佛眼觀之卽佛)와 전어도 관련, 도읍지 위치 배정 및 이자춘, 이성계의 묏자리도 그가 봐주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종묘의 칸 수를 결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야사일 뿐이니 너무 믿진 말자. 종묘의 칸 수 경우엔 확실히 틀렸다. 자세한 내용은 이성계 문서 참고.
그러한 야사들을 볼 때 상당한 명풍수이자 예언자였다고 봐야 할 듯. 단, 고우영 화백의 수레바퀴에서는 재상과 장군이 나오는 묫자리를 왕이 나올 자리라고 했다가 틀렸다고 스승 나옹의 꾸지람을 받거나 왕십리의 유래에도 나오듯이 처음부터 잘못된 위치 선정으로 도선 국사의 가르침을 받는 장면을 보면 무학이란 법명 그대로 그렇게까지 빼어난 고승은 아니였을거라고 서술했다.
1392년 10월 9일에 왕사가 되었고 10월 11일은 이성계의 탄신일인지라 깨달음에 대해 강의했는데 종교의 취지에 대해 능히 해설하지 못해 중들 가운데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1] 1393년 2월 11일에는 한양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 땅의 형세를 관람하면서 이성계가 묻자 능히 알 수 없다고 했으며, 1402년 7월 13일에는 회암사의 감주가 되었다.
1402년 11월 9일에는 이성계가 함주에 있을 때 이방원의 명으로 이성계에게 가서 이방원이 속히 돌아오기를 청한다는 것을 전했으며, 1405년 9월 20일에 향년 79세로 사망했고 그 뼈는 회암사 부도에 안치되었다. 1410년에 시호를 받았고 조선왕조실록에서 무학이라는 호보다는 자초라는 법명으로 더 많이 나온다.
사극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한 1996년 작 용의 눈물과 KBS 대하드라마의 부활을 알린 2014년작 정도전에서 출연하였는데, 두 드라마 모두 박병호씨가 배역을 맡았다. 이처럼 동일 배역을 다른 사극에서 두 번 연기한 다른 경우로는 원경왕후 역의 최명길(용의 눈물, 대왕 세종), 단종 역의 정태우(한명회, 왕과 비), 소혜왕후(인수대비) 역의 채시라(왕과 비, 인수대비) 등이 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