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덴노

(메이지 천황에서 넘어옴)
일본의 역사
日本史
선대고대중세근대현대
~ A.D 538538~11851185~18681868~19451945~
조몬 시대야요이 시대고훈 시대아스카 시대나라 시대헤이안 시대가마쿠라 시대겐무 신정남북조시대무로마치 시대전국시대에도 시대일본 제국GHQ일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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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일본 제국
메이지 시대다이쇼 시대

1 소개

일본의 역대 덴노
121대122대123대
고메이 덴노메이지 덴노다이쇼 덴노
메이지 덴노의 어진영.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점을 주목하시라.[1]
왕호메이지 덴노(明治天皇)
이름무쓰히토 (睦仁)[2]
생몰년도1852년 11월 3일 ~ 1912년 7월 30일 (59세)
출생지일본 야마시로 국 교토 교토 교엔
사망지일본 도쿄 메이지 궁전
재위기간1867년 2월 3일 ~ 1912년 7월 30일 (45년 178일)
즉위식1868년 10월 12일
장례식1912년 9월 13일

일본의 무쓰히토(睦仁, 목인)덴노 시절의 연호. 일본 근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명군으로 꼽힌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는 시대를 잘 만나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된 입헌 군주로, 실제 개혁에 앞장선 건 이토 히로부미 등 하급 무사 출신의 정치인들이었다.

일본 극우 계열이 부를 때는 메이지 대제(大帝), 무쓰히토 대제, 메이지 성제(聖帝)라고도 부르는 듯.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개혁 성향의 인물이라고 쉽게 오판할 수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다.

2 연호 "메이지"

한자로는 明治(명치), 한 글자(일본어 2바이트 규격)로 압축하면 .

이 시절부터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3]가 채택되었기 때문에 무쓰히토 덴노의 재위기간을 메이지 시대라고 부르며, 무쓰히토 덴노를 가리켜 메이지 덴노라고도 부른다. 메이지 유신이 이 때 일어났다.

사실 즉위 이듬해인 1868년까지 선왕인 고메이 덴노의 연호인 게이오(慶應)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일세일원제는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본래 동양권의 연호는 군주가 사망하더라도 당해년까지는 전왕의 재위년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1867년까지 게이오 연호를 썼다면 정상적으로 제대로 연도를 센 게 맞다. 하지만 메이지라는 연호가 채택된 것은 1868년 9월인데, 사망한 전임 덴노의 연호를 1년 넘게 사용했다는 점은 확실히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메이지로 개원함과 동시에 연호를 1868년 1월까지 당겨서 소급적용했기 때문에 일세일원제가 확립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태음력에서 태양력으로의 변환도 동시에 진행했기 때문에 이 해의 날짜를 세는 건 약간 복잡하다.

즉 1868년 음력 9월 8일(양력 10월 23일), 연호를 '메이지'로 개원하면서 게이오 4년 1월 1일부터 9월 8일까지의 날짜를 삭제하고 이를 메이지 원년 1월 25일부터 10월 23일로 고쳤다. 그리고 '일세일원의 조'를 발표해 이제부터는 한 덴노에 하나의 연호만을 쓰도록 공포했다.

문제는 근대 일본은 연대를 셀 때 서력기원을 병기하지 않고 연호만을 표기했기 때문에, # 그러다보니 메이지 20년대와 30년대는 각각 1887년부터 1896년, 1897년부터 1907년이 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서기연도와 대응시켜 이해하기가 힘들다.

3 생애

무쓰히토의 어린 시절 이름은 사치노미야(祐宮). 1860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867년 아버지 고메이 덴노가 사망하면서 1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고메이 덴노와 측실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는데, 2남 4녀인 그의 형제자매 가운데 유일하게 유아기에 죽지 않은 인물이다. 한편 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은 에도 막부 제1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시집갔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메이지 덴노의 고모부가 된다. 아빠 외로울까봐 고모부 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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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때의 메이지 덴노. 소쿠타이류에이노칸으로 이루어진 정장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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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궁정 개혁 후의 사진. 이각모(Bicorne)와 군복의 서양식 제복을 착용중.

즉위한 다음해 1세 1원제를 정했으며, 그 다음 해인 1869년에 에도 막부가 무너진 에도로 황궁을 옮긴 후 칙명을 내려 에도를 지금의 '도쿄(東京)'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1870년에는 신토를 국교로 정하고 제정일치를 천명했다. 정치엔 크게 개입하지 않았지만 정한론이 대두될 때 사이고 다카모리조선 파견을 중지시키는 개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서남전쟁을 일으켰고, 그걸 진압한 건 메이지 덴노가 아니라 오쿠보 도시미치가 중심이 된 주류 개혁파였다.

다만, 정치를 전혀 안 한 건 아니다. 이를테면 <<일본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책에 따르면, 정실인 쇼켄황후와 함께 지방 순행을 자주 하면서 이른바 국민 통합의 차원에서 신정부의 얼굴마담 역할을 함은 물론[4] 앞서 말한 메이지 6년 정변도 그렇고, 오쿠보 도시미치 사후에 일본 지도부 사이에 벌어진 혼란을 수습하는데 덴노가 개입했다고 한다.

4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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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부자연스럽다
아니 그냥 이상하다

정실 쇼켄황후(昭憲皇后)[5]는 자녀를 낳지 못했지만, 여러 측실들을 거느려 자녀를 많이 낳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1~2살 안팎으로 죽었고, 1남 4녀만이 살아남았다.

  • 3남 하루노미야 요시히토(明宮嘉仁) 친왕(1879-1926) - 측실 야나기하라 나루코(柳原愛子)[6] 소생. 훗날의 다이쇼 덴노. 쿠죠 사다코와 결혼하여 쇼와 덴노 등 4남을 낳았다.
  • 6녀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昌子) 내친왕(1888-1940) - 측실 소노 사치코(園祥子) 소생. 다케다노미야 나루히사(竹田宮恒久) 왕에게 시집가 1남[7] 1녀를 낳았다.
  • 7녀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1890-1974) - 측실 소노 사치코 소생.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北白川宮成久) 왕에게 시집가 1남 3녀를 낳았다. 1947년의 신적강하 때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전락했다. 후사코의 손녀 기타시라카와 하츠코(北白川肇子)는 1939년에 태어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나,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한 후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 8녀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允子) 내친왕(1891-1933) - 측실 소노 사치코 소생.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8] 에게 시집가 2남 2녀를 낳았다.

5 트리비아

의외로 서양 문물에 부정적이었다. 한학자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나 사사키 다카유키(佐々木 高行)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데, 특히 교육에선 유학을 중심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서구식 학제를 도입하려는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1847~1889)가 문부성의 고문에 임명되자 병을 핑계로 2개월간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최종 승인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 배째).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적절한 설득으로 입헌군주제 등에 반대하진 않게 되었고, 1886년부터는 궁중에서 양장 차림을 허락하였다. 대신 그의 이런 성향은 《군인칙유(軍人勅諭)》(1881), 《교육칙어(敎育勅語)》(1890) 같은 봉건적 요소가 가득한 표어들을 만드는데 영향을 크게 끼쳤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일본 개방의 중심이던 사쓰마, 조슈 무사단의 성향 자체가 보수 개혁파였기 때문이지만.

항목 최상단에 올라가 있는 메이지 덴노의 모습은 어진영(御眞影)이다. 사진 촬영이나 어진을 그리는 작업 일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궁정화가로 고용된 이탈리아 출신 화가 에도아르도 키오소네(Edoardo Chiossone)가 평소의 모습을 스케치해서 초상화를 완성한 뒤 이 그림을 다시 흑백사진으로 찍어서 복제했다는 의미. 사진 찍기 좋아했던 고종황제와는 대조적.

프로파간다로 유명한 그림이기도 한데, 사실 메이지 덴노가 사진 찍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 이유는 얼굴에 마마 자국이 있어서 본인의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그 점을 역이용하여 메이지 덴노의 모습을 진짜 실물이 아닌 어진영으로 재구성하면서, 프로이센의 카이저 같은 강인하고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를 심고자 했다.

결과적으로는 대성공. 전국의 관청, 학교 등에 붙어서 덴노 그 자체인 것처럼 숭배시되었는데, 심지어는 불타는 학교에 어진영을 구하려고 뛰어 들어갔다 죽는 교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전 문서에 무슨 북한이냐고 비꼬는 글이 달려 있었는데 사실 동양에서는 왕가의 위패나 어진등을 구하기 위해 물이든 불이든 뛰어 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조선시대에도 병자호란때를 비롯하여 몇 번 비슷한 일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니까 북한이 비정상인거다.


1890년 전후에 겨우 찍은 수정없는 흑백 사진.

이런 숭배는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러일전쟁의 삽질로 유명한 노기 마레스케 육군 대장은 삽질의 책임을 지고 종전 직후 할복하려다 메이지 덴노가 "나 죽기 전에는 절대로 못해" 라고 못박아 버리자, 덴노 사망 후까지 기다려 장례절차가 다 끝난 날 밤에 부부가 동반자살했다.

어렸을 때부터 대인기피증이 상당했다고 한다. 일본 군주가 히키코모리라니 그래서인지 자기 자식들도 잘 안 만났다고 한다.

이 사람을 모시는 신사가 그 유명한 메이지신궁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한편 그에 대한 음모론도 존재한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 참조.

이 사람이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골수 덴노주의 군인과 신료들의 영향을 받아 '교육에 대한 훈시'를 한 '교육칙어'라는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군국주의 시대를 산 일본인들은 대부분 이것을 암송하고 글자까지 모두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사무치게 배웠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학생들도 이걸 외울 것을 강요당했다. 원문과 해석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을 흉내낸 한국의 10월 유신독재 시절에도 이 교육칙어를 모방한 국민교육헌장을 무조건 외우도록 강요했다. 그 시절 학교를 다닌 중장년층은 아직까지도 "민족중흥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 같은 구절이 머리속에 박혀 몇십년이 지났는데도 암송이 기능한 사람이 많다. 강제로 국민들에게 삶의 방향을 주입하는 효과가 있는 독재정권의 특징적 행태라고한다.

생전에 여자와 유흥을 매우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렘왕[9] 정무에 별 관심이 없어 신하들이 알아서 개혁을 추진하도록 묵인했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 같은 대신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메이지 덴노를 '장난감'에 비유한 적도 있을 정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택에 일본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메이지 덴노는 별다른 방해를 하지 않은 채 능력 있는 신하들이 개혁을 주도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일본은 신속한 개혁을 거쳐 근대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어떤 반도 국가어떤 국왕이 뭔가 하긴 하는데 결과는 현실은 시궁창이 되어버렸었던 것과는 대조적. 애초에 조선말기 지도층이 개혁을 이룰만한 능력이 있었는지는 그냥 넘어가자

야마다 아사에몬이 바친 일본도 코류 카게미츠를 패용했다고 한다. 남북조시대의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검으로 전해지는 물건인데, 마사시게가 일본 제국에서 덴노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된 것을 생각하면 정치적 상징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문단에서도 몇번 이웃나라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이 언급되는데, 재미있게도 고종과 메이지 덴노는 1852년으로 동갑이고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고종이 양력 9월 8일(음력 7월 25일), 메이지가 11월 3일로 메이지 덴노가 2개월 늦다. 현재 11월 3일은 문화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6 메이지/출생

6.1 실존인물

6.1.1 메이지 원년 ~ 9년(1868~1876)

6.1.2 메이지 10년대(1877~1886)

6.1.3 메이지 20년대(1887~1896)

6.1.4 메이지 30년대(1897~1906)

6.1.5 메이지 40년대(1907~1912)

6.2 가상인물

6.2.1 원년 ~ 9년(1868~1876)

6.2.2 메이지 10년대(1877~1886)

6.2.3 메이지 20년대(1887~1896)

6.2.4 메이지 30년대(1897~1906)

6.2.5 메이지 40년대(1907~1912)

7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대한제국구한말만큼이나 격동의 시대였던지 창작물에서도 배경으로 종종 쓰인다.

  1. 또 이 그림은 실제와 조금 많이 다르다. 실제 메이지 천황의 얼굴을 서양인의 이목구비와 유사하게 조작한 것이다. 아래 사진과 비교하면 인물이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 덕에 아이누족과 비슷한 사진이 되어버렸다.
  2. 도산 안창호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유언으로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고 했는데, 여기서 목인이 바로 무쓰히토, 즉 메이지를 의미한다.
  3. 한 군주가 재위기간 내내 한 연호만을 쓰는 제도. ex)히로히토 - 쇼와, 아키히토 - 헤이세이, 군주가 정치적, 혹은 주술적인 이유로 연호를 갈아치우면 여러 가지로 피곤해지기 때문에 한번 연호를 정하면 못 바꾸도록 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명대부터 시행되었다.
  4. 가령 지방 순행 중 특별히 재해를 입었거나 빈공한 사람들을 볼 경우 금전을 하사한다던가, 다 덕치 개념을 이용해 국민들을 체제에 순응하게 하고자 하는 거다.
  5. 본래 이름은 마사코(勝子)였으나 하루코(美子)로 개명했다. 고셋케(五攝家) 중 하나인 이치죠(一條) 가문의 딸이다.
  6. 나루코의 오빠 야나기하라 사키미츠(柳原前光)의 서녀 야나기하라 뱌쿠렌은, '다이쇼 시대 3대 미인' 중 하나이자 문학가로, 그리고 파란만장한 사생활로 유명했다.
  7. 이 아들인 다케다 츠네요시는 731 부대에서 생체 실험한 전범이다.
  8. 난징 대학살의 총 지휘관이다.
  9. 반면에 그의 아들인 다이쇼 덴노와 장손인 쇼와 덴노는, 황후 외의 다른 여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어 후궁조차 두지 않았다.
  10. 일본 최장수 노인이었던 사람.
  11. 과거 일본 최장수 노인. 사망 당시인 2013년 한국 나이로 117세. 19세기에 태어난 전세계 남성 중 최후의 1인. 참고로 1920년대 문화기만통치시기에 조선총독부에서 통역으로 잠깐 일한 경력이 있으며, 이후엔 우체부로 살았다.
  12. 제목대로 주요 캐릭터들은 다이쇼 시대 출신이지만, 이 2명은 7월 30일 이전 출생(타마키 : 2월 7일생, 사치코 : 3월 26일생)이라 시간상으로는 메이지에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