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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 | |
Sammi Superstars | |
창단 | 1982년 2월 5일 |
매각 | 1985년 5월 1일 |
모기업 | 삼미그룹 |
연고지 | 인천광역시, 경기도, 강원도, 이북 5도 (1982~1984)[1] |
홈 구장 | 도원야구장 (1982~1984) |
마지막 경기 | 1985년 6월 21일 vs. 롯데 자이언츠 |
구단명 변천사 |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5) 청보 핀토스(1985~1987) 태평양 돌핀스(1988~1995) 현대 유니콘스(1996~2007) 해체 |
1 소개
삼청태현 | ||||||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5) | → | 청보 핀토스 (1985~1987) | → | 태평양 돌핀스 (1988~1995) | → | 현대 유니콘스 (1996~2007) |
한국 프로야구의 해태 타이거즈와 더불어 전설이 된 팀. 물론 나쁜 쪽으로.
1982년에 창단해서 1985년 여름 청보그룹에 매각되어 이후 청보 핀토스로 팀명이 변경되었다. 연고지는 인천-경기-강원. 참고로 인천 도원야구장 보수 공사관계로[2] 1982년 홈경기 개막전도 춘천에서 열렸으며, 이후에도 제2연고지로서 춘천 경기가 계속 있었다. 지금의 군산, 청주 구장이나 포항 야구장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야구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1할의 승률 [3][4][5]을 냈던 전설의 꼴찌팀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팀의 기록은 가히 전설적일 정도. 암흑기 막장 시절 한화가 이 팀의 기록을 경신한 건 시즌 팀 방어율 뿐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세운 기록의 비범함을 엿 볼 수 있다. 비슷한 의미에서 한국야구의 전설로 기록되는 선수인 감사용도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다. 뭘 좀 해보려고 했던 박현식 감독도.. 통산 55승 79패의 단일 시즌 30승 투수도 있었다
모기업 삼미그룹은 무역, 해운, 광업, 철광 등이 주종목으로 프로야구의 홍보효과를 누릴 만한 소비재 분야 계열사가 거의 없었다[6] . 구단 운영을 통해 시너지를 낼 만한 요소가 없었지만, 당시 30대였던 김현철 회장이 스포츠를 좋아했고, 미국 유학시절 메이저리그 광팬이어서 메이저리그가 미국의 국민스포츠로 자리잡은것과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 그 지역사회의 저명인사가 되어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걸 목격했으며, 프로야구의 발전 가능성과 당시 KBO 사무총장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고 야구팀을 창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야구계에선 인천-경기-강원 지역연고팀으로 강원도가 고향인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에 접근했으나 거부당하였다.[7][8] 이후 급하게 대타를 찾는 와중에 삼미가 아무런 준비 없이 뛰어든 것이다. [9]
2 구단 창단과 매각
프로야구 출범 전, 많은 인천 야구팬들의 기대와 함께 기적을 기대하며 프로야구 경기를 지켜 봤는데, 첫 경기에서는 인호봉의 3실점 완투와 양승관의 3타수 2안타 2타점의 활약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5:3으로 이겼지만, 이후 삼미는 이기는 일이 없었다. 프로야구 출범당시 유일하게 국가대표 출신이 단 한 명도 없는 최약체팀으로 사실상 직장인야구단이 바로 프로팀이 되니 이길 리가 없었다.[10] 매년 꾸준한(?) 성적부진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6개의 팀중 6위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장명부의 활약으로 1983년도에는 전후기 2위씩 차지하는 등의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당시에는 전후기 1위 두팀만 한국시리즈 티켓을 가져가는 제도라 삼미는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11], 그리고 장명부가 혹사의 여파로 무너지자 삼미는 다시 천성적인 약팀으로 돌아가버렸다. 1985년 전기리그를 끝으로 성적부진과 모기업의 재정난을 이유로 청보식품에 매각, 1985년 6월 29일, 청보 핀토스가 되어 이후 현대 유니콘스까지 역사를 살아가게 된다. 여담으로 삼미 구단주였던 김현철 회장은 매각 협상이 끝나고 매각서에 사인한 뒤 그날 밤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웠다는 얘기가 있다. 얼마나 아쉬웠으면...
2.1 안습의 기록들
1982년에는 전기리그 10승30패, 후기리그 5승35패를 기록, 통합성적 15승65패를 기록하며시즌 최종 승수가2016년NC의 16연승으로 쌓은 승보다 적다! 세계 프로야구 어디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1할승률(0.188)과[12] 유일무이한 특정 구단 상대 전패(OB 베어스(現 두산 베어스)전 16전 전패) 기록하기도 했다. 1985년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 무려 18연패(敗)를 기록, 연패 기록의 전설로 군림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1999년 시즌에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그 기록을 깰 뻔했으나 LG 트윈스가 패배하는 바람에 명예(?)를 안지 못하였고, 2002년 시즌에는 롯데 자이언츠가, 2010년 시즌에는 기아 타이거즈가 16연패로 그 기록에 도전(?)했지만 각각 LG 트윈스, 한화 이글스가 그 기록을 막았기(?) 때문에 아직 최다 연패 기록은 삼미 슈퍼스타즈이다. 그러나 최근에 롯데가 엔씨 상대로 14연패 (1승 15패)를 하면서 이게 깨질 수 있었지만 실패하고 기록이 깨지는 것은 2017년 시즌을 기약한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매각된 후 청보 핀토스(1985)-태평양 돌핀스(1988)-현대 유니콘스(1996)로 이름이 바뀐다. 문제는 삼미의 후속팀인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의 성적도 시원찮았다는 점이다. 현대 유니콘스는 성적은 앞의 인천팀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좋았지만 팀 말년에 인천을 버리고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려 시도한 점이 있고, 때마침 일어난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으로 인해 지원이 끊겨 팀이 해체되어 결국 삼청태현의 명맥은 끊기게 되었다. 우리 히어로즈는 KBO 제8구단으로, 현대가 해체된 후 재창단된 팀이며 따라서 현대와 우리는 별개의 구단이다.그러나 08년 우리 히어로즈의 KBO 가입비 미납으로 인하여 08년 8월 히어로즈라는 팀명을 달고 나온다. 그 다음시즌인 09년도에는 공식적으로 서울 히어로즈라는 이름으로 팀을 개편하려 했으나, 넥센 타이어와의 2년 전격 스폰쉽을 맺으며 넥센 히어로즈로 바뀌게 된다. 한편 히어로즈 팬들은 두 구단을 사실상 하나의 구단으로 취급하고 있으나[13] 대다수의 타팀팬들은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14]
1982년의 방어율은 6.23으로 당연히 최하위였으며, 이 팀 평균자책점 기록은 한화 이글스가 2014년에 6.35를 기록하며 갱신할 때까지 32년간 최악의 기록이었다. 또한 1982년 7월 21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김일권에게 KBO 리그 1호 단독 홈스틸을 허용한 적도 있었다.
3 팬덤
2000년대에는 박민규의 소설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처리 투수[15] 감사용의 일화를 각색한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타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인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와 모티브가 비슷해서 표절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16]
그러나 꼭 그게 아니라도 삼미 시절부터의 팬으로 시작한 이들 중에서 문학성이 끝내주는 경우가 많다. 야구의 추억을 연재한 김은식[17]이나 인천 출신으로 인천 야구에 대한 책을 여러편 적은 고 이종남 기자 같은 널리 알려진 인물들 말고도, 인터넷상으로도 삼미에 대해서 글을 써놓은 문서들을 보면 유달리 필력들이 좋다.
4 마스코트
팀의 심볼로 다른 팀이 동물이나 상징 로고를 그려넣는 것과 달리 삼미는 "배트를 든 슈퍼맨"을 선택했다. 마침 영화 슈퍼맨이 전세계적으로 대흥행할때라 창단 당시 최고의 인기 팀으로 군림했었다.[18] DC 코믹스: 너 고소 넥센 히어로즈는 마블과 손을 잡았다는 게 함정 스파이더맨은 여기서도 어벤져스에 못 꼈다
5 삼미그룹 그 후
구단 매각 당시 삼미그룹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재정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골칫거리는 해운업이었는데, 70년대 말 해운경기가 호황을 누리자 이에 편승하려고 소유 선박 및 용선량을 무리해서 늘렸다가 얼마 안 가 해운업에 극심한 불황이 찾아오고 석유파동이 겹치면서 선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헐값에 다 팔아치우고 아예 해운업에서 철수를 해야 했던 것. 그리고 30여년 뒤 역사는 반복됐다 해운이 또 결국 해운사를 비롯한 그룹 계열사들, 야구단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상징이기도 했던 그룹 사옥까지 팔아치우는 구조조정 끝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무리한 다각화로 피를 봤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그룹의 노선을 특수강 분야에만 집중하기로 했고 때마침 찾아온 3저 호황과 철강수요 증가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전성기에 버금가는 재계순위를 되찾았으나, 92년 찾아온 철강산업의 불경기는 특수강 분야에 올인했던(...) 삼미그룹을 또 한번 통째로 뒤흔들었다. 문어발도 위기, 몰빵해도 위기 대체 어쩌라고 또 다시 부동산과 주요 계열사들을 매각해가며 꾸역꾸역 부채비율을 줄여가고 있었는데...
97년 1월 한보사태가 터졌고 결국 한보그룹이 부도가 났다.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제일은행은 급한 대로 거래기업 중 가장 만만한 삼미의 목을 졸랐다. 쉽게 말해 부도가 나도 그나마 국가경제에 큰 타격이 없을 기업이라 생각했던 것.재계순위 20위 기업이? 왜 여기나 여기도 한방에 날아갔는데 그렇게 97년 3월, 삼미그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19]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금시장의 경색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 그렇게 진로, 기아, 해태 등 재벌들의 부도가 이어지고, 여기에 정부의 정책 실패가 곁들여져 환율이 급등하면서 외환위기가 찾아왔으며 결국 대한민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외환위기 항목을 참조할 것.
6 기타
- 오래된 팀이라 최근 유입된 사람들은 이 팀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지만 요즘 신세대들에게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개그우먼 3명 트리오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지도...
-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2군 팀을 창단, 운영한 팀이다. 한국프로야구 퓨처스리그 참조.
- 팀의 상징색은 파란색, 하늘색 등을 사용했다.
7 역대 성적
| 우승 |
| 준우승 |
| 포스트시즌 진출 |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
연도 | 정규시즌 순위 | 최종 순위 | 팀이름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1982 | 6위/6팀[20] | 6위 | 삼미 슈퍼스타즈 | 80 | 15 | 65 | 0 | 0.188 |
1983 | 3위/6팀[21] | 3위 | 100 | 52 | 47 | 1 | 0.525 | |
1984 | 6위/6팀[22] | 6위 | 100 | 38 | 59 | 3 | 0.392 | |
1985 | 6위/6팀[23] | 6위 | 55 | 15 | 40 | 0 | 0.273 | |
이후 역사는 청보 핀토스로 |
- ↑ 당시에는 광역 연고제였다.
- ↑ 당시 도원야구장은 1982년 9월 한국에서 열렸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보조 경기장으로 쓰였다. 이 때문에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 ↑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KBO리그 단일시즌 최저 승률 1할 8푼 8리, 0.188을 1982년 시즌에 세웠다. 더더욱 충공깽인 것은 이 해의 후기리그 승률이다. 후기리그 40경기 중 5승 35패의 성적을 거둬 1할 2푼 5리, 0.125(...)의 승률을 거뒀다.
- ↑ 이 팀은 KBO리그 사상 단일시즌 최다 연패 기록인 18연패(...)도 세웠는데 이 기록이 나온 것은 1982년이 아니라 1985년이었다.
- ↑ 김은식의 저서에 따르면 선수단 등록에 필요한 최소 엔트리를 못채워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선수단 모집을 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프로야구단에 사회인 야구 뛰는 사람들이 1군 선수로 낙점 받았다는 소리(...) 이는 선수 풀이 좁았던 것도 있지만 운동선수 그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 프로와 달리 야구단을 운영할 여건이 되는 수준의 기업 내지는 은행에서 안정적인 직장인 신분으로 선수를 할 수 있는 실업야구가 더 높게 평가 받고 있었던게 큰 영향을 끼쳤다. 현대 야구는 프로 선수가 FA로 수억~수십억을 벌면 그 것으로 퇴직 이 후를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지만 당시에는 프로 야구가 출범한 직후기 때문에 선수 생활 은퇴 후에도 사원 신분으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으며 고위 임원까지도 노릴 수 있는 실업야구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 ↑ 아주 없는 건 아니었고, 82년 부산의 대명목재를 인수하면서 대명목재 소유의 유나백화점도 인수해 유통업에도 진출했었다. 본사였던 서울 삼일빌딩 지하에도 매장을 운영했지만 결국 지방 향토 백화점 브랜드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이를 해결하려 이태원동에 세웠던 비바백화점은 슈퍼스타즈을 매각하고도 한참 뒤인 91년에야 문을 열었다. 그나마도 얼마 못 가 삼미그룹의 해체과 함께 사라졌는데...그 건물을 사서 리모델링해 들어온 것이 바로 제일기획 되시겠다.
...어? - ↑ 올드 인천 팬들에게는 애석한 일. 당시 정 회장은 야구를 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88올림픽 준비에 여념이 없어 야구까지 신경쓸 겨를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축구팀을 만들긴 했다 - ↑ 참고로 현대그룹 자체는 야구에 적대적이지 않았는데, 이미 실업야구 시절 현대건설 야구단을 창단해 준프로야구팀을 만들 계획을 하기도 했고 이후 현대 피닉스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14년 뒤 진짜 현대그룹 구단이 되었다.
- ↑ 다른 기업을 낀 창단이 여의치 않아 5개팀으로라도 준비하려는 찰나에 KBO 첫 총회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참가의사를 밝혔다.
- ↑ 창단식 당시 박현식감독이 "우리 팀은 모두가 슈퍼스타입니다."라는 변명을 한적이 있다(...)
정작 박현식감독은 감독제의가 들어왔을때 스타는 커녕 국대출신 한명도 없다고 디스한적이 있는게 함정.단 이땐 하필 세계 야구선수권대회때문에 난다 긴다, 내노라하는 선수들이 죄다 국가대표 합숙으로 프로에 입단이 힘들었고, 그 국대출신들은 1983년에 입단하게 된다. 삼미도 당시 인천출신 국대스타였던 투수 임호균, 포수 김진우를 어떻게 해서든 데려올려고 갖은 수를 썼지만 끝내 실패했다. 인천야구 골수팬들은 이 둘만 데려왔어도 삼미의 원년 굴욕은 있지도 않았을꺼라고 지금도 얘기하고 다닌다. - ↑ 2위가 해태였는데 마지막 3연전 2.5경기차에서 3연패하며 전기리그 준우승
- ↑ 1899년에 메이저리그에서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라는팀이 20승 134패로 최하위를 차지한적이 있다. 단 이때는 한 구단주가 두 구단을 운영할수있는 신디게이트 방식이 허용되던때라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와 세인트루이스 퍼펙토스를 같이 운영하던 구단주가 우승가능성이 더 많아보이던 세인트루이스에다 클리블랜드의 주축선수들을 다 넘겨버린거라 가능했다. 이당시 사이 영도 세인트루이스로 이적. 그리고 이 시즌이 끝나고 신디게이트 경영은 금지되었고,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는 해체를 하게된다.
- ↑ 히어로즈 팬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 SK 와이번스의 사례와 다르게 가수 김광진의 사례처럼 팬들이 그대로 이어졌고 응원하던 선수와 스태프, 심지어 프런트까지 그대로 이어졌으니 단지 팀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구단 해체의 아픔을 겪은 것이 이 팀의 팬들이기도 하고.
- ↑ 삼청태현 참고.
- ↑ 물론 삼미 슈퍼스타즈가 있었던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패전처리 투수는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았다. 인원이 적었던데다가 선발, 중간, 마무리라는 개념 자체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 ↑ 결국 작가인 박민규가 표절을 인정하긴 했다.
- ↑ 유년 시절 인천에서 자랐다고 전해진다. 그 덕에 KBS N 스포츠에서 제작한 스포츠 다큐 인천야구의 추억에서 스토리 텔러의 역할을 맡았다.
- ↑ 참고로 삼미의 여성 마스코트는 원더우먼이었다.이벤트가 열리면 다른 팀들은 모두 동물옷을 입고 나오는데 삼미만 늘씬한 미인 언니가 나와서 주목을 받았다.
롯데는? - ↑ 한 분야에만 집중한 덕분인지, 기업 자체의 저력은 인정받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상황은 면했다. 지금의 현대비앤지스틸이 바로 옛 삼미특수강. 이외에 삼미건설이라는 중소건설사가 있다. 여기는 본래 삼미그룹과의 연관성은 없으나, 과거 삼미그룹의 중심이었던 (주)삼미를 인수하고 삼미그룹의 부도 전 마크를 사용하고 있는 건설사다.
- ↑ 전기 6위, 후기 6위
- ↑ 전기 2위, 후기 2위
- ↑ 전기 6위, 후기 6위
- ↑ 전기 6위, 후기부터는 청보 핀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