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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华人民共和国 国家安全部
중국어 번체자: 中華人民共和國 國家安全部
영어: Ministry of State Security. 약칭: MSS
한국어: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 약칭: 국안부
담당 부장: 겅후이창(耿惠昌)
목차
베이징 후베이성 우한에 위치한 국가안전부 본부어쩐지 미국의 연방정부와 심히 닮았다.
1 개요
국가안전부는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정보기관이다.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Ministry of State Security)이며 줄여서 국안부, 또는 영어로 MSS라고 표기한다. 뉴스나 언론에선 그리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1] 해외에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국가안전부는 미국 CIA와 이스라엘의 모사드 등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한국이나 미국과는 다르게 별도의 홈페이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한 소속 인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독일의 주요 일간지 ‘디 벨트(Die Welt)’는 2009년 자국 정보기관인 연방헌법수호청(BFV) 관계자를 인용해 해외에서 공작 중인 MSS 스파이의 규모가 매우 광범위하다고 보도하였는데 그게 어느 정도냐면 미국 CIA 내부에까지 침투해있을 정도라고 한다.ㄷㄷ 1985년 미국으로 망명한 국안부 간부 위창성은 CIA 내부에서 정체를 숨긴 채 활동 중이던 MSS 공작원 '진우지(金無忌)'의 신분을 폭로했다. 2005년 호주로 망명한 톈진시 소재 ‘610사무실’ 요원 출신 하오펑쥔은 국제정치에서 비교적 변두리에 위치한 호주 내부의 중국 스파이만 해도 1천 명에 달한다고 증언했다.
2 역사
해외에서 MSS또는 Ministry of State Security으로 알려진 중국 국가안전부의 창설은 중국 국공내전 때부터 탄생되었다. 당시는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의 비밀특무기관이 명성을 날렸었는데, 장제스의 양대 특무기관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중통). 특히 장제스의 심복 다이리(戴笠)가 지휘한 군통은 일본 황실에까지 스파이를 심었을 정도였다.그리고 공산당한테 명성을 날리게 털렸다. 중국 국민당의 군통과 중통의 비밀공작에 중국 공산당은 매우 큰 어려움과 위기를 겪었다. 공산당을 이끄는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군통과 중통에 맞설 특무기관의 창설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1937년 산시성 옌안(延安)에서 만든 오늘날 국가안전부의 시초인 중공 중앙사회부다. 중국 공산당의 대내외 첩보업무를 관할하는 중앙사회부는 캉성(康生·전 부주석)을 총책으로 비밀 공작을 수행했다.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마오쩌둥은 중앙사회부를 확대개편해 중공 중앙조사부(IDCPC)를 만들었다. 중앙조사부의 편제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신베트’를 모방했다. 중국은 과거부터 친(親)유대인 정책을 취해 이스라엘과 군사정보 협력 등이 긴밀했다. 이스라엘의 대내정보부인 신베트는 대외정보부인 모사드와 함께 양대 정보기관이다. 중공 중앙조사부의 별칭은 ‘서원(西苑)’. 중앙조사부 본부가 베이징 서북쪽 하이뎬구(海淀區)의 ‘서원대원’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당정의 공식문서에는 ‘서원기관’이란 이름으로 표현됐다. [2]
3 악행
대표적으로 전직 탈북자이자 탈북 지원활동가인 유상준이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도우다가 흔히 공안 당국이 아닌 국가안전부로 끌려간 사례가 있었다.[3][4] 증언에 따르면 5월 5일 중국 공안에 체포 직후 이송되었던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시 룽먼(龍門)파출소에서 하루 동안 구금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구석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를 발견했는데 2007년에 이미 한 차례 공안국에 체포된 적이 있었던 유상준은 갑작스러운 CCTV의 출현 앞에 직감적으로 자신이 단순한 공안부 차원의 심문을 받고 있음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했다.
또한 당시 공안들은 유상준에게 그의 중국 내 행적이 고스란히 담긴 CCTV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영상의 내용에는 사우나에 들어가는 모습에서부터 길거리를 걷는 모습까지 유상준의 일거수일투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유상준은 직감이 왔다고 한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중국 공안일지라도 이러한 능력까지 발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 정상적인 절차대로라면 공안부에서의 조사를 거쳐 정식재판에 회부된 뒤 복역하거나 강제출국되어야 했지만 자신이 끌려간 곳은 인적 드문 교외의 한 허름한 여관이었다.[5] 이 곳에서 유상준은 자신이 흔히 영화에서 나올 법듯한 정보기관의 개입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 후 유상준은 공안으로 보이는 4명의 인원에게 온갖 폭행과 심문을 받기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 그들은 유상준에게 한반도에서 정보나 분석, 현황을 수집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심문 중에서도 틈틈이 유상준 달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했으며, 배달되는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와중에 가끔 유상준을 데리고 고급 음식점으로 외출하기도 했고, 앞서 유상준에게 돈을 제시하기도 했었다고... 구체적으로 정보 수집의 대가로 상부에서 지급되는 성과급을 7:3 비율로 나눠가질 것을 제의한 것인데 이는 공안부의 업무 권한을 넘어선 것이며 그들 스스로 중국 정보기관의 요원임을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인 것이다.
MSS 요원들은 유상준에게 국정원 관련 정보를 비롯해 중국 내 선교사 및 인권활동가, 탈북지원활동가의 인적사항과 같은 정보를 연달아 요구하였는데 그 때 이미 그들은 국정원 등에 대한 상당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유상준 말고도 이전에도 비슷한 술법으로 공작원들을 포섭해왔다는데 이 말은 즉슨 중국 공산당에 포섭되어 한국 내에서 활동 중인 중국 스파이가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 게다가 유상준은 "실제로 이 4명의 인원 중 한 명은 접선 등을 목적으로 연중 수 차례 한국에 입국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유상준의 증언으로 국내 보안당국 관계자도 이를 확인해주었다. 관계자는 "조선족 밀집지역인 서울 구로구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중국 정보당국 요원들이 상당수 암약 중"이라며 "주한(駐韓) 대사관이 거점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이들 요원은 평범한 중국 관광객으로 위장하거나 제3국인으로 신분을 세탁해 입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 때 당시 유상준은 자신을 포섭하려든 MSS 요원들 중 한명의 실명과 전화번호를 갖고 있었는데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출국 직전에 그 요원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며 귀국하면 연락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름은 김형권. 조선족으로 안전부 내에서도 지위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내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며 귀국 후 전화할 것을 요구했다. 333-1899. 그의 전화번호다”
-탈북지원활동가 유상준의 증언 中-
2008년 10월 중국 체류기간이 10년 이상이라는 이유로 국적을 받지 못하자 청와대 인근에서 노숙하다시피 하며 시위를 벌였던 탈북여성 채OO는 당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정보기관에 체포될 당시 그들의 일을 해주지 않으면 강제북송하겠다는 협박을 들었다"며 "살기 위해 거짓으로 응하는 척 하고 한국 입국 후 이틀 만에 자수했다"고 밝혔다. 채OO에 따르면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정보기관은 자신에게 별다른 임무를 하달하지는 않았지만 핸드폰 한 개를 주며 한국에 입국한 다음 연락할 것을 강요했고, 성과급을 주겠다는 제안까지 걸었다고 한다.
심지어 현지 한국인도 납치한 사례도 있었는데 북한인권운동가인 김영환을 택시로 유도해 둘러싸서 포섭 후 다롄의 한 호텔로 끌고가 조사를 받고, 다음 날 아침에 국가안전부로 이송되어 하루 13시간 씩 노역을 시키고 잠을 못자게 하는 등 모진 폭행과 가혹 행위를 받았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하지만 석방 당시 안전부에서 귀환해주는 대신에 중국 법률 위반을 사실적으로 인정하고 고문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조건을 강조해(사실상 협박에 가깝다.)"구체적인 답변은 다음에 밝히겠다."며 언급을 피하였다.
4 모사드와의 관계
중국 국가안전부는 모사드와 매우 독특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지난 50년 동안 국가안전부는 모사드 함께 공작활동을 벌여왔는데, 사실 중국은 처음부터 이스라엘과 함께 공작활동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1964년 국가안전부가 아프리카로 요원들을 보내 아랍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며 이스라엘을 공격하라고 부추겨 시비를 걸었는데, 빡친 모사드는 케냐, 가나, 콩고, 잠비아 등 곳곳에서 차량 폭파, 총기 암살, 약물주사 후 사자와 악어에게 먹이로 던져주는 식으로 국가안전부 요원들을 마구잡이로 암살했다. 그 때 당시 국가안전부는 수십 만 명의 인력과 구소련 KGB에 맞먹는 예산을 갖고 있었지만, 악명 높기로 유명한 모사드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심지어 아프리카로 갔던 국가안전부 요원들이 속속 죽어 나갔으며, 시신도 못 찾을 정도였다. 예를 들자면,
1. 국가안전부 요원이 모사드 요원을 칼로 난자해 암살하면
2. 빡친 모사드는 그 국가안전부 요원을 잡아서 총으로 쏴 죽이거나, 썰어서 악어 밥으로 던졌다.
3. 국가안전부 역시 뚜껑이 열려 모사드 요원을 추적한 다음 당했던 만큼 보복하면
4. 모사드도 그 요원을 잡아내 폭탄으로 요단강 익스프레스 태워 보냈으며,
5. 여기에 국가안전부 역시 반격하면 모사드는 적들이 근무하는 사무소를 향해 로켓포까지 쐈다고(...)
물론 이스라엘은 중국과 전쟁할 생각이 없어서 대놓고 적대하지 않았다. 중국 역시 빡쳐도 이스라엘의 태도를 알기에 모사드한테 엿먹을때마다 간접적인 보복만 했지 전쟁은 생각 안했다.국가안전부는 그렇게 모사드와 치고박고 하다가 KGB가 멀티를 시도하자 모부투 자이레 대통령을 앞세워 휴전을 제의하고, 함께 KGB를 막자는 제안을 했다.[6] 그 뒤 모사드는 중국과 급속히 친해졌다. 나중에는 중국과 함께 미국의 주요 연구소를 털기도 했다. 2005년 5월 5일 중국 국가안전부, 인민해방군 정보국과 함께 미국의 핵무기 연구소인 로스 알라모스에서 가짜 화재를 일으킨 뒤, 중요한 핵무기 정보가 든 하드 드라이브를 해킹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로스 알라모스의 이 하드 드라이브를 분실한 것으로 생각했다. 한 달 뒤 구석에 숨겨져 있던 하드 드라이브를 발견한 뒤 난리가 났다. [7][8]
5 조직도
대만 법무부 조사국에 의하면 국가안전부는 현재 17개 핵심 국(局)과 10개의 행정지원국으로 대외활동량 증가 및 정보통신, 위성, 무인항공기(UAV) 등 첨단기술 운용에 따른 필요성에 의해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된 상태이며, 96년에 비해 명칭과 기능이 다소 변경되었다고 전했다.
제1국 歐美情報局: 유럽, 미주, 대양주 지역정보수집
제2국 東歐情報局: 러시아 동유럽 지역 정보수집 (CIS 및 중앙 아
시아지역포함)
제3국亞非情報局:아시아∙아프리카 지역 정보수집
제4국台港澳局: 타이완, 홍콩, 마카오 지역 정보수집
제5국情報分析通報局: 정보의 분석과 통보, 수집지도
제6국科技情報局: 과학∙기술 정보의 수집∙연구 및 통신공작/활
동지휘
제7국 反間諜情報局:반간첩정보의 수집
제8국 反間諜偵察局: 외국간첩의 추적 정찰∙체포
제9국 技術偵察局:우편물 검사 및 통신
정찰
제10국對(外保)防偵察局:해외 중국공관 안전공작 담당 (유학생 및 반중국세력 감시활동병행)
제11국情報資料中心局: 문서자료의 수집∙연구∙관리 (중국현대국
제관계연구원)
제12국社會調査局:사회단체 연락 및 민의 동태조사
제13국技術偵察局:과학 기자재 관리∙연구
제14국密碼.通訊局:암호∙통신공작 담당
제15국台港澳硏究局:대만∙홍콩∙마카오지역 정보분석, 연구조사
제16국計算機管理局:내부 전산망 관리, 전산망의 외부 침입 방지
및 사이버정보분석
제17국兩化企業局:국안부 소속 기업 및 사업관리담당
∙ 그 외 기타부서
판공청(辦公廳)
정치부(政治部)
조직선전부(組織宣傳部)
교육배훈부(敎育培訓部)
인사국(人事局)
노간부국(老幹部局)
감찰심계국(監察審計局)
종합계획국(綜合計?局)
- ↑ 이 때문에 국내에선 중국에 정보기관이 있다는 걸 대부분 모른다..
- ↑ 한국의 국가정보원의 초기 시절 중앙정보부 청사가 서울 남산에 있다고 해서 중정을 ‘남산’이란 별칭으로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
- ↑ 언론에선 공개되지 않았다.
- ↑ 말이 이렇지 사실 본부로 끌려가진 않았다.
- ↑ 주인은 중국 당국과 관련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유상준의 처지를 알아채고 몰래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 ↑ 국가안전부가 모사드와 치고받고 하는 동안 KGB가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이밀며 아프리카를 요리하려고 했다고 한다. 중소분쟁 이후 소련과 갈라진 중국으로써는 또다른 적이 출현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여기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양국은 결국 휴전에 동의한다.
- ↑ 특히 FBI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 ↑ 미국-이스라엘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사죄로 어느정도 마무리가 해결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