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형제

Wright Brothers

(좌)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년 4월 16일 ~ 1912년 5월 30일)
(우)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 1871년 8월 19일 ~ 1948년 1월 30일)홍진경에 따르면 히틀러라 카더라

비행의 아버지

수천년동안 하늘을 날고 싶었던 인류의 꿈을 실현시킨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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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는 키가 커서 192cm에 달했는데 오빌은 175cm... 몸, 다리 길이 차이가 상당하다.

1 개요

1903년 모든 비행기들의 조상인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제작하여 성공시킨 미국인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 형제를 일컫는 말로, 항공계의 개척자로 통하기도 한다. 라이트 형제가 없었어도 1906년 파리에서 "출발할 때 동력장치가 필요 없는 비행기"를 최초로 날린 브라질프랑스계 발명가 아우베르투 산투스 두몽(Alberto Santos Dumont, 1873~1932)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 그 자체는 발명 되었을 것이다.[1][2] 그래도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의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매우 거대하며,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타는 비행기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를지도 모른다.

해외 언론사에서 '항공 역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 100선'을 만든 적이 있는데, 당연히 1위로 나왔다. 2위는 베르너 폰 브라운. 사실 브라운이 천재고 뭐고 해도 소용이 없는게, 라이트 형제가 없었으면 사실상 오늘날의 항공기 자체가 없었다.[3] 미하일 칼리시니코프는 있는데 존 브라우닝의 총기가 없다고 생각하면 쉽다 그만큼 위대하고, 남긴 것도 많은 이들이다.

2 가족사

아버지 밀턴 라이트(1827~1917)는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수전 캐서린 코너(1831~1889). 가계는 부계가 영국계 및 네덜란드계, 모계가 독일계 및 스위스계이다.[4]

대체로 라이트 형제라고 하면 윌버와 오빌만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장남인 로런스 필립 라이트(1861~1920), 차남인 토머스 라이트(1865~1938), 누이동생인 막내 캐서린 라이트(1874~1929)가 또 있으며 이 세 사람도 셋째 윌버와 넷째 오빌을 도왔음에도 실질적인 비행기 제조에 나선 이 두 사람의 이름만 잘 알려져 있다.

한 때 다섯 남매는 지역신문사를 경영하면서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나 메이저 대기업 신문사의 진출로 파산하여 자전거 가게를 하면서 겨우 벌어먹곤 했다. 그 밖에도 기계완구가게도 같이 하면서 작은 글라이더 놀이를 즐기면서 이걸 크게 만들면 어떨까하는 호기심을 가졌고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 1848~1896)이 글라이더로 하늘을 날았다는 소식에 자신들도 연구하면 할 수 있다고 믿고 독자적으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초기 항덕. 그러던 도중, 릴리엔탈이 글라이더 시험비행중 돌풍에 의해 추락사한 것을 알고 글라이더 말고 다른 것은 안될까하여 비행기 연구를 시작했다.

3 동력비행기 개발을 위한 노력

이들은 독자적인 연구만으로는 도저히 어렵다고 판단하여 미국 스미소니언 과학협회를 찾아가 전문적인 과학자들에게 여러 정보를 듣기도 하며 열심히 노력한다. 결국 두 형제가 주로 비행기 연구 및 개발, 시험비행에 나서기로 하고 로런스와 토머스가 자전거 가게와 기계완구 가게를 맡고 캐서린은 초등학교 선생으로 벌어먹으면서 연구자금을 도와준다.

수천년간 사람들이 바라온 꿈이 이뤄지는 순간. 1903년 12월 17일, 플라이어(Flyer) 1호 하늘을 날다.

여러 연구와 같이 바람의 크기 및 일정 속도의 바람이 부는 곳을 찾아헤맨 끝에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던 당시 인구 100명도 안되는 작은 마을 키티호크(Kitty Hawk)[5]로 찾아간다. 그 곳을 연구거점으로 삼아 3년에 걸친 온갖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1903년 12월 17일 프랑스계 글라이더 조종사이자 비행기 연구가인 옥타브 샤뉘트(Octave Chanute, 1832~1910)를 포함한 5명이 보는 자리에서 라이트 형제를 태운 최초의 동력 비행기 플라이어 1호는 하늘로 날아올랐고 약 12초 동안의 짧은 비행에 성공했다. 바람이나 수소같은 기체(氣體)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난 인류 최초의 비행 성공기록이었다.

마침내 인류는 숙원과도 같았던 스스로 하늘을 난다는 꿈을 이루어 냈고 그 이후 모든게 바뀌었다.

4 알려지지 않은 수난

보통 위인전에 잘 다루지 않은 게 이들의 고생담이다. 동력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기술을 탐내는 도시의 수많은 인간 도적 무리들 미국 과학계는 축하보다는 분노와 시샘을 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중 하나가 바로 라이트 형제가 찾아간 스미소니언 과학협회 간부인 새뮤얼 랭글리(Samuel Langley, 1834~1906) 박사[6]였다.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한 랭글리는 이미 1897년부터 동력 비행기 개발에 힘을 기울여왔는데 듣보잡인 아마추어 형제들이 자신을 제쳐두고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하필이면 1899년 라이트 형제는 그를 찾아와서 동력 비행기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에 랭글리 박사는 자신의 영광을 듣보잡 두 놈이 훔쳐갔다고 이를 갈았다. 게다가 1903년 12월 8일 겨우 아흐레 전, 랭글리 박사는 동력 비행기 시험비행에 나섰다가 추락했기에 자신이 실패하고 라이트 형제가 성공했다는 걸 믿지 못했다.

그리하여 1904년 7월. 랭글리 대 라이트 형제의 대결이 벌어진다. 둘이 동력비행기를 타고 2만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누가 잘 날아가나 시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라이트 형제 완승.

랭글리의 비행기는 힘없이 강물에 추락했지만, 라이트 형제가 탄 비행기는 잘만 날아갔다. 그것도 15분씩이나 400미터 위를 쌩쌩 날아갔기에 미국 언론은 이번이야말로 "라이트 형제 하늘을 날다!"라고 확인 보도를 해버렸다. 결국 랭글리는 패배에 충격을 먹고 좌절하여 모든 활동을 멈추고 폐인처럼 지내다가 오래가지 못해 죽게 된다.

하지만 랭글리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스미소니언 과학협회는 라이트 형제가 스승의 아이디어 및 여러가지를 도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라이트 형제는 1년이 넘는 온갖 조사와 수사를 받아야 했다. 물론 결과는 무죄. 어떤 증거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똑같다면 왜 랭글리 비행기는 추락하고 저들이 만든 비행기는 잘 나는데? 라는 결과가 이를 입증했던 것.

이렇게 무죄가 입증되고 이들은 계속하여 여러 단점을 고쳐나가면서 개량된 비행기를 만든다. 1905년에 이들이 만들어낸 '플라이어 Ⅲ'은 선회·방향전환·원운동·8자비행이 가능했고, 30분 이상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럼에도 스미소니언 협회는 라이트 형제가 도용했다는 언플을 계속했고 이런 여파 때문인지 이들이 만든 비행기는 일절 팔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이들은 미 육군 측에 시험비행도 여러번 했지만 육군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이런 주제에 잘도 최강의 공군을 보유하다니, 되려 유럽이나 아르헨티나(당시에는 세계적인 경제부국이었다.),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관심을 보이며 생산공장을 자국 안에 만들자고 온갖 조건을 제시하며 유혹했다.

그런 가운데, 라이트 형제를 꾸준히 지지하던 옥타브 샤뉘트가 조국이었던 프랑스에 열심히 이들을 알렸고 동력 비행기에 대한 걸 홍보한 끝에 결국 1908년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기 공장을 만들게 되었고 미 육군은 제시하는 시험비행을 성공시키면 구입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시험비행을 성공시켰지만 그럼에도 여러 조건이 안 맞는다면서 거부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생산에 주력하지만 결국 공짜는 없다는 듯이 제조기술이 유출되어버린다. 이 일로 프랑스는 독자적인 비행기 제작에 들어가고 더더욱 새로운 기술 등에 여러 모로 노력하면서 라이트 형제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때 앞서 말한 두몽과의 최초 발명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으며,[7] 10여년 간 스승이자 친구였던 옥타브 샤뉘트가 기술 유출에 연루된 게 드러나서 라이트 형제와 샤뉘트는 엄청 다툰 후 결국 갈라섰다.[8]

이런 와중에 미국에선 글렌 커티스(Glenn Curtiss, 1877~1930)라는 이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와 비슷한 걸로 특허를 내고 공장을 차렸고 되려 라이트 형제가 자신의 기술을 도용했다고 소송드립을 치며 라이트 형제를 괴롭혔다. 어처구니없게도 조국인 미국은 커티스의 주장에 동조하여 원조인 라이트 형제는 온갖 고생을 해야했으며, 기나긴 소송이 시작되었다.

소송을 맡았던 것은 형인 윌버였는데 잦은 여행과 재판으로 인해 건강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1912년 보스턴으로 사업차 여행을 다녀온 후에, 티푸스 열 진단을 받았고, 몇 주 동안 의식을 잃었다 회복했다를 반복하다가 끝내 45세라는 아직 한창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1914년에 미국 상급 법원에서는 라이트 형제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이번에는 세간에서 라이트 형제가 탐욕을 부린다는 식으로 비난을 퍼부게 된다.

5 미국을 떠나서

조국에서의 푸대접과 윌버 형의 죽음으로 슬픔과 절망에 빠진 오빌은 다른 형인 로런스와 같이 미국을 떠난다. 슬픔을 떨치고자 그는 비행기 생산에 전력을 다했고 더 나은 발전을 위하여 연구했으며 프랑스 및 독일, 영국, 네덜란드와 멀리 아르헨티나를 오고가면서 비행기 홍보를 했다.

오빌은 1918년도에 1911년 모델B형을 마지막으로 조종하고는 비행기를 조종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러 항공 위원회에서 우대받으며 위원으로 활동을 했었는데, 그 중에는 NASA의 전신인 NACA도 있었으며, 28년간 몸을 담았다.

1928년 오랫만에 미국으로 돌아온 오빌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커티스가 사업실패로 부도에 빠지자 그의 생산공장을 돈으로 사면서 복수에 성공했다. 그래서 이름이 커티스-라이트[9]가 된 것이다. 이들을 고소하고 사기꾼으로 몰던 커티스는 자신이 역관광당하고 비참하게 살다가 오래못가 1930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아주 쌤통이다.

비행기 공장의 성공 및 온갖 로열티를 인정받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었으나 오빌은 살아 생전에 미국이 외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심지어 오빌은 1933년 키티호크에 세계 최초 동력비행 기념비를 세우고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도 주로 유럽 측 자금으로 지을 정도였으며 미국에선 무시했다. 세월이 지나 1943년에 비행 최초 4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미국에서 조촐하게 지냈다.(2차대전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같은 나라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 이젠 로런스와 토머스, 캐서린[10] 같은 다른 형제들도 모두 죽었기에 홀로 자리에 참여한 오빌은 인터뷰로 한 말로 여전히 미국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 벨기에... 유럽 각지에서 나(오빌)와 세상에 없는 윌버 형에게 훈장과 표창장을 주고 명예 시민, 명예 교수, 명예 학자 자리를 주며 인정했지만, 조국 미국은 그래본 적이 없다."

참고로 세계 최초 동력 비행기인 플라이어 1은 바로 영국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오빌이 스스로 영국에 임대 기증한 것이었다. 단, 조국인 미국에서 원한다면 언제라도 돌려준다는 조건을 달아서 언젠가 미국이 자신들을 알아줄 것이란 전망을 했다.

1944년 록히드 항공사가 만든 두번째 비행기가 캘리포니아 주의 버뱅크(Burbank)에서 워싱턴까지의 거리를 6시간 57분으로 주파했다. 이 비행기를 조종한 사람 중 한 명이 하워드 휴즈였었다. 돌아오는 도중 이 비행기는 라이트 비행장에 멈춰섰고, 오빌은 생애 마지막 비행을 했다. 잠깐이나마 조종간도 잡았는데, '비행기의 날개 길이가 내가 처음 날았던 때보다 길어졌군.'이라는 말을 남겼다.

1948년 1월 30일, 오빌은 고향인 오하이오 주 데이턴 시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76세. 첫 비행을 한 지 만으로 44년 만이었다. 며칠 전부터 혼수상태이던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바람은 높아......이제 날 수 있겠어."

마치 옛날 40여년 전을 회상하듯, 그 비행기를 띄울때 모든 걸 잊고 비행기 연구에 전념하고 드디어 하늘을 날때 벅차던 그 시절을 되새기며 눈을 감은 것으로 보인다.

마차가 다니던 시대에 태어나 항공 시대를 열었던 오빌은 초음속 시대의[11] 태동기를 직접 목격한 산 증인이었다. 윌버와 오빌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 [12] 자식은 없었다.

6 그 뒤에

오빌이 죽고 10년도 안돼 미국에선 라이트 형제붐이 일어난다. 2차대전 승리와 대영제국으로 알아주던 영국의 약화, 영국을 대신한 미국의 강세 속에 위대한 미국붐이 일어나면서 미국이 자랑할 이야기들이 떠오르며 미국은 뒤늦게 라이트 형제를 찾아나선다.

1955년에서야 라이트 형제의 위인전이 출판되었고 미국은 영국에 전시중이던 플라이어 1호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한다. 이미 오빌은 영국 측에게 미국이 돌려달라면 언제라도 돌려줄 것을 조건으로 임대해준 것이었기에 별일없이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미국에서 미국의 자랑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지만. 사실 좀 우여 곡절이 있고, 사건도 오빌의 사망 이전이었다.

우선 미국이 돌려달라고 한 게 한두 번은 아니었다. 미국이 플라이어 1호를 돌려달라하자 영국 대영 과학 박물관에서 플라이어 1호를 돌려주기를 거부했고, 미국은 데꿀멍했다. 사실 이전에도 오빌이 플라이어 1호의 반환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도 거절(...) 그런데 루프트바페런던 폭격으로 박물관이 박살날 가능성이 커져 기체를 지키기 힘들어지자 얌전히 미국에 보냈다(...).

7 그 밖에

라이트 형제가 개발한 최초의 동력비행기인 '플라이어 1호'는 지금의 뒤쪽에 수평꼬리날개가 달린 일반적인 비행기와 달리 앞쪽에 카나드가 달린 비행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들이 비행하기 몇 해 전에 글라이더 및 비행기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오토 릴리엔탈이 자신의 글라이더를 타고 비행하던 중 추락하여 사망하였는데, 일단은 워낙 높이서 추락한 것도 문제지만[13] 오토 릴리엔탈의 글라이더는 앞쪽에 아무런 구조물이 없는 형태였기 때문에 추락하면 조종사가 직접 땅에 부딪히는 구조인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라이트 형제는 앞쪽에 승강타 역할을 하는 카나드를 달아서 설사 추락해도 앞쪽 구조물이 먼저 부서져 충격을 흡수하는 것을 노렸다. 또 한편으로는 조종사가 직접 승강타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아직 신뢰성이 부족했던 당시의 항공기를 조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라이트 형제가 개발한 항공기는 지금의 항공기들 처럼 카나드 대신 수평꼬리날개가 있는 형태로 바뀌었다.

플라이어1호의 조종방식은 독특하였다. 지금의 항공기는 조종간과 페달로 움직이며 특히 조종간은 전후좌우로 움직였다. 그러나 플라이어1호는 조종간이 전후로만 움직인다. 조종간을 좌우로 움직이는 것에 해당하는 조작은 엎드린채로 타는 조종사가 직접 허리를 좌/우로 움직여야 했다. 이후 개발한 항공기들은 좀 더 편하게 앉아서 타는 형태로 바뀌었다.

조종사가 허리를 좌우로 움직이면 그에 맞춰 날개 왼쪽, 혹은 오른쪽이 비틀리면서 그쪽으로 기체가 기울어졌다. 이후에는 에일러론이라 하여 아예 날개 끝 부분이 위아래로 꺾이도록 경첩을 달았는데, 사실 이 부분이 바로 커티스와 특허 분쟁에 휘말렸던 부분이다.

라이트 형제는 자신들의 항공기에 붙어 있는 승강타 역할을 하는 카나드를 러더(rudder)라고 불렀는데, 이는 현재 항공기에서 방향타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1호는 사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매우 불안정한 항공기다. 조종사가 잠시라도 조종을 멈추면 항공기는 점차 방향이 틀어지거나 기수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는 잘못된 무게중심과 날개의 위치관계 때문. 그래서 조종이 매우 어려운 편이었음에도 라이트 형제가 자신들의 비행기를 제대로 날릴 수 있엇던 이유는 실제 동력 비행에 앞서 유사한 형태의 글라이더로 여러번 비행연습을 하였기 때문이다.

라이트 형제는 비행에 앞서 모형을 가지고 실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들은 모형을 가지고 실험한 결과 종전의 학자들이 계산/실험한 내용이 틀렸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라이트 형제의 실험결과가 틀렸다. 당시만 해도 아직 모형으로 실험할 때와, 실제 항공기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풍동실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부족한 것이 원인인데 풍동실험에서 현실을 반영하는 결과를 얻기위해서는 상사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를 판단하는 수로 대표적으로 마하수와 레이놀즈수가 있다. 여기서는 마하수 0.3 이하의 저아음속이므로 압축성 효과는 고려할 필요성이 작아 레이놀즈수를 중요하게 보는데 레이놀즈수는 간단히 말하면 유동의 상대 속도가 빨라지면 커지고 물체의 크기가 작아지면 작아지게 된다. 즉, 풍동에서 작은 물체를 가지고 같은 레이놀즈수를 얻으려면 속도를 높여야 한다. 그런데 이걸 만족시키지 못하면 풍동은 저 레이놀즈수의 유동조건이나 현실에서는 그보다는 훨씬 높은 레이놀즈수의 유동조건이 만들어져 큰 차이가 발생한다. 덕분에 이들은 날개를 최대한 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니 날개 구조강도가 약해질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단엽기 보다는 복엽기 형태의 항공기를 만들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한 사망자도 공교롭게 이들 형제가 냈다. 1909년 오빌 라이트가 조종하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오빌은 늑골 4개와 왼쪽 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공식 관측자로서 탑승하고 있던 미 육군 장교 토머스 셀프릿지 중위는 두개골 골절상을 입고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부상이 너무 심해 그날 밤 사망했다.

쌍라이트 형제와는 관련없다.

8 그들의 발자취 및 관련 항목

  • B-29 - 1937년 5월에 처음으로 나온 라이트항공의 R-3350 듀플렉스-사이클론(Duplex-Cyclone) 엔진을 4기 장착하였다[14]. 참고로 그 엔진은 더글라스 A-1 스카이레이더, 록히드 컨스텔레이션, 록히드 넵튠 같은 항공기에도 사용되었으며, 특히 A-1의 경우 1985년까지 운용되었다.
  • 노스 아메리칸 항공(North American Aviation) - 1948년에 커티스-라이트의 항공사업부를 인수하였다. 이후 노스 아메리칸 항공은 록웰 인터내셔널로 재편되고, 그리고 록웰 인터내셔널은 분할매각되어 항공부문은 보잉으로 승계된다.
  • 록히드 마틴 - 오빌 라이트가 매각한 라이트사와 글렌 마틴(Glenn Martin)의 회사가 1916년에 합병한 이후 1917년에 해산했다. 이후 글렌 마틴의 회사는 마틴 마리에타로 재편되고, 이후 1995년에 록히드 마틴으로 합병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보잉 - 노스 아메리칸 항공, 록웰 인터내셔널을 거쳐 결과적으로 라이트 형제의 항공기사업을 이어받은 회사.
  • 커티스-라이트(Curtiss-Wright) - 오빌 라이트가 세운 회사를 전신으로 하는 항공, 원자력발전, 금속 방면의 대기업으로, 수차례의 인수합병을 거쳐 1929년 이래 현재의 형태로 존속해 있다. 인수합병의 역사 자체가 라이트 형제의 수난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 프랫&휘트니 - 1925년 당시 라이트항공의 대표이사에 있었던 프레더릭 렌트슐러(Frederick Rentschuler)가 사임하여 코네티컷주 이스트 하트포드시에서 세운 회사로 세계 3대 항공기 엔진 메이커이다.
  • CVL-49/CC-2 라이트 경항공모함/지휘함 - 사이판급 경항공모함의 2번함으로 1945년 9월 1일 취역해 실전엔 참여하지 못했다. 배수량 14,500톤급으로 에섹스급 항공모함보다는 소형이었으나 최고속도 33노트를 발휘할 수 있어 전투함대와 공동작전이 가능한, 에섹스급과 호위항공모함 사이의 능력을 가진 경항공모함이었다. 1962년에는 지휘함으로 개조돼 CC-2 라이트로 재지정됐으며 1970년까지 활동했다.
  • 키티호크급 항공모함 - 네임쉽 키티호크는 라이트 형제가 첫 동력비행실험을 성공했던 키티호크에서 따 왔다.
  • 라이트-패터슨 미합중국 공군기지: 고향 오하이오주 데이튼에 소재한 윌버의 이름을 따온 윌버 라이트 필드가 오늘날에는 확장되어 공군기지로 쓰이고 있다. 이 곳을 주로 관장하는 사령부는 비행기 만드는게 주 업무인 미 공군 군수사령부.

9 미디어

시간탐험대에서 주인공 일행이 만난다. 1903년 비행기를 시험운전하던 이 형제를 주인공 일행은 라이트 형제라는 걸 알고 성공할 것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선 레프트라는 사내가 라이트 형제와 반목한다. 그는 사람은 새처럼 스스로 날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글라이더 비슷한걸 만들지만 연이어 실패했다. 그러다가 램프의 바바를 보곤 하하하하하~웃으며 램프의 바바 옷차림을 하고 날아보라는 샬랄라 공주 말대로 하는데 물론 즉시 추락하기 일쑤. 되려 이걸 보던 돈데크만이 라이트 형제처럼 비행기로 날아야 한다고 어이없어했다. 결국 라이트 형제는 실제 역사차럼 플라이어 1호를 몰고 하늘을 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신이 나간건지 레프트가 여전히 램프의 바바 옷차림을 하며 하하하하하하 웃음과 같이 하늘을 날려다가 계속 넘어지며 이 에피소드가 끝난다.
  1. 참고로 두몽의 기체는 헬리콥터에 더 가까웠다. 두몽은 그 외에도 손목시계를 발명하고 수륙양용기 또한 시도한 뛰어난 발명가였다. 하지만 그는 늘상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투기로 사용되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1932년 상파울루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하였다.
  2. # 그래서 역시 자존심 강한 프랑스는 자기들이 비행기를 발명했다고 코웃음 친다고. 일단 크레망 아델이 1899년에 동력비행장치를 만들었잖아? 브라질이겠지 브라질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내용을 보면 알겠듯이 브라질이 먼저란 소린 헛소리다. 해당 블로그 글 역시 미국의 역사왜곡이라 주장하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그냥 '두몽이란 사람도 비행기를 개발했다' 정도로만 참고하자. 다만 뒤에서 보듯 프랑스가 최초로 비행기 대량생산을 한 건 사실. 하지만 그게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의 공장라는게 함정
  3. 바로 위의 두몽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없었다면 폰 브라운의 V2도 전혀 다른 형태로 나올지도 모른다.
  4. 이런 다양한 혈통의 배경 덕분인지 훗날 미국을 떠나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의 여러나라를 거치면서 외국어를 구사하는데에 어느 정도 비중있는 도움이 되었다.
  5. 지금은 인구가 늘어나서 2014년 인구가 3400명 정도이다. 종종 항덕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지금이야 인구도 늘고 라이트 형제가 머물고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기가 난 곳이라고 기념비 세우고 그걸로 홍보하지만 1903년 당시에는 그야말로 변두리 마을로 당시 먼저 가서 머물던 윌버는 오빌에에게 편지로 "우리가 찾던 기상조건으로 어울리지만 살아가는 곳으로는 전혀 안 어울리는 거 같다!" 라고 하소연했다...
  6. 버지니아주에 소재한 NASA 랭글리 연구소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왔...지만 같은 주의 CIA가 위치한 동네도 있어서 아주 유명하지는 않다.
  7. 유럽에서는 1903년의 첫 비행 등이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8. 옥타브 샤뉘트와의 관계는 이미 라이트 형제의 성공에 대해 얼마만큼 그가 기여했는지를 두고 사이가 삐그덕거리던 상태였는데, 재판 후 옥타브가 라이트 형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라이트 형제가 샤뉘트의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끝장났다.
  9. 마음같아서는 라이트-커티스로 고치고 싶겠지만 그동안 커티스 사로 워낙 알려졌기에 이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10. 오빌은 캐서린과 사이가 나빠진 상태였다. 캐서린은 1926년에 결혼을 했는데, 오빌은 이에 크게 분노하고는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얘기조차도 하지 않으려 했다. 토머스가 고집을 부려 캐서린이 죽기 전에 겨우 만났다.
  11. 오빌이 사망하기 3개월 전인 1947년 10월 17일 척 예거벨 X-1 실험기를 타고 음속 장벽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12. 윌버는 '비행기와 아내 모두에게 쓸 시간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13. 글라이더가 제대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려면 절벽이 필요했고, 그래서 릴리엔탈은 절벽에서 글라이더를 타고 뛰어 내렸다가 곧 돌풍을 만났다
  14. 1929년 이후에는 커티스-라이트의 한 사업부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