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브리튼 Provincia Britannia | |||||
로마의 속주 | |||||
로마 제국 전성기 시절 로만 브리튼의 위치 | |||||
AD.43년 ~ 410년 | |||||
위치 |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남부 | ||||
중심 도시 | 런던 콜체스터[1] | ||||
국가원수 | 로마 황제 | ||||
언어 | 라틴어 켈트어 | ||||
민족 | 라틴족 켈트족 | ||||
멸망 이후 | 칠왕국 | ||||
1 개요
로만 브리튼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던 지금의 잉글랜드, 웨일즈 지역을 일컫는다. 당시로서는 로마 제국의 최북단에 위치했고, 총 4개의 속주가 존재했다.
로마인의 첫 브리튼 침공은 기원전 55년 즈음, 갈리아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갈리아 원정으로 지금의 벨기에 지역을 손에 넣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리튼의 켈트족이 갈리아 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는 핑계로 브리튼을 침공하게 되었다. B.C 54년의 침공으로 가장 강력한 왕이었던 카시벨라우누스를 굴복시켰지만 갈리아의 반란으로 카이사르는 다시 철수한다. 그러나,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정치적 이유로 브리튼을 다시 침공하여 카라타쿠스를 굴복시키고 로마로 개선했다. 이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재정복으로 웨일즈 지역까지 정복당했다. 또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에 이르러서는 칼레도니아의 잦은 침입을 막기 위한 두 겹의 방벽을 세우기까지에 이르렀다. 이후, 약 400년 가량을 로마 제국과 함께 하다가 두 겹의 방벽의 붕괴와 로마 제국의 분열로 인해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 로마 제국의 브리튼 정복은 지금의 영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지금 존재하는 영미권의 많은 성씨와 지명은 로마 제국의 영향이다. 이 문화를 로마노-브리튼 문화라고 부른다. 다만 영어는 라틴어 계통 언어가 아닌데, 고대 영어를 사용하던 게르만족들은 5세기 들어서야 브리튼 섬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현대 영어에 존재하는 라틴어 계통 어휘는 근세에 학술적인 목적으로 들여온 어휘가 많다.
2 역사
2.1 로마 제국의 침공
기록으로 남아있는 로마 제국의 첫 브리튼 침공은 카이사르의 침공이다. 당시 브리튼은 소수의 켈트족 이외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기에 로마인들에게 미지의 세계라는 이미지로 보였다. 이 때, 브리튼의 켈트족이 로마 제국과 전쟁중이었던 갈리아 인들의 편을 들면서 카이사르는 이 때를 기회 삼아 브리튼을 정복하고, 미지의 세계를 정복했다는 점에서 명성을 높이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맨 처음의 카이사르가 세웠던 계획은 브리튼의 지방 세력들을 분열시킨 후, 차례차례 정복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자료 조사를 위해 브리튼과 무역을 해 본 적이 있던 상인들에게 브리튼에 대해 물었을 때, 상인들이 잘못된 정보를 흘려보내며 카이사르의 계획에는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카이사르는 허둥지둥 두 군단을 이끌고 도버에 상륙을 시도하게 됐다.
그러나 위기를 직감한 브리튼 인들이 똘똘 뭉쳐 로마의 상륙을 방어해내게 된 것은 물론, 역으로 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조금 더 북쪽에 있는 딜 지역에 상륙을 성공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소규모의 전투를 벌인 끝에 카이사르는 브리튼 동남부 해안에 거점을 만들게 되었다. 사실 이 정도면 원정의 실패라고 보는게 맞지만, 카이사르는 이번 원정이 대성공이라면서 원로원에 거짓말을 했고, 커다란 파티까지 열게 되었다.
1년 후, 지난 번의 침공이 너무도 아쉬웠던 카이사르는 다시 한 번 브리타니아를 침공한다. 첫번째 침공에서 씁쓸한 패배를 맛본 카이사르는 현실을 깨닫고, 무려 800척의 배에 기병까지 추가로 태워 도버 해협을 건너게 되었다. 또한, 당시 지금의 서포크 지역에 있던 카시벨라우누스와 동맹을 맺어 체계적인 공격을 실행하게 되었다. 도버 해협을 건너게 된 카이사르는 빠른 속도로 작전을 전개하여, 순식간에 잉글랜드 동남부를 빼았게 되었다. 그러나 영토 확장이 목표가 아니었던 카이사르는 브리튼 족과의 합의 하에 수많은 재물과 포로를 데리고 갈리아 지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카이사르가 사망하고 1세기 동안 브리튼은 로마인들의 관심 밖으로 잊혀져갔다. 카이사르의 승리로 브리튼 지역에서도 로마 제국의 화폐가 통용되게 되었으며, 로마 제국과 브리튼 간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또한, 브리튼 여성들은 빼어난 외모로 로마제국의 남자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며, 많은 브리튼 여성들이 로마의 남자들에게 시집을 가기도 했다. 그렇게 브리튼과의 전쟁은 끝난 듯 싶었으나, 로마 제국의 클라우디우스황제가 명성을 얻고 싶어하는 장군들과 작위를 얻고 싶어하는 관리들의 요청에 따라 약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하게 되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침공했을 당시 브리튼 족은 로마 제국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별 저항도 하지 않았기에 로마 제국은 단기간에 잉글랜드를 정복하게 되었다. 물론 저항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로마 제국의 잔인한 통치와 폐단에 화가 난 켈트인들이 부디카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를 여왕으로 모시고 반란을 일으켜[2] 잉글랜드의 반 이상을 차지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반란으로 그쳤고 클라우디우스는 2세기 초까지 남부의 비옥한 토지를 모두 정복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정복 과정을 담은 지도 |
클라우디우스의 침공으로 잉글랜드 곳곳에 여러 도시들과 길이 닦이고,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런던은 클라우디우스가 해군 보급 기지[3]를 세운 후, 로마인이 이주해 오며 세워진 도시[4]였고, 지금의 윈체스터, 맨체스터, 울체스터 등은 당시 로마 군의 전진 기지였던 곳이었다. 또한 런던과 군사 기지를 이어주던 길은 지금의 웰링턴 거리가 되었다.
2.2 팍스 로마나(Pax Romana)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즈가 정복당한 이후, 로마 제국에는 300년 간의 긴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또한, 브리튼인들은 단 한번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데에는 로마 제국의 평화적 정복 때문이라 할 수있다. 로만 브리튼의 행정관을 맡았던 타키투스 황제의 장인 아그리콜라는 켈트 인들의 토착 신앙을 탄압하지 않은 채 크리스트교를 전파했고 로마 병사와 브리튼 여성 간의 결혼도 장려했기에 로마인과 브리튼 인의 피는 섞이게 되었다. 그렇게 켈트인들은 로마의 문화를 순순히 받아들였고 반란도 일으키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300년의 기간동안 로마는 브리튼에 로마의 여러 도시들과 똑같은 형식으로 도시를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런던과 콜체스터 지역이 빠르게 로마화 되었고, 로마형 도시의 끝장판인 배스를 새우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의 스코틀랜드지역에 살던 켈트족들이었다. 그들은 끊임었이 로만 브리튼을 침공해 로마를 위협했고, 그 결과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한가지 고안을 내게 되었다. 그것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접경 지대에 방벽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 년의 공사로 방벽을 만들어 내고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2.3 로마의 후퇴와 그 이후
3세기 이후, 긴 평화를 누렸던 로마 제국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기마병을 주축으로 하는 유목민족 들의 잇따른 침입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당시 기마병이 소수로 구성되었던 로마 병사들은 유목 민족의 기마병에게 빠른 속도로 무너져갔다. 설상가상으로 그 당시에는 로마군의 대부분이 야만족으로 구성되었고, 이 때문에 유대 관계가 약화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로마군은 전투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5]. 이렇게 로마 제국이 쑥대밭이 되어가는 동안,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야만족의 침입을 모조리 차단한 브리튼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문제는 내부였다. 브리튼은 유럽대륙과 떨어져 있기에 유입된 로마인이 적었고, 브리튼으로 정착을 한 로마인들마저도 켈트인, 브리튼인 들과 피가 섞이며 로마 제국의 속주라는 주체성을 잃게 된다. 결국, 브리튼의 병사들은 로마의 황제와 대립하는 자신들만의 황제를 내세우게 되었고, 그때부터 브리튼에는 헬게이트가 열리게 되었다.
브리튼은 막시무스라는 황제를 옹립했는데, 막시무스는 일부 수비군만 남기고 골 지방으로 출정을 하게 되었다. 막시무스는 골 지방에서 황제를 죽이려 시도하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목이 잘리게 되었으며. 많은 브리튼 군이 브리튼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 스코틀랜드의 스콧인, 픽트인이 방벽을 뚫고 브리튼을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브리튼 인들은 색슨 족의 용병으로 불렀는데 점차 더 많은 토지와 보수를 요구하면서 이들간의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색슨에 이은 앵글로, 주트 족이 공격을 가하게 되었고, 그들은 수 많은 브리튼 인들을 학살했다[6]. 결국 브리튼 인들은 웨일즈, 콘월, 데번, 브르타뉴등으로 후퇴한다, 그렇게, 잉글랜드의 땅에는 앵글로 3국, 색스 3국, 주트 1국의 칠왕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3 하위 속주와 지역들
밑의 네 속주는 세베릴로 황제의 계획으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지역을 정복하여 로만 브리튼의 4개의 속주로 개편할 예정이었으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며 로만 브리튼의 속주는 브리타니아 인페리오르와 브리타니아 수페리오르로 나뉘기만 하게 되었다.
- 브리타니아 인페리오르 속주 (Britannia Inferior): 세베릴로 황제에 의해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분화된 속주로 밑에 서술된 막시마 카이사리엔시스, 발렌티아와 브리타니아 세쿤다 지역이 이 속주에 속한다.
- 브리타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Britannia Suferior): 세베릴로 황제에 의해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분화된 속주로 밑에 서술된 브리타니아 프리마와 플라비아 카이사리엔시스 지역이 이 속주에 속한다.
-
칼레도니아 속주 (Caledonia): 현 스코틀랜드 일대이다. 남부를 넘어 스코틀랜드 전역을 정복하기 위해 도미티아누스 황제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까지 여러 황제가 나섰으나, 픽트 족의 강한 저항과 산악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로마 군대의 특성 탓에 실패로 돌아갔다..
-
히베르니아 속주 (Hibernia): 현 아일랜드 일대로 도미티아누스황제 시절에 칼레도니아와 같이 정복하려 했으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흐지부지 되었다.
로만 브리튼(브리타니아 속주)에는 총 5명의 관리가 각각 5개의 지역을 관할했는데, 비유하자면 지역구 정도로 비유할 수 있다.
- 막시마 카이사리엔시스 (Maxima Caesariensis):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 발렌티아 (Valentia): 하드리아누스 방벽 너머에 위치했기에 야만족의 침입이 잦았다. 지금의 스코틀랜드 남부 지역의 속주였다.
- 브리타니아 세쿤다 (Britannia Secunda): 웨일즈 지역의 속주이다.
- 플라비아 카이사리엔시스 (Flavia Caesariensis): 잉글랜드의 정중앙에 가장 큰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속주이다.
- ↑ 당시에는 이름이 각각 런더니움과 카뮬로디늄이었다.
- ↑ 게임 Ryse: Son of Rome에서는 이 반란이 게임 초반의 주 스토리로 나온다
- ↑ 당시 템즈 강은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기에, 해군 기지를 세웠고 이 곳으로 상인들이 몰리며 점차 도시를 형성해 나갔다.
- ↑ 은퇴한 로마군들이 작은 부락에 모여 살게 되며, 그 부락이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고, 그 예로는 글로우세스터, 링컨 등의 도시가 있다.
- ↑ 우리나라로 치자면 한국군의 80%를 북한 사람으로 구성해 놓고 북한과 전쟁하는 격이다.
- ↑ 그 방법이 매우 다양한게, 건물에 수 백명을 가두어 불을 지르기도하고, 산에 끌고가 생매장하기도 했으며, 보는 즉시 학살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