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플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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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플레이션 (超inflation / Hyper-Inflation)

1 개요

인플레이션이 악화되어 더 이상 수습할 수 없는 상태일 때 사용하는 경제학 용어.

보통 초인플레이션은 '한 달 사이에 전달대비 물가가 50% 이상 상승'한 것을 말한다. 즉, 1년에 물가가 100배[1], 아니면 50일마다 물가가 2배로 뛸 때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고 한다.

느낌이 안 온다면, 이 자료에 따른 1990년부터 2015년까지의 25년간 한국의 물가상승률을 다 합친 게 대략 100%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지난 25년동안 물가 오를 게 50일만에 뛰는 셈.

유머집 등에 소개되어 있는 '화장실에서 휴지가 없어 옆칸에 있는 사람에게 돈을 줄테니 휴지를 팔라고 하자 그 돈으로 닦으라고 했다'는 유머가 이 상황에서는 유머가 아니다.(...)

2 원인

초인플레이션의 주 원인은 전쟁이나 국가부도, 자연 재해, 내란, 사회적 공황, 갑자기 닥친 식민지청산 독립같은 "국가비상사태"인 경우가 많다. 물론 로버트 무가베 같이 경제학적 지식이 전무한[2] 인간이 경제에 관련된 고위직 공무원이 될 경우에도 벌어진다.
가장 큰 이유는 사실 간단한데 화폐발행 주체인 정부의 재정건전성이 심각할 정도로 훼손되어 화폐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하락한 반면, 화폐 발행 규모는 유지되거나 심지어 커지는 경우 발생하게 된다.

생각 없이 돈만 찍으면 돈의 가치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떨어지므로 이 꼴 나기 좋다. 이러한 인플레이션이 벌어진 나라들은 인플레이션 수치 상승에 민간의 인플레이션 기대가 반영되어 정부가 찍어내는 그 이상으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한마디로 찍어내는 것 보다 더한, 가속화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것. 그래서 일반적인 국가는 돈을 적당히 찍으면서 이런 꼴을 안 보게 신경쓴다.

심지어 전쟁 때는 적국의 경제를 망가뜨리기 위해 상대국의 지폐를 위조해 대량 살포하는 경우도 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나치독일은 서로 상대국에 위조지폐를 뿌릴려고 시도했으며, 일본 제국도 중국 대륙에 거액의 위조지폐를 살포하였다.[3] 그 밖에도 다수의 사례가 있다. 블로그

전세계 모든 국가가 위조지폐를 최대한의 중형으로 처벌하는 것은 이런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초인플레이션을 겪는 주민들에게는 고통이지만, 초인플레이션은 경제학자들의 좋은 연구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3 실제 사례


숫자에 속지 말자
사실 저기에 그려진 돌값이 더 비싸다.

초인플레이션으로 유명한 짐바브웨100조 짐바브웨 달러 지폐 사진. 이 지폐를 발행할 당시 100조 짐바브웨 달러는 한국 환율로 1만 5천원 내외에 불과했다. 그리고 저 지폐가 폐지되었을 땐... 그러니까 이거 하나 가진다고 부자가 되는게 아니다! 것보다 왜 하필 100조짜리인지를 생각해보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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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청소부가 쓰레기 지폐더미를 빗자루로 쓸고있는 사진. 아무도 저 지폐더미를 주우려고 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다. 지폐는 좋은 불쏘시개 공급원이죠 참고로 이쪽의 세계 기록은 헝가리가 갖고 있다.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서도 1945년 일제의 항복선언 직후 한 가마니 가격이 1945년 11월~1946년 3월까지 무려 55배가 치솟았다고 한다. 4개월에 55배면 복리로 환산할 경우 1년에는 무려 166,375배가 된다. 이 사태의 원인으론 미국의 명령으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행정권을 행사하던 조선총독부가 자국민의 귀환 자금을 위해 조선은행권을 무차별 방출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물론 여기에 당시 한반도를 통치하던 미 군정청의 미숙한 통치능력도 한몫 거들었다. 네 이놈 존 하지!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특별시에서는 북한위조지폐 대량 살포로 가루 한 말 가격이 1950년 7월 ~ 1950년 10월 기간에 120배가 뛴 적도 있다.

1973년 10월 칠레에서 한 달 동안 88%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한 적도 있다. 이 목록에 나온 나머지 사례에 비하면 믿기 힘들 수준의 안정적 물가지만.

보스니아 내전 당시 디나르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었다.

1993년 스릅스카 공화국 (세르비아와는 다른 국가다.) 초고속으로 물가가 올라서 1994년 1월 한 달 동안 300만 배나 물가가 뛰었다.

1993년 한 해 동안 물가가 1027배 이상 뛰었고 1994년 1월 한 달 동안 20 배가 넘는 물가 상승을 경험한 유고슬라비아의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참고로 위의 스릅스카 공화국, 보스니아 와는 별개의 사례다!)

남아메리카에선 1990년~1992년 기간동안 초인플레이션을 겪은 전력이 있다. 예를 들어 1990년 니카라과 코르도바의 환율이 30,000,000C$=1$까지 치솟았다.

터키도 2004년까지 초인플레이션까진 아니어도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의 결과로 2004년 12월 1,339,000리라=1$의 막장 환율에 이르르자 결국 1,000,000 구 리라 = 1리라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779년 11월 미국에서도 대륙화폐[5]의 월간 인플레이션율이 47%에 달해 간신히 초인플레이션 기준(50%)은 안 넘은(...) 사례가 있다. 이 때문에 'Not worth a continental'이라는 영어 숙어가 생겨났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로 인해 세계 각국 정부가 묻지마식으로 을 쏟아붓고 있는데, 닥터 둠으로 불리는 마크 파버는 미국마저도 짐바브웨 꼴이 날 것이라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관련기사

2009년에는 윗동네화폐개혁을 잘못 해서 초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고 카더라. 저 동네가 워낙에 숨기는 게 많고, 그렇다고 정보가 잘 퍼지지 않으니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덕분에 화폐개혁을 주도했던 박남기 계획부장이 공개 총살당했다.

3.1 독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얼마나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정도였냐면 불과 약 3년(1919년~1921년)만에 물가가 무려 1조 배나 올랐다고 한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이후로 각종 생산시설이 붕괴된 데다가 전쟁 기간 동안 필요한 재원을 조달한다며 엄청나게 통화를 발행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6][7] 거기에 더해 패전 뒤에 공업력이 떨어져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지는 못하는데 반해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생긴 현상.[8] 그게 어느 정도였냐 하면, 땔감을 사는 것보다 지폐를 땔감으로 쓰는 게 오히려 더 알뜰하고, 벽지를 사느니 그냥 지폐로 을 도배할 정도였다. 실제 지폐로 도배를 하는 사진도 있다.
Tapezieren_mit_Geldscheinen-WikiCommons.jpg
바로 이것.

이런 상황이니 방석을 사느니 문자 그대로의 돈방석을 만드는 게 더 낫다고 할 수도 있겠다. 돈방석을 돈방석이라 부르지 못하다니 심지어 어떤 강도는 돈이 꽉 찬 바구니를 훔친 다음 길거리에 바구니 속에 있던 돈을 뿌리고 바구니만 들고 도주했다고 한다. 바구니가 바구니 속의 돈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서전에 의하면 슈바르츠발트라는 지역의 물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이곳의 물가는 정말 싸다! 하루 숙박에 40만 마르크, 저녁 한 끼에 180만 마르크, 우유 한 통에 25만 마르크." 추가적으로 나중에 물가가 최고조에 도달했을때에는 레스토랑의 한끼 식사가 100~200억 마르크, 학교 구내식당에서도 저녁 한끼가 10억 마르크, 극장표가 3~4억 마르크였다.

또 이런 이야기들도 있다.

어떤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성실하게 일해서 번 돈을 꼬박꼬박 저축해 두었고, 동생은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술만 퍼마시는 인간 쓰레기였다. 그런데 1차대전이 끝나고 초인플레이션이 터졌고, 형이 번 돈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그러나 동생이 마시고 모아 둔 술병이 더 값어치가 나가게 되어 어떻게든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인생은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훌륭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 새옹지마

독일 어느 도시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 스위스로 건너가 살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독일은행에 60만 마르크[9]를 예금해놓고 스위스로 떠났다. 4년만에 독일로 다시 돌아온 그녀의 집에는 은행으로부터 3통의 우편물이 와 있었다.

첫번째 것은 평소에 잘 알던 은행원이 보낸 것이었는데, "부인이 당은행에 맡기신 거액의 예금을 차라리 다른 곳에 투자하시길 권합니다. 마르크화의 가치가 떨어질 전망이니 다른 실질적인 것에 투자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언제 시간이 나시면 저와 상의하도록 하십시오."

두번째 편지는 다른 은행원이 쓴 것이었는데, "귀하의 예금은 액수가 너무 적어서 은행 입장에서 더 이상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예금을 찾아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온 편지는 그녀가 스위스에서 돌아오기 몇주 전에 보낸 것으로, "아무리 연락을 드려도 소식이 없어서 귀하의 구좌를 임의로 폐쇄했습니다. 현재 저희 은행에서 보유하고 있는 소액권이 없어서 백만 마르크짜리 지폐를 동봉합니다."

그래서 이 과부는 지폐를 찾으려고 봉투를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지폐는 보이지 않고 겉봉투에 우체국 소인이 찍힌 백만 마르크짜리 우표만 붙어 있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60만 마르크의 예금이 4년만에 우표 한 장 값에도 못미치게 된 것이다.


출처

또 당시를 다룬 단편소설로 슈테판 츠바이크보이지 않는 소장품이란 작품이 있다. 렘브란트를 비롯한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어느 장님 수집가에 대한 소문을 들은 주인공이 그 작품들을 보고 싶어 늙은 수집가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을 열렬히 환영하는 수집가의 뒤에서, 그의 아내와 딸이 사색이 되어 "손님이 배가 고프실 게 틀림없으니까, 식사를 하고 먼저 작품을 보여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노인을 뜯어말리는 것이 아닌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주인공은 배가 고프다는 핑계를 대고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집가의 딸이 그를 찾아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편은 세계대전 중에 전사하고 벌이가 시원치 않아 장님인 아버지 몰래 작품을 내다 팔고 비슷한 크기의 종이로 바꿔치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품을 팔아 거액을 받긴 했으나 며칠 만에 그게 휴지조각 값이 되버렸고 다시 다른 작품들을 내다팔았으나 죄다 며칠만에 휴지조각만도 못한 가격으로 추락하면서 엄청난 가치를 가진 작품들을 죄다 팔아버리고도 빵 하나도 사지 못할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돈이라도 많이 받았으면 모르겠는데 거의 길거리에 내다 버리다시피 한 꼴이 되버려서 아버지에게 말도 못하고 남은 식구들만 사색이 되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주인공이 작품을 보러 와서 "이게 웬 백지들입니까?"라고 하면 아버지는 그야말로 심장마비로 그자리에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것이 없었고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발 식사를 하고 작품을 보자고 사정을 한 것이다.

어쨌거나 소설의 결말은 주인공이 백지들을 가리키며 기뻐서 설명을 하는 장님 수집가에게 열렬히 호응을 해주며 작품들을 칭찬하고 수십년간 만져온 무게와 작품의 무게가 다른 것을 보고 이상함을 느낀 수집가에게 "이러 이러한 점이 이 작품의 특징이 아니냐?"라고 재빨리 거들며 위기를 넘긴다.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뒤로 이렇게 행복해하는 독일인을 본 적이 없다."는 주인공의 말을 끝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래서 사람은 눈치가 빨라야한다.


당시 발행된 지폐.지폐 찍을 돈도 없어서 1,000 마르크 지폐 위에 10억 마르크라고 고쳐 쓴 거다.(...) 잉크는 어떻게 구한걸까?

millio은 미국과 같은 100만이지만 독일에선 10억을 billion이라 안 쓰고 milliarde 라고 한다.

berlin9.jpg
다른 것으로 1923년에 촬영된 유명한 사진.[10] 저 벽돌같은게 다 돈뭉치다...

파일:Attachment/onebillimrc.jpg
그리고 대미를 장식할 이 동전. 이 동전은 무려 1조 마르크짜리 동전으로 인류 역사상 최고액면의 동전이라고 한다... 이것이 10억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미국에 한정되는 것이고, 독일에서는 1조를 billion이라고 한다.

고종황제가 독일에 맡겨둔 비자금도 이 난리통을 겪으면서 휴지조각으로 바뀌어버렸다고 한다. 이미 비자금의 주인공인 고종이 사망한 뒤이지만.

이 인플레이션은 바이마르 공화국1923년 11월 렌텐마르크[11]라는 새 화폐를 발행하고 옛 마르크와 1조 대 1의 비율로 화폐교환을 실시하면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이 초인플레이션의 충격이 너무 커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 때문에 무너질 때까지 이런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거나 1929년부터 시작한 경제 대공황 때 다시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물론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바이마르 초기의 초인플레이션은 렌텐마르크를 발행하면서 수습을 했으며, 대공황 때는 본질적으론 '디플레이션'이므로 이런 폭발적인 물가상승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큰 인플레를 겪었는지 당시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중엔 은행을 믿지 못해 재산을 현물로 바꾸어 개인금고에 보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12], 그 사람들이 늙어서 사망하고 나서 자식들이 유품 정리를 하기 귀찮아서 대행업체에 맡기고는 했는데, 집구석 정리하다가 금덩어리나 보석이라도 나오면 다 내꺼ㅋ가 성립이 돼서 외국인(주로 터키계) 노동자들이 이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3.2 짐바브웨

짐바브웨는 인플레이션이 상상을 초월했던 걸로 유명했다. USD로 1,000억 달러라면 2009년 1월 환율로 100조원이 훨씬 넘어간다. 그러나 짐바브웨 달러로 1,000억달러는 고작 달걀 세 개 값밖에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짐바브웨 달러 지폐를 보면 0이 무식하게 많이 붙어있는 진 풍경을 볼 수 있다.

이게 왜 무섭냐면 예를 들어 오늘 1,000억 짐바브웨 달러를 벌었다고 치자. 그럼 오늘 물가로는 이 1,000억 짐바브웨 달러에 달걀 3개를 살수 있는데 이 돈을 다음 달까지 가지고 있으면 1,000억 짐바브웨 달러로 달걀 3개는커녕 1개도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율은 2008년 1월~7월간 2억%였다. 즉 오늘 짐바브웨에서 1 짐바브웨 달러에 산 물건이 있고 그걸 1년 뒤에 되팔면 200만 짐바브웨 달러를 손에 쥘수 있다. 만약에 이걸 한국식으로 계산해 보면, 500원 하던 두부 1모의 가격이 1년 뒤 10억원으로 폭등하는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짐바브웨에서 물건 사서 판 다음 몇천억 짐바브웨 달러를 손에 쥐고 "난 부자다!" 할 사람은 없겠지 참고로 말해두지만 짐바브웨 화폐 개혁 전인 2008년 7월 기준으로 환율은 1달러 = 69,484,070,056 짐바브웨 달러, 즉 700억 짐바브웨 달러를 벌어와도 당신은 1달러 벌어온거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1천억 짐바브웨 달러를 은행에 가서 바꿔달라고 내밀면 아마 1,500원을 내줄 것이다. 그래도 4자리 수인 게 어디냐

2009년 2월에 세계적인 경제잡지인 포브스(Forbes)에서는 짐바브웨의 2008년 초인플레이션을 6.5×10108% = 6,500만 구골%이라고 발표했다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다. 2008년 11월 중순에 최고점 찍었는데 그 때 월 상승률이 1억배에 좀 못미치는 79억 6천만%.# 10108 %로 오르려면 매달 10억(109)배 가까이 올라야 한다.

그러니까,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큰 수를 표현할때 '천문학적인'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곳의 인플레이션은 이미 천문학에서 쓰는 숫자의 단위를 돌파했다. 리처드 파인만 드립 돋네

그래서 결국 통화발행을 금지하고 달러를 통화로 사용하는 걸로 해결했다. 외국 통화의 유통은 인플레를 해결하는 검증된 방법 중 하나다. 흥선 대원군당백전이라는 실책을 청나라의 돈을 들여오는 것으로 땜질한 바 있다. 문제는 그러고도 완전 수습이 안 됐다는거지만. 이유는 심플한데, 청나라 동전 자체가 관리들이 밀수한 동전으로 이것도 악화였다. 당시 화폐인 상평통보 기준 1/3의 가치. 당백전은 6/100의 가치. 청전은 당백전에 비하면 양화이지만, 상평통보에 비하면 악화이기 때문에 문제가 계속된 것이다. 더구나 이게 당백전보다는 부작용이 적다는 이유로 흥선 대원군 지배 시기 동안에는 폐지도 되지 않았다. 폐지된 것은 고종 친정 이후이고, 청전을 폐지한 결과 조선은 디플레이션에 시달렸다. 폐지하기 전에는 화폐불신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3.3 헝가리

인플레이션 때 헝가리에서 발행된 1해 (100,000,000,000,000,000,000 = 1020) 펭괴 지폐. 참고로 통용되진 않았다.

흔히 초인플레이션으로는 독일이나 짐바브웨의 사례가 유명하지만, 최고 기록을 세운 것은 의외로 헝가리다. 숨겨진 1인자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최대 월 98%의 인플레이션을 자랑했는데, 2차대전 이후 나라 전체가 독소간 전쟁으로 말 그대로 평탄화가 되면서 물자는 부족한데 수요는 늘고, 여기에 정부가 아무 생각없이 돈을 막 찍은 결과 1945년부터 1946년까지 15시간당 물가가 2배씩 뛰는 초막장 인플레이션이 또 일어났다. 역사상 평균적으로 2번째로 물가가 빨리 오른 짐바브웨 인플레이션의 경우 1일에 2배씩 뛰었다는 것에 비교하면 별 차이 아닌 것 같겠지만 계산해보면 이는1달에 1.3경 배[13]의 물가상승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1944년 6월 30일에 1미국 달러당 33.5펭괴이던 환율이 1945년 8월(앞으로 모든 날짜는 일을 명시하지 않으면 그 달 마지막 날)에 1,320펭괴, 1945년 10월에 8,200펭괴, 1945년 11월에 108,000펭괴, 1945년 12월에 128,000펭괴가 되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1946년의 첫 7개월에 비하면 매우 안정적이었다. 1946년 1월에 795,000펭괴, 1946년 3월에 175만 펭괴, 1946년 4월에 590억 펭괴, 1946년 5월에 4경 펭괴가 되더니 7월에는 46양 펭괴(460,000,000,000,000,000,000,000,000,000 = 4.6×1029)까지 올라갔다.

이에 도무지 버틸 수가 없자 1946년 7월 31일부로 결국 화폐 단위를 펭괴에서 포린트로 바꿨다. 교환 비율도 무지막지했는데 40양[14]펭괴당 1포린트였다. 그 덕분에 1946년 7월 한 달 동안 화폐가치가 2억 7,000만 분의 1로 떨어졌고, 8월이 되자 시중에 있는 모든 펭괴 지폐를 다 합쳐도 당시 환율로 미국 돈 0.1센트밖에 안 되는#, 말 그대로 휴짓조각보다 못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3.4 중화민국

의외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화민국의 초인플레이션도 꽤나 지독했다. 주요한 원인은 전쟁으로 인한 물자유입부족과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 때문.[15][16]

인플레이션 자체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시작되었으나 1939년 6월까지는 완만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1939년 6월 이후로 광저우 함락, 주요 철도노선 단절, 왕징웨이 괴뢰정권의 등장, 난닝-하노이 노선의 차단과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이전까지 년당 수십%(...) 정도의 완만한 인플레이션은 순식간에 몇백% 단위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1945년 간신히 전쟁은 승리했으나 하도 지독하게 황폐화 당한 상황에 전쟁에 승리했다고 이전의 문제점들이 한 순간에 해결될리도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동부 연안의 산업시설들을 가동시켜야만 했으나 소유권을 둘러싸고 또 다시 갈등이 벌어졌다. 우선 화폐문제가 있었는데 왕징웨이 괴뢰정권이 발행한 '저축은행권'과 국민당 정부가 발행한 '법폐'와의 적당한 교환비율 때문에 대공황이 발생한것이다. 국민당 정권은 '중국의 정통정부'라는 명목으로 법폐의 가치를 높게 책정했는데 문제는 1944년도에 이미 일본군이 국민당 정부의 법폐를 낮은 가치로 저축은행권으로 바꿔버린것이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400위안은 불과 1위안으로 추락되었고, 결과적으로 화폐가 동부로 유입되어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또한, 일본 자본이 소유하던 생산 설비의 전후처리 또한 문제가 많았는데 임시로 중앙정부가 관리하면서 원주인에게 환수하는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이러한 방칙을 두고 충칭-청두 지역의 자본가들이 '항일전쟁을 수행한 우리들이 그 보상으로 받아야한다.'라고 주장하였고, 동부 연안가의 자본가들도 '경제를 운영하는것은 우리들이 더욱 능숙하다.'라고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며 충돌했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정부는 기업을 국영화시켰으나, 이는 관료자본의 부패를 가져왔고 국민당 정권에 강한 반발을 가져와 국공내전의 패배 원인중 하나로 작용했다.

한편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명확한 생산물(농산물)'을 확보한 농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층의 수입원은 급락했다. 농민층도 20% 정도의 소득이 줄어들었고 일반 공무원은 무려 90% 정도의 수입이 인플레이션으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여기에 국공내전의 재개로 다시 엄청난 지출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국민당 정부의 화폐의 가치도는 급격히 떨어져갔고 1946년 6월 한달만에[17] 350%가 넘는 인플레이션이 닥쳤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47년도에 들어오면서 국민당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졌고 1월달에 다시 300%, 2월달에 1,100%, 5월달에는 3,000%, 10월달에는 5,000%, 1948년 2월에는 무려 18,000%가 폭등했다. 결국 1949년 8월 상하이가 함락되기 직전에는 한달만에 600,000(60만)%가 넘게 오르며 1,368,049%의 물가지수를 기록했다.

이렇게 인플레이션이 감당이 되지 않다보니 상인들은 하루에 몇번씩 가격표를 바꿔야했고 나중에는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가능한 한 늦게 팔아야 손해를 덜 보기 때문이었다. 국민당 정부도 이를 예측하고 1945년도 초에 화폐개혁을 위한 새로운 화폐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물가폭등은 국민당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겨버렸다. 1947년 2월에 물가를 통제하고 임금을 동결하였으나 불과 석달을 가지 못해 모든 조치를 해제하였다. 국민당 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1948년 8월 23일, 구권과 신권의 교환비율을 300만분의 1로 정한 금 본위제 기반의 통화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이미 상황은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넘겨버렸고, 결국 정부의 지시에 순응한 중산층만 파산시키는 대재앙을 남긴 채 공허히 끝나버렸다. 부자들은 정부를 불신해 화폐개혁에 협조하지 않았고 물건을 강제로 유통시키려고 하자 밀수, 나중에는 아예 물건을 상하이 등의 대도시로 옮기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타 도시의 지방관이 물건이 빠져나가는걸 금지하기도 하였다. 결국 화폐개혁을 담당하던 장징궈는 10월 31일 화폐개혁이 실패한것을 인정하고 11월 11일 금, 은, 외환의 소지를 허용하였고 이는 사실상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저지하는걸 포기했다고 자백하는 꼴 이었다. 이러한 화폐개혁은 국민당 정권에 대한 지지를 결정적으로 추락시켰고, 국공내전에서 민심이 공산당으로 돌아서게하는 요인이 되었다.

4 초인플레이션의 종말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정부의 지속적인 통화 발행은 통화발행 외에는 정부의 재원 조달 수단이 없기 때문에 시도된 것이다. 민간에서는 정부의 지속적인 통화발행과, 역시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을 예상한다. 화폐수요(L)는 인플레이션 기대에 영향을 받아 감소하는데 이는 한층 더 높은 물가상승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는 경기침체와 (실질)세수감소를 막기 위해 통화량을 더 늘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은 지속된다.

이러한 초인플레이션은 사람들이 향후 오랜 기간 통화발행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정부재정의 건전성과 신뢰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통화정책만으로는 초인플레이션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초인플레이션도 언젠가는 종식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토마스 사전트는 저서 '초인플레이션의 종말'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폴란드 등 역대 초인플레이션과 그 종식 사례를 연구했는데, 이들 국가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통된 특징이 나타났다. 첫째, 초인플레이션 진행 도중 물가상승이 통화량증가를 선행한다. 둘째, 초인플레이션은 일정시점에 갑자기 사라진다. 셋째, 초인플레이션 종료 이후에도 일정기간 통화량 공급은 증가한다.

대부분의 초인플레이션 현상은 '재정개혁'으로 종식되었다. (새고전학파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지만, 초인플레이션의 종식은 종종 재정적인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5 가공 매체

애니메이션 C에서는 제니퍼 사토타케다자키 시게오미가 공모해 일본에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엔화를 쓰레기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달러가 새로운 공식화폐가 되는 걸로 끝.

라이트노블 무책임 남자 시리즈(무책임함장 테일러의 원작) 에서는 타일러가 라르곤 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 후 우주태풍의 위기를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전우주 스케일의 초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 픽션이니만큼 몇달도 안되는 사이에 10억분의 1 디노미네이션 끼워서 '자'를 넘어간다. 떡하니 자기 이름으로 화폐단위를 삼아 놓고서는 느긋하니 다음 수 단위가 어떻게 나가는지 읊는 장면이 압권.

라이트노블 만능감정사 Q의 사건수첩에서도 초반부에 세토우치 리쿠가 리사이클 숍의 경영 정상화를 위하여 위조지폐 트릭으로 초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18] 원래 8만 3천엔 하던 니시이케부쿠로 3정목의 원룸멘션 월세가 순식간에 40만엔으로 올랐고, 180엔 하던 JR 기본운임이 3,200엔(!)까지 치솟았으며[19], 곧 영원히 욕먹을 회사[20]와 도쿄가스는 아예 광열비를 달러로만 납부받는 상황이 벌어진다.[21] 작중에서 이전가격을 명확히 밝힌 장어 1조각(120엔)을 기준으로 하면 대략 33시간만에 37.5배 인상되었으니그나마도 햄버거는 더 올랐다 위에서 언급한 헝가리나 짐바브웨를 아득히 쌈싸먹는 캐막장 인플레다.물론 주인공 린다 리코의 활약에 의해 검거되고 물가는 정상화되기는 하지만.[22] 만화판에서 공예관 토도 슈이치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와중에도 이익을 챙기려 발버둥치던 높으신 분들이 있었던 모양.

온라인 게임 내에서도 운영자들이 경제 밸런스 잡는 데 실패하거나, 작업장에서 돈을 무한히 찍어낼 경우 생긴다. 대표적으로 메소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는 메이플스토리. 또한 최근에 발생한 엘소드의 인플레이션이 이런 경우이다.[23] 게임으로 배우는 경제! 나를 빼놓으면 섭하지

웹 게임인 동물농장에서는 한 때 치트오매틱으로 돈을 최대 21억 4,748만 3,647포인트로 미친 듯이 불리고 탐험 컨텐츠의 최종 보스를 주무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당연히 아이템 시세가 박살났고 그 후로도 여전히 박살난 상태라서 와글와글 장터에서 좀 귀해보이는 물건이다 하면 몇 백만, 몇 억 포인트 단위로 입찰되는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미국 게임도 그런다. 예를 들어 로블록스란 웹 게임은 환전 시스템이 있었다.틱스(Tix, ticket의 줄임말)를 로벅스(Robux,게임화폐이다. 유로.)바꿀수 있었는데 틱스가 삭제된다는 무슨 미국달러에서 센트를 빼는 소리를 했다. 지금은 삭제되었지만 아무튼 삭제 되기 전에는 기간이 남아 있었는데, 그 기간동안에는 로벅스1:틱스30까지 올라갔었다.

6 관련 문서

  1. 정확히는 129.75배
  2. 무가베의 전공은 순수 인문학이다.
  3. 더 황당한건 당시 국민당 정부가 중일전쟁 전비 마련을 위해서 통화를 남발하면서 스스로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4. 놓지마 정신줄에서도 비슷하게 생긴 화폐가 등장했었다.
  5. Continental Currency로, 직역하면 대륙의 화폐 대륙의 기상과는 다르다! 이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뭔가 그런 구석이 있긴 하다. 사실은 당시 대륙회의가 발행한 화폐
  6. 독일의 전시 국채 상환 액수만으로도 연합국의 배상금을 초과할 정도.
  7. 연합국에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지폐를 찍어내지는 않았다. 연합국이 요구한 배상금은 금 마르크로 지폐는 해당이 안 된다.
  8. 세계 대공황의 막장 이미지와 겹쳐 이게 10년뒤인 1929년의 대공황기의 일인줄 아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88만원 세대같은 유명 대중서에서도 그런 병크를 저지른 적이 있는데, 세계 대공황기의 문제는 인플레가 아닌 디플레이션이었다. 돈가치는 떨어지고, 사람들은 물건을 안 사려고 해서 문제. 독일 입장에서는 용광로탕을 빠져나왔더니 냉탕으로 들어간 기분이었을 듯
  9. 당시 환율 달러당 4.2마르크, 원으로는 약 1억4천만원.
  10. 이 사진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이 한국은행 박물관에도 있었다. 현재는 없다고 한다.
  11. 이를 위해 농지와 산업시설을 담보로 하는 렌텐은행이라는 새 은행을 설립하였다.
  12. 인플레만이 원인이 아니라 유태인의 재산몰수도 한 원인임.
  13. 130,000,000,000,000,000(=1.3×1017)%
  14. 4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 4×1029, 1양은 1해의 1억 배
  15. 흔히 국민당 정부의 화폐투기로 그렇게 되었다고 잘못 알려졌으나 1945년 이후로 화폐발행이 인플레이션보다 높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16. 중일전쟁 기간 일본은 중화민국의 경제를 날려버리기 위해서 위조지폐를 제조했지만 이 잘못된 경제 정책때문에 일본이 만든 위조지폐양보다 수십배나 되는 통화가 유통되어서 쓸모없는 짓이 되어버렸다.
  17. 1945년 9월의 물가지수를 100%로 환산해서
  18. 초 인플레이션 상황에서는 현금보다 현물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
  19. 그나마도 사철의 반값이다
  20. 첫 출간은 2010년이라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기 1년 전이었다.
  21. 소설 내의 초인플레이션은 꽤 세세하게 묘사되는데, 위폐 보도 이틀 후 패스트푸드점은 치즈버거세트 35,200엔, 데리버거세트 55,000엔, 주간소년점프 최신호 6만엔, 도시락 6만엔, 오이 5개 6천엔/80센트, 장어 1조각 4,500엔/1달러, 무조림 100g 5,200엔/1.2달러, 톳나물 100g 6천엔/1.5달러, 청어조림 100그램 6,800엔/2달러, 카페의 스몰사이즈 블렌드커피 22,000엔/2.9달러, 택시 기본요금 42,000엔, 원래 40,900엔이던 하네다-나하 전일공 요금은 312,000엔....
  22. 애초에 작중에서 위조지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빠르게 정상화 된 케이스다. 실제로 위조지폐가 돌아다녔다면 빠른 정상화는 어림도 없다.
  23. 단, 이 사례는 작업장에서 변조핵을 사용해 게임 내 화폐를 말그대로 찍어낸 경우이다. 아무리 게임내라도 인플레이션이 그리 쉽게 일어나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