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弱臣强
1 개요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강희제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조선을 깔 때 사용한 표현인데, '청나라는 군주가 강하고 신하가 약한데, 조선은 군주가 약하고 신하가 강하니 안된다.'는 정도의 표현.
2 부정하는 입장
거의 모든 나라들이 막장테크를 탈 때 신하의 힘이 강력해 졌다는 것을 봤을 때 조선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당장 중국사에서 십상시의 예가 있다. 게다가 건국초 청나라의 경우, 실제로 황제의 권한이 명나라와 비교해봐도 유달리 강한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왕조 국가인 만큼, 기본적으로 왕에게 주어진 권한은 매우 강력하고 왕통의 불안요소만 없다면 조선의 왕권도 대단히 강력해진다. 조선의 경우, 왕통이 불안하게 승계되다보니 왕권이 약화되는 면이 있었다. 반정이나 방계로 교체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그때마다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강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저 말이 나왔던 현종 시대는 소현세자 문제 때문에 효종, 현종의 왕권이 어느 정도 제약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문제가 있었다.
이론상으로 조선의 왕은 마음 먹으면 어떤 신하를 불문하고 죽이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모든 재판을 주관하여 그 어떤 죄라도 사면해 줄 수 있었으며, 왕이 내린 명령은 곧 법률이었다. 조선의 왕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한 몸에 가졌다. 또한 왕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내수사의 내탕금은 조선 시대 내내 고갈된 적이 없었으며, 왕실은 조선 내에서는 누구와도 비교할 상대가 없는 탄탄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에게는 별다른 불안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그 송시열을 일격에 공자님 곁으로 보내버렸을 정도다.
다만 불안요소 없이 멀쩡하게 왕권을 누린 왕이 아버지가 불안요소를 다 쳐내 준 세종, 스스로 사화를 일으켜 다 쳐내버린 연산군, 왕의 적장자로서 원자부터 세자까지 정석 테크트리를 탄 숙종 정도 밖에 없다.
숙종의 장남 경종은 폐서인 된 장희빈의 아들인 데다가 아버지인 숙종의 눈밖에 난 천덕구러기 신세라 불안 요소가 다분히 많았지만, 일단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신의 정파를 바로 세우고 동생 연잉군의 세제자리를 지켜줄 정도의 권위는 확보할 수 있던 걸로 보아 왕의 역량에 따라서는 군약신강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왕의 권력=국력(國力)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한민족이 세운 국가, 그 중 특히 조선은 전제군주제 국가 치고는 군주의 패악질이 다른 주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 여기에는 신권이 끊임없이 왕을 견제한 점이 매우 크게 작용한다.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어야 나라가 잘 굴러가는 법이다. 단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신권이 너무 강해진 것 뿐.
다만 조선 후기에 신권이 너무 강해진 것도 정조 사후 왕위에 오른 순조가 정치에 지나치게 무관심했고 그 이후 헌종이 지나치게 일찍 세상을 떠나고 중앙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철종이 왕위에 올라 마찬가지로 무기력 했기 때문이지, 왕의 권한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세도정치도 일종의 신하의 권력이라 봐야한다면) 신권이 왕권을 완전히 압도했다고 볼 수 있는 시기는 순조-헌종-철종에 이르는 3대뿐이고[1], 이도 곧 강한 권력의지를 가진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을 왕위에 올리며 집권하자 바로 뒤집어진다.
그나마 심환지 어찰[2]에서 확인되듯이, 그 신권의 견제조차도 왕이 마음만 먹으면 이면에서 정치적으로 조율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왕 빼고 다 가졌던 노론과 안동 김씨는 경종과 고종을 낀 흥선 대원군이 자기들에게 반대하자 권력에서 밀려났다.[3]
3 긍정하는 입장
일단 당시 주변 국가들에서도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선 대부분의 나라가 막장테크를 탈 때에 군약신강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해해줘도 이 발언이 나온 시기의 조선은 멸망까지 거의 200년 이상을 남겨둔 시점이었다[4]. 막장테크를 탈 때에는 신하들의 발호가 이뤄진다면 조선은 남은 기간 동안 막장 테크를 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 200년에는 숙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기간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런 배경은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청이 유목국가라서 특수한 것이라고 보는 것도 맞지 않는 것이, 한족 국가였던 명나라도 황제권이 절대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청나라의 경우는 황제가 주도적으로 만주족의 관습을 강조하기 때문에 두드러져 보일 뿐이다. 조선은 거의 동 시대에 건국된 명나라와 비교해도 왕권이 유달리 약했다. 이에 비견하려면 봉건제 국가의 군주나 강남으로 도주한 이후의 중국 국가들 정도는 되어야 비교가 가능한데, 통일국가에 중앙집권적 국가의 왕권이 이런 케이스와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5]
일반적으로 왕조 국가에 있어서 왕의 권한이 강한 것은 일반적 상황이다. 그로 인하여 부정적인 영향이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고, 왕권을 제약하면 왕으로 인한 문제를 줄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줄어든 문제가 대신 왕을 대신해서 권한을 가진 이들에 의해서 벌어지면 거기서 거기다. 더구나 왕조국가의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제도적으로 왕에게 권한이 있기 때문인데, 신하들 입장에서 이걸 압박을 통해서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양자간의 권력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왕에게서 권력을 가져온 다음에는 자기들끼리 싸웠고 군약신강의 근본적인 문제는 제도적으로 강한 왕권을 현실적으로 강한 신권이 억누른 결과물이란 것이다.[6]
현실적으로 강한 신권의 배경이 바로 성리학이다. 원래부터 문치주의가 극에 달했던 남송시기 주희에 의해서 본격화된 성리학[7]의 정치이념화는 조선 초기 정도전에 의해서 군신공치라는 개념으로 본격화 된다. 하지만 이 군신공치 개념은 이미 증명된 것처럼 극히 예외적인 경우외에는 실행된 적이 없다.[8] 군신공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세종이나 성종 마저도 후반부에는 그냥 자기들 맘대로 했다[9]. 영조나 정조는 더욱 그랬으니 다른 왕들은 언급할 것도 없다. 군신공치는 성리학을 신봉한 신하들의 입장에서 가정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이지 그게 실제로 실행된 적은 없다. 애초에 군신공치를 처음들고나온 정도전만 해도 그 권력은 군신공치 운운하기에는 너무 강했고, 이건 이방원과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성리학에서 군신공치가 가능하다고 본 이유이자, 그리고 군신공치 개념이 어려운 이유가 있는데 바로 도학군주 개념이다. 집권층 전체가 성리학에 물든 조선에서 신료에서 재야의 선비들은 물론이고 왕도 성리학에 충실한 군주가 되기를 요구받았다. 유학적 개념에 있는 아시아권, 특히 성리학으로 통일된 조선에 익숙해지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보이지만 서구권이나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도 이는 상당히 특이하다. 당장 세자를 가르치는데 사용된 책들을 보면 실무적인 정치 지식을 다룬 《정관정요》나 《국조보감》과 같은 서적들 보다 《대학》의 주석서인 《대학연의》, 《중용》, 이이가 저술한 《성학집요》, 《성리대전》 등 성리학과 관련된 서적이 더 많다. 그리고 이것은 왕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아서 경연의 형태로 성리학과 유학에 대해서 공부하는 형태가 된다. 이건 플라톤의 철인군주론의 보다 적극적 개념일 수도 있지만, 국왕이나 세자의 두뇌를 성리학으로 고착화해버리는 역할을 한다. 그나마 이런 과정을 적극적으로 왕권 강화에 활용한 정조와 같은 국왕도 있지만, 그 결과 정조는 문체반정운동과 같이 철저한 도학군주로서의 한계를 지니게 되었고, 이런 세뇌에 가까운 과정에 반발을 품은 이들은 양녕대군이나 사도세자처럼 세자 시절에 엇나가거나 혹은 연산군처럼 재위기간 도중에 막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도학군주 개념마저도 시간이 갈수록 신권강화로 전개되었음을 볼 수 있다. 단적인 예가 이황과 이이의 논쟁인데, 이황은 국왕이 스스로 깨달아서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이이는 신하의 교육을 거쳐서 국왕이 군자가 된다라고 주장했다.
이 부분이 중국 성리학보다 이이와 정도전의 방법론이 더 나가는 것이다. 중국 성리학에서 왕은 특히 높으면서도 신하 전체로 대립이 가능한 수준이었다면, 이이와 정도전의 방법론은 왕=신하들이 포함된 사대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게 실현된 것은 중국에서도 송대의 문제가 아니다. 남북조시대의 극혼란기 속에서나 이게 가능했고, 그 결과는 문벌귀족의 난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장면은 고려 초의 문벌귀족 시기에도 나타난다. 당장 고려만 해도 일반적으로 기억에 남는 왕이 몇명 안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광종 이후로 왕권이 강했던 특이한 예(숙종, 예종의 경우)나 그 와중에도 깽판친 경우(단적으로 충혜왕의 경우)를 제외하면 공민왕 이전까지 기억나는 왕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반기는 문벌귀족, 중반기는 무신정권, 후반기는 권문세족. 그래서 고려시대의 상태가 좋았는가? 고려사 및 관련 사료들의 상당수가 문신관료들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문벌귀족의 정치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무신은 대단히 부정적으로, 권문세족 시기는 조선 건국자들이 때려부순 이들이라서 부정적으로 쓰여진 것 까지 고려하면 고려시대 백성들의 삶은 정말 갑갑해진다.[10]
앞서서 왕권이 약해도 관료층에서 난리치면 별 차이 없다는 것이고, 성리학은 전통적으로 약했던 왕권을 이론적으로 확립시켰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문벌귀족시기의 정치 모습[11]과 별반 차이도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정통성의 문제 때문에 왕권이 약했다고 하지만, 애초에 정통 개념을 극도로 중시한 것 자체가 성리학의 특징이다. 공자의 정명론이건 양명학이나 고증학이건 성리학만큼 정통론에 입각하여 이 국왕, 이 왕조에게 정통이 있네 없네를 따진 학문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국왕의 후계자들에게 있어서 정통성이 있네 없네 현국왕에게 정통성을 부정하네 운운하면 조선시대 후반을 뒤흔든 문제, 즉 택군이 등장한다. 신하들이 국왕을 선택한다고 하면 입헌군주제 분위기라서 좋아 보일지 몰라도, 그 신하들이 실질적으로 대표로서 보다는 귀족의 개념에 더 가깝다면 귀족 과두정의 문제만 나올 뿐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전체 민의의 대표자보다는 자신들의 특권 유지와 자신들의 이상을 유지하고 펼치는데 대부분의 열의가 사용되었다. 소위 애민정신도 위에서 아래를 보는 긍휼히 여김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조선의 왕들의 권력은 정통이 있느냐 없느냐도 있지만은 왕이 재위하여 집권한 시기가 얼마나 되느냐와 실제로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역량이 있느냐라는, 보다 개인적인 부분의 비중이 컸다. 단적으로 군약신강이라는 표현이 나온 현종은 세손 - 세자 - 왕이라는 루트를 착실하게 밟아서 왕위에 오른 몇 안 되는 인물이다.[12] 현종이 효종의 아들이라서 정통성이 문제를 보였다면 현종의 아들인 숙종이 정통성이 강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2대는 약하지만 3대정도가면 정통성이 보강되어서 그런가? 성리학의 개념에서 보자면 정통성은 현실적인 문제나 몇대를 지났느냐 같은 것과는 별로 상관없다. 예송논쟁 과정만 보아도 재위 초기였던 1차 예송과는 달리 2차 예송에서 현종은 송시열을 밟아버렸다. 송시열이 현종대가 아니라 숙종대에 죽은 것은 현종이 정통성이 약하고 숙종이 정통성이 강해서가 아니라, 현종이 34세의 나이로 도중에 사망했기 때문이다.[13] 이건 왕권이 정통이 아니라 왕과 신하들간의 권력 다툼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조선의 왕들은 이론적으로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집권층 모두가 성리학 일색이라 세자 시기부터 시작되는 세뇌에 가까운 교육과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 촘촘히 마련되어가는 신하들의 견제에 운신을 마음대로 못 하게 되고, 이에 어긋나면 광해군마냥 쫒겨날지도 모른다는 반정의 위험을 느끼는 와중에서 별 소리를 하지 못하다가 자기도 나이를 먹고 재위 기간이 길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낙에 견제에 배운 것이 성리학뿐이라서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기존 제도를 손대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놀아버렸다. 애초에 다른 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지쳐버리던가 그 신하들의 정쟁에 말려들어 강력해진 권력을 숙청등에 쓰던가이다. 그나마 강화한 권력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신하들과 아웅다웅해야 한다. 학문에 손을 대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정말 특이한 사례일 뿐이다. 아예 집권 초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그것을 진압하는 동안 권력이 강해진 영조조차 신하들에게 치여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쳐갔고 나중에는 신하들의 정쟁에 휘말려들어 사도세자를 저승으로 보내버렸다.[14]
이런 조선의 모습은 중국의 황제들 입장에서는 군약신강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청이 정복왕조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같이 성리학을 신봉한 남송이나 황제는 덤이고 실제로는 권문세족이 통치한 남북조시대의 황제들 정도를 제외하면 조선의 국왕들만큼 왕들이 뭘하는데 제약이 많았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멀리 갈 것 없이,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건국한 명나라만 해도 황제의 권한은 내부에서 거의 무한한 수준이었다.
4 미디어에서는
이딴 거 없고 사극에서는 무조건 군약신강이다. 이유야 간단한 것이, 안 그러면 긴장감이 없어서인데, 실제 역사와 괴리가 너무 심해서 문제다.
심지어 바로 위에서 언급된 강력한 왕권의 숙종조차도 신하들에게 벌벌 긴다(…). 조선만이면 모를까 전기 고려도 군약신강, 전성기 고구려도 군약신강이다.- ↑ 헌종도 일찍 죽어서 그렇지 죽기 직전까지 안동 김씨를 왕의 권위를 이용해 극딜하고 있었다. 헌종이 몇년만 더 살았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 ↑ 그런데 심환지 어찰도 문제인 것이, 이런 어찰은 원래 받으면 보고 불살라야 한다. 이걸 가지고 있다가 현대까지 남아서 발견되면 안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심환지 어찰이 어떻게 남아있을 수 있었는지를 고려하면 결론이 좀 달라지게 된다.
- ↑ 다만 대원군 집권시기에도 대원군 자체의 권력기반이 약한 것도 있고 세도 정치동안 안동 김씨의 세력이 여기저기 뿌리를 내렸었기 때문에 쇠퇴할지언정 위세는 남아있었다.
- ↑ 기본 500년을 가는 한국 역사에 익숙하면 200년 막장 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으나, 전근대 국가에서 200년이면 한 나라의 역사 전체라고 해도 절대로 짧은 기간이 아니다.
- ↑ 이와 유사한 경우라면 문벌귀족들이 득세한 고려 전기 정도가 비교가 되는데, 조선이 귀족제 국가라고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없지만은 그 고려 전기와 비교될 정도로 신하들의 권한이 강한 수준이었다.
- ↑ 강희제의 말을 전한 원접사 수촌 오시수는 그 말을 꺼림직하게 여겼던 당시의 집권세력인 노론에 의해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 현자(송시열)를 모해하려 든다는 이유로 주살된다. 그리 당파적인 인물도 아니었고 정승까지 역임했던 중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 애초에 성리학이 등장한 남송 시기부터 왕권의 약화, 문치주의 강화, 교조화, 배타주의 등이 모조리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원을 거쳐서 명과 청으로 이어지면서 성리학의 방법론이 박살나고 왕권이 다시 강해진다.
- ↑ 애초에 중국식 성리학의 개념으로는 군주와 신하는 그 격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라인에 설 수도 없다. 이이와 이황의 개념으로 보자면 이황이 보다 중국식 정통성리학 개념에 가깝고, 이이의 그것은 거의 마개조에 가깝다. 그리고 이이의 책 성학집요에서 군신공치의 개념이 다시 등장한다.
- ↑ 군신공치가 완벽하게 실행되었으면 훈민정음은 창제되지도 못했거나 혹은 제대로 반포되지도 못하고 끝났을 것이다.
- ↑ 신라 헌강왕의 사례를 봐도, 나라가 개판이라도 집권층과 사관의 의향이 맞으면 기록은 전혀 달라질 수도 있을 정도이다.
- ↑ 물론 문벌귀족은 세습을 노골적으로 했고 조선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은 고려에 비해 인재풀을 좀 더 넓힌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너서클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조선시대에 당상관 이상에 오를 수 있는 관리들의 명단인 도당록에 기재된 인물들을 분석해보면 지리적이고 혈통적으로 능력과 성품에 따른 인재 채용이라는 성리학적 관료제가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애초에 정치성향도 아니고 학파로 파벌 만들던 것은 중국에서는 송대에 이미 끝난 것이다.
- ↑ 단종도 세손-세자-왕이라는 루트를 탔지만 자기 힘도 제대로 못 휘둘러보고 쫒겨났다.
- ↑ 현종이 2차 예송으로 송시열의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서 독살설까지 만들다가 재위 16년만에 사망했고, 숙종이 송시열을 죽인 것도 재위 15년이 되던 해이다. 실제로 국왕들은 초기에는 대신들과 협의하거나 오히려 휘둘린 왕들도 집권이 15년에서 20년 정도 되면 정국주도권을 쥐고 잡아대기 시작했다.
- ↑ 영조의 업적 대부분은 즉위 전반부에 몰려 있고, 후반부로 가면 큰 일은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