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

(배설행위에서 넘어옴)

1 排泄: 생물 활동의 하나

모든 생물이 살아가기 위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남은 몸 안의 노폐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행위. 왠지 더러워 보이지만 실제로 더럽긴 하지만 생명체라면 정기적으로 해줘야 하는 지극히 당연하다면 당연한 행동. 제대로만 하면 정말 시원하고 좋다. 그리고 배설욕은 인간의 기본적 생리욕구 중 하나로 식사 후 포만감이나, 재채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며 적게 하면 건강에 이상이 오고 아예 안 하면 죽는다.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일본에서 20대 여성이 배설을 못 해 죽은 경우가 있다. 따라서 배설욕을 느낀다면 건강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시원하게 쏴주자. 물론 아무데서나 싸란 소리가 아니다

그런데 생물학적으로 소변은 배설물이지만 대변은 사실 배설물이 아니다. 응가는 몸 안으로 들어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입에서부터 항문까지의 소화기의 관 안쪽 공간은 일단 몸 바깥쪽 공간이라 '음식물이 신체장기를 스쳐가면서 영양분과 수분을 제공한 뒤 떨어져나가는 거' 라고 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대변은 배설물이 아니고 배출물이다. 단, 일상에서는 배설물이라고 하면 대변도 포함한다.

모 게임에서는 무녀의 품위를 나타내기도 하며, 배설에 대한 비하적 표현으로는 네똥기가 있다.

2 인터넷상의 그릇된 행위

배설행위라 한다. 주로 1번에 해당되지만 3번도 관련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간단한 를 들자면 야 언데드 존나 좋아같은 글.DC인사이드 등지에서 주로 사용되며,별 내용 없는 글들을 쓰는 걸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욕을 쓰거나 혐짤 등을 올리는 행위가 배설행위로 불리기도 했지만 사장되어 안 쓴다. 이런 글들을 똥글, 똥 혹은 배설글이라고 한다.

3 조선의 무장 장군

裵楔

1551~1599

조선무장.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수사로 있었으며, 최악의 패전으로 유명한 칠천량 해전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미리 자신의 수하들과 12척의 배들을 끌고 도주 퇴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배설이 남긴 12척이 이순신의 1척과 함께 명량 해전에 활용되었다.

3.1 일생

1583년(선조 16년)에 시행된 별과 호방(虎榜)에 급제하였으며, 1592년(선조 25년)에 방어사 조경(趙儆)을 따라서 남정 할 때에 조경이 왜군에 패하자 향병[1]을 규합하고 공을 세웠다. 이후 합천 군수가 된 배설은 1592년 9월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2]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3]로 임명된 상태였다.

"수령으로서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른단 말인가?"

참고로 당시 조선의 품계에서 군수는 정4품이고 첨지는 정3품이다.[4]. 배설은 이후에도 김면의 명령을 어긴다. 1593년 2월, 김면은 개령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군수 배설은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이때 김면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5]로 승진한 뒤였다.

배설은 합천군수에 임명되었다가 부산첨사가 되었고, 동래현령이 되었다가 밀양부사가 되었고,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4년에 충청병사로 간 원균의 후임으로 1597년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원균이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에게 수백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였다.

배설은 웅천을 급습해 잘 싸웠으나,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군량 200석, 전함 수십 척을 상실하였다. 칠천해전(漆川海戰)의 초반전인 14, 15일 싸움에서 패한 뒤, 15일 저녁에 원균이 여러 장수를 소집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으나, 배설은 전세가 불리함을 짐작하고 비밀리에 퇴각할 것을 모의했다.

7월 16일 적의 대선단이 원균의 주력 부대를 공격해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배설은 전세를 관망하다가 스스로의 판단으로 12척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여 안전을 도모하였다. 한산도로 물러난 뒤 군사 시설 및 양곡·군기와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남아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배설이 독단적으로 후퇴하면서 보존한 이 12척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을 해전을 펼치게된다. 배가 없으면 천하의 이순신도 어쩔 수 없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12척의 배를 남김으로써 이순신에게 역전의 기회를 남겨준 임진왜란과 명량 해전의 숨은 영웅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칠천량 해전 이후 복귀한 다음이었다. 이순신이 복귀하자 이순신에게 불복하고 탈영을 한 것이다.

배설의 탈영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에 관한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명량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전선을 인계해주는 것도 미적거렸고, 이에 이순신이 괘씸하다고 썼다. 사실 배설은 PTSD가 의심될 정도로 상당히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배설이 자꾸 나약한 모습만 보이고 병을 이유로 배에서 내려 잠시 육지에 가겠다고 하자, 이순신은 한마디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으니 장수된 자로서 함부로 먼저 혼낼 수 없다는 논지의 기록을 남겼다.[6]

그 후 이순신의 심증과 들어맞게 배설은 도망간다…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며 배설에게 호통을 쳤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재밌는 점은 탈영루트가 후덜덜하다는 것. 왜군 점령지대를 거의 단신으로 돌파해버렸다. 콜옵?

하지만 선조 실록 22권에서 ‘맹장(猛將) 배설이 수질(水疾)[7]이 있다’라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고, 난중일기 8월 21자에도 '배설이 제 종(奴)을 시켜서 소지[8]를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해서 조리를 하겠다고 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병을 핑계대는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병 치료를 위한 휴가 중에 모함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칠천량 패전 이후 배설에 관한 난중일기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7월 21일 양력 9월 2일<경자> 맑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보므로 패하던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元均)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7월 22일 양력 9월 3일<신축>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고, 원균(元均)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8월 12일 양력 9월 22일<경오> 맑다.
아침에 장계를 초잡고 그대로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안위)·발포만호(소계남)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들 편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 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해내지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나랏일을 크게 그릇치건마는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보성군수가 왔다.

8월 17일 양력 9월 27일<을해> 맑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장흥땅 백사정(장흥읍 원도리)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수사배설(裵楔)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9] 장흥의 군량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맘대로 모조리 훔쳐 나누어 갈 적에 마침 그때 이르러 잡아다가 호되게 곤장을 쳤다. 거기서 잤다. 배설(裵楔)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괘씸하다.

8월 18일 양력 9월 28일<병자> 맑다.
늦은 아침에 곧바로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멀미를 핑계를 대므로 보지 않았다. 다른 장수는 보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

8월 19일 양력 9월 29일<정축> 맑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를 하는 데, 경상수사 배설(裵楔)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 여기고 잘난 체 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너무도 놀랍다.[10]

8월 27일 양력 10월 7일<을유> 맑다.
그대로 어란 바다 가운데 있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게 아니오!"라고 말하였다.[11]

8월 28일 양력 10월 8일<병술> 맑다.
새벽 여섯시 쯤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 30일 양력 10월 10일<무자> 맑다.
그대로 벽파진에서 머물렀다. 정탐꾼을 나누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배설(裵楔)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관할 아래의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裵楔)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 좀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뭍으로 내려 몸조리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裵楔)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12]

9월 2일 양력 10월 12일<경인> 맑다.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도망갔다.

즉 배설은 전선을 수습해온 공은 있지만 명량 해전이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칠천량 해전에서의 PTSD까지 겹치면서 그가 탈영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13] 결국 전시 탈영이라 열받은 도원수 권율은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고, 왜란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인 1599년 고향인 경상도 선산에서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전시 탈영만으로 죽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을 모아 이상한 짓[14]을 꾸몄고 조정에서 배설의 부친과 형제를 붙잡아 인질로 잡은 후 배설을 체포해 처형했다고 한다 지옥의 묵시록 조선 버전 당시 선조와 조정이 하는 짓에 아주 정나미가 떨어진 것인지, 공황장애인지 의견이 분분한 사람이다. 이래나 저래나 미스테리한 인물.

놀랍게도 사람 보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순신난중일기에 배설에 대한 불만을 그다지 표시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 어느 정도 유능한 장수였다는 평가가 있기도 하다.[15]

후대에 와서 그가 쌓은 무공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원종1등공신(原從一等功臣)[16]으로 증직[17]되어, 1610년(광해군 2년)에 신원(伸寃)[18]되어 가선대부 병조판서(현 국방부장관)에 추증되고,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되었다.

3.2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창작물에서는 이름 때문인지 보통 언행이 구리거나 비겁한 장수 이미지로 잘 나온다.

공식적인 기록상 칠천량 해전의 초기대응 멤버였고, 왜선을 가라앉힌 전과도 올렸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이 한 일 중 중요하게 평가 받는 부분은 명량 해전의 기반이 되는 "12척을 끌고 퇴각했다"라는 부분이고, 명량 해전탈영했다가 잡혀 참수형를 당한 최후로 "도망치기 전문"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 김성한 선생의 장편소설 7년전쟁에서는 죽기 싫으면 싸게 싸게 도망가라고 선동한다. 나름대로 능력과 공적은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해서 다른 사람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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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으로 출전한 이후 칠천량에서 원균에게 후퇴를 건의하나 이를 묵살당하자 김완에게 자신은 칠천량 부근을 정찰을 하겠다며 다시 설득을 하라고 한 뒤 자신의 휘하 부하들을 데리고 함대를 이탈한다. 이후 숨어지내다 잔병들과 함께 나타난 이순신에게 상관을 운운하며 당당한 척 하다가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자 회령포에 함선을 숨겼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통제사가 내린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서 정작 휘하 부장들이 충언을 하면 호통을 치는 모순을 보여준다. 찌질이+공황장애 정도의 이미지로 합의를 한 듯 하다. 이후 협선을 타고 탈영한 것으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 김경진의 임진왜란(김경진)에서는 어느 정도 개념이 잡혀있는 캐릭터로 나온다.[19] 칠천량 해전과 명량 해전 사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시 자신이 지휘한 판옥선들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에게 합류하지만, 명량해전에 앞서 조선 조정에 대한 반감과 지휘권 분열에 대한 우려[20] 때문에 몰래 도주하는 걸로 말을 맞추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로 나온다.[21]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돌파하여 지나가버리고,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요시히로의 장남은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시마즈 가의 적본진 돌파'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었다.
  • 영화 명량에선 김원해가 분해, 전형적인 소인배. 실제와 마찬가지로 배 12척을 남겨준 것을 강조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이순신을 암살하려 하고 건조 중이던 구선에 불을 지르는 등의 패악질을 끼치고 자신은 조그마한 배를 타고 도주하려 한지만 안위의 저격활에 맞아 쓰러진다. 영화 명량을 바탕으로 나온 소설판에서는 활을 맞지 않고 도주했으며, 이후 권율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 300냥을 내걸었다. 실제 역사에서 그냥 도주한 것과 달리, 이순신 암살시도 등 온갖 막장행위를 한 인간쓰레기로 묘사했다는 문제가 있다. 그 때문에 배설의 후손들이 사자명예훼손죄로 소송을 걸었다.(기사) 그의 과가 있다고해도 이건 너무나도 심한 비하였기 때문에[22] 배설의 후손들이 아니더라도 보기 불편한 관객이 있긴했다.
후손들은 성주 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했다.(관련기사) 이 덕분에 배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일반인들도 실제 역사상 배설의 실체를 알아가고 있다. 또한 그 와중에 원균 옹호론마냥 이순신을 까기 위해 배설을 지나치게 띄우려는 유사역사학자들의 발악이 다시 준동하는 부작용도 발생했다.
결국 배설 후손들은 CJ엔터테인먼트를 고소했다.(관련기사) 하지만 경찰은 사자 명예훼손으로 인정하지 않고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겠다고 한다.(관련기사) 결국 역사상 배설의 진실만 널리 퍼진 꼴이 되었다.
  • 유승진의 웹툰 오성X한음에서는 무과응시생으로 등장. 율곡 이이를 까고 주위 사람들에게 성산의 표범이라 불리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진족인 니탕개가 조선인이라고 말하는 등 병신이다...
  • 임영대의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임진왜란(김경진)의 인물해석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배설에 대한 해석도 김경진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이며, 불순한 뜻으로 사람들을 모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하여 권율에게 잡히는 걸 피한 후 역모를 위해 정여립, 이몽학 등 여럿 역모와 반란 사건의 잔당 등을 규합하였다가 이순신이 군사를 일으키자 육지에서 호응, 이순신의 가족들을 보호하고 한양에서 합류하는 것으로 나온다. 온건한 이순신과는 달리 조선 왕실 자체를 혐오하는 강경파지만 함경도에서 선조정원군의 요청으로 들어온 여진족을 상대로 무모하게 진격하다가 전사한다.[23]

4 어니스트 토머스 베설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을 맡았던 어니스트 토머스 베설(Ernest Thomas Bethel)의 한자식 이름.

5 排設

연회, 제사 등에서 상을 차리는 일. 하필 1번(排泄)과 발음이 같아서 춘향전을 비롯한 고전소설에서 '배설하고 즐겼다'라는 글귀 등으로 이 단어를 보면 기분이 이상해질 수 있다. 이러한 동음이의어 문제 때문에 요새는 진설(陳設)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인다.
  1. 중앙 관군이 아닌 의병이나 지방의 병사
  2. 지례 전투, 김면 항목 전투일지 참조.
  3.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는 조선 시대에 있던 관직으로 중추원에 속하는 정삼품의 무관이다.(출처)
  4. 조선의 품계
  5.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직으로 병사라고도 함.
  6. 이순신 자신 또한 건강이 좋지 못할 때에는 상선에서 내려서 육지 진영에서 머물고는 했다. 병을 이유로 배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7. 오랜 물 생활로 생긴 병
  8. 자신의 뜻을 밝힌 글
  9. 명량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 판옥선 12척을 의미한다.
  10. 교서는 임금의 명령을 담은 글이므로 그 자체에도 예를 갖춰야 하는 게 당시의 예법이었다. 즉 이때의 배설은 임금이고 뭐고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이다. 난중일기에서는 이 구절의 바로 다음에 이방과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고 나오는데, 정황상 경상우수사란 고위직인 배설을 직접 처벌하긴 곤란하므로 그 아랫사람인 아전들을 대신 처벌한 것으로 보인다.
  11.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12. 이렇듯 이전의 난중일기의 기록과 이날의 일기를 보면 배설에게 딱히 다른 깊은 뜻이 있던 게 아니라 그냥 냅다 토낄까 궁리하는 걸 의심했던 것이 이순신의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3. 그 처참한 패배를 겪고 정신병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
  14. 반란음모(역모)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후대에 그의 공이 인정되어 증직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함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5. 자기 심복이던 권준과 교체되었을 때에도 아쉬움을 표방했었다.
  16. 정공신 다음 등급의 공신
  17. 죽은 후 벼슬을 높여줌.
  18. 억울함이 풀림
  19. 김경진의 의견에 따르면 그가 경상우수사로 부임하던 시절 판옥선이 25척까지 증가하였고 경상우수군의 굶주림도 어느 정도 해결시켰다고 말한다. 이 중 판옥선이 25척까지 증가했다는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이 나머지는 숨겨두고 판옥선 6, 7척만을 사용했을 뿐이지, 원래 경상우수영이 가진 판옥선은 25척이었기 때문. 그러니까 원균이 숨겨뒀던 판옥선을 꺼내기만 하면 됐다.
  20. 당시 두사람은 품계(=계급)가 같았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는 별정직인지라 품계는 수군절도사와 차이가 없었으나 이순신은 그 전에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를 받았었기 때문에 그동안 지휘에 문제가 없었던 것.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을 복직시키면서 본래의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가 아닌 수군절도사와 같은 정3품 절충장군 품계를 주었다.
  21.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과 이억기와 원균은 모두 품계가 같았던 걸 예를 들어 지나친 비약이라는 평도 있다. 그렇지만 당시 상황은 원균은 휘하의 배가 많아야 7척밖에 없어서 사실상 전력 외였고, 이억기의 경우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 참여하지 않아 발언권이 약한 데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 연합함대의 기동타격군 역할을 맡겼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의 직속 병력이라 할 수 있는 전라좌수영의 병력도 충실했었다. 그렇지만 명량 해전을 앞둔 당시 함대는 배설 휘하 함대로 사실상 이순신 장군이 배설을 통해 지시를 내려야 했던 상황이었기에 두 사람의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건 매우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럼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뭔데? 이 인간도 정3품 절충장군인데?
  22. 반역 모의설을 채택했다고해도 그래도 다소 심한 감이 있다.
  23. 여진족들이 조선 민간인들을 잡아다 인간방패로 삼은 것을 보고 빨리 구출하려는 조급함 때문에 무모하게 진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