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역사

< 영국

 영국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브리튼 제도의 역사를 포함한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역사
History of the United Kingdom
Foras Feasa ar Éirinn
고대중세 ~ 근세근대 ~ 현대
아일랜드켈트족히베르니아아일랜드 영지아일랜드 왕국그레이트
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아일랜드 자유국아일랜드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칼레도니아알바 왕국스코틀랜드 왕국그레이트
브리튼
왕국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
웨일스로만 브리튼귀네드 왕국웨일스 공국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 연방잉글랜드 왕국
잉글랜드칠왕국
잉글랜드 왕조동앵글리아, 머시, 노섬브리아, 웨식스, 에식스, 켄트, 서식스웨식스 왕조덴마크 왕조웨식스 왕조노르만 왕조앙주 왕조플랜태저넷 왕조랭커스터 왕조요크 왕조튜더 왕조엘리자베스 시대스튜어트 왕조스튜어트 왕조하노버 왕조작센윈저 왕조
조지안빅토리안에드워디안
대영제국

1 개요

참고하면 매우 도움이 된다.
우리는 대륙과 이웃하기는 하지만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볼링브룩 경-

이 한마디로 영국의 역사는 모두 표현이 된다. 위 말대로 영국은 유럽 대륙에 속하기는 하지만 55km의 짧은 거리를 두고 섬나라로 남아있다. 영국이 섬나라였기에 다른 나라에게 본토를 지킬수 있었고[1] 유럽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어 바다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섬이기는 하지만 유럽 대륙과 거의 붙어있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2]. 또한 영국은 명예 혁명으로 처음 의회를 탄생시키고, 산업 혁명을 일으켜 세계 역사를 뒤집어 놓는 등 대표적인 강대국으로서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영국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는 세계사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없을 정도이다.

2 선사 시대의 영국

크로마뇽인들이 4만~ 3만 년 전 부터 살고 있었으나, 이들은 빙하기 때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해빙기 이후 다양한 이주민들이 브리튼 섬으로 들어와 저마다의 문화를 이루어 나가게 되었는데, 켈트족의 흔적은 기원 전 6세기 때 부터 나타났다. 그들은 돼지고기와 맥주를 먹고 드루이디즘 의식이 발달했으며 켈트족 특유의 토조성채를 쌓는 등 기술이 야만족이라 무시하지 못할만큼 발전해 있었다. 또한, 그들은 명목 상의 왕들[3] 도 존재했고, 사람에 따라 계급도 나뉘며 나름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축하여 살아갔다. 다만 아직은 통일된 왕조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3 로마 제국 통치기

켈트족이 살고 있던 브리튼은 수 백년 동안 로마의 공격을 받아 점령당하게 된다. 브리튼이 로마의 침공을 받게 되는 첫 번째 기록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전쟁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도중, 브리튼의 켈트 족이 갈리아인들을 도와주었다는 핑계로 브리튼을 침공했다. 당시 카이사르는 무려 2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침공해, 명목적인 복속약속과 인질을 받고 떠난다. 이후, 약속대로 공물을 바치지 않자 한 번 더 침공하게 되지만 역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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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군대가 켄트 지역을 공격하는 순간을 묘사한 그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 이후, 1세기 동안이나 브리튼은 로마 제국의 눈 밖이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이르러, 여러 귀족들이 새로운 땅을 지배하기를 갈망하게 되면서 브리튼은 또 다시 공격받게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무려 5만의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여, 잉글랜드의 비옥한 평원을 정복하게 되었다.[5] 그 이후로, 도미티아누스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이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즈를 정복하며, 잉글랜드의 켈트 인들은 로마 인들에게 완전히 복속당하게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외의 여러 로마 황제들의 원정으로 로마 제국에게 점령당해 식민지가 된 브리튼은 300년 가까운 통치[6]를 받았으며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때는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 까지 공격 받는다.[7] 이후, 하드리아누스때, 스코틀랜드와의 접경에 장벽을 세우며 로마의 브리튼 원정은 끝이 나게 되었다. 브리튼 정복이 완전히 끝난 후, 브리튼은 로만 브리튼이라는 이름으로 통치되는데, 기민성과 적응력이 빨랐던 켈트인들이 로마의 문화를 신속히 받아들이며 로만-브리튼 문화가 창조되었다. 학자들은 로마인이 브리튼을 점령해 로만-브리튼 문화를 이루어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영국 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로만-브리튼 문화는 영국의 지명[8]이나 영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게 300년 동안 브리튼은 로마에게 점령당해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기술이나 문화면에서 이전보다 훨씬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이 훈족의 침략과 내전으로 혼란해지면서 410년에 로마 군단이 철수하게 된다.

4 중세 시대의 브리튼 (5세기 ~ 15세기)

잉글랜드 고대 7왕국

동앵글리아

머시아

노섬브리아

웨식스

에식스

켄트

서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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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화된 원주민 켈트족 브리톤 민족과 배타고 이주한 외부 침략자인 게르만족 앵글로-색슨 민족이 충돌하면서 7세기 경까지 전쟁이 계속되다가 앵글로-색슨의 승리로 끝나면서 여러 개의 앵글로-색슨 국가들이 건설되고 브리튼 섬에 잔존한 브리톤 민족은 웨일즈, 콘월 지방으로 대피하고 대륙으로 건너간 브리톤 민족은 브르타뉴 공국을 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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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년, 데인족웨식스의 영토

8-9세기에 이르게 되면 바이킹의 침략에 브리튼 섬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고 앵글로-색슨이 브리톤의 전철을 밟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으나 웨식스 국왕 알프레드 대왕에 의해 앵글로-색슨은 간신히 멸족을 모면했다. 그 후 10세기 초의 애설스탠은 바이킹을 몰아내고 소왕국들을 통일하여 최초로 통일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고, 에드거 1세 왕에 이르러서는 통일이 완전히 확고해졌다. 이후 11세기 덴마크 왕자 크누트 대왕이 영국을 잠시 정복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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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7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지배한 영토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에 의해 정복되었고, 이에 잉글랜드 왕국을 건설한 앵글로-색슨 왕조와 영주들은 완전히 몰락하고 정복 왕조와 이들을 따라 온 노르만/프랑스 영주들이 빈 자리를 차지한다.

공작 아래에 백작이 있고 백작 아래에 자작이 있었던 대륙과는 달리 브리튼 섬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러 개의 앵글로-색슨 왕국이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대치하고 있었고, 통일 이후에도 비슷비슷한 힘을 가진 영주들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영주들을 모두 통제하기가 어려웠던데다가,[10] 더군다나 노르만 정복 왕조 이후에는 프랑스와 영국 양쪽에 넓은 영토를 가진 강력한 노르만 영주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다른 나라에 비해 신권(臣權)이 강해졌는데 이라고 여기서 물러설 수 없는 법이었다.

5 16세기 ~ 17세기

영국은 17세기 명예 혁명에 이를 때까지 왕권과 신권의 다툼으로 얼룩진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만들어냈으며, 이후 최종적으로 신권이 승리했다.

참고로 이 시기에 벌어진 왕권과 신권간의 다툼으로 인해 영국 정치에는 괴이한 전통이 생겨났다. 우선 영국 국왕은 하원에 출입할 수 없다. 이는 찰스 1세가 하원에 들어가서 의원들을 체포하려 했던 사건 이후에 생겨났다. 그리고 영국 국왕이 연설을 하기 위해 의회에 출석할 때는 하원의원 한 명이 왕궁에 억류당한다. 신하들이 왕의 목도 따버린 나라이다 보니 국왕의 무사귀환을 담보하기 위한 인질이다.

어쨌든 신권의 승리로 권리 장전을 발표하여 왕권을 크게 제약하면서 민주주의입헌군주제의 시초를 만들어냈다.

6 그레이트브리튼 왕국[11]: 1707 ~ 1801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Kingdom of Great Britain
국기
1707년 ~ 1801년
표어Dieu et mon droit
국가God Save the King
위치브리튼 섬
수도런던
정치체제입헌군주제
국가원수
언어영어
민족앵글로색슨, 켈트
종교성공회
주요사건1707년 연합법
1800년 아일랜드 연합법
통화파운드 스털링
성립 이전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이후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1707년에는 연합법으로 잉글랜드 왕국이 스코틀랜드 왕국과 연합왕국을 이루어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이시기 조지라는 왕호의 국왕들이 연달아 즉위해서 조지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업 혁명의 시동이 걸린 시대이며 7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들을 점령해 본격적인 대영제국의 서막이 오르는 시기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발발한 미국 독립전쟁으로 인해 북미의 식민지들이 독립해 나가기도 했다.

7 세계대전 이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12]: 1801년 ~ 1914년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왕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801년 ~ 1922년
표어Dieu et mon droit
국가God Save the Queen
위치브리튼 제도
수도런던
정치체제입헌군주제
국가원수국왕
언어영어
민족앵글로색슨, 켈트
종교성공회
주요사건1800년 아일랜드 연합법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 독립
통화파운드 스털링
성립 이전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아일랜드 왕국
이후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19세기 들어서는 섬나라의 특성을 살려 활약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현대로 오는 과정에서 산업 혁명을 이뤄내고 막강한 해군력과 식민지를 통해 얻은 풍부한 자원으로 전 세계를 종횡무진 설치고 다녔다.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이때 미국은 영국의 대표적인 식민지였고 또한 20세기 이전 영국에서 싸워 독립한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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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대영제국 최대 강역. 역대 국가 영토 1위(3670만 제곱킬로미터)[13]

19세기 영국은 정치, 경제적으로도 크게 부흥하였으며, 이에 못지 않게 문화적 성취 역시 세계 최선진에 있었던 나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유럽 본토의 주류 문화가 귀족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과 달리 영국의 문화는 산업 혁명에 의해 시민 계급이 주체가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귀족들이 즐겨왔던 것과 차별화된 새로운 장르, 특히 소설 탄생의 배경이 되었다. 덧붙여 이 시기를 대영 제국이라고 칭하곤 하지만 영국 국왕은 한 번도 황제를 칭해본 적이 없다.[14] 그럼에도 대영 제국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제국주의 시절의 식민지 제국(colonial empire)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며,[15] 무굴 제국의 멸망 이후에는 인도의 황제를 겸해 영국 국왕의 칭호중 하나에 드디어 황제가 생기게 되었다.[16] 또한,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나라. 몽골 제국보다 넓었다. 오죽하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을까.[17] 하지만 런던 항목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본토만 놓고 봤을 때 '해가 뜨지 않는 나라'라고 불러야 맞을 듯.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은 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릴까?" "신은 해가 진 이후의 영국인들이 하는 짓을 못 믿으니까"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이 당시의 대영제국이 무섭고 위대했던 게 또 있는데, 얘네들은 식민지와는 별도로, 심지어 자국 직할 속령으로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만들었는데 이는 식민지처럼 수탈삥뜯기목적으로 점령한 게 아니고 자국 직할 속령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18]

또한 영국은 일본과 공통점이 있는데, 적의 외침으로부터 수비하기가 유리하고 맨 구석에 있는 위치와 지형이란 거다. 이것도 또한 영국이 전성기 시절 제1의 강대국이 되는데도 영향이 끼쳤으리라는 시각이 있다.[19][20]

8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1914년 ~ 1945년

제국의 쇠망을 보면 1차대전 이후로 제국에 금이 슬슬 가기 시작했다. 전후 구 오스만 제국과 독일의 식민지 그리고 중동 지역의 영토를 추가로 얻으면서 제국의 영토와 인구는 지구 전체의 1/4을 차지해 사상 최대로 넓어졌다. 이 당시 터키조차 사실상 점령했었다. 흠좀무.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엄청난 속도로 경제성장을 한 미국과 독일과 비교해 상대적인 경제적 규모는 점점 작아져가기 시작했고 영국이 자랑하던 여러 산업들의 기술간 격차도 결국 저 두 나라에 추월당하였다. 그나마 대공황은 식민지들과의 무역으로 잘 버텨냈긴 했다. 강제구입 하세요 다만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식민지들은 점차 2등 국민 대우에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모든 인종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기도 했고 젊은 시절의 간디도 그걸 믿었지만 현실은 '열등한 유색인종들에게는 아직, 어쩌면 영원히 스스로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는 원칙이 적용되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학살, 이스라엘 문제 같은 인종주의 문제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키플링의 시 백인의 의무를 기억하는가?

결정타는 2차대전으로 미국에서 엄청난 돈을 꿔서 전쟁을 치룬 탓에 빚쟁이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이 빚을 모두 다 갚은 것은 무려 종전 후 61년이 흐른 2006년에 이르러서다. 더군다나 신흥 패권국으로 미국소련이 국제 사회에 등장했고[21]

9 세계대전냉전 그리고 그 이후: 1945년 ~ 현대

종전 이후 처칠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노동당 정부는 식민제국의 시절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여, 제국의 보석이라 불리던 인도의 독립을 약속하였던 1948년보다 빠르게 승인하였다. 각 식민지에서 구질구질하게 알제리 전쟁,베트남 전쟁을 벌이면서 추태를 벌이던 프랑스에 비하면 대부분의 식민지에서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나간 편. 물론 학살이나 충돌이 없던건 아니고. 1951년에 와서는 보수당조차 후에 '변화의 바람'이라 불리게 되는 정책방향을 수용하기에 이르렀으며 최대한 평화롭게 식민지의 권력을 현지 민주정부로 이향하길 소망했다. 이 정책에 아프리카인들은 미개해 자치할 능력이 없다 하며 남아프리카 도미니언은 크게 반발했고 결국 1961년 영국연방을 탈퇴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 본토 외 제국의 신민은 1945년 종전 이후 7억에서 1965년 500만명으로 줄어들게 되었으며 남은 신민 중 60%는 홍콩인들이었다.

아무튼 내부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는 대영 제국에 국제사회에서 결정타가 날아왔으니, 중동전쟁으로 사실상 영국의 위장 식민지였던 이집트를 독립시킨 나세르가 이집트에서 영국 소유였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프랑스, 이스라엘과 합공을 펼쳤으나 미국과 소련의 입김에 발을 뺄 수밖에 없었다. 이미 2차대전 이후로 미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 vs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국가)의 대결이었으나 그래도 미국보다 약간 아래로 취급해주기도 했고, 자유 진영 2위로 생각되었던 영국이 전세계적으로 미국과 소련에게 대들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버린 국가로 낙인찍혔다. 핵이 없으니 이래저래 19세기의 영국처럼 세계 곳곳에 군사력을 투입하여 영국의 입맛대로 끌고가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 드러난 사건.

다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외적 힘은 미국과 소련에 밀려 약해졌으나, 내적으론 노동당 정부가 앞세운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로 널리 알려진 복지정책을 펼쳐 실제 영국민들의 삶의 질은 세계 최상위였다. 실제로 1948년부터 전 국민을 상대로 무상의료가 시작되었다.[22] 영국 경제는 당시 성장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많이 느리긴 했지만 어쨌든 큰 경제적 위기는 겪지 않았다. 그냥 연평균 성장율 2.3%로 그럭저럭 굴러간 셈. 다만 이후 고복지 저효율 영국의 경제 구조는 영국병을 불러오게 된다.. 그 전에는 경쟁력이 없던 상품도 식민지에 강매하면 되었지만 더이상 그게 불가능했으며 스털링 지역을 유지하고자 파운드화를 지나치게 고평가하여 수출 자체의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석유잠가라 마법으로 촉발된 국제 석유위기와 정부의 경제적 삽질 정책으로 인해 1970년대 후반부터 막장으로 가더니 결국 IMF행으로 골인.

1970년대 오면서 대영 제국은 아예 본격적으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일단 경제적으로도 망해가고 있었다는 팩트는 잊으면 섭하고 먼저 대부분의 식민지들이 독립해나간 것도 있지만,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하면서 대영 제국 국가들 사이에 있던 특별한 관계를 깨부수기로 결정했기 때문. 그 이전엔 영국과 영국에 법적[23]으로 종속된 국가들인 캐나다,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등의 국가와의 무역이나 인적 자원 이동에는 큰 제한이 없었다. 이 국가들은 프랑스의 주요 수출품과 겹치는 농산물이나 축산제품들을 영국에 주로 판매했는데, 일단 규모가 다르고 관세도 없으니 가격이 상대적으로 프랑스산에 비해 저렴했다. 자국의 농업이 파괴되는걸 바라지 않던 프랑스는 위와 같은 이유로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는걸 반대했고 영국은 구 대영 제국 국가들과 유럽,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후자를 택하기로 결정. 뒤질랜드. 이제 너네들 제품에 세금 물릴거고 영국 올려면 비자 받아서 오셈 결국 1973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 영연방 소속의 국가들은 대양을 건너야 있는 영국 경제에 상당수 의존했기에 후폭풍은 엄청났다. 일단 이 나라들의 경제도 단기적으로 영국과 같이 시궁창으로 가기 시작했고(...).

결국 경제도 망하고 거기다가 배신당해서 열받은 캐나다,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는 영국과 법적 종속 관계를 청산하기로 결정, 결국 캐나다는 1982년, 호주와 뉴질랜드는 1986년 법 제정을 통해 모국과의 법적 종속 관계를 청산해 윈저 왕조 치하의 (영국과 동등한) 입헌군주제 주권국들이 되었다.

대영 제국이 그나마 마지막 체면 치레한 것은 1982년의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규모도 그렇게 크지 않았고 상대가 망해가던 아르헨티나인지라(...) 대영 제국의 위세를 다시 드높이기엔 무리였다. 이래저래 대영 제국의 위세가 올라갔다기 보다는 대처의 정치 인생만 늘어나게 해준 전쟁. 대처 시기에 대해 언급하자면. 과감하게 저효율 산업과 고복지를 포기하고 영국병에 신음하던 영국을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치료해서. 몰락해가는 영국을 다시 회생시켰다.

비슷한 시기, 영국은 식민지들의 주민이 영국 시민권을 받을 수 없게 법을 제정하고 난 뒤, 중국의 덩샤오핑과 홍콩 반환 교섭을 진행한다. 1982년부터 시작된 교섭은 1984년 홍콩 반환과 관련된 중영공동성명으로 마무리되고, 중영공동성명을 통해 덩샤오핑이 구상한 일국양제 원칙이 관철되어 사회주의 체제를 홍콩에 적용시키지 않고, 최소 50년 간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내용의 반환협정이 체결된다. 그리고 홍콩이라는 영국의 마지막 식민지는 이렇게 반환되게 되었다. 처음에 홍콩인들은 미국이나 캐나다 등으로 이민을 가기도 하는 등 중국에 대한 공포가 있었으나 막상 반환 후 중영공동성명대로 사회주의 체제 자체가 적용되지 않고 국민의 기본권도 문제없이 보장되자 되돌아왔다. 홍콩과 비슷한 케이스였던, 포르투갈의 해외영토였던 마카오의 주민들은 포르투갈 국적을 받아서 현재 영국에서 거주하거나 일하는 데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는데, 나무위키에서는 이를 아이러니라고 햇다만 실상은 영국과 포르투갈의 차이 그리고 홍콩과 마카오의 인구와 국제지위 차이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이미 지리멸렬한 2류 서유럽 국가로 전락해 굳이 마카오인들이 이민 올 이유 따위는 없었고 최근에 남유럽 경제위기땜에 반대로 마카오로 향하는 포르투갈인이 넘쳐 흐른다. 반면 영국은 아직도 최선진국이며 미국과 함께 세계를 이끄는 역할을 하는 나라이다. 그리고 홍콩은 700만이라는(중국 본토 이주민 포함) 엄청난 머릿수를 안고 있으나 마카오는 불과 50만 명이라는 적은 인구만 지니고 있다.

대영 제국이 아편 전쟁의 결과로 청나라로부터 홍콩을 할양받은지 99년이 지난 1997년, 대영 제국의 남은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았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다. 반환식은 영국의 통치력이 미치는 마지막 날인 6월 30일날 열렸으며, 찰스 왕세자와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토니 블레어를 비롯한 영국의 최고위 인사들이 홍콩 반환식에 참여했다. 6월 30일, 저녁 11시 58분에 조용히 영국의 국가인 God Save the Queen이 연주되는 사이에 유니언 플래그가 홍콩에서 내려지기 시작했으며, 7월 1일 0시, 유니언 플래그가 완전히 내려진 순간에 오성홍기가 중국의 국가와 함께 울려퍼지며 홍콩에 게양되었다. 이로서 홍콩은 공식적으로 중국에 반환되었다. 이는 동시에 19세기부터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대영 제국의 최후를, 그리고 21세기의 바로 앞에서 서구의 구 제국주의는 끝났고 동양 대 서양의 새로운 세기가 시작됨을 알리는 대사건이었다.

10 참고

  1. 영국은 노르만 침공 이후, 백년 전쟁과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때 본토를 공격 받지 않았고 2차세계대전에서도 영국 본토 항공전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영국 본토가 공격받지는 않았다.
  2. 게르만 문화와 로망스 문화의 영향으로 근본적인 영어의 탄생이 이루어졌고, 프랑스에서 들어온 예의 중시 문화를 토대로 레이디 퍼스트매너같은 개념이 생겨났다.(그 외에도 있다면 추가)
  3. 왕이란 칭호만 있지, 사실은 부족장에 가까웠다.
  4. 애초에 점령이 목적이 아니라 로마 시민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 미지의 땅을 원정한거다. 더 상세하게 알고 싶다면 갈리아 전쟁 문서를 참고,
  5. 부디카의 반란을 제외하면 켈트인들이 별 저항없이 항복했기에, 로마가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6. 카이사르가 브리튼을 정복하며, 300년동안 로마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일명 팍스 로마나(Pax Romana).
  7.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원정은 오랫동안 끝나지 않다가, 안토니누스의 포기로 끝나게 된다.
  8. 예를 들어, 영국의 지명 중 맨체스터나 윈체스터 같이 뒤에 체스터가 붙는 도시는 과거 로마군의 야영지나 성채였던 곳으로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9. 그는 후에 덴마크 왕위도 계승하게 된다.
  10. 프랑스와 같이 친족들을 영주들의 우두머리인 공작 등으로 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11. [1]
  12. [2]
  13. 아이러니한게 대영제국시절 당시 러시아 제국은 북미식민지(알래스카),중앙아시아 동유럽 전체 북만주 등의 영토를 점유하며 어마어마한 영토를 자랑했지만 대영제국에는 영토가 밀렸었다.현제는 제국주의의 몰락과함께 식민지들이 다 독립한 식민제국에 비해 여전히 러시아는 세계 최고의 영토를 보유중이다.
  14. 유럽에서의 황제(Emperor)란 로마의 지배자라는 의미와 통하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과 그 정통성을 계승한(혹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라틴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니케아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과, 가톨릭의 권위로 서로마를 계승한 신성 로마 제국 등이 이에 해당한다.
  15. 프랑스의 경우, 본국의 정치 형태가 왕국이건 공화국이건 제국이건 상관없이 제국주의 시기를 통틀어서 프랑스(식민)제국이라 불린다는 점을 알면 이해하기 쉽다.
  16. 영국은 이미 19세기부터 인도를 거의 완전히 통치하고 있었지만, 세포이 항쟁을 거쳐 1872년 빅토리아가 인도 여제 칭호를 사용하기 전에는 이미 수명이 다한 무굴 제국의 황제가 명목상 인도의 황제였고,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7. 뉴질랜드에서 저녁이면 본토인 영국에선 낮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저 두 영토간 시간차는 12시간. 즉, 대영 제국에서 완벽히 해가 지는 것을 보는건 일반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것.
  18. 미국도 자국 직할 속령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지만 당시 영국이 상황이 어려웠던 적도 있었고 미국은 이후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다르게 영국 본국과 사사건건 마찰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미국한테 세금이랑 관세를 매기기 시작했고 이에 분노한 미국은 영국을 상대로 미국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한 150년 후에는 천조국이 된다.
  19. 실제로 일본도 이런 위치와 지형으로 인해 혜택을 봤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확실히 보면 좋은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20. 러시아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러시아의 경우는 유럽기준으로 보든 아시아 기준으로 보든 맨구석의 위치이나 몽골과는 기후가 비슷하고 가까워서 칭기즈 칸이 몽골의 대전성기를 열었을 때 몽골에게 1세기 정도 지배당했던 전적이 있다.그렇게 따지면 영국도 로마한테 지배당했던 전적은 있다 지형으로 본다면 매우넓은평원지대도 있지만 죄다 매우 울창한 수림지역이고 (대초원지대는 후대 제국주의 시절에 유목민에게 획득한 지역이다.) 엄청나게 추운 날씨와 라스푸티차, 광대한 영토가 있다는 면에서는 방어하기 매우 유리한 면이 있지만 . 또한 러시아의 특성상 유럽이든 아시아든 중심지와 영국이나 일본보다 더 떨어져 있는 위치인지라 중심지의 문화를 자기식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던 영국이나 일본보다도 타국과의 교역 양도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문화를 자기식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이 강했다.(하지만 이것도 비잔틴제국 멸망 이후에나이지 비잔틴 제국이 살아있을땐 콘스탄티노플-드네프르로 직통해서 문명의 발상지와 이어져 있었다.)
  21. 미국은 이미 1차대전 이후로 기술적으로 보자면 세계에서 따라올 자 없는 초강대국이었으나, 아직까진 유럽 강국들에게 밀려 지금과 같은 독보적 위치를 가질 순 없었다. 게다가 미국 스스로 고립주의 원칙을 갖고 있었고.
  22. 그리고 그 복지 비용을 대주느라 식민지가 희생당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
  23. 영국의 의회에서 저 국가들의 법을 제정하거나 그 국가들의 의회에서 만든 법안을 부결시키는 것도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