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와히드 왕조

الموحدون , 알 무와히둔 (아랍어)
ⵉⵎⵡⴻⵃⵃⴷⴻⵏ Imweḥḥden (베르베르어)
Los almohades (스페인어) [1]
Almohad Dynasty (영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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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역사
Historia de España

고대 - 레콘키스타 - 스페인 제국 - 현대
레콘키스타스페인 제국현대
아스투리아스갈리시아 왕국카스티야 연합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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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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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 왕국아라곤 연합왕국
바르셀로나 백작령
후우마이야무라비트무와히드나스르
718년 ~ 1492년1492년 ~ 1931년1931년~
포르투갈의 역사
História de Portugal

선사 - 로마 - 게르만족의 대이동 - 헤콩키스타 - 포르투갈 제국 - 현대
헤콩키스타포르투갈 제국현대



아스투리아스
왕국
갈리시아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왕국이베리아 연합포르투갈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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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백작령
우마이야후우마이야무라비트
무와히드

1120년 모로코의 아틀라스 산맥 지역에서 발흥하여 1269년 멸망한 베르베르인 왕조. 당시 마그리브와 안달루스[2]를 지배하던 무라비트 왕조를 무너뜨리고 전성기를 맞았으며, 좌측 지도와 같이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였다. 북아프리카의 패권을 차지한 뒤에는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기독교 국가들과 싸워 이겼으나, 위기감을 느낀 기독교 국가들이 연합하여 반격을 시도한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활동이 급속히 위축되었다. 그 후 이베리아에서는 기독교 국가들의 본격적인 침입(레콩키스타), 아프리카에서는 마린 왕조를 위시한 휘하 베르베르 부족들의 반란에 직면하여 빠르게 해체되었다. 최근에는 아랍어 표기를 따라 무와히드 왕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영어 혹은 스페인어 표기를 따라 알모하드 왕조, 혹은 알모아데 왕조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2 기원 및 형성

무와히드 왕조의 기원은 무라비트 왕조와 마찬가지로 광신적인 종교 조직이었다. 아틀라스 산맥 주변 지역의 베르베르 부족집단인 마스무다 출신의 이븐 투마르트(Ibn Tumart)가 그 창시자였는데, 젊은 나이에 코르도바, 메카, 바그다드 등을 거치며 신학을 공부한 그는 주위 무슬림들의 종교적 나태함에 분노했다. 28살의 나이에 모로코로 돌아온 이븐 투마르트는 매우 엄격한 종교적 강령을 만들었는데, (한발리 파와 유사하게) 꾸란에서 금지한 모든 것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금지하는 한편 신의 다양한 성격을 모두 부정하고 오직 한 가지의 신격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알 무와히둔, 즉 "신의 유일성을 믿는 자들"(Unitarians/Monotheists)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꼴통스러운 엄격한 강령을 만든 이븐 투마르트는 1118년 마흐디(구세주)를 자처하고, 여러 도시들을 돌며 설교를 하고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설교의 내용은 지배층인 무라비트 왕조 세력의 종교적 나태함에 대한 비난과 자신의 교조적인 강령에 따른 엄격한 종교적 "개혁"을 실행할 것 등이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자 당연히 무라비트 왕조 측의 탄압이 뒤따랐고, 이에 이븐 투마르트는 동족인 마스무다 집단의 본거지 아틀라스 산맥의 도시 틴멜(Tinmel)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자기 운동의 성과를 보지 못한 채 1128년 무라비트 왕조와 맞서 싸우다 죽었으나, 그의 후계자 압드 알 무민(Abd al Mu'min)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압드 알 무민은 알제리의 베르베르계 제나타 족[3] 출신으로, 비록 출신은 다르지만 이븐 투마르트의 열렬한 제자인 동시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재이기도 했다. 이븐 투마르트 생전에도 두각을 드러냈던 그는 이븐 투마르트가 죽자 그의 후계자, 즉 칼리파로써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했고, 마스무다를 중심으로 강력한 교단-군사 조직을 만들어 무라비트 왕조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마침 무라비트 왕조는 이베리아의 레온, 카스티야, 포르투갈 등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다른 곳의 반란까지 겹쳐 위축된 상태였기 때문에 무와히드 세력의 강력한 공세를 막지 못했다. 1130년 경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와히드 세력의 정복은 1149년 마라케시를 점령하여 무라비트 왕조를 멸망시킨 후에도 멈추지 않았고, 1163년 압드 알 무민이 죽기 직전에는 북아프리카 일대를 석권하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침입하였다.

3 전성기와 몰락

유능한 지도자 유수프 이븐 타쉬핀이 죽자 바로 허약해지기 시작했던 무라비트 왕조와 달리, 무와히드 왕조는 그나마 후계자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압드 알 무민 사후 칼리파 자리를 이어받은 아부 야쿠브 유수프 1세는 북아프리카의 안정된 세력을 바탕으로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군소 이슬람 세력들을 제압하고 기독교 국가들을 공격하였다. 이베리아 정복을 위해 수도를 안달루스 남부의 대도시 세비야로 옮기기도 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마라케시로 돌아간 듯하다. 1184년 유수프 1세가 기독교 군대와 싸우던 중 전사하자 그 뒤를 이은 아들 야쿠브 알 만수르는 부친의 복수를 천명하며 재차 이베리아로 침입하였다. "승리자"를 의미하는 그의 칭호 "알 만수르"는 1195년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를 격파한 뒤 얻은 것이다.

유수프 1세와 야쿠브 알 만수르는 이베리아로 쳐들어올 때마다 압도적인 물량을 이끌고 와서 기독교 군대를 쫓아내고 여러 도시와 마을들을 점령했으나, 매번 오래 머무르지 않고 수도인 마라케시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이에 따라 칼리파가 이베리아로 건너가면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북아프리카로 돌아오면 기독교 국가들이 쳐들어오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나마 야쿠브 알 만수르는 기독교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그 세력을 한풀 꺾었지만, 기독교 국가들을 완전히 격멸하지는 못했다. 반면 기독교 국가들은 거대한 적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오랜 기간 자신들의 발목을 잡아왔던 서로간의 반목을 잠재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199년 야쿠브 알 만수르의 사후 뒤를 이은 무함마드 알 나시르 역시 처음에는 압도적인 물량을 바탕으로 기독교 국가들과의 싸움에서 뒤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211년 이베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역대 최대의 군대를 이끌고 왔던 알 나시르는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에서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 나바르의 산초 7세, 아라곤의 페드로 2세, 포르투갈의 아폰소 2세가 이끈 기독교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숫적으로 크게 열세였지만 더 중무장했던 기독교 군대는 지형을 이용한 기습 공격을 통해 단기간에 칼리파의 지휘부까지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버티다 못한 칼리파 알 나시르가 도주하는 순간 무와히드 왕조의 군대와 패권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이후 무와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이베리아에 남은 이슬람 도시들은 각자 힘으로 버티다 각개격파당했다. 우마이야 왕조 이래 알 안달루스의 아성이었던 코르도바를 포함, 대부분의 도시들이 반세기 남짓한 기간 내에 레콩키스타의 제물이 되었다. 그나마 반도 끝자락에 붙어 있는 그라나다에 나스르 왕조가 들어서서 1492년까지 간신히 명맥을 이었지만, 더 이상 기독교 국가들과 힘으로 맞설 수는 없게 되었다.

한편 아프리카에서도 무와히드 군대의 파멸을 틈타 휘하 부족들의 반란이 빈발했다. 무라비트 왕조에서 무와히드 왕조로 교체될 때처럼 강력한 구심점과 추진력을 가진 군사 교단 집단 따위가 출현하지는 않았으므로 무와히드 왕조는 나름 오래 저항했지만, 영토의 해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반란 세력 중 가장 강력했던 것은 마린 부족(Banu Marin)으로, 1268년에 이르러 무와히드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인 이드리스 알-와티크를 공격하였다. 1269년에 마라케시가 함락될 때, 이드리스 알-와티크는 노예에게 살해당했다. 이렇게 마지막 칼리파가 죽은 뒤 모로코는 마린 왕조의 땅이 되었다. 튀니지에서는 하프스 왕조, 알제리에서는 자얀 왕조가 각각 들어섰다.

4 특징과 의의

무와히드 왕조는 무라비트 왕조와 마찬가지로 엄격하고 교조적인 교단 조직이 군사 조직을 갖추어 국가로 발전했다는 특징이 있다. 다만 그 종교적 광신은 무라비트 왕조보다 한 술 더 떴던 모양인데, 예컨대 압드 알 무민은 1151년 튀니지를 정복한 이후 유대인기독교도들에게 "이슬람과 죽음 중 한 가지를 택하라"고 강요했다는 주장이 있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 버나드 루이스에 따르면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을 데려다 놓고 서로의 문화 중 어느 쪽이 우월한지를 논쟁하게 하는 "위험한 장난"까지 쳤다고 할 정도. 처음에는 종교적 광신주의로 시작했지만 세력 확장 과정에서 다소 관대해진 무라비트 왕조와는 다른 점이다.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야쿠브 알 만수르 시대에는 다소 태도가 누그러지기도 했었지만, 전체적인 추세가 변하지는 않았다.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예전까지 무슬림들과 잘 지내던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이 무와히드 왕조 치하에서 국외로 이주하는 현상이 잦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원래 코르도바에 살았지만 이집트로 도망쳐서 살라흐 앗 딘의 궁정 의사가 된 유대인 학자 마이모니데스(모세 벤 마이몬) 일가이다. 하지만 마이모니데스처럼 먼 길을 떠나 더 관대한 이슬람 국가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가까운 기독교 국가들로 들어가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다만 무슬림의 경우에는 어느정도 관용을 베풀었던 모양으로, 중세 이슬람 세계 최대의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아베로에스(이븐 루쉬드)는 교조적인 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여러 저작을 남기며 천수를 누렸다.

교조적인 종교 강령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무와히드 왕조는 문화, 예술에는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븐 투마르트 시대에는 모스크에 있는 종교 예술품들을 우상 숭배라 하여 파괴하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대신 건축 분야에는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는데, 왕조의 중심지였던 모로코와 이베리아 남부에 궁전과 사원, 학교들을 많이 지었다.
  1. 스페인어에서는 아랍어 정관사 al까지도 고유명사화 시키고 그 앞에 다시 정관사를 붙인다. 스페인어내의 아랍어 단어들은 이러한 경우가 매우 많은데, 이를테면 el arroz(쌀) 같은 단어들이 있다. 원형은 ar-ruz.
  2. 이슬람 치하의 북서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3. 정확히 말하면 일개 부족이 아니라 여러 베르베르 부족들이 뭉친 부족 연합에 가깝다. 당시 가장 큰 베르베르 부족 연합으로는 제나타(Zenata), 산하자(Sanhaja), 그리고 상술했다시피 이븐 투마르트를 배출한 마스무다(Masmuda) 등이 있었다. 당시 지배 세력이던 무라비트 왕조는 산하자 족 휘하의 부족인 람투나 족이 주축이 된 왕조이므로 제나타나 마스무다와는 알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