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파(Die Brücke) 1905 ~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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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표현주의 작가 중 가장 대표적으로 뽑히는 작가를 꼽자면 다리파에 속하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를 들 수 있다. 키르히너는 1901년 드레스덴의 왕립공과대학에 입학해 건축학을 공부하면서 틈틈이 뮌헨의 미술학교에서 유겐트슈틸 운동의 중심인물인 헤르만 오브리스트(Hermann Obrist)에게 회화를 배웠다. 그리고 프리츠 브라이엘(Fritz Bleyl), 에리히 헤켈(Erich Heckel), 카를 슈미트 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 등 몇몇 친구들과 회화와 소묘 모임을 조직했다. 그는 1905년 이 모임의 이름을 ‘브뤼케(Die Brücke=The bridge=다리)’라 칭하고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리파로 이름을 정한건 혁명적인 정신과 회화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자 한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1906년 드레스덴에서 푸줏간 자리에 공동 작업실을 얻은 다리파 화가들은 함께 작업하며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키르히너를 비롯한 다리파는 1912년 뮌헨의 ‘청기사파’화가들이 베를린에서 개최한 두 번째 전시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키르히너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같은 독일 르네상스 화가들의 회화와 판화에 관심이 많았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그리고 프랑스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원시 미술에 매료되어 매우 거칠고 원색적인 화면을 만들어냈다. 특히 미술을 내적 갈등의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시각 표현으로 보고 강렬한 회화적 분출을 추구했다.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군인 모습의 자화상>, 1915
그러나 1913년 키르히너와 다른 회원들 간의 갈등이 원인이 되어 브뤼케파가 해체되었다. 키르히너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대에 자원입대했으나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고 이듬해 신경쇠약으로 임시 제대했다. 이시기 키르히너가 그린 <군인 모습의 자화상>을 보면, 그의 얼굴은 무슨 약먹은것 같이 누렇게 떠있고 손목은 잘려있다. 게다가 뜬금없이 뒤에는 벌거벗은 여자가 서있고 말이다. <군인 모습의 자화상>은 피카소처럼 형태가 심하게 해체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마티스처럼 밝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키르히너의 그림 속 인물들은 뭔가 음울하고 뒤틀려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리고 얼마나 군대가기 싫었는지 느낄 수 있다
결국 1917년 전쟁을 피해 스위스 다보스 근처 프라우엔키르슈로 이주한 그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그의 양식도 한결 차분해지고 단순화되어 알프스 산의 풍경과 소박한 농부의 모습, 그리고 친구들의 초상화를 선보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날 무렵인 1933년 즈음, 당시 정권을 잡은 나치는 키르히너를 ‘퇴폐 미술가’로 규정했다.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이곳에서 나치가 벌인 짓에 비하면 키르히너같은 화가가 그린 그림은 건전한 편이었다. 차라리 예술로 응어리진것을 표출하는 것이, 겉으로는 위선을 떨면서 뒤로는 온갖 참혹한 짓을 저지르는 것보다 낫다는걸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결국 1937년 나치 정권은 뮌헨에서 선전용으로 ‘퇴폐미술전’을 열면서 여기에 키르히너를 포함시켰고, 여기에 더해 나치는 키르히너의 작품의 전시 및 거래를 금지하고 600점이 넘는 그의 작품들을 미술관에서 철거, 파괴시켰다. 절망에 빠진 키르히너는 심한 우울증을 앓다 58세가 되던 1938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