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치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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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啓超(양계초)

1873년 ~ 1929년

청말 민국초의 중국의 정치가,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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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광둥성에서 태어났다. 재수를 거쳐 15살에 향시에 합격, 거인이 된다. 이때 베이징에서 내려온 감독관이 그의 총명함을 알고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해 주는데, 베이징의 처가는 량치차오가 훗날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1] 향시에 합격한 이후 캉유웨이의 제자가 된다. 1898년 캉유웨이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을 추진한다. 당시 겨우 25세이었다. (광서제 항목 참조). 그러나 서태후 등 보수파의 쿠데타로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한다. 이후 1912년까지 14년 동안 중국에 돌아오지 못한다.

망명 이후 스승인 캉유웨이와는 다르게 강력한 서구식 근대화를 주장한다. 일본에서 량치차오는 <청의보>, <신민총보> 등 잡지를 발행했는데 청 정부가 판매를 금지했음에도 어떤 국내잡지보다도 가장 많이 팔렸다. 이로 인해 그는 망명객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여론을 장악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899년 독립신문에 그의 '애국론'이 실리는 등, 비슷한 시기에 독립협회 등에 참여했던 조선의 애국계몽 운동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박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의 '주자' 수준이었다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意太利建國三傑傳)》[2], 《월남망국사》 등의 책들은 신채호에 의해 번역되었는데, 훗날 일제에게 금서처분 당했다. [3]

그 자신도 조선에 관심이 많아 경술국치 이후 《조선망국사략》을 쓰기도 했고, "남아의 죽음을 어찌 말하리오? 나라의 치욕을 씻지 못하면 어찌 이름을 이룰 수 있는가?"라면서 안중근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선은 중국의 번국이라는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인물은 아니었다(역으로 그래서 조선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조선인을 매우 비판적으로 묘사했는데,


"조선 사람은 화를 잘 내고 일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한번 모욕을 받으면 곧 팔을 걷어올리고 일어난다. 그러나 그 성냄은 얼마 안 가서 그치고 만다. 한번 그치면, 곧 이미 죽은 뱀처럼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다.

조 선 사람은 미래의 관념에 대하여 매우 박약하다. 소민(小民)은 한번 배부르면 서로 두셋이서 짝을 지어 차(茶)를 다리며 나무 그늘에 쉬면서 한담(閑談)으로 날을 보낸다. 다시 내일은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까 하는 생계문제를 계획하지 않고 유유하게 고대(古代) 태평시대의 사람과도 같다.

벼 슬한 사람들도 또한 그러하다. 다만 오늘에 벼슬을 하고 권세가 있으면, 내일에 나라가 망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관심 밖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한 후로부터 모든 사람은 다 조선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밑에 후술하겠지만 이는 그의 조선에 대한 "중국의 속국이다"라는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망명 생활 중 역시 일본에 망명 중이었던 쑨원과 만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두 거물 망명객이 힘을 합쳐 중국을 변화시키기를 바랬지만 두 사람의 합작은 결국 실패했다. 쑨원과 달리 량치차오는 정치적 혁명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량치차오는 쑨원의 사회주의적 색채를 공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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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남 오오
망명 당시의 양계초와 당시 일본 사회에서 떠돌던 사회진화론 담론을 편집한『음빙실문집』(1903)

나이대가 나이대인 만큼 나중에 신해혁명( 멸망) 후에 40대로 인생의 리즈시절을 맞아 의회운동의 당수, 사법총장, 재무총장 등을 맡으며 위안스카이 안티의 선봉에 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예측하고 로비를 통해 연합국 줄서기를 이루어냈으며, 결국 그 덕분에 파리 강화 회의에도 중국 대표단의 고문으로 참석하게 된다. 이때 그는 총리 돤치루이가 중국 남방 정벌을 위한 차관을 얻기 위해 일본에 칭다오산둥의 이권을 넘겨주려 한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의 폭로는 5.4운동으로 이어져 북양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유럽 여행 이후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변심한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문명개화, 사회진화론을 때려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직후 파괴된 유럽 국가들의 모습과 그 국가들 나름에서 존재하던 계층 간의 갈등의 진면목을 보게 되면서 "자연의 파괴보다 인간의 파괴가 더 심하고, 야만인의 파괴보다 문명인의 파괴가 더욱 더 심하다."라고 개탄하게 된 것. 그리고는 180도 전향하여 남은 10여년 동안 "불교의 자비, 유교의 균무빈·화무과(均無貧·和無寡), 도교의 자족과 같은 동양 사상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물론 이 전환도 꼭 옳은 판단이라고 볼 순 없지만, 적어도 사회진화론의 극한으로 달려간 조선판 량치차오의 종착역이 대체로 친일파였다는 걸 생각할 때(윤치호라든가... 이광수라든가...) 그들보다는 나았다고 할 수 있다. 역시 문명 진화론에 빠져있던 안중근 의사나 신채호 같은 분들 역시 제국주의의 폭력을 직접 보게 된 후에는 자신들의 생각을 고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추악한 현실을 보고 자신의 믿음을 수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위인으로 남을 수 있는 걸지도.

당대의 그는 한국에서 양계초라고 하도 널리 알려졌고, 이후에 교과서에도 양계초라고 자주 등장한다. 그가 활약했던 시기가 (적어도 국사책에서는) 신해혁명 이전이기도 했고.

  1. 의사소통부터 도움을 줬다. 량치차오는 광둥어가 심해 음식점에서 주문도 못할 정도였다.
  2. 주세페 가리발디, 주세페 마치니, 카밀로 카보우르를 말한다.
  3. 참고로 일제가 태웠다는 20만권 사서 떡밥의 금서들에 이 책이 포함되어 있다. 양계초가 잘도 환빠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