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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김인식 감독은 소수정예의 불펜투수 운용으로 인한 몇몇 투수의 과부하, 김인식 감독 특유의 베테랑 선수 선호로 인한 세대교체 지연의 문제, 2006년부터 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고 있는 류현진의 혹사 등으로 특히 한화 이글스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05년의 윤규진, 2007년의 안영명, 2008년의 마정길, 2009년의 양훈, 황재규는 김인식 감독의 불펜투수 혹사로 자주 거론되는 선수들이다. 특히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많이 던지게 해 투수의 생명을 짧게 하는데 여러가지로 공헌을 했다. 투수가 부상에 가장 시달리기 쉬운 상황은 바로 짧은 기간에 많은 공을 던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짧은 기간에 많이 던지는 행동은 투구 밸런스를 무너트리기 쉽고, 곧 무너진 밸런스로 투구를 하는 행위 자체가 몸의 부상을 가져 올 확률을 매우 높인다. 이로 인해서 한화 주력 불펜 투수들이 혹사당했다고는 하나 총 이닝이 타 팀 노예(…)들보다 적은 경우가 꽤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단기간에 많이 던져서 탈이 나 나머지 기간동안 빌빌 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젊은 선수뿐만이 아니라 나이든 베테랑 선수조차 투타를 가리지 않고 심각하게 혹사 or 부상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사 재활을 할지라도 충분한 재활 기간을 안주고 이른바 "땡겨쓰기"를 마구잡이로 감행해 그 선수의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문동환, 구대성, 이영우…. 이러한 성향은 킬인식이란 안좋은 별명을 갖게 만들었다. 이런 요소들이 누적되어 김인식 감독 퇴임 후, 한대화 감독이 취임한 이후에는 쓸만한 선수는 모두 혹사로 맛이 가거나 해외 진출, 타 팀 이적, 군 복무 등으로 빠져나가 1군의 양과 질이 타팀 2군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로 인해 한화 이글스는 암흑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2 재활공장장의 허상
과거 부상으로 오래 고생했거나 은퇴한 선수를 다시 불러다 쏠쏠하게 활용해서, 두산 시절의 조계현, 김호 등을 비롯하여 2005~2006년 에이스로 활약한 문동환을 비롯[1],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생애 최고의 역투를 보여줬던 지연규, 그리고 '몸 만들고 기다려'로 유명한 조성민 등이 있다. 최근에는 유망주였다 부상으로 잊혀졌던 강동우도 2009년 시즌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것 자체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이런 특유의 운영방식은 밑에서 언급할 신인 홀대와 겹쳐서[2] 주전 선수의 노쇠화로 인해 팀 리빌딩이 필요한 국면에서는 팀의 세대교체에 막대한 지장을 주면서 현재의 파국을 낳은 원인이 되었다.
3 믿음의 야구에 대한 비판
선호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가진 선수들에게는 상당히 오랫동안 기회를 부여하면서 지켜봐주는 지도 스타일 때문에 흔히 믿음의 야구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두산 베어스 시절까지는 이러한 노선이 상당히 성과를 거두었으며 김상호, 심정수, 정수근, 진필중, 홍성흔, 타이론 우즈 등의 선수들이 김인식 감독의 고집에 부응하면서 기량이 만개하였다. 1994 시즌까지 그저그런 타자였던 김상호는 1995 시즌 붙박이 좌익수로 전 경기 전 이닝 3번 좌익수 선발출장을 하는 전폭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홈런왕을 차지했다. 심정수 역시 8번 타순에 고정 배치되어 "삼진 걱정 말고 마음대로 휘둘러 봐"라는 김인식의 신뢰를 받고 그해 21홈런을 치면서 주전으로 부상했다. 타이론 우즈의 경우에도 1998 시즌 중반까지 그저그런 성적으로 퇴출이 거론되었으나 김인식 감독이 고집스럽게 3번에 고정배치하면서 7월 이후 잭팟을 터뜨린 경우.
그러나 한화 이글스에 부임하면서부터는 노장에 의존하는 보수적인 성향이 더 강해지면서 신인급 선수에게 믿음을 보내는 '모험'을 기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대한 한화 팬들의 불만은 적지 않아서 나이 많고 실력도 떨어지는 선수들이 주전 자리를 계속 꿰차고 있는 '철밥통 야구'라고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예컨대 '믿음'받지 못하는 선수들의 경우에는 '불신의 야구'로서 출전이 제한받고 2군에서 썩는 경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2007년 시즌의 비범한 병살 기록을 세운 이도형과, 대주자로서도 대타로서도 가치가 영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1군에 들어앉아 있던 김인철의 계속된 기용 등이 있었다.
반면 신인들에 대해서는 '불신의 야구'로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데, 가뭄에 콩나듯 가끔 2군에서 올라오는 선수들이 어쩌다 선발에 올라와서 첫 타석에 삼진이나 병살 등을 기록하면 주저없이 다음 이닝 수비 때 교체해 버린다. 장타력이 좋았던 유망주 송광민의 경우 이런 패턴의 기용에 불만을 표했다가 짤없이 2007년 내내 썩어야 했다.
2008년에 레귤러 자리를 차지한 김태완도 지명대타 포지션을 이도형이 차지하는 바람에 2007년까지는 변변찮은 출전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2008년에도 연경흠 등 자체 팜 출신 유망주보다는 두산 베어스에서 데려온 윤재국의 기용 빈도가 더 높았다. 당시 윤재국의 타율은 2할에 간신히 턱걸이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런 감독이 최진행, 김태완, 송광민, 연경흠을 키우려고 노력했다는 소리를 하는 것은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한번 자기 눈에 벗어나면 절대 다시 중용하지 않는 것은 코칭스태프 운용에도 마찬가지이며, 대표적인 경우가 한용덕 코치로, 류현진의 활용 문제로 부딪친 이후로 바로 재활군 코치로 내리고 투수코치로 이상군을 끌어올렸다.
4 투수 혹사
해태 시절 김응용을 보좌한 탓인지 투수 운용이 상당히 흡사하며, 불펜에 상당한 과부하를 주는 경향이 있다. 두산 시절에는 이용호, 진필중, 이혜천, 차명주 등이 허구한날 등판했으며, 심지어 차명주에 대해서는 '매일 2이닝씩 던질수 있는 투수'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KBO 최고의 유리몸으로 꼽힌 박명환은 데뷔때만 해도 상당한 이닝이터였으나 3년간 미친듯한 혹사를 당한 끝에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그런데도 계속 현역이다[3]. 선발이라고 다를 바가 없는 게 1995년 우승 때도 위에 언급한 김상진, 권명철, 송재용 선발 3명이 포스트시즌 내내 3일 쉬고 나왔으며 그외 이경필, 구자운 등 특정 선수 혹사 문제는 당시 두산의 얇은 선수층과 맞물려 계속 지속되던 문제였다.
한화 이글스에 부임한 이후에도 불펜중 뛰어난 구위를 보인 투수는 과도하게 기용하여 혹사시켰으며, 거의 해마다 한명 이상씩 탈이 나서 이탈하게 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의 휘하에서 망가진 투수만 해도 정병희, 윤규진, 안영명, 최영필, 구대성, 송창식, 문동환등이 있다. 송창식은 아마시절과 유승안 감독의 혹사, 혈행장애로 장기간 재활이 필요했는데 조기복귀 시키는 바람에[ 선수생명 끊어질 뻔 했다. 2005년 전반기에 과도한 혹사를 당한 정병희는 김민재를 FA로 영입할 때 보상 선수로 SK 와이번스에 넘어간 뒤 다시는 부활하지 못한 채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방출당했다. 2005년 후반기에 혹사한 윤규진은 오랜 재활끝에 2008년 선발 로테이션을 차지했으나 '불펜에 구위 좋은 투수가 있어야 한다'는 김인식 감독의 판단 아래 1경기에만 선발 등판하고 다시 불펜으로 전환했으며, 역시 이길때 질때 가리지 않고 등판하다 결국 어깨부상으로 시즌 아웃됐다.
2006년 류현진의 뒤를 잇는 2선발로서 뛰어난 성적을 올려 한화 이글스의 한국 시리즈에 진출에 이바지한 문동환은 한국시리즈때부터 허리 부상의 징조가 보였고 결국 2007년 시즌 초반 현대전에서 허리 부상이 도져 치명적인 디스크로 발전, 그 후로 2007년을 끝으로 기약없는 재활만을 반복하다가 2009년에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되었다.
선발 요원으로 키워지다 2007년 불펜에서 혹사당한 안영명도 볼끝이 가벼워지며 2008년 들어 난타당했으며, 무릎 상태가 좋지 않던 노장 구대성도 팀 사정상…이란 이유로 2007년 내내 클로저로 등판시키다 기어이 무릎에 칼을 대야 했다.
2008년에도 특정 불펜 선수들을 이기고 지고에 상관없이 마구 등판시켜 악명이 높았으며, 오랜 부상 후 복귀한 윤규진은 다시 큰 부상을 걱정했다고 한다. 시즌 후반기에 들어서는 특히 마정길의 휴식일은 류현진의 등판일 뿐이라는 웃을 수 없는 상황(16경기 중 14경기 등판, 류현진 등판 경기에도 불펜에서 몸품)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러고도 류현진 등판일 빼고는 모조리 졌다는 것이다.
물론 혹사문제는 이 나이대 감독들 중에 이광환 감독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무죄처분을 받기 어려운 일이긴 하다. 투수혹사라는 용어조차 없고 선발과 패전처리만이 존재하던 시절에 셋업맨, 원포인트 릴리프, 1이닝마무리 등의 철저한 분업화와 투구수 관리로 한물 갔다고 평가받던 투수조차 살려내면서 우승을 차지한 1994년 LG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큰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다른 구단에선 투수 분업화 시스템이 정착되었던 2000년대에도 한화에선 예전 시스템, 선발//마무리 겸업이나 중무리, 집중적인 불펜연투가 일어났다는 점이 문제다.
2009년 시즌에는 마정길이 4월 6경기 연속등판+5월 3연투 2번, 4연투 1번뒤에 6월에 점점 등판이 줄어들다가 7월 중순경에 2군 강등. 유일하게 이상군의 손을 타지 않은 양훈[4]은 1년 내내 이틀에 한번 등판하고, 매일 몸을 풀면서 실질적으로 매일 등판한거나 다름없다고 이야기를 들었으며 이 사이사이에 루키 대졸 투수 중 그럭저럭 쓸만하게 던지는 황재규를 심심할때마다 연투를 시키며 혹사. 후반기 들어서는 허유강을 새 혹사의 제물로 삼았다.
이 후유증으로 양훈은 2009 시즌의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다 2011년에 선발 투수로 겨우 반등했고, 2010 시즌 황재규는 1군에 잠시 있다가 2군으로 내려가서 버로우, 2군에서 올스타전에 출전했지만 결국 시즌이 끝난뒤 공익으로 입대하여 복무를 마쳤다. 허유강도 1군에서 털리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2011시즌에서 버로우를 탄 후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쳤다.
4.1 부상 선수 혹사로도 유명
한화에 오고부터는 부상 선수를 급히 복귀시켜 혹사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해졌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구대성과 이영우, 권감기권준헌이다.[5]
구대성의 경우 2007년 시범경기 때 무릎 쪽 인대에 부상이 생겼으나 그 소식을 들은 김인식 감독은 "구대성 없으면 시즌 포기"라는 식의 늬앙스를 풍기는 언플인터뷰를 하며 구대성의 복귀를 재촉…. 그러나 그 해 성급한 복귀로 인해 구대성은 결국 부진했고 이 때 김인식 감독이 남긴 말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쟤만 똑바로 했으면 우리가 1등이야."(…)선수가 어찌되든 지 성적만 챙기니?
결국 2008시즌 전반기 내내 재활에 힘쓰다 시즌 중반에 복귀했으나 혹사가 문제되어서 또 재활군으로 갔다. 2009 시즌에 들어서 5월에 조기 복귀했으나 다시 부진…. 2010 시즌에는 스타팅 멤버에 들어갔으나 부상을 입은 부위의 통증이 더 심해지면서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6]
타자 쪽으로는 이영우가 대표적인 케이스인데, 전역 이후 어깨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감독의 어명으로 수비를 하다가 결국 어깨가 박살나(!)[7] 2009시즌에는 1루에서 홈으로 송구도 못할 정도로 송구력이 저하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손가락 부상마저 있어서 이로 인해 컨택이나 파워가 심각히 줄어들었고. 2010시즌에 들어서는 급격한 파워저하로 인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시 재활을 담당했던 의사가 이영우의 어깨 상태를 보고 "이런 상태로 야구를 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라고 했을 정도. 결국 2010년 9월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5 입영연기 연장으로 인한 문제
잘 쓰지도 않는 젊은 선수들의 입영을 연장시키면서 한화의 암흑기를 제공한 근본적인 원인을 만들었다. 한화 프론트의 무능력한 행정과 함께 충청도 팜의 열악함 등이 겹쳐 쓸 만한 선수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쓰지도 않을 유망주들조차 백업 선수 구성을 위해서 군대도 안 보내고 계속 2군에서 굴려먹었다.
정작 1군에 올려도 노장 선수-자신이 직접 영입추진한 방출 선수들-를 주로 쓰다가 대수비 대주자용으로만 기용했다. 이로 인해서 성장 동력을 잃고 2군에서 헤매던 선수나 뒤늦게 기회를 받아 성장한 지금 한화의 주축 타선은 최진행을 제외하고는 다 군대를 갈 시기를 놓쳐서 앞으로 2~3년 동안 줄줄이 군대를 가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최진행 외에는 윤근영, 전현태 정도가 군 복무를 빨리 마친 케이스.
결국 2010년 한화 이글스는 총 14명 이상의 군 입대 예정자를 갖게 되었고 가뜩이나 없는 전력 속에서 군입대 선수로 인해 안 그래도 약한 전력이 더욱 약화되어 2009년 이후 얇은 뎁스의 문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대화 감독이 자신의 임기 동안 선수들을 군대 보내다가 끝날 거 같다고 말할 정도.
6 빠가 까를 낳는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직후 위의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팬은 인식까라 불리며 분란종자 취급을 당했고 김인식에 대한 어떤 비판이나 지적도 용납되지 않았다.
또 대부분의 '인식빠'들은 WBC 이후에 팬이 됐다거나, 김인식을 따라 유입된 두산팬, 아니면 보수적인 관점을 지닌 팬들이 많았던 탓에 팀의 미래? 그건 먹는건가요? 우걱우걱의 태도로, 절대적인 김인식 믿음과 찬양의 태도를 유지했다.
따라서 비판하는 입장에선 말이 안 통하니 그야말로 복장 터질 노릇. 게다가 2006년에는 위에서 언급된 모든 투수 혹사, 베테랑 쥐어짜기, 군대 안보내기 등등으로 꽤 좋은 성적을 냈으니, 김인식이 곧 진리이자 법이었다.
게다가 팬들 뿐 아니라 언론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는데, 팀이 잘나가건 못 나가건 김인식이 한화 감독으로 있는 동안 언론기사의 90퍼센트가 김인식 찬양이었다.
김인식 감독 시절 내내 기자들의 관심은 그가 무슨 밥을 먹고 무슨 농담을 했는지의 내용이었을 뿐, 한화 팀 자체에 대해선 무관심 그 자체였다. 팀의 어느 선수가 홈런을 쳤건, 부상으로 빠져있던 간에 팬들은 김인식이 점심으로 뭘 먹었다는 따위의 기사 밖에는 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비정상적인 김인식 인기 탓에 김인식은 예상보다 장기간 한화 감독직을 유지했으며 WBC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김인식이 이처럼 오래 한화 감독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 직전에 발생한 뇌경색 문제도 있었기 때문. 그런데 WBC 잭팟 이후 재임기간 말년까지 어떤 비판도 쉽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누적된 문제가 곪아터지면서 마침내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김인식이 위에서 언급된 모든 문제의 원흉이든 아니든 간에, 그의 존재 자체가 이 문제점들을 덮는 쉴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재임 말년부터는 한화팬 대부분에게 이 상황을 만든 가장 큰 주범은 김인식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에 이르러 위와 같은 장문의 비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 정확히는 유승안이 다시 불러다 재기까지 시킨것을 김인식은 그냥 혹사만 시킨 것이다.
- ↑ 이 때 신인만 잘 키웠으면 왕조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가을야구에 붙박이로 자리잡는 강팀이 될 수 있었다.
- ↑ 그 뒤 2004시즌은 부활했다고 볼 수 있지만, 신인때의 혹사로 이닝을 많이 못먹는 박명환을 200이닝 가까이 굴린결과 2007시즌을 끝으로 퇴물로 전락했다.
- ↑ 전지훈련에 가지 못하고 한용덕 코치와 비닐하우스에서 폼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 ↑ 사실 이런 쪽으로는 기아 타이거스가 훨씬 선배다
- ↑ 실제 사례, 은퇴선언 때 본인이 직접 말했다.
- ↑ 실제로 2008시즌인가 2009시즌 초기 對 SK전 때 김성근 감독이 이영우의 어깨가 안 좋은걸 간파하고 SK 타자들에게 좌익수 쪽으로 타구를 보내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