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세금 제도

< 중국사(양세법에서 넘어옴)
공자노나라의 혼란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는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던 중 허술한 세 개의 무덤 앞에서 슬피우는 여인을 만났다. 사연을 물은 즉 시아버지, 남편, 아들을 모두 호랑이가 잡아먹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자가 "그렇다면 이 곳을 떠나서 사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여인은 "여기서 사는 것이 차라리 괜찮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면 무거운 세금 때문에 그나마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말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도 무섭구나."[1]

1 개요

중국 역사에서의 세금 제도와, 이에 관련이 깊은 토지 제도 따위에 대한 정보. 수능에서 세계사동아시아사를 선택할 사람들은 특히 균전제 항목부터 꼼꼼히 읽어보자.

2 하나라, 상나라 의 세금 제도

맹자의 말에 따르면 하나라는 공법, 상나라는 조법이라는 제도를 취했다. 다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래 '맹자의 주장'을 참조하자.

3 정전법(井田制)

주나라에서 시조로 받들었던 후직(后稷)은 농업신으로 알려져 있고, 주나라는 농업 국가였다. 주나라에서 시행했다고 알려진 토지 제도가 바로 정전제다.

토지, 땅 크기를 제는 단위에 무(畝)라는 것이 있는데,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지금 기준으로 30평 정도다. 다만 정확한 크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많다. 예를 들어서 진순신의 이야기 중국사에서는 주나라 당시의 1무가 대략 1.82아르라고 한다. 그럼 55.055평인 셈이다.

어찌되었든 약 900무의 땅을 정사각형 모양으로 아홉 개로 나누면, 그 둘레의 모양이 정(井) 자가 되는 것이다. 이 땅의 가장 자리 부분은 여덞 가구가 열심히 농사 지어서 먹고 살고, 한 가운데의 100무는 서로 공동으로 경작해서 정부에 바친다. 이것이 공(共)전이고, 가장자리 부분들이 사전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대전(大圖)> 편에 이와 같은 내용을 다룬 노래가 있다.

有渰萋萋(유엄처처) : 먹구름 뭉게뭉게 일어나
興雨祁祁(흥우기기) :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雨我公田(우아공전) : 우리 공전에 내리고
遂及我私(수급아사) : 나의 사전에도 내린다
彼有不穫穉(피유부확치) : 저곳에는 베지 않은 늦곡식
此有不斂穧(차유부렴제) : 이곳에는 베어둔 곡식들이 있다
彼有遺秉(피유유병) : 저곳에 버려진 곡식 단들
此有滯穗(차유체수) : 이곳엔 흘린 이삭들이 있다
伊寡婦之利(이과부지리) : 이것들은 과부들의 차지

노래 내용을 보면 공전에 먼저 비가 내리고 다음에 사전에 내리기를 바라고 있다…… 코렁탕이 두려웠나? 버려진 이삭들을 과부들이 주워 담았다는 것은 일종의 복지 제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전법이 실제로 주나라에서 시행되었느냐 하는 점에 있어서는 논란들이 있는데, 여덞가구가 공전을 경작하는 데 분쟁은 일지 않았는지, 각자 자신들의 사전을 경작하기 바뻐서 공전을 방치하지 않았는지, 공전의 수확량이 예상보다 적었다면 과연 추가적인 세금을 안 걷었는지 등 여러 가지 의문이 있기 때문에 정전법은 허구일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 것이다.

혹은 주나라가 초기에는 그런 제도를 했다고 쳐도,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규모가 훨씬 커진 이상 그 제도를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았을 것이라는 점을 들기도 한다. 초기의 주나라는 씨족 공동체였을 테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가족과 개개인의 사유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게 될 수록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적당히 일을 하게 될테니 말이다.

3.1 맹자의 주장

맹자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 上)을 보면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다. 등문공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묻자 맹자가 대답하면서 이전의 세금 제도에 관한 언급을 한다.

하(夏)나라는 세대당 전지 50묘를 주고 공법(貢法)을 행하였고, 은(殷)나라는 세대당 70묘를 주고 조법(助法)을 행하였으며, 주(周)나라는 세대당 100묘를 주고 철법(徹法)을 행하였는데, 실제로는 모두 10분의 1의 세금을 거둔 것입니다. 철(徹)은 힘을 합해 함께 일하고 똑같이 나눈다는 뜻이고, 조(助)는 힘을 빌려 공전(公田)을 경작한다는 뜻입니다. 용자(龍子)[2]가 말하기를,

'토지를 다스리는 데는 조법(助法)보다 좋은 것이 없고, 공법(貢法)보다 나쁜 것이 없다. 공(貢)이란 수년 간의 소출의 평균을 계산하여 일정액의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할 경우, 풍년에는 곡식이 넘쳐나서 많이 거두어도 학정이 되지 않는데 적게 취하게 되고, 흉년에는 토지에 거름을 내기에도 부족한데 반드시 일정액을 꼭 채워 세금을 취해 가는 일이 벌어진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백성으로 하여금 원망스러운 눈으로 일년 내내 부지런히 노동해도 제 부모를 봉양할 수 없게 만들고, 거기다 빚까지 내서 일정액의 세금을 채워 내게 함으로써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산골짜기에 나뒹굴게 한다면, 어떻게 백성의 부모될 자격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벼슬하는 자에게 대대로 녹(祿)을 주는 세록(世祿)은 등 나라가 본래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위에 언급한 시경의 내용을 말하며, '조법에만 공전이 있는데 공전 이야기가 나오는것은 주나라도 공전을 한것'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이 이야기를 참조로 하면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시대의 토지 제도를 알수가 있지만 확증 할수는 없다. 맹자 본인은 확실하게 정전법을 주장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이전의 정전제를 이상화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일단 맹자가 주장하는 내용을 이러하였다.

  • 시골에선 9분의 1의 조법을 행한다.
  • 성 안에서는 10분의 1의 조세를 걷는다.
  • 경(卿 : 벼슬) 이하는 50전의 규전(圭田)[3]을 준다.
  • 농가의 기타 노동자에게는 25무를 준다.
  • 사방 1리마다 우물 정자 모양의 정전을 두어 1정 900묘 중 100전은 공동 경작하여 그 생산량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800묘는 한 가구가 100묘씩 경작하여 먹고 산다.

이 정전법이 실제로 행해졌는지, 맹자로 인해 지나치게 이상화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이후로 정전법은 이상향이 되어 후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것이다.

4 관중의 징세제

관중

제환공을 패자로 만든 관중이 중시한것은 경제력이었다. 그의 사상은 즉 이러했다.

"나라에 재화(財貨)가 많으면 먼 데서도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어 있다. 땅을 개간하고 개발하면 몰려온 사람들은 머문다. 곡식창고가 차 있으면 사람들은 예절을 안다. 입고 먹는 것이 충족되면 사람들은 영욕(榮辱)을 안다. 법을 지키면 육친(六親)이 화합한다. 예의염치(禮儀廉恥), 즉 예절과 의리와 조심함과 부끄러움이 있는 나라에서는 임금의 명령도 통한다."

여덟 집에서 세금을 내기 위하여 공동으로 경작하는 농토는 아무래도 자기것이 아니라고 등한히 하게 된다. 그래서 관중은 공전제(公田制)를 폐지하고 징세제를 만들었다.

즉, 농사를 지어서 일정한 비율의 수확을 세금으로 낸 나머지는 개인것으로 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열심히 일한 만큼 자신이 갖게 되는 몫이 많아지니 모두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제나라의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이것이 군사력의 증강으로 나타나 제나라가 패자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만, 이 방법의 경우 흉년이 들거나 하면 농민도 낼 세금이 부족하고, 국가도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한다는 부작용이 있었다. 일단 비율로만 세금을 내기 때문에 흉년이 들 경우에는 국가의 필요최소량의 세금도 못거두면서 반발을 사기 딱 좋기 때문이다.

5 BC 594년 초세무(初稅畝)

노나라의 선공(宣公) 15년에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농민이 직접 다스리는 땅의 크고 작음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초세무 제도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땅의 크기의 서로 다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즉 바로 토지의 사유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정전제가 완전히 붕괴되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땅의 단위를 무라고도 했기 때문에 세무제(稅畝制)라고도 하였다. 이 초세무의 가장 큰 의의는 국가의 토지지배를 강고하게 하고 차등적인 세율을 적용해 농민들이 토지 속박을 강하게 했다는 점이다. 즉 영토국가로서 국가체제 발전의 전단계로 전국시대를 여는 전초적인 세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어설프긴 하지만 최초의 토지세라고 볼 수 있다.

6 한나라 시기의 세금 제도

한나라 시대에 이르면, 이제 통일 제국이 되고 전쟁도 많이 사라졌으니까 사람 수는 늘어났고, 그걸 거두는것도 중요한 일이 되었다. 한나라의 조세 제도에서는 인두세(人頭稅)라는 것이 유명하다.

인두세. 사람 인, 머리 두, 세금 세. 즉 사람 머리 숫자대로 돈을 거두어 들였다는 것이다. 3∼14세의 남녀에게 23전을(구부라고 한다.), 15∼56세의 남녀는 120전을 바쳐야 했다.

인두세만 바치면 끝나는것이 아니었다. 전조(田租)라는것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경작하는 땅에 부과하는 세금이었는데, 수확량의 일정량을 바치는게 목적이다. 다행스럽게도 한나라는 이런 부분에는 관대한 편이라 전조로 걷어들이는 돈은 많지 않았다. 땅 때문에 문제가 되진 않았으나 문제가 되는건 인두세 비용이 몹시나 부담스러웠다는 것이다.

병역의 의무에 대해서 말하자면, 일생동안 2년간의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따로 노역을 하는 시간이 1개월씩 있었는데, 사정이 너무 막장이라 노역을 할 수 없다 할 경우에는 관청에 돈을 내고 관에서 대체 인력을 고용하게 했다.

7 왕망의 대개혁

왕망이 등극하였을 당시의 한은 왕조 말기적 현상을 노출하여 경제는 호족과 대상인 등에 집중되어 정체상태에 빠지고 일반 백성들은 빈곤과 고통 속에 있었으므로 사회의 불안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왕망은 그의 유교적 이상국가상을 바탕으로 정치, 사회, 경제 각 분야에서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왕망의 유교적 이상 국가란 곧 주나라였다. 왕망은 곧 주나라로의 회귀를 주장하였다. 전국의 토지를 왕전(王田)으로 고쳐 조정 소유로 귀속시키고 사사로이 매매를 금지했다. 그리고 화폐 제도를 개혁하여 장안, 낙양, 한단, 임치, 완, 성도 등의 전국 6대 도시에 오균사시와 전부관을 설치하여 오균육관을 실시했다. 이 오균육관에서는 외상을 주는 것과 돈을 빌려주는 것을 시행하고 물가를 관리하게 했으며 술, 소금, 쇠붙이 등의 세금을 매기게 했다.

그러나 이건 오히려 물가가 폭등하고 이래저래 제도가 복잡하여 기존 제도보다 훨씬 못하고 오히려 사회 혼란을 야기했다.

토지국유화의 목적은 대토지 소유자들의 토지를 강제 몰수하여, 토지를 갖지 못한 유망 농민들에게 경작지를 갖도록 함으로써 토지겸병과 빈부불균형의 사회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재정확보를 꾀하려 하였지만 기존 호족세력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3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왕망의 정책 자체는 그의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인심수렴의 면과 정권유지를 위한 재원확보라는 이원적 성격을 띤 현실적 정책이었다.

하지만 정책의 근거를 오직 고대의 경전에서 찾았고, 자신의 황제권을 높이고 견고히 하는데 필요한 재원확보에 더 집착함으로써 그의 정책은 일종의 강압정책이 되어 실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당시의 오랜 사회관습과 기존세력의 이해관계, 그리고 백성의 구체적 현실을 무시한 채 강행함으로써 결국 호족으로 대표되는 지방 유력 계층과 백성의 불만을 다같이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개혁을 하면서 기득권층에게 반발을 사는건 당연하지만 기득권층이 아닌 일반 백성들도 등을 돌리게 했으니 안망할 수가 없다.

결국 왕망의 개혁은 그 이름대로 왕창 망하면서 실패해버렸고, 다 이전으로 돌아가버렸다.

8 조조 등장

조조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위나라의 조조가 등장했고, 조조는 이런 부분에 손을 대었다. 우선 유명한 둔전법(屯田法)이 있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국가에서 재정 확보등을 목표로 계획적으로 사람들을 투입해서 땅을 경작하는 제도다.

조조가 둔전을 만든것은 물론 아니다. 한무제 때부터 이미 둔전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군둔, 즉 군사적인 둔전이었다. 즉 적과 맞붙은 지역의 변경 지대를 새로 개발해서 자기 땅으로 만드는 일이었던 것이다.

한무제 때 장액과 돈황 방면에 둔전을 설치했고, 한나라 선제때 76세의 노장 조충국은 둔전병을 이용해서 강족을 막기도 했다. 후한 광무제 때에는 여러 곳을 평정한 장수들이 장병을 거느리고 각지에 둔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조조의 둔전은 성격이 많이 달랐다. 민둔(民屯). 즉 민간인을 이용한 둔전이었다. AD 196년의 일로, 조조의 둔전제로 위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둔전의 영향력이 큰 나라가 되었다.

장안을 탈출한 천자를 모시고 허창에 근거지를 마련한 조조는 허창의 주변에 사람들을 모집해서 둔전을 설치하기 시작하고, 이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중심지는 허창, 낙양, 하남성 중부, 하북성 남부, 섬서성 남부, 산서성 남부에 분포하고 있었다.

소설 '삼국지연의'등으로 잘 알라져있듯이 그 당시는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매일같이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죽었으며 땅은 주인을 잃었다. 조조는 이 버려진 땅과 적대 세력을 물리치고 얻은 토지를 둔전으로 경영하고 하천 유역에는 수리시설을 갖추어서 경작지를 만드는데 중점을 두었다.

둔전을 일구는 사람들은 정복당한 주민들 - 갈 곳 잃은 유민들 - 가난한 빈민들이었는데 조조는 이들을 강제로 이주 시켜 일을 시켰다. 둔전민들은 호적에 포함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둔전민들은 둔전객, 아니면 아예 그냥 객이라고 불렸는데 일반 양민보다도 지위가 낮았고 차별받는 존재들이었다.

둔전을 하러 온다면, 물론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소나 종자등은 관청에서 지급하였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데, 둔전민에게 겪는 세금은 자신의 소를 사용한다면 수확의 2분의 1, 만약 관청의 소를 빌려서 쓴다면 수확의 60%라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는데, 한나라 시대는 10분의 1을 넘어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담은 가혹한 수준이었다. 대신, 둔전민들은 말 그대로 '굶어 죽지는 않을 정도'는 벌 수 있었고 더 이상의 착취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좋게 생각하자면 농사를 짓는 소작농들은 한나라의 세금 그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소작료로 수확량의 상당 부분을 지주에게 내야 했고 전세 외에도 다른 여러 명목으로 거두는 세금으로 고통을 겪었기에 최소 40%~50% 는 자신의 것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선 당시 사정을 고려하면 낫다고 볼 수도 있다.

오랜 전란으로 황폐하게 된 땅은 이렇게 개간되었다.

군둔전도 물론 유지되었는데 주로 오나라의 국경 지대 전선에서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를 사용하면 2분의 1, 관청의 소를 빌리면 60%를 내야했다.

삼국시대 조조의 둔전제 : 피정복민, 유민, 빈민을 이용해서 개척. 자신의 소를 사용하면 수확의 2분의 1 납부. 관청의 소를 빌리면 수확의 60% 납부

하지만 둔전제의 경우에는 후한 말기의 혼란의 상황을 벗어난 일반 백성들에게는 별로 흥미가 없는 엄격한 제도라서 일단 삼국이 정립된 다음에는 농민을 땅에 가두어 놓고 가혹한 세금을 뜯어가는 제도로 변질되고 만다. 그래서 서진이 성립되는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면 둔전에서 나오는 세수의 양과 질이 모두 떨어져고, 둔전을 장악한 권문세족이 해당 둔전을 사유화 하는 경우가 많아서 서서히 둔전이 해체되고 만다.

조조는 또한 호조제(戶調制)를 실시하였다. 업성을 함락한 조조는 호조령을 반포한다. 호, 즉 집 마다 비단과 면 일정량을 바쳐야 했는데 이것이 호조제였다.

이러한 이유는 후한 말기가 되자 워낙 상황이 막장스러워 국가권력은 떨어지고, 시골 마을의 인구수를 제대로 알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냥 집 단위로 세금을 때려버린 것이다. 또한 돈을 바치는게 아니라 비단 등을 바친것은, 한나라 말기에 화폐를 이용한 경제가 쇠퇴하고 상공업이 막장스러워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단 인두세는 사람 숫자에 따라 대책없이 세금만 늘어나는 경우가 있기에 가혹했기 때문에 인두세를 내지 않으려고 아이를 낳지 않거나 비밀리에 키우는 경우가 있어서 인구가 늘지 않고 호적에 기록되지 않는 인구가 늘어나는 등 각종 폐단이 있었다. 물론 호조제도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악용할수도 있지만, 일단 이 시점에서는 폐단을 고쳤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9 균전제의 등장

효문제

북위효문제 이후 중국은 균전제(均田制)를 사용했다. 균전제는 모든 토지가 조정의 소유라는 전제하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진 농경지를 노동력을 갖춘 몰락 농민에게 분배함으로써, 농업 생산력을 높여 안정적인 세수와 요역의 확보를 꾀하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제도다. 그 모습을 어찌보면 고대의 정전제를 다시 부활시키고, 현실에 맞게 매끈하게 다듬은 모양새인 것이다.

서기 485년, 한족 출신의 관리 이안세(李安世)는 효문제에게 이를 건의하였고, 효문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효문제는 15세부터 70세까지의 사람들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땅을 나누어주었다. 대신 남자는 40무, 여자는 20무로 여자는 남자의 절반 수준이었다.

균전제를 쓰면 농민들은 대호족들에게 땅을 잃을 염려가 없고, 국가는 이를 강력하게 통제하여 그들이 본업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말 타고 다니던 유목민족인 북위가 이런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이 재미있는 점인데, 이때를 기점으로 북위는 한족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균전제의 경우도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면서 임자가 없는 땅이 많아졌을 때나 기능이 가능한 제도라는 점이다. 당장 균전제는 권문세족이 보유한 사유지에는 적용되지 않으므로 권세 있는 양반들이 사유지를 늘려갈수록 균전제에 사용할 땅 자체가 줄어들기 때문에 다른 원인이 없더라도 균전제를 유지할 수 없는 중대한 원인이 된다. 결국 북위가 분열되는 시기에는 사실상 균전제가 붕괴되었다.

10 조용조와 부병제의 성립과 붕괴

당나라 시기에 이르면 그 동안의 혼란과 왕조 교체, 강남지역의 점령등으로 인해 다시 한번 균전제를 널리 시행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따라서 균전제는 널리 퍼지져 정남에게 100무의 땅을 주었고 이른바 조용조(租庸調) 라는 제도가 출현하였다.

 * '조(租)'는 토지에 부과해서 걷어들이는 곡물, 매년 2석.
 * '용(庸)'은 몸으로 때우는 일하기, 20일 정도.
 * '조(調)'는 다시 집마다 부과하는 토산물들. 견포류 2장 및 진면 3장.

꽤 부담은 적은 편이긴 하였다. 그리고 귀족이거나 관리들은 이런 거 안했다. 또 여기다 흉년이 들면 부담분을 감소시켜주니, 백성들은 나름 살맛 난 편이었다. 다만 지방에서는 잡요라고 문자 그대로 잡일이 조금 있기는 했다고 한다.

토지 제도나 조세 문제는 아니지만 당나라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부병제(府兵制)다. 부병제는 균전제와 다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절충부(折衝府)라는 곳이 있었다. 땅을 준 대신에 농사가 끝날 때마다 농민들을 모아서 군사 연습을 시키는 곳이었다. 절충부 하나에 1,000명 가량이 소속되었고 당나라의 전성기에는 전국에 65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 부병제에 해당되는 사람은 21세부터 59세의 성인 남성이었고, 3명 당 1명씩 3년씩 근무하게 했다. 그리고 장비와 식량등은 농민이 알아서 맞추어야 했는데……국가는 이미 땅을 나눠주었으니 할만큼 했다 이거다. 덕분에 당나라는 낮은 군사 비용으로 많은 군대를 거느릴 수 있었다.

이 균전제 - 조용조 - 부병제는 서로를 지탱하는 역할이었으며 사실상 고대에서 중세로 가는 시기에 나올 수 있는 거대 제국의 가장 완성된 최종적인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당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서 땅이 사유화되어 균전제가 무너지고~조용조도 무너지고~부병제도 덩달아 무너지고~당나라도 그냥 무너졌다. 부병제 같은 경우엔 절충부가 장안, 낙양 지대에만 유독 집중되어 해당 농민들의 부담이 큰 것도 원인이라고 한다.

11 양세법의 등장

당덕종(唐德宗) 이괄(李适)

이 제도들이 무너지게 된 원인을 보면, 균전제는 성인 남성당 100무(3000평. 물론 그때와 지금의 기준이 똑같지는 않겠지만)나 되는 땅을 주기에 넉넉해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인구수가 너무 늘어났다.

그래서 100무를 주어야 할 땅이 50무나 40무 정도 주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땅은 줄어들어서 받는데, 부담은 그대로인데다 오히려 늘어나기도 하는데……

농민들이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호구 등록을 안해버리는 것. 당고종때에 이미 이런 현상이 심화되면서 균전제 유지를 위해 각종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결국 측천무후 집권시에 최종적으로 균전제가 무너져 내렸다. 당장 측천무후에서 당예종때까지 수많은 절들이 세워졌는데, 그 절 소속 농민들은 절에 들어가기 전엔 다 어디에 있었을까. 덕분에 당현종 즉위시엔 무려 전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호구조사에서 벗어난 상태였다고 한다.

그 땅들은 조용조에 해당이 안되는 귀족들의 사유지가 되고……귀족과 호족들은 막강해지고. 부병제에 부담이 늘어나서 군사력은 엉망이 되고……엉망이 된 군사력을 군진을 세워 복구했는데, 군사력 복구 자체는 제대로 됐다. 근데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게다가 그 군진들을 총괄하는 절도사들의 세력이 커지고……관리도 안되고……막장이 되고……안사의 난이 일어나고……망했어요.

결국 당나라 덕종 때인 780년 무렵, 재상 양염(楊炎)의 건의에 따라 조용조를 포기하는 대신 양세법(兩稅法)을 시행하고 만다. 참고로 여기서 '나가는 것을 헤아려 들어오는 것을 정한다'라는 뜻인 양출제입(量出制入)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무릇 백역에 드는 비용과 한 푼이라도 거두어들이는 것들은 먼저 그 수를 헤아려 사람들에게 부과하고, 지출할 것을 잘 따져서 수입 계획을 세운다(凡百役之費, 一錢之斂, 先度其數而賦於人, 量出制入)" ─ 신당서 양염전 中.

양세법은 주거지역의 자산에 따라 조세를 걷고, 전납을 원칙으로 하였고 여름 가을 두번 세금을 징수해가는데 그 대신 토지의 자유화를 선언하고 균전제를 폐지하였던 것.

즉 조용조로 나누어 받던 세금을 하나로 통폐합하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에 따라 세금을 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땅을 나누어준 대가로 헐값에 군사력을 부릴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모병제로 돈 주고 군사력을 사는 형태가 되었던 것이다.

양세법은 이대로 무려 800년을 쭈욱 흘러갔다. 일단 세금을 거두기가 쉬었으며, 진짜로 돈 없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머릿수대로 거두는 인두세가 병존하기 때문에 국가가 돈을 진짜로 못 거두는 사태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대십국송나라 시대에 조금씩 변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모습은 똑같았다.

12 일조편법의 실시

장거정(張居正)

오랫동안 세금제도의 기본을 차지했던 양세법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800년이 지난 뒤 명나라 시기에 들어와서였다. 만력 9년(1581년) 만력제의 스승 장거정의 주도 아래에 전국적인 토지측량과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전국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원래 토지측량과 인구조사는 10년마다 이루어지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존에 있던 숫자를 옮겨적는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이것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도록 했다. 일조편법은 사실 15세기부터 강남지역에서 여러 지방관들에 의해 이미 조금씩 세금제도에 변화를 주었던 것에서 장거정이 여기에서 효과적인 원칙들을 골라 뽑아서 전국적인 수준에서 세금제도의 개혁을 실시하게 한 것이다.

일조편법의 원칙은 다음의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 토지의 면적을 측정해서 토지의 질과 양에 따른 평균 세액을 결정해서 부과했다. 이것은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과거 양세법 이후로 토지의 세액을 결정하는 기준이 굉장히 다양하고 복잡했는데 이걸 단순화시킨 것이며 토지조사를 새롭게 시행함으로써 세금이 현실에 맞게 부과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기존의 여러가지 세금의 항목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과거 양세법부터 내려온 역역(力役) 제도에는 잡세라고 해서 굉장히 다양한 이름의 세금이 존재했다. 그걸 모조리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그래서 일조(一條)편법이다. 사실상 세금을 토지세와 인두세 두 개 만으로 고정시켰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세금의 은납화(銀納化)이다. 금화은(金花銀)이라고도 하는데 15세기부터 각지방에서 조금씩 실행되고 있던 것을 공식적으로 전면적으로 시행시킨 것이다. 과거 양세법에서는 토지세를 쌀로 납부하는 것부터 해서 (우리나라의 공납제(貢納制)처럼) 현물로 납부하는 것이 있었는데 2번째 원칙에 따라 하나로 통일하고 이걸 화폐로 납부하게 했다.

당시 지방에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향신(鄕紳)층이 소유한 땅을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일이 많았지만, 장거정은 이것을 단호히 대처하여 관청 몰래 경작하는 대량의 땅을 적발하였다. 그때까지의 세제인 양세법은 항목이 너무 많고 복잡하여, 불공정한 눈속임을 저지를 구석이 많았다. 일조편법은 그것을 일관화시켜, 과세대상을 토지로 옮기고, 당시 보급이 진행되고 있던 은으로 납세를 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혁으로 명의 재정은 크게 호전되었고, 국고에는 10년 분의 식료와 4백만냥의 잉여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만력제는 무덤 축조, 임진왜란 파병과 같은 돈지랄을 할 수 있게 된다

전세, 노역을 대신 하는 정은, 잡세, 잡역 모두 다 은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명나라 시기에는 민간에서도 화폐 경제가 활발해져 나라 입장에서도 가격이 요동치는 현물 같은 것보다는 화폐가 다루기 편하기도 했다.

일조편법은 청나라 시기에도 쭈욱 계승되었다.

하지만 일조편법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폐단이 존재했는데, 이를테면 지방의 지주들이 관청과 유착해 자기들 세금을 일반 농민들에게 떠넘기는 일이었다. 못살겠다 싶은 농민들이 타지로 달아나버리면 국가는 안정적인 수입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세금을 안 내려고 도망치고 머릿수를 속이다 보니 정세(인두세)를 매기기가 힘들었다. 징역(征役), 즉 부역을 부과하려면 인구 조사는 필수인데 가난한 농민들은 대책이 없으니 납세를 피해 도망갔고, 부자들은 당연히 이를 피하고, 나라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관리들도 문책을 당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되었다.

13 지정은제의 시행

강희제

청나라 강희제 50년인 1711년.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을 선포하였다. 즉 지금은 태평성세이기 때문에 이후로 늘어나는 정세는 세금을 걷지 않겠다는 것. 강희제 50년의 인구를 조사한 다음 정세를 영원히 동결 시켜 버렸다. 이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데 호구 수에 따른 세금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나 있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는데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애를 많이 만들어도 이젠 뭐 부담도 없고...당현종 당시의 상황과 비교하면 한차원 높은 발전이었던 것이다. 이건 다시 말해 인두세를 폐지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금 수입이 줄어드는 효과가 되었다. 때문에 아버지가 호기롭게 실시한 정책때문에 피를 보게 된 옹정제 시기에 세금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여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무(攤丁入畝) 방법을 적용하였고 이로 인해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 제도는 우선 지방인 광동성에서 먼저 시험을 해보았고, 결과가 괜찮자 사천, 절강, 하남성에서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다.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이렇게 시행되었다. 이 지정은제가 시행되기까지 엄청난 논란이 있었고, 이를 반대하는 요구가 극심했다.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면 토지의 소유자는 세금이 늘어나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이 줄어들고 땅 가진 부자들에게 세금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를 했던 것이다.

옹정제

1726년, 향시에 응시한 천여명의 응시생등은 단체로 시위를 하면서 항의했고, 상인들에게는 문을 닫으라고 협박했다. 지정은제에 찬성하던 순무 이위(李衛)는 이들을 간단하게 때려잡아 처벌했고 그 후 2년동안 지정은제는 복건, 섬서, 감숙, 강서, 호북, 강소, 안휘성을 걸치고 산서성에서도 시행되어 건륭제 연간에는 완벽하게 정착하게 되었다.

옹정 5년, 계주의 지주 서리 진순예는 지세를 납부하라고 재촉했지만 지방의 유력자들은 오히려 진순예를 탄핵했다. 하지만 옹정제는 진순예는 그대로 두고 지세 납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때려 잡았다.

향신, 즉 중국의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살고 있는 자 또는 향촌의 퇴직관리나 유력인사 등의 사회 계층들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실질적인 향촌 지배자였다. 이들은 지세 납부에 계속해서 저항했는데 1272년 동광현의 지현 정삼재는 혀를 내두르면서 황제에게 이렇게 보고 하기도 했다.

"이곳의 악랄한 향신들이 온갖 구실로 관을 위협하고 지세를 내지 않아 백성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격노한 옹정제는 진상 조사를 철저하게 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향신들은 영향력이 워낙 커 관리들도 다루기가 힘든 존재들이었기에, 순진한 지방관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털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당시에 얼마나 지세 납부에 대한 향신들의 반응이 안 좋았느냐 하면,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퍼져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아예 향시의 시험에 나가는것을 거부하고, 누군가가 나가면 응시자들의 답안을 뺏어서 찢어버렸다. 호광 지역에서도 이들은 단압하여 지세 납부를 거부하며 관과 맞서면서 뻗댔다.

옹정제는 아주 단호하고 극렬하게 이에 대응했다. 응시생들이 단체 활동을 한번만 더 벌이면 영원히 응시자격을 박탈하겠다는 교지를 내리고, 산동 지방의 진사, 거인, 수재, 감생 등 1천 4백여명의 공명이 모두 박탈되었다. 불이익을 주거나 벼슬길 자체를 아예 막아버렸고, 지세를 납부하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체포해서 코렁탕을 먹였다. 이런 엄청난 대응끝에 향신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고, 지정은제는 확립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곡절 끝에 확립된 지정은제는 아편으로 인해 중국의 은이 외국으로 유출되는 현상이 심해진 청나라 말기까지 제대로 동작하였다. 하지만 은의 유출이 심화되면 은의 가치가 올라가서 백성들이 세금을 내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청나라는 필사적으로 은의 유출을 막아보려고 애를 썼고, 아편이 마약이라 세금낼 사람들의 건강과 정신상태를 맛가게 만든다는 점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아편에 대해 대대적인 단속을 펼쳤고, 그 결과 아편전쟁이 발생하였으며, 여기서 청나라가 패전함에 따라서 서구열강들에 의한 중국침략이 점차 속도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청나라의 부패수준이 심화되면서 세제가 다시 문란해졌다.
  1. 《예기(禮記)》, <단궁하편(檀弓下篇)>,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2. 공자, 맹자 할때의 사람 이름이다. 언급만 되어 있을뿐,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존재 자체가 허구일 가능성도 높다.
  3. 경(卿)•대부(大夫)•사(士)에게 주던 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