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영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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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金左根
1797~1869
조선 후기의 권신.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추였던 김조순의 3남이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동생이다. (신)안동 김씨의 수장으로서 헌종, 철종 때 (신)안동 김씨 세도의 정점이었다.
자는 경은(景隱), 아호는 하옥(荷屋). 그래서 이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하옥대감'이라고 하면 이 사람을 일컫는다. 시호는 충익(忠翼).
2 권력을 잡기까지
1825년 순조가 김조순의 회갑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6품직에 제수했는데, 자기 실력이 아니라 아버지 빽으로 벼슬을 받은 것을 본인도 쪽팔리게 부끄럽게 여겼는지 순조 시대에는 이렇다할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에는 늦게 급제했는데 이때가 헌종 4년인 1838년,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 뒤부터 폭풍승진을 하게 된다. 벼슬길을 시작한지 4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부교리, 규장각 직각, 이조 참의, 이조 참판 등을 거친 끝에 오늘날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공조판서와 이조판서까지 오르게 된다.
이 무렵은 김좌근의 누나인 순원왕후가 어린 헌종을 대신에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였는데, 순원왕후는 오빠인 김유근이나 사촌 김홍근 등을 대표로 하는 친정 형제들의 자문에 의지하여 수렴청정을 펼쳤고 김좌근 역시 순원왕후의 자문역을 맡아서 중용된 것이다. 그러다가 형 김유근은 헌종 재위 중에 중풍에 걸려 2년 후 죽을 때까지 자리보전을 하게 되었고, 김유근 대신 사촌형인 김홍근이 뒤를 이어 실세로 자리잡나 싶더니 김유근이 1840년에 죽고, 김홍근도 2년 뒤인 1842년에 죽게 되면서 그 뒤를 이어 (신)안동 김씨 세력의 리더가 되었다. 젊은 시절이야 어쨌든 꽤 운이 좋은 남자.
3 막장으로 치닫는 정치
아버지인 김조순이 전면에서는 겸손하게 처신했으면서도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국을 움직였다면, 형 김유근도 그랬지만 김좌근 역시 전면에 나서서 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반대파들을 숙청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그러다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고 헌종이 장성하면서 외척들인 (신)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세력이 아닌 사람들을 5군영 대장에서 배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요직 인사에도 안김이나 풍조 세력을 배제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김흥근을 탄핵하는 신하에게 힘을 실어주고, (신)안동 김씨에게 쫓겨난 이들을 재등용하는 등 (신)안동 김씨를 제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위기를 맞는 듯 했으나 헌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헌종이 후사 없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순원왕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그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철종비 역시 (신)안동 김씨에서 나오게 되면서[1] 가문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영의정을 세 번이나 역임하며 권력을 독식했으며, 조정의 요직까지 (신)안동 김씨 일문들이 거의 독식하게 되면서 조선의 정치판은 완전히 막장이 되고 만다.
이때가 그의 전성기로 이 무렵 김좌근의 집은 눈도장 찍으려고 벼슬 청탁을 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매관매직까지 공공연히 행해지곤 했다. 그의 세도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각지에서 민란이 많이 일어났으나 그는 이런 민생에는 그리 관심이 없고 권력 유지에만 집착했다. 또한 삼정의 문란을 개정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인 '삼정이정청'의 총재관이 되기도 했으나 사실 삼정의 문란 최대 수혜자가 바로 자신의 가문[2]이었던만큼 김좌근이나 그 세력이 이를 개혁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야사에 의하면 김좌근에게는 나주 출신의 기생 첩인 양씨가 있었다. 워낙 김좌근이 이 첩을 총애했던 나머지 당시 벼슬을 원한 사람들은 김좌근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양씨에게 청탁하기도 했고, 양씨의 마음에 들면 그녀가 김좌근에게 잘 말해줘서 벼슬을 딸 확률이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나주 출신 정승'이라는 의미의 나합(羅閤)이었다. 당시 세도가나 정승들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성이나 사는 곳에 ~합(閤)이라는 호칭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황희가 정승이면 '황합', 장동에 사는 정승은 '장합' 이 장합이 아니다 이런 식.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칭한 태합이 이런 호칭이다.
그리고 이 나합은 배짱도 대단했는지 김좌근이 나합에게 "세상 사람들이 왜 그대를 나합이라 부르는지 아는가?"라고 묻자 나합은 "나주 조개(蛤, 조개 합)라는 뜻이지요"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무슨 의미인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애들은 가라 야사 중에는 훗날 권력을 장악한 흥선군이 괘씸죄로 양씨에게 "감히 기생 출신인 주제에 정승이나 쓰는 나합 호칭을 사용해?"라고 꾸짖자 저 대답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 말년과 후일담
70이 다되어서 다음 세대인 김병학, 김병국, 김병기 등이 새로운 권력의 핵심으로 슬슬 떠오르는 상황에서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게 된다. 대원군은 그와 안동 김씨의 절대권력은 뺏었지만 명예는 뺏지 않았으니 김좌근은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에도 철종실록의 총재관을 맡았고 말년에는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삼군부영사, 영돈녕부사를 맡았으며 영돈녕부사인 상태에서 죽었다. 심지어 신하의 최고의 영예인 안석과 궤장을 하사받기도 했다. 말년에 명예직만 맡으면서 권세는 많이 꺾이기는 했지만 조정 원로로 대접 받을 건 다 받은 셈. 뒷세대인 김병학, 김병기, 김병국도 조정의 요직을 맡아 대원군의 개혁을 뒷받침했고 대원군 역시 김좌근을 나쁘지 않게 대접했으며, 김좌근이 죽자 그 묘비명도 직접 써 주기도 했다. 결국 나라는 나라대로 망쳐놓고 누릴 것은 다 누리고 간 인물. 정말 평생에 걸쳐 운이 참 좋은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행장이나 묘지명 등에는 '공명정대했다', '도량이 넓었다' 등의 찬평을 받고 있고 고종실록의 김좌근 졸기에서 고종은 교지[3]에서 '바른 몸가짐과 공평한 지조를 갖추었다'고 평했는데 이런 거야 원래 립서비스로 해 주는 표현이고, 조선에는 결과적으로 악영향만 끼쳤다. 이런 립서비스들과는 달리 정작 누나인 순원왕후는 김좌근에 대해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흠이 있다고 꼬집은 바 있다. 자기 누나에게도 남 말 안듣는다고 까인 사람을 공명정대했다고 찬평해 준 것을 보면 위화감이 심하다. 저 립서비스를 해 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대원군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 하지만 대원군의 성격이나 행적으로 미뤄 보면 오히려 반어법을 이용한 풍자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묘는 경기도 이천에 있었다. 그런데 김좌근의 묘에도 사연이 있는데, 이천에 김좌근 고택이라는 유적이 있다. 이 고택 뒷산이 바로 (신)안동 김씨 일문의 선산으로 양자인 김병기도 죽은 뒤 김좌근의 묘 근처에 묻혔었다. 그런데 그 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이장이 되었는지 원래 묘가 있던 자리에는 묘가 없어지고 묘에 세워져 있던 묘비나 석물만이 김좌근 고택 마당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 후 2009년에 김좌근 고택과 그 주변 땅들을 (신)안동 김씨 문중이 서울대학교에 기증을 했고, 서울대학교에 의해 (신)안동 김씨 일문의 묘역 복원을 마쳐서 김좌근 묘는 김좌근 고택 뒷산에 있다. 그래서 오늘날 김좌근 고택은 서울대학교가 관리하고 있고, 김좌근 묘역에서 발견된 석물들은 서울대학교 박물관 주변에 세워져 있다.
5 일화
야사나 사극 등에서는 주로 상갓집 개 시절[4]의 대원군에게 굴욕을 주다가 대원군이 집권하자 데꿀멍하고 복수를 당하는 인물로 나온다.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김좌근이 교자를 타고 가다가 흥선군이 술값을 달라고 구걸을 하자 엽전을 땅바닥에 던져주고 제 갈 길을 갔다는 일화가 있다. 이 때 흥선군 뿐만 아니라 김좌근 주변에 있던 종자들까지 그 엽전을 주우려고 개싸움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그리고 흥선군이 김좌근을 찾아갔을 때 이러한 일화가 있다. 김좌근이 애첩인 나합 양씨와 함께 있었는데, 본래 그녀가 기생인지라 당시 양반들이 아무리 청탁을 하더라도 나합에게는 절을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흥선군은 스스럼없이 나합에게 큰절을 하며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존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합도 흥선군을 좋게 보았고 김좌근도 조카인 김병국, 김문근에게 흥선군을 후히 대하도록 했고 이들도 시키는대로 했는데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만이 흥선군을 경솔한 사람으로 보고 흥선군을 예의를 갖추어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합 양씨의 경우 극도의 사치스러운 행적을 묘사한 야사들이 몇 개 존재한다. 강의 물고기들에게 적선을 한다며 쌀밥을 몇 가마니나 해서 강에 뿌린다거나 하는 식. 그런데 특이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고향으로 전해진 나주에서는 평가가 썩 나쁘지는 않다. 야사에 따르면 나주에 기근이 들자 양씨가 김좌근에게 요청해서 구휼미를 풀어 나주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 그 때문인지 나주에는 유일하게 김좌근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6 현대 매체에서의 김좌근
명성황후에서는 송재호가 배역을 맡았는데, 대원군이 집권한 뒤라 노쇠한 대신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집권 전 대원군에게 엽전을 땅바닥에 던져주는 일화도 재연하고 있으나 대원군 집권 후에는 오히려 대원군의 하인들에게 자신의 하인이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집에서 술자리를 같이 하다가 별안간 대원군이 음식을 뱉으며 "너님들 나 독살하려 함?"이라고 묻자 아들인 김병기가 대원군이 뱉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주워먹는 일화도 나온다. 전체적으로 대원군에게 몸을 숙이면서 늙어빠진 노인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가문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노회한 정치인으로 그려진다.
MBC의 드라마 '닥터 진'에 등장하는 조선말기 권신 김병희(김응수 분)의 모델이 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작중의 김병희는 이 사람보다 더 포스가 강력하다. 대원군이 집권하자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과 달리 여기서는 대원군 집권 후에도 매우 건재했었다. 최종보스 보정에 배우 보정도 있고 물론 김좌근은 대원군 집권 후에도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지만, 김병희는 대원군과 대립 끝에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 큰 차이.
또 KBS 2TV의 조선 총잡이에서 나오는 김좌영이 김좌근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좌영과 김좌근은 안동 김씨의 거두로서 세도 정치의 중심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김좌근과 큰 차이가 있다면 김좌영 역시 김병희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점.
네이버 웹툰 한섬세대에서는 흥선군에게 경종을 울린다며 명복을 죽일 것을 지시하는 노인이 잠깐 나오는데, 얼굴이 완전히 나오지는 않는다. 작중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명복이가 납치되기 전에 '하옥대감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난다'는 식의 대사를 흥선군에게 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정황상 이 노인이 김좌근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