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크스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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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크스부르크
Augsburg
아우크스부르크 시의 문장
국가독일
바이에른
시간대UTC+1 (서머타임 준수)
한국과의 시차-7시간

1 개요


Perlach Tower와 Lech Town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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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독일 남부 바이에른에서도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아욱스부어크"가 현지발음에 더 가깝다. 주 내에서 뮌헨, 뉘른베르크에 이어 세번째로 큰 도시이다. 한국인들에게는 지동원, 구자철이 뛰고 있는 축구구단 FC 아우크스부르크로 친숙하며, 종교개혁 당시 루터교가톨릭 세력이 서로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가 체결된 곳으로 세계사에 이름을 남겼다. 인구수는 2011년 기준으로 26만 명.

2 역사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로, 그 기원은 기원전 15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의해 게르마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만들고자 시도했던 티베리우스가 세운 군사 기지이다. 도나우 강알프스 산맥 사이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라는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지한 로마 측에서는 이 곳을 라이티아 속주의 주도로 삼는다. 이후 중세 시기에 훈족샤를마뉴에게 연달아 도시가 약탈당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지만 13세기 후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자유도시[1]로 지정받으면서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넘어오는 로만틱가도[2]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아 상업수공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그에 따라 바이에른 근방에서 가장 세련된 도시이자 활기찬 도시로 승승장구하였다. 마르틴 루터가 주도하는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530년 양 측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후대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라고 부르는 양 측의 협상이 이 곳에서 열렸고 그 덕에 전 유럽이 종교를 놓고 피로 물들던 와중에도 평화롭게 지내나 싶었는데... 1618년 30년 전쟁이 터지면서 모든게 수포로 돌아갔다. 전쟁이 한창이던 1634년 구스타프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 군이 아우크스부르크 외곽에 주둔하자[3] 이에 발끈한 구교 측이 아우크스부르크를 포위하고 공격했던 것. 그 덕에 포위전 기간 동안 성 안에서는 아사자 및 병사자[4]가 속출하면서 인구가 기존의 7만명에서 만 명 가량으로 급감하고 만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빈 회의를 통해 새로운 유럽의 질서가 결정되는 와중에 아우크스부르크는 자치권을 상실하고 바이에른 왕국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 시기 산업혁명을 맞이하면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풍부한 수력을 이용하여 공업, 특히나 섬유산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으며 바이에른 왕국이 보불전쟁 이후 프로이센 왕국 주도의 독일 제국에 가입하면서 아우크스부르크도 독일 제국의 일원이 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제3제국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3 여담

  • 2차 대전 당시 나치당의 2인자였던 루돌프 헤스가 2차대전 중 영국으로 의문의 비행을 갔을 때 이륙한 장소가 이 곳이라고 한다. 또한 다하우 수용소의 부속 시설이 이 곳에도 있었다고,
  • 대항해시대3에서도 등장하는 도시이다. 유럽지역이라 플레이어가 찾아나서지 않아도 이미 발견이 되어있는 상태이다.
  1. 봉건영주에게 소속되지 않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직속으로 소속된 도시를 말한다.
  2.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온 후 독일 바이에른을 가로지르는 길로, 퓌센에서 출발해서 아우크스부르크를 지나 뷔르츠부르크로 향하는 통상로이다. 로만틱가도라는 이름은 말그대로 로마인의 길이라는 의미이다.
  3. 아우크스부르크는 신교도가 당시 더 많았기 때문에 신교측에 우호적이었다.
  4. 티푸스가 유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