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의 역대 황제 | ||||
3대 애황제 조방 | ← | 4대 폐황제 조모 | → | 5대 원황제 조환 |
연호 | 정원(正元, 254년 10월 ~ 256년 5월) 감로(甘露, 256년 6월 ~ 260년 5월) |
성 | 조(曹) |
휘 | 모(髦) |
자 | 언사(彦士) |
생몰기간 | 241년 ~ 260년 |
재위기간 | 254년 ~ 260년 |
목차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4대 황제. 폐제(廢帝) 또는 고귀향공( 高貴鄕公)으로 불린다.
무제 조조의 증손자이자 문제 조비의 손자이며 명제 조예의 이복동생 동해정왕 조림(曹霖)의 아들이다. 즉 조예의 조카로 형으로는 요절한 조계(曹啓)가 있었다. 조방이 조조(曹操)의 아들인 팽성왕 조거(曹據)와 함께 황제 후보에 올랐으나, 역상속을 꺼린 곽태후(명원황후 곽씨) 조방보다 서열이 낮은[1] 조모를 추천해 황제에 즉위했다.
2 생애
2.1 위나라의 황제로 옹립
244년 담현의 고귀향공에 봉해졌으며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학업을 일찍 이루었다. 조예 사후 황제 조방이 사마사에게 폐위된 후, 공경들과 상의한 사마사에 의해 옹립되었다.[2] 조모가 현무관에 도착하자 대신들은 상주하여 전전에서 머물기를 요청했지만 조모는 선제가 옛날에 살던 곳이라고 하며 피하고 서상에 머물려고 했다. 대신들은 또 법가로 그를 맞으려고 했지만 조모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모가 낙양으로 들어가자 대신들은 서액문 남쪽에서 맞아 배례하였으며 조모가 수레에서 내려 인사에 답하려고 하자 옆에서 안내 하는 자가 말했다. "의례를 따르면 인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에 조모는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신하요." 그리고 인사에 답했다. 지거문에 이르러서 조모는 수레에서 내렸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말했다. "옛날에는 수레를 타고 궁궐까지 들어갔습니다." 조모는 말했다. "나는 황태후의 부름을 받았을 뿐이지, 어떻게 하는 바를 모르오." 그래서 조모는 그대로 태극동당까지 걸어가 곽태후(명원황후)를 만났다. 그 날 조모는 태극전전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즉위식에 참가한 백관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다. - <삼국지> 위서 [삼소제기] |
조모가 옥새를 불경스럽게 받아들고 발걸음을 높이 드니 사마사가 경제가 듣고는 이를 우려하였다. 조모의 예의와 위엄을 보고 그냥 꼭두각시로 있을 인물이 아니라는 걸 경계한 것이다.
2.2 허수아비 황제
조모는 명제 조예와 곽태후의 양자로 즉위했다. 즉위 후 황제가 사용하는 수레, 옷, 후궁의 비용을 줄이고 또 상방과 어부에서 각종 사치스럽고 호화로워 실제적인 용도가 없는 물건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254년 시중에게 부절을 갖게 하여 사방으로 분산 파견하여 풍속을 관찰하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으며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써 직업을 잃은 사람을 살피도록 하였다. 또 사마사에게 황금 월(鉞)을 주어 조정에 들어올 때 빨리 달리지 않고 어떤 일을 상주할 때는 자신의 관직만 말하고 이름을 말하지 않으며 검을 차고 신을 신고 전상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조모는 성장하자 슬슬 황권을 강화하려고 했으나, 실권은 이미 사마씨에게 넘어간 뒤라 사실상 후한의 헌제와 마찬가지로 꼭두각시 황제에 불과했다.[3] 한번은 사마사가 종회에게 조모의 평을 은근히 묻자 종회는 "그의 재능은 진사왕과 같고 무용은 태조와 비슷합니다."라고 했다. 또 석포가 조모를 높이 추켜세워 "위무제의 환생이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조모는 사마씨가 전횡하는 현실을 그냥 두고 보려 하지는 않았다.[4] 사마사가 갑작스럽게 관구검의 난을 토벌하고 야전에서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사마소를 허창을 지키라는 명분으로 수도 낙양으로 오지 말라고 했다. 이는 낙양 내에 있던 사마씨 친위 세력을 제거하여 사마소를 이빨 빠진 호랑이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사마소는 심복 종회의 말을 듣고 허창에 주둔하지 않고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입성하려는 무력시위를 하자 조모는 사마사의 대장군 작위를 사마소가 이어받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2.3 사마소와의 신경전
조모는 학문에 굉장히 관심을 가져 하루는 태학(太學)을 시찰하고 여러 유생들에게 주역, 상서(尚書), 예기에 대해 하문했다. 이 때 역학박사 순우준(淳于俊), 박사 유준(庾峻), 박사 마조(馬照)는 조모에게 연달아 발리고 데꿀멍했다. 또 조모가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시를 짓도록 명했는데 시중 화유(和逌)와 진건 등은 시를 짓는 제한된 시간을 초과하여 파면 되었다. 조모는 항상 중호군(中護軍) 사마망, 시중(市中) 왕침, 산기상시(散騎常侍) 배수(裴秀), 황문시랑(黃門侍郞) 종회 등과 동어전(東御殿)에서 모여 토론을 하고 문학론을 썼다. 4명을 총애해 배수를 유림장인(儒林丈人), 왕침을 문적선생(文籍先生)이라 칭하고 사마망과 종회에게도 각기 이름을 짓도록 했다. 조모는 성격이 급했으므로 이들을 소집시킬 때에는 빨리 도착하기를 바랬다. 배수 등은 궁 안에서 관직생활을 했으므로 즉각 올 수 있었지만 사마망은 외부에서 근무하였으므로 특별히추봉거(追鋒車)[5]와 근위대 병졸 5명을 내려 모임이 있으면 거마를 타고 빨리 도착하도록 했다.
256년 4월 사마소에게 제왕의 상징인 곤룡포, 면류관, 붉은 신발을 하사하고 8월에는 대도독(大都督)의 칭호를 더하고 입궁할 때 이름을 아뢰지 않아도 되는 특권과 황금 도끼(鉞)를 내렸다. 258년 2월 제갈탄의 난을 진압한 사마소를 5월 상국(相國)으로 임명하고 진공(晉公)으로 봉했으며 구석(九錫)의 예를 더했다. 이에 사마소는 9차례 사양했으나, 결국 받았다.
259년 정월 황룡 2마리가 영릉현(寧陵縣)의 우물 속에서 나타나자 사람들은 모두 길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모는 용이란 군주의 덕을 상징하며 올라가 하늘에 안주하고 아래로 내려와서는 밭에 안주하며 자주 우물 속에 숨어있는 것이므로 길조가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잠룡(潛龍)이란 시를 지어 사마씨의 권력농단을 직접 풍자했다. 이에 사마소는 이 시를 읽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잠룡시의 자세한 내용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아래에 있는 시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잠룡시로 조모가 지었다는 근거는 없다.
傷哉龍受困(상재룡인곤) : 슬프구나, 용이 곤경에 빠져
不能躍深淵(불능약심연) : 능히 깊은 연못에서 벗어나지 못하구나
上不飛天漢(상불비천한) : 위로는 하늘을 날지 못하고
下不見於田(하불견어전) : 아래로는 밭에서 일어서지 못하구나
蟠居於井底(반거어정저) : 우물 속에 웅크리고 있으니
鰍鱔舞其前(추선무기전) : 미꾸라지와 뱀장어가 그 앞에서 날뛰는구나
藏牙伏爪甲(장아복조갑) : 이빨을 감추고 발톱을 숨긴 모습이
嗟我亦同然(차아역동연) : 아, 내 신세와 어찌 그리 같단 말인가
삼국지연의에서는 자기를 미꾸라지와 뱀장어로 비판해서 불쾌해했고 이 일로 대놓고 조모를 조롱하고 도발한다.
2.4 사마소 시군
260년 4월, 조서를 내려 이전에 내린 명을 실시하도록 하고 사마소를 다시 상국으로 임명하고 진공으로 봉했으며 구석의 예를 더했다. 그러나 조모는 이에 분노를 느꼈는지, 아니면 2년 전 동오의 실권자 손침이 황제 손휴에 의해 토벌된 것에 자극을 받았는지 사마소를 토벌하려고 했다. 5월 갑자기 '사마소의 마음은 행인들도 알고 있소.[6] 짐은 이대로 계속 치욕을 감당할 수 없소. 오늘이야말로 경들과 함께 사마소를 치러 나가겠소.'라면서 말했다. 조모는 직접 사마소를 참살하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 상서 왕경, 시중 왕침, 산기상시 왕업을 불러 품안에서 조서를 꺼내며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조모는 이들을 믿었기에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은 것이지만[7] 왕침과 왕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왕경은 춘추시대 노나라 소공(昭公)[8]의 예를 들며 홀로 말렸다. 그래도 조모는 꿋꿋하게 강행했으나, 병이 이미 사마씨에게 장악된 상황이라 변변한 병사들을 모을 수 없었고 조모가 부릴 수 있는 병력은 노복이나 환관들 뿐이었다. 왕침과 왕업은 왕경에게 자신과 함께 사마소에게 알리러 가자고 제안했지만 왕경은 거절했다. 이에 둘은 사마소에게 일러바쳤고 계획은 누설되었다.
할 수 없이 조모는 그나마 모인 소수의 부하들을 데리고 친히 북을 울리며 사마소를 치러 출병했다. 도중에 둔기교위 사마주를 만나자 고함을 질러 물리치고 운룡문과 지거문을 나섰다. 그러나 동화문 앞에서 사마소가 보낸 가충이 지휘하는 정예 병력에 가로막히고 겁먹은 병졸들이 흩어지자 스스로 검을 빼들고 싸웠다
하지만 병사들은 감히 황제를 공격할 수 없어 이러저리 몸을 피하기 바빴다. 이 때 가충의 부하였던 성제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가충이 '사마공께서 너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은 오늘을 위해서였다. 뭘 망설이는가?'라며 다그치자 병사들은 그제서야 조모를 공격했다. 조모가 무엄하다고 고함을 지를 때 성제가 갑자기 닥돌하여 조모를 창으로 찌르고 칼로 등을 꿰뚫었다. 결국 조모는 연(輦)[9]에서 떨어져 죽었고 가마는 피바다가 되었다.
조비는 9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성한 아들은 조예와 조림 뿐이었다. 그러나 조예와 조림이 죽고 조비의 자손은 조림의 아들 조모만 남아 있었는데 조모가 이렇게 자손 없이 죽으면서 조비의 대는 끊겼다.
2.4.1 역사 왜곡
정사 삼국지에는 별도의 본기가 없이 조방, 조환과 묶여 '삼소제기(三少帝紀)'란 한 세트로 처리되어 있다. 이상한 점은 조모가 260년 4월에 사마소를 상국으로 임명하고 진공으로 봉하고 구석의 예를 더한지 1달 후인 5월 7일 갑자기 항년 20세로 사망했다고만 나오며[10] 조모 사후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곽태후가 내린 '조모가 미쳐서 나를 죽이려 했는데 사마대장군이 막아주었다.'라는 식의 조서가 첨부되어 있다. 사실 조모가 사마소를 참살하려는 시도부터 성제의 조모 시해까지의 내용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사마소의 잘못은 하나도 없이 오로지 조모의 잘못만 날조, 과장한 전형적인 역사 왜곡이다. 그러나 태후의 조서 자체는 왜곡이 아니라 실제로 내린 게 맞는데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해보면 곽태후가 사마소의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서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서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대충 이렇다. 조모가 학문을 좋아하고 덕이 있어 조예와 곽태후의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조모가 점점 포악해져 질책을 하자 조모가 곽태후를 비방하면서 둘의 관계는 끊어졌다. 그래서 사마소에게 이를 말했더니 조모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렇다며 두둔해 줬다. 하지만 조모는 계속 반항하고 마침내 활을 쏴서 곽태후를 죽이려다가 실패했고 곽태후가 사마소에게 폐위시켜 달라고 했다. 이에 부들부들하던 조모는 곽태후를 죽이기 위해 측근을 매수해 태후가 복용하는 약에 독약을 넣을려고 몇 번이나 계획했다. 이 일이 드러나자 조모는 군대를 일으켜 곽태후와 사마소를 죽일려고 했고 왕침, 왕업, 왕경을 불러 난을 일으켰다. 다행히 왕업, 왕경이 사마소에게 알렸고 조모는 칼을 들고 북을 치며 날뛰다가 피살했다. 옛날 창읍왕도 죄를 짓고 후작으로 강등되었으니,[11] 더 심한 짓을 한 조모는 평민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된다.
진수도 사마씨 치하에서 진실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지만 조서의 내용을 본문으로 옮겨줘서 매끄럽게 사마씨의 폭거를 윤색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도리어 조서 뒤에 매우 위화감 넘치는 기록을 남겨서 후세의 독자들이 진상을 짐작하게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배송지의 주석에는 《한진춘추》 등에서 인용된 이 사건의 전황이 상술한 대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진서》 〈문제기〉에는 가충의 부추김을 받은 성제가 조모를 직접 죽였다는 내용이 있어서 결론적으로 사마소를 제압하려다가 시해당했다는 게 맞다.
봉건시대에서는 황제가 무도한 신하를 제거하는데 당연한데 오히려 신하가 황제를 시해했으므로 사마소는 역적이다.
2.5 사후
사마소의 압박에 명원황후 곽씨는 조모를 천하의 개쌍놈으로 몰아 평민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했으나, 시해 다음날 진공 사마소, 태부 사마부, 태위 고유, 사도 정충 등이 머리를 조아려 상주하면서[12] 왕의 예로 장례를 치뤘다. <한진춘추>에 의하면 조모는 낙양 서북쪽 30리에 있는 낙수(落水)의 지류에 안장되었는데 볼품없는 수레가 몇 대 따랐고 깃발도 없었다. 이에 백성들은 울면서 '이 분은 전에 시해당한 천자이시다.'라면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는 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사마소는 그나마 체면치례는 해보겠다고 애꿎은 사람들의 일족을 멸해 얼렁뚱땅 넘어갔다. 결국 가충의 부추김을 받고 조모를 직접 시해한 성제와 조모를 끝까지 말린[13] 왕경은 멸족을 당했다. 태부 사마부와 상서복사 진태는 조모의 시신을 무릎에 눕히고 곡을 했는데, 사마소가 진태한테 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물으니 진태는 사마소에게 가충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사마소는 다른 방법이 없겠냐고 절충안을 물었으나, 진태는 타협을 거절했고[14] 사마소는 조조의 손자이자 조우의 아들로 조모의 숙부뻘에 해당하는 조환을 옹립했다. 조모는 시호도 받지 못하고 폐제로 취급되었으며 역사에서도 폐제 아니면 즉위 전 작위인 고귀향공으로 불린다.
조모의 죽음은 사마씨에도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던 사마씨 정권이었는데 현직 황제가 백주대낮에 정권의 수하에 의해 참살당했다는 충공깽의 사태에 정권의 이미지나 정통성은 그야말로 시궁창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그 망탁조의도 현직 황제를 백주대낮에 참살하지는 않았다.[15] 결국 사마씨 정권은 정권 유지 및 새나라 건국을 위해 귀족층에 많은 것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한 서진의 황권 약화와 지배층의 혼란은 결국 서진이 역대급으로 막장쇼를 거하게 찍다가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마소에게 일러바친 왕침과 왕업은 열후에 임명되었으며 왕침은 나중에 <위서>[16]를 만들었고 왕업은 훗날 서진의 중호군이 되었다. 반면 충신 왕경은 오히려 조모를 부추긴 죄로 체포되어 가족과 처형되었다. 왕경은 모친에게 죄송하다고 했으나, 모친은 오히려 웃으면서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서진이 들어서자 무제 사마염은 왕경의 손자를 발탁했다.
3 여담
분명 재능있고 과감한 군주였지만 세력이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신중히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젊은 혈기로 밀어붙인 결과 자신의 목숨만 잃고 말았다. 거기다 믿는 사람들이라고 셋을 불렀는데 그 중 둘은 배신했다. 만약에 조모가 사마소를 공격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했다면 편안히 천수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조환 대신에 본인이 사마소나 사마염에게 찬탈을 당하고 나라를 닫는 험한 꼴을 봐야 했겠지.
훗날 동진의 2대 황제 명제 사마소(司馬紹)[17]가 승상 왕도와 국사를 논하다 '사마씨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소'라고 물었다. 이에 왕도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학살한 이야기, 사마의가 조상을 토벌할 때 남녀노소 모두 멸족한 이야기, 그리고 사마소가 조모를 죽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에 진명제는 '만약 경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진나라가 오래가지 못한 게 당연하고 이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라며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책상에 묻고 탄식했다.동명이인을 디스
고려 희종도 비슷한 일을 벌였지만 역시나 실패하고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만 하고 유배만 보냈다. 최충헌이 똑똑한 건지 사마소가 멍청한 건지...
황후 변씨는 변융의 딸로 무선황후의 증손녀이다. 자식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훗날 당현종 때 활동한 화가 조패(曹霸)[18]가 조모의 후손이다. 당나라 때 기록과 북송 때 기록으로 교차검증되는 사실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거의 비슷하지만 즉위할 때 사마사에게 절을 했다. 또 일부러 사마소와 가충이 조모를 도발한 것으로 나온다.
4 미디어 믹스
4.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1 |
삼국지 12,13 |
명색이 황제였던만큼 삼국지 시리즈에도 꾸준히 등장하지만 대우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일러스트는 칼을 들고 있고 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61/69/56/76로 내정이나 해야 하는 수준... 분투, 혼란, 고무를 가지고 있긴 하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57/43/59/72/76 으로 그냥그런 문관쪽이지만 특기라고 준 게 치안, 간첩 딱 2개로 능력치를 전혀 살릴 수 없는 특기를 줬다.
삼국지 11 열전에는 분명 "조식의 지혜와 조조의 무예를 겸비했다"고 나왔는데 능력치는 어째 신통치가 않다. 그나마 정치는 74.
삼국지 12에선 PK에서 추가.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사마소를 토벌하기 위해 스스로 칼을 뽑는 장면이다. 능력치는 54/61/59/75, 전법은 기군신속이다. 특기는 명사, 병심, 변설, 신속
삼국지 13에서는 그다지 달라진 건 없다.
4.2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6에서는 오리지널 보이스와 모델링이 존재하지만 NPC로만 등장하고 플레이어블은 아니다. 때문에 플레이어블 무장도 아니고 클론 무장도 아닌, 다소 어정쩡한 케이스. 면류관을 쓴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완전 고유 룩은 아니고 5편의 헌제를 적당히 바꿔서 쓴 듯하다.
7편에선 제갈탄의 반란을 사주한다던지 하는 음모를 꾸미거나 진심과 충심을 보이려는 사마소에게 열폭하며 죽이려는 찌질이처럼 묘사되고, 최후에는 얼이 빠져서 엉금엉금 기어가려다 가충에게 살해당한다. 특히 역사상으로 자신의 재능을 칭송한 종회에게 게임에선 "무능한 바보놈"이라는 뉘앙스로 까인다. 안습. 전체적으로 사마소를 띄워주기 위해 상당한 너프를 당했다는 평가. 클론 무장의 숙명 IF 루트에서는 음모를 꾸미지는 않지만 반란을 일으킨 종회에게 붙잡혔다가 반란이 진압된 후 사마사에 의해 폐위당한다. 여전히 안습.
그 후, 최후반기 인물임에도 진삼국무쌍 BLAST에 등장. 클론 무장들이 넘쳐나는 진나라 스토리를 보강하기 위해 추가된 듯 한데, 사실 황제봉기 시나리오를 빼면 조모가 나설 곳은 딱히 없는지라 참전할 가능성은 그닥 높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조모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시나리오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역시 아직은 모를 일. 일러스트를 보면 조조가 쓰는 장검을 쥐고 있는데 이는 조모의 재능이 조조의 환생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기록을 반영한 듯 하다.
4.3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서는 그라함 에이커로 패러디되었는데, 첫 대사에서 그라함과 마찬가지로 처녀자리임을 어필하고 있다. 그리고 친위 쿠데타 하기 전에 그라함의 유언를 패러디하고 친위 쿠데타 때에는 당연히 미스터 무사도의 가면을 쓰고 사마소를 치러 갔다가 변을 당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조모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일반적으로 선황보다 항렬이 높은 사람은 상속을 꺼린다. 새로 즉위한 황제가 항렬이 높으면 항렬이 낮은 선황을 위해 절을 해야 되고 태후 입장에서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조거는 조조의 아들이므로 조모의 종조할아버지뻘이고 곽태후의 시숙에 해당한다. 조방은 조예의 양자이고 조모는 조비의 손자이다. 즉, 항렬은 같지만 조모는 조방의 사촌동생뻘이다.
- ↑ <진서> 경제기에 의하면 사마사는 조거를 강력히 추천했으나, 곽태후가 강력히 천거해 뜻을 꺾었다.
- ↑ 군신은 직접 조모에게 배알하는 것 조차 불가능했고 권력은 사마씨에게 모두 넘어가 있어서 황명만 내릴 뿐, 결정은 모두 사마씨가 처리했다.
- ↑ 원래 학문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사마씨의 경계를 느슨히 하게 하려는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 ↑ 빠른 가마
- ↑ 고사성어 사마소지심로인소지(司馬昭之心路人所知)의 유래가 되었다.
- ↑ 특히 왕침은 상술했듯이 학문을 좋아하던 조모가 대단히 총애했다.
- ↑ 춘추시대 중기 노나라는 임금의 실정으로 여러 대 동안 강한 공실 지파 계손씨에게 국정을 내주었는데 소공은 계손씨(季孫氏)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모아서 계손씨를 공격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제나라로 망명했다. 이후 제·진·월 등을 오가며 계손씨를 치고 귀국하려 했으나, 끝내 객사하고 말았다.
- ↑ 천자의 가마
- ↑ 보통 본기는 황제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사망했으며 어디에 안장되었다고 기록되는게 정석이다. 그러나 조모의 경우는 언제, 갑자기 사망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 ↑ 전한 소제가 죽고 뒤를 이었으나, 국상 중 음행과 예를 지키지 않음으로 폐위되고 즉위 전의 창읍왕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해혼후로 한 단계 더 격하됐다.
- ↑ 대략 상소 내용은 조모가 한 짓은 인륜을 저버리고 국가를 위험에 빠지게 하고 스스로 멸망했으므로 창읍왕의 선례에 따라 평민의 예로 장례를 치뤄야 한다. 하지만 곽태후의 자애로움을 생각하면 왕의 예로 장례를 치룰 수 있다고 상소했다.
- ↑ 하지만 결국 조모를 부추긴 죄로 치부되었다.
- ↑ 정사 삼국지 삼소제기 주석으로 인용된 <위씨춘추>에 있는 내용인데 배송지는 이 일화의 진실성을 의심했다. 한편 세설신어에서는 이 때 진태가 "그 이상이라면 모를까(즉, 사마소가 책임지던가), 그 이하의 방법은 안됩니다."라고 적혀 있다.
- ↑ 왕망은 평제를 독살했으나, 유자영은 폐위시켜도 끝내 죽이지는 않았다. 동탁은 소제를 폐위시킨 뒤에야 독살했고 조조는 수 차례의 헌제를 낀 친위 쿠테타 시도에도 불구하고 헌제의 옥좌만은 보전해 주었다.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 얼마 후 죽었으니...
- ↑ 정사 삼국지의 위서가 아닌데 다만 진수는 이 위서를 인용하여 정사 삼국지 위서를 만들었다.
- ↑ 사마의의 차남인 사마소와 다른 인물
- ↑ 공교롭게도 조조의 고향인 초(焦)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