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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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산스크리트어शाक्यमुनि(샤카무니)
중국어釋迦牟尼
한국어석가모니
로마자 표기Śākyamuni
본명산스크리트어सिद्धार्थ गौतम(싯다르타 고타마)
팔리Siddhattha Gotama
한국어고타마 싯다르타
로마자 표기Siddhārtha Gautama[1]
가족관계父: 슈도다나
母: 마야 부인
夫人: 아쇼다라
子: 라훌라
생몰년도B.C 563년 ~ B.C 477년
"나는 일체에 뛰어나고 일체를 아는 사람.

무엇에도 더럽혀짐 없는 사람.
모든 것 사리(捨離)하여
애욕을 끊고 해탈한 사람.
스스로 체득했거니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 하랴.
나에게는 스승 없고, 같은 이 없으며
이 세상에 비길 이 없도다.
나는 곧 성자요 최고의 스승,
나 홀로 정각(正覺) 이루어 고요롭도다.
이제 법을 설하려 카시(迦尸)로 가거니
어둠의 세상에 감로(甘露)의 북을 울리리라.

-<잡아함경>. 득도 후 처음으로 만난 우파카라는 자의 질문에 답하여.

다른 누구로도 말고,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2]

1 개요

깨달은 자[3]
붓다(부처)라고도 불린다.

석가모니는 산스크리트어 '샤캬무니' 를 중국어(한자어)로 음역한 것으로, 샤캬는 그가 속했던 부족, 무니는 '성자'를 의미하므로 석가모니란 '샤캬(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무니에는 고행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본명은 싯다르타 고타마(주로 역순으로 쓴다. 고타마가 성씨이다.) (숫타니파타에서는 고다마 라고도 불린다.) 로, 샤캬족의 소왕국인 카필라에서 '라자'[4] 슈도다나마야부인 사이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 사방의 성문 밖에서 노인과 병자와 망자 등을 만나 인간의 생애가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생로병사)으로 이뤄져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여 결국 왕위를 버리고 출가. 많은 수도 끝에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치고 많은 이들을 교화하다가 열반하였다.

석가모니의 수행법은 동양 문화권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일생

인간이되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 그런지 얽힌 전설 및 일화도 가지각색이다. 우선 어머니 마야 부인이 인도에서 신성시되는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했다.[5] 마야 부인은 당시 인도 풍습에 따라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룸비니 동산[6]에서 탐스러운 무우수 나무를 향해 손을 뻗다가 산기를 느끼고 그곳에서 산실을 차렸다. 석가모니는 마야 부인의 겨드랑이로 나와[7], 육방, 혹은 팔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8] 하지만 마야 부인은 출산후 7일뒤 숨을 거두고 만다.

그가 태어나고 난 후에 아버지인 정반왕이 예언자 아시타 성인에게 예언을 들었는데, 만약 궁정에서 그대로 자란다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한다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말도 들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고타마를 돌봤으며 아버지는 왕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그에게 바깥을 잘 안보여주고 궁정에서만 호화롭게 자라게 했지만, 알다시피 몰래 바깥을 경험한 싯다르타는 뭇 삶(중생)들의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금수저 반박할 수 없는 금수저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하면 덧나냐

다른 일화로는 젊어서는 무예에 통달하여[9] 무술대회에서 사촌 데바닷타나 아난다 같은 강무자를 물리치고 우승했으며, 성난 코끼리를 잘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냈을만큼 평정심을 유지하는 경지 또한 매우 원숙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외의 기록에서 부처의 경지에 이른 뒤, 다치거나 몸에 이상이 온 사례가 있는데, 데바닷타[10]가 갑자기 돌을 벼랑 위에서 굴려 석가모니를 죽이려 했을 때 이를 피하다 튄 돌에 발가락을 맞았을 때와[11] 열반 직전에 대장장이 순타가 공양을 드리고 식중독 증세를 보인 정도.[12]

최후에 열반한 후 다비를 거행하였을 때, 사리가 무려 여덟 이 나와 당시 석가모니를 조문하러 온 8부족의 왕들이 한 바라문의 조정에 따라 나눠 가졌다고 한다.[13] 뒤늦게 온 한 나라는 남은 재를 가져갔고, 조정을 맡은 바라문은 사리가 들어있던 병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2.1 석가모니불의 오도송(悟道誦)

많은 생을 윤회[14]하면서 나는 치달려왔고 보지 못하였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괴로운 생은 거듭되었다.
집 짓는자여, [이제] 그대는 보여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다.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는 부서져버렸다.

anekajaatisam*saaram* sandhaavissam* anibbisam*/
gahakaaram* gavesanto, dukkhaa jaati punappunam*//
gahakaaraka dit*t*hosi, puna geham* na kaahasi/
sabbaa te phaasukaa bhaggaa, gahakuut*am* visan#khatam*/
visan#khaaragatam* cittam*, tan*haanam* khayamajjhagaa//”

-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이 팔리어에서 직접 번역 -

2차출처에서 재인용

위 내용은 담마빠다(법구경)의 153번과 154번의 게송이다. 영문 번역본

3 사상

P025.jpg

그의 중심 사상은 역시 인류가 혹독한 삶으로 고통받는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는 데 있다. 그 가르침이 바로 불경이며, 이는 후대에 그를 따른 수많은 이들에 의해 정립되고 확장되었다.[15]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성, 위엄, 절대의 모습보단, 제자에게 신통력을 내보이지 말고[16][17] 수행에 정진하라고 가르치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다.

당시 인도는 수많은 종교와 수많은 사상들이 혼잡하게 있어서 어떤 것이 진리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석가모니는 많은 질문들을 받았는데 이들 사이의 대화내용이 결국 불교의 경전이 된다. 대화 내용중에는 민감한 내용을 직설적으로 물어보거나 석가모니를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도 많았다. 석가모니는 일관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설하였다.

붓다가 께사뿟따라는 깔라마들의 성읍(북인도의 조그만 도시)을 방문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붓다에게 물었다.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수행자와 성직자들)이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칭찬합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매도하고 욕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합니다. 이런 존경하는 사문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그들에 대해서 저희들은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럽습니다."

그대들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리라고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스스로 깨닫고 알게되면 그 때에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 깔라마 경 중에서[18]

역사학적으로 따자보자면, 석가모니는 그 당시 힌두교카스트에 반대한 인간 평등을 주장한 식자에 가깝다. 힌두교는 불가촉천민을 포함해서 5단계로 계급을 나누고, 전생에 업(카르마)를 져서 현세에 이런 걸로 태어난 것이라는 사상을 주장한다. 그러니 내가 현생에 그 계급에 맞는 일을 열심히 하면 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는 지금 계급이 아닌 더 높은 계급으로 환생한다든지 바라문으로 환생할 수가 있다고 가르쳤다. 인도의 지배층은 이 힌두교의 가르침을 널리 설파해 하위계급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고 현대에도 이러한 문화는 인도에 뿌리깊이 박혀 있다.[19]

그런데, 석가모니는 카스트 제도를 강력히 반대하고 현세의 계급에 상관없이 수행을 함으로써 여성이나 천민 등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삶의 끝없는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이었다. 이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일부 권력자들의 열성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아쇼카왕 이후의 인도에서는 타 종교의 요소들을 받아들인 힌두교가 세를 급격히 불려 민중들을 적극 공략해 인도의 사상의 대세를 점하게 된다.

4 가족

아버지 정반왕과 어머니 마야부인,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자바티, 부인 아쇼다라, 아들 라훌라가 있다. 아쇼다라와는 16세때 결혼했다.
후에 고타마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어 돌아왔을 때 라훌라는 모친인 아쇼다라를 통해 '왕이 되려 하니 보물을(유산을) 주십시오.'라는 요청을 전하게 했다. 이에 석가모니는 즉석에서 라훌라를 출가시켜 불도를 닦게 하였다.
정반왕이 죽자, 새어머니 마하파자바티와 아내 아쇼다라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 사촌 형제로 아난다아나율, 이복동생으로 난다가 있는데, 이들 셋 다 석가모니를 따라서 출가했다.[20] 참고로 석가모니를 일생의 원수로 삼고 그를 해하려 했다 알려진 데바닷타 역시 석가모니 붓다의 사촌이다.

이렇게 왕족 중 뛰어난 남자는 대부분 석가모니를 따라 출가하는 싹쓸이 사태가 발생하자, 정반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이을 후계자 문제를 제기, 이후 승단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집안을 이끌 장자는 출가할 수 없으며, 출가시엔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규칙을 새로 제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정반왕의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다 출가했기 때문에 정반왕 사후 샤카족은 부처님 당대에 인접한 강국 코살라국[21]의 침공으로 멸망하나, 한편으론 출가한 석가족이 있었기에 샤카족이 사라지는 건 피할 수 있었다.

사실, 전대에 재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비도다바 왕자의 아버지 파세나디 왕이 샤카족에게 사돈을 맺자고 여자를 보내달라고 하자, 코살라국이 힘만 센 야만스런 나라라고 경멸하던 샤카족은 비천한 출신의 여자를 왕족이라고 속이고 시집보냈다.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비도다바인 것. 비도다바가 아직 왕자일 적에 샤카족을 방문했는데, 그들이 뒤에서 모친 얘기를 꺼내며 몰래 비웃는 것을 듣고는 앙심을 품었다. 결국 왕위에 오른 뒤에 샤카족을 침공했다. 이 때 석가모니는 3번에 걸쳐 군대 앞을 가로막아 설득하여 군대를 돌려보냈으나, 그래도 다시 군대를 보내자 4번째는 결국 치뤄야하는 업이라는 것을 알고 슬퍼하면서도 막지 않았다. 여담으로 비도다바도 얼마 뒤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 때의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코살라국이 샤카족을 학살하자 마지막 왕이었던 마하나마(석가모니의 사촌 뻘이었다고 함)는 코살라국의 왕에게 '내가 저 호수에 들어가 있는 동안이라도 학살을 멈춰달라'라고 간청했다.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봤자 얼마나 오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이를 허락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 마하나마가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들어가 보게 했다. 그런데 마하나마는 호수 바닥에 자신의 몸을 묶어 둔 채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

달리 말하면 여래의 가르침이 의외로 현실세계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또한 수행에 있어서 엄숙함이나 교조주의를 최대한 배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이는 초기의 불교 전파에 매우 큰 강점이 되었다. 풍속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그 풍속을 지키며 불법을 따르고 싶다고 하니 다 허락하는가 하면, 지체높은 집안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랐다가 출가한 제자가 발에서 피를 흘리자(당시 출가자들은 맨발로 다니는 게 보통이었다) 모든 비구들에게 신발을 신게 하기도 했다. 또 라훌라가 탁발갔다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숙소를 뺏겨 화장실에서 자는 걸 보고 당시 계율이던 '1인 1실'을 '2인 1실'도 허용하는 것으로 바꾸기도 했다.

5 제자

팔리어 삼장에 의하면 석가모니의 첫 제자는 아프가니스탄 발흐(Balkh) 출신의 상인인 TrapusaBahalika이다. 현장에 의하면 이둘은 붓다에게 머리카락을 받고 발흐로 돌아갔다고 한다. [22] #

6 절의 전각

'대웅전(大雄殿)' 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이름이 붙은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불상으로 표현할 때는 좌선하듯이 양 손을 하단전에 모으고 있는 선정인이나, 선정인에서 한 손을 풀어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마라 파피야스 항목 참고)을 수인으로 취한다.

7 국내에서의 인식

종교인들 다수가 종교를 믿는 이유가 기복신앙인(...) 한국에서는 가끔 존재감이 아미타불이나 미륵, 관세음보살 등에 밀리기도 한다. 기원할 때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라고 하고 석가모니불 독송은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불교의 창시자이자 교조이므로 대부분의 절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고(위에도 나오듯 절의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곳이다), 가장 많이 신앙하고 있다.

어째서인지 무속에서는 현재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최고신으로 인식된 것 같다.[23] 이는 석가모니가 이 시대의 부처(현존불)라는 가르침이 변질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륵을 더 높이 치기도 하는데, 실제 불교 내에서도 미륵이 이 세계에 내려오려다 석가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더 완전한 세계의 부처가 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미륵의 위치가 높긴 하다.

삼국시대/고려시대에 불교 교단이 민중을 압제했고 현세의 불교 교단의 이미지가 석가에 투사됐다는 분석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학설을 소개할 경우 출처가 필요합니다.

8 기타

그 일생에 워낙 신비한 전설이 많이 섞여 있는지라 한 때 서양학자들은 그 실존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이곳은 석가모니불이 태어난 곳이므로 세금을 면제한다'고 쓰여진 아소카 왕의 석주가 발견되면서 역사상의 실존 인물임이 확정. 그리고 이로써 룸비니 동산의 위치도 확정되었다.

현존불이기 때문에 각종 고전 및 현대문학, 그리고 창작물에 등장하지만 최강이 아닌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서유기.

그 사상이 워낙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사유구조속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다. 유일신을 주장하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아브라함의 종교)가 모두 같은 '아프로아시아'어족에서 나왔듯이, 같은 어족에서 비슷한 사유가 나오는 경우가 있고 그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연구도 있는 것이 사실. 무려 3372개의 언어와 다양한 인종이 존재하는 인도[24]에서(사멸하는 언어를 가정하면 과거에는 더 많았을 수도 있다) 태어난 석가모니가 실제 모어로서 사용했던 언어는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은 충분히 들 수 있다.

환빠들은 석가모니불 또한 단군의 자손이라 주장한다(애초에 단군은 특정인물도 아니지만, 이들은 그렇다고 우긴다).(...) 주장의 출처는 한국외대 학사, 뉴욕 시립대학교 석사학위, 동국대 철학과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강상원[25]인데, 옥스퍼드 산스크리트어 영문 대사전 509페이지 석가모니 항목에 나와있는 산스크리트 어를 해석하면 석가모니는 단군의 자손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혀 신빙성이 없고 근거도 명확하지 않다. 어짜피 자기 분야가 역사학도 아니고, 철학과 박사가 이런 주장 해 봐야 학술적으로 의미 없는 짓이다.

여담이지만, 염세주의의 대부인 쇼펜하우어칸트와 인도철학의 기반에서 자신의 사상을 만든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근본은 자연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적 사상이며, 불교가 기반이 되는 부분이 많다. 문제는 상당히 왜곡해서 이해했다는 거. 뭘 어떻게 착각했는지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허무의 종교로 봤다.[26][27] 그리고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은 현대에까지 불교에 대한 상당한 오해와 편견을 남겼다.[28]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에서 공통분모가 있다면 집착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불교에서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지 "어차피 허무하니 매달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한국 불교계에서는 불경을 독송하거나 할 때 "석가모니"를 "서가모니"라고 읽기도 한다. "석가여래" 역시 "서가여래"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관습이 영향을 끼쳐서 원불교에서는 아예 "서가모니"라고만 쓰며, 불교 쪽 영향을 받은 소규모 종교에서도 서가모니/서가여래라고 씀이 관례로 정착한 사례가 있다.

조선의 진묵스님이 석가모니불의 환생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 이런 스토리는 주로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에서 인용된 것이다. 부처님 이제 환생 안 하신다면서요.

9 미디어에서의 석가여래

  •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는 석가모니불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 자체가 석가모니에 대한 전기 만화이다.
  • 디지몬 시리즈샤카몬이 석가모니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 세인트 영멘에서는 세기말을 무사히 보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본에 내려와 휴가 중이다.
  • Fate/EXTRA에서 석가모니가 등장한다.
  • 근육소녀대의 악곡 석가(근육소녀대)의 제목이기도 하다. 단, 가사는 종교적인 내용과 별 관계가 없는 (결말이 좀 많이 끔찍한) 사랑 노래.
  • 신드로이아 연대기 - 박건 작가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으로써 최상위급의 신성을 획득한 초월자중 한명.
  • OH, MY GOD!에서 다른 신들과 더불어 이사로 근무중이다.
  •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는 인민의 눈을 멀게 한 악인으로 엄청나게 까인다. 석가모니만 까이는 건 아니고 메이저 종교 지도자들은 다 까인다.(예수, 공자 등)
  • 서유기에서는 불교성향의 이야기답게 가장 강한 존재로 나오며 선신의 최고위인 옥황상제도 어쩌지 못하는 손오공을 제압하거나 선인들이나 보살들조차 잡지못하는 강력한 적을 잡는 존재로 나온다.
  • 세인트 세이야에 등장하는 골드세인트 아스미타샤캬, 시지마는 설정상 신불의 환생이다. 다만, 석가여래를 콕 집어서 설정한 것은 아니고 부처 혹은 아라한이나 사다함 등 일정한 경지에 이른 수행자가 환생했다고 보아도 무방.
  • 일본 드라마 서유기(2006) 마지막화에서는 손오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잠깐 보여줬으나 어쩐일인지 납치되어 삼장법사 일행은 재결성, 여래를 구출하러 간다.[29]
  1. 산스크리트어 로마자 표기.
  2.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열반경에 나오는 구절로 다만 원전(팔리어 경장;디가 니까야)에는 등불이 아니라 섬이었으며, "누구든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뒤에나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으로 삼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였다는 지적도 있다.
  3. 부처란 Buddha, 즉 '깨달은 자'의 통칭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불과 불교가 탄생하기 전에도 부처님은 존재했고, 앞으로도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석가모니 이후에 정각을 이룬 존재가 없으므로 한국 등의 불교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부처님이라 하면 이 석가모니불을 가리키며, 절의 대웅전에 있는 불상은 석가모니불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대상일 수도 있다. 모든 교회의 예수상이 예수 한 존재를 표현한 것과는 다른 점이다.
  4. 보통 '왕자'로 번역되지만, 인도의 라쟈 개념은 그와는 좀 다른 개념이다. 지방 유력자(마하라쟈)나 그 자손으로 보는 게 더 가깝다. 간디의 칭호가 마하트마(위대한 사람)인 점을 감안해보자. 프린스와 비슷한 개념으로 봐도 될듯.
  5. 서양 학자들은 이를 수태고지와 같은 처녀수태로 보기도 하는데, 동양의 태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다.
  6. 흔히 인도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재의 네팔에 있으며 인도와의 국경 인접지역에 있다. 불교 성지일 뿐만 아니라 네팔의 관광 수입을 책임지는 곳 중 하나이기 때문에 네팔에서는 매우 민감하게 여겨 룸비니 동산이 인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7. 다분히 힌두교적인 설화로, 왕가의 자손임을 상징한다. 힌두교 신화에선 브라만 계급은 신의 입에서, 크샤트리아는 겨드랑이에서, 바이샤는 무릎에서, 수드라는 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저런 신화에서조차 언급이 없던 불가촉천민은 지금도 인도에선 수드라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다. 실제론 인도 인구 중 60프로 정도가 불가촉천민이다.
  8. 불교에 나오는 모든 말도 안 되는 초능력은 무언가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예들들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태어나셨을때 동쪽으로 일곱걸음 걸어가서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하늘 위 하늘 아래 내가(=모두가) 제일 존귀하다. 온세상이 괴로움이니 내가 이를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를 외쳤다 하는 설은 태어자나마자 7발자국을 걸어갔다는 6도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실 분을 뜻하며 천상천하를 외친것은 원래 부처님이 되실 분이셨다를 뜻한다을 외쳤다고 한다.
  9. 일설에는 이 무예가 칼라리파야트라고 하기도 한다.
  10. 승단의 수행을 더욱 엄격히 할 것을 주장하는 등 나름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문제는 이 개혁안이 당시 기준으로 보기에도 극단적으로 엄격했으며 현대 회사돌아가듯이 수행자를 다룰려고 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떠난 제자. 석가모니 붓다의 사촌 형제이며, 7 ~ 8세기 인도의 북부에는 데바닷타의 극한 고행 방침을 따르는 추종 수행자들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떠날 당시에도 따른 제자 및 추종자들이 있었던 만큼 그 갈등의 여파를 오늘날 불교 설화의 데바닷타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11. 이 때에 발가락에서 나온 피에서 꽃 칸나가 피어났다는 설화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돌은 석가모니를 피해 튕겨나갔다고 한다.
  12. 서유기에서 전갈 요괴의 도마독(독침)에 쏘이고 고통스러워 했다는 표현이 있긴 하나 단순한 창작물이다.
  13. 이 사리를 진신사리라고 하며, 그 중 일부는 한국에도 전해져 몇몇 절에 봉안되어있다. 이 중 신라시대 자장대사가 가져온 사리를 5군데 절에 모셨는데 이 5곳의 절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그리고 최근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80%는 진실, 나머지는 위조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1개의 사리가 3개로 늘어난 예가 보고된 바 있다.
  14. 일각에서 초기불교에 윤회의 개념이 없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오도송과 배치된다.
  15.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에는 불경이 없었으며 열반제자들에 의해 결집되었다.
  16. 물질적인 기적이 관련 설화에 나타난 경우가 아예 없진 않지만, 분량이 적고 그나마 불가피할 상황에만 일어난 수준이며, 오히려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도 인과응보의 세상 이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발언이 나오기까지 한다.
  17. 강을 건널 때 사공에게 부탁하는 걸 보고 물 위를 건너는 신통력을 발휘하는 수행자가 나타나 이를 조롱하자, "너님의 능력은 사공에게 동전 2닢을 지불하는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고 논박, 데꿀멍시킨 일화도 있다.
  18. 깔라마 경의 내용중 일부를 축약해놓은 것이다. 실제 내용은 더 길게 설명되어 있으며 석가모니의 대답은 깔라마 경 9번째 게송을 인용한 것이다. 중아함경의 가람경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으나 석가모니의 답변은 조금 다르다.
  19. 위에서 나왔듯 불가촉천민이 60%라면 신분 구조가 피라미드형이라는 얘기인데 이런 얘기 없이 그런 신분 차별을 이 시대에까지 받아들이는건 불가능하다.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을떄의 프랑스 신분 구조를 생각해보자
  20. 그 중에서도 난다는 미모로 유명했던 공주와 약혼식을 치르려는 중에 출가했으며 신부도 훗날 출가해 두 사람 모두 수행의 경지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21. 불교의 주요 후원자였던 파세나디 왕이 아들 비도다바 왕자의 반란으로 물러난게 결정적인 침공계기가 되었다.
  22. 중앙아시아불교는 이 둘에 의해 이른시기부터 시작된 걸로 보인다.
  23. 엄밀히 말하면 무속 세계관에서 천상계와 마주하는 극락세계의 지배자. 서유기 원전만 읽어도 그런 모습이 많이 반영되어있다. 옥황상제도 쩔쩔맨 손오공석가여래가 제압한다.
  24. 미국처럼 근대의 이민자들 때문에 인종이 다양한 것이 아니라 본래 원주민들 자체가 인종이 다양하다. 주한 인도대사의 말에 따르면 한국사람처럼 생긴 원주민도 존재한다고 한다.
  25. 이 인간이 그 유명한 전라도 방언이 세계 언어의 뿌리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26. 불교는 중도의 종교다.
  27. 기독교도 비슷한 왜곡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전도서.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쇼펜하우어가 불교 보듯이 전도서를 보면 허무 타령만 가득한 책으로밖에 안 보인다.
  28. 불교를 영지주의 비슷하게 잘못 해석한 것 같다. 실제로 지금도 서구권의 종단들은 신자들이 공부하는 도중에 영지주의 비슷하게 결론을 내는 것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
  29. 그리고 그대로 엔딩이다. 스토리를 네버 엔딩 스토리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서유기 세계관에서 부처님을 잡아갈 수 있는 존재가 있긴 한가? 작가가 전직 막장드라마 출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