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사랑스럽다."
"내가 충칭에 있을때 , 국민당 부총재, 국방최고회외 부주석으로 이 기관과 함께 옮겨 다녀도 안전에는 별 문제가 없었고 (중략) 패전하여 죽더라도 사후에 이름을 얻을 터인데, 왜 충칭을 떠났을까? 나는 20살 조금 넘어 혁명에 투신한 이후로 한번도 나 자신을 위한 계산을 한 적이 없다. -1940년 3월경. 왕징웨이의 회고
1942년경 왕징웨이의 음성
1 개요
본명은 왕자오밍(汪兆銘, 왕조명) 자는 징웨이(精衛). 보통 사람들에게는 왕징웨이(汪精衛, 왕정위)로 불렸다.
중화민국의 정치인. 중국 국민당 좌파 계열의 수장이었으며 쑨원의 보좌관이자 국민당의 주축, 장제스의 라이벌, 그러나 친일 정권인 왕징웨이 정권의 지도자로 중국 근대사의 한간(친일파)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찬란한 시작
젊은 왕징웨이 |
광동 성 싼수이 현(三穗縣)출신이며[1] 4살때부터 경전 교육을 시작하고 18살이 되던 1901년 광동성 1,2차 과거시험을 동시에 수석 합격하며 문장가로서 명성을 날렸고 1902년 군익학사(群益學社)라는 모임을 만들어 실학을 연구햇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점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진것으로 추측한다,. 이후 일본 관비유학생으로 파견되어 호세이대학 속성과에서 공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반청사상과 공화혁명을 추구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왕징웨이는 여기서도 수석으로 입학하고 4등으로 졸업하는등 뛰어난 명성을 누렸고 이 당시 동기였던 후한민은 당시 그의 재능은 아무도 따라갈 자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우연히 쑨원과 교류하게된 그는 1905년에 중국동맹회의 중심으로서 창립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후 1906년의 중국 유학생의 동맹휴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2] 동맹회의 중심으로 참여하였고 이후 중국동맹회의 기관지인 민보에서 입헌파인 량치차오와의 논쟁에서 승리함으로서 혁명파의 토대를 견고히하였다. [3]
이후 1908년경부터 뚜렷한 중심이 없던 중국동맹회는 분열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왕징웨이는 암살단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후한민에게 "나는 혁명의 땔감이 될테니, 당신은 혁명을 위한 솥이 되어달라."라는 사실상의 유언을 남겼다. 한편 손문에게는 "지금의 문제점을 해결하기위해서는 미봉책으로는 불가능하며 모종의 적극적인 수단이 있어야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을 토대로 보면 왕징웨이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정체된 혁명파의 활기를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한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10년, 선통제의 아버지인 섭정 순친왕에 대한 암살시도에 가담하나 폭탄이 조기에 발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4]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석방되며, 옥중에 투옥되던 당시 쓴 시편들이 외부로 알려지며 그는 신화적 인물로 떠올라지게 되었다.
이후 북양정부와 광동의 세력가들로부터 여러번 권력권유를 받았으나 '자기 희생의 각오로 혁명에 참여한 사람이 혁명의 성공을 이유로 관직에 오르는 것은 혁명을 출세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모든 관직을 거부하고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오오 폭퐁간지. 이후 1918년 10월, 쑨원의 호법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부터는 파리에서 산동성의 일본조차를 승인하는 베르사유 조약을 반대하고 조약 완성 이후에는 승인을 거부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결국 그는 제국주의와 국제연맹의 한계를 꿰뚫는데는 실패했고 언젠가는 산동성이 중국으로 돌아오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등 여전히 국제적인 현실감각은 부족한 면모를 펼쳤다. 다만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로서 결국 독일과 똑같으며 종국적으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시작할것이다.'라고 하는등 현실주의적 시각을 일부 획득하기도 하였다.
2.2 쑨원의 후계자로서 맞이한 현실
1921년 중국 국민당이 창설되고 국민혁명이 시작되자 쑨원은 점차 그에게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위원 등 여러 요직을 맡기면서 점차 후한민, 랴오중카이와 함께 국민당의 주축 세력의 리더이자 장차 쑨원의 후계자로 부상한다. 당시 차기 후계자로 주목받은 이는 당 좌파의 수장 랴오중카이로 제1차 국공합작 달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의 총애를 받았고 후한민과도 친한 사이였다. 후한민은 중국동맹회 창단 멤버이자 당 우파의 수장이었으며 강경한 인물로 명망이 높았다. 반면 왕징웨이는 좌파이긴 했지만 중도파의 역할을 자처했으며, 당 내부의 분쟁을 조정하는 걸로 지지도가 높았지만 그만큼 자기 기반이 약했다. 그러나 랴오중카이는 후한민, 쉬충즈에 의해 쑨원 사망 이후 곧 암살당하며, 후한민은 이 사건을 사주한 것이 드러나 소련행과 실각, 복귀를 반복하다가 훗날 장제스와 결탁하지만 정치적 이견으로 감금되어 죽고 만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졸개 내지는 측근 정도로 인식되었으나 쉬충즈 숙청, 중산함 사건으로 자신이 군 지휘관 a 정도에서 왕징웨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권주자임을 인식시켰다.
1926년 3월 20일 북벌 당시, 왕징웨이와 장제스. |
1925년, 쑨원이 죽자 왕징웨이는 쑨원의 직책인 대원수 직책을 이어 새로이 국민정부 초대 주석으로 취임하며 1926년에 북벌을 개시한다. 그는 당시 황푸군관학교 교장이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당권과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에게 주력부대를 맡기고 동북방향으로 진군하게 한 후, 자신은 당내 좌파 세력 등을 이끌고 서북방향으로 향하여 우한을 점령한 후 우한으로 정부를 옮긴다. 이후 장제스는 상하이와 난징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중산함 사건 이후 자신이 좌익이 아니라 우익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장제스는 국민당 좌파, 공산당과 마찰이 심했고 신수도로 우한과 난창 중에 어느 곳이 좋은지 등을 두고 다투었다. 국민당 좌파는 장제스를 폭군이라 비난했고 그를 숙청해 마땅하다고 주장했으며 탕성즈 등도 이에 부화뇌동하여 장제스의 자리를 차지하려 들었고 장제스는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고 군비군물을 비축하는 한편 자신의 후원자에서 정적이 된 소련 고문 보로딘을 소환할 것을 소련에 요구했다. 이에 우한 정부는 장제스에게 부여된 비상권력을 회수하고 군사독재를 용납할 수 없다고 장제스를 비난했다. 마침내 장제스는 상하이를 점령한 다음에 상하이 청방의 3대 수장 두웨성, 황진룽, 장샤오린, 당 우파의 수장 후한민과 결탁, '상하이 4.12사건'를 일으키고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한다. 이때 왕징웨이는 상하이의 혼란한 치안 상태를 보고 장제스를 지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너무 어이없는 사태에 어안이 벙벙해졌던 왕징웨이와 우한정부는 닷새가 지난 4월 17일에야 반격에 들어가 장제스를 출당시키고 장제스를 반역자이자 반혁명수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의 목에 25만 위안의 현상금을 걸었다. 하지만 장쭝창, 장쭤린을 비롯한 군벌들의 공세에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는 잠시 협력해야 했다. 왕징웨이는 펑위샹과 동맹을 맺어 장쭤린의 공격을 저지하려 했고 더 나아가 장제스의 배신에 대처하려 했지만 펑위샹은 왕징웨이를 위협해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을 축출할 것을 요구한 다음에 장제스가 우한 정부와의 협력을 깨고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자 장제스와 손을 잡아버렸다.(...) 거기에 공산당이 아예 국민당을 장악하기 위한 술수를 버리는 것이 포착되자 경악한 왕징웨이는 국공합작 파기를 결정하고 분공정책을 취하는데 이후 그는 장제스보다도 더한 반공인사가 되었다. 그가 훗날 일본에 붙은 이유 중 하나도 공산당과 합작하는 항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
한편 우한 정부 역시 재정적 곤란에 시달렸고 이로 인하여 여력을 상실한 왕징웨이는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를 합병하는 조건으로 장제스의 사직을 요구했는데 장제스를 이를 받아들여 물러나 영한합작이 성립되고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는 합쳐졌다. 하지만 장제스를 대신하여 난징 정부를 장악한 광서파가 gg를 치고 물러나는 통에 얼마 안가서 복귀했다.한편 이로 인하여 크게 실망한 왕징웨이는 측근들에게도 알리지않고 독단적으로 홍콩을 거쳐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이러한 행동에 장제스조차 '모든것을 그자가 하자는데로 했는데 그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라고하였고 후세의 연구가들은 왕징웨이 특유의 낭만적 지식인기질이 현실과 타협하거나 강하게 반발하는 대신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여전히 국민당 최대의 거물이었고 결국 다음해 6월에 돌아왔으나 리쭝런, 펑위샹, 옌시산 등과 모두 한번씩 합작을 하면서 장제스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려 했으나 장제스가 반장전쟁에서 승리함으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31년 탕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번엔 개조파, 서산파, 광동파, 광서파를 모두 규합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장제스에 맞섰으나 만주사변의 발생으로 난징과 광저우는 협력하게 되었고 왕징웨이는 자신을 무시하는 광동파에 빈정이 상해 아예 발생을 전환, 장제스와 손잡기로 결정했다. 한편 이 시기 그는 군사력으로 외교적 노력이 좌절되는 사태를 여러번 목격하였고 결국 이로 인한 절망은 반제국주의를 추구하는 대신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방향으로 비틀어지고 말았다.
2.3 혁명의 영웅에서 민족의 반역자로
형은 쉬운 길을 가십시오. 동생은 어려운 길을 가겠습니다.충칭을 탈출하기 직전 장제스에게 남긴 편지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시절 타임지에 실린 왕징웨이 |
1932년 1월 자신을 무시하는 광동파에 불만을 품은 왕징웨이는 어제의 적인 장제스와 협력하여,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에, 자신이 행정원장이 된다는 조건으로 개조파-친장파 합작을 성사하여 장왕합작의 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왕징웨이는 당권을, 장제스는 군권을 장악하고 1935년까지 두 사람이 난징 정부를 영도하였다. 하지만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크게 견제했기 때문에 합작이란 말이 무색하게 왕징웨이의 권력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자기 분야에 있어서도 장제스의 심복들에게 밀려 기를 펴지 못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나치 독일에 외교 방문을 하여 아돌프 히틀러와 친분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성향이 점차 극우적 성향으로 변하여 유럽 파시즘 계열의 극우파 세력을 새로이 조직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제스의 세력 기반도 자본가 세력, 극우세력이었다.
하지만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1차 상하이 사변, 1933년 러허 사변 등 일본의 도발이 연이어 이어졌고 일본은 화북오성자치운동을 벌이며 화북을 중국에서 독립시켜 괴뢰국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일본과 전면전을 벌일 능력이 없던 국민정부는 일본에 계속 저자세로 양보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국내에선 국민정부의 대일정책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었다. 결국 1935년 11월 5일 6중 대회 중에 왕징웨이는 '일본의 침략에 묵인하는 국민정부를 징벌한다'라는 명분을 가진 사람이 쏜 세발의 총탄을 맞았고 신속히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은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당시 의료기술로 척추에 맞은 세번째 총알을 빼낼 수가 없어 독일까지 가서 치료했으나 끝내 제거하지 못했고 결국 이것이 골수종양으로 번져 그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그게 무슨 소리요, 총을 빼낼수가 없다니! 에엑따 이후 그는 다시 요양과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고만 좀 가라. 이 사건의 배후로는 장제스가 지목되었으나 알고 보니 광동파 이제침과 진명추의 소행이었고 원래 암살 목표는 왕징웨이가 아니라 장제스였으나 그날 장제스가 불참하면서 왕징웨이로 목표가 수정되었다.
저격 직후의 왕징웨이 |
이후 서안 사건이 발생하자 권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귀환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후 다시 국민당에 복귀했지만 다시 항일의 가능성과 정부 수립을 두고 장제스와 대립하였고 이때부터 왕징웨이가 친일파로서의 길을 준비했다고 보는것이 정설이다.
그러던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줄곧 대일 주화론을 주장한 바가 있으며 난징 함락 이후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던 우한마저 함락되자 왕징웨이는 더 이상의 항전이 무의미한 걸 넘어 항전하는 것이 중국을 죽이는 길로 판단하였고 일본과의 비밀협상 끝에 1938년, 충칭을 탈출하고 하노이를 거쳐 상하이에 있는 일본군과 합류하며 저우포하이, 천공보, 리시쿤 등과 함께 상하이 괴뢰정권, 즉 왕징웨이(또는 왕자오밍) 정권을 수립하여 정부 주석에 오른다. 이 과정과 왕징웨이의 선택을 찬양한 밀도 있는 르포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발표되었다. 그 르포를 쓴 사람은 바로 박태원이었다. 월북을 했기 때문에 주인공 보정으로 이런 친일 수필은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명망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자신의 선택에 동조할 것이라 주장했지만 장제스에 적대적인 군벌들조차 왕징웨이를 무시했다. 일본은 왕징웨이를 내세워서 장제스 정부를 무너뜨리고 왕징웨이와 협상하여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화친파를 일소시켜 장제스 정권의 정통성만 굳건히 해주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같이 합류했던 일부 인사들이 일본이 자신들을 괴뢰로 내세워 이용하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하여 홍콩으로 탈출하여 왕징웨이와의 일본의 협정을 공개하여 그의 비겁함을 규탄함으로 왕징웨이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1943년 11월 '대동아회의'에서의 왕징웨이. 이 회의에서는 일본의 영향 하에 있던 아시아의 국정 최고 책임자라고 쓰고, 일제의 꼭두각시라고 읽는 이들을 초청했다.
왼쪽에서부터 버마 수상 바 마우, 만주국 수상 장칭후이, 왕징웨이, 일본 수상 도조 히데키, 태국 왕자 완 와이타야콘, 필리핀 대통령 호세 라우렐, 자유 인도 임시정부 주석 찬드라 보세다.
그가 일본군과 화친하려고 한 이유에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번째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족을 배반했다는 민족배반론(한간론), 충동적인 성격으로 판단을 그르쳤다는 실수론, 일본의 무자비한 침략으로 민중들이 고통받는 것을 볼 수 없었다는 고육지책(자기희생)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자기희생론등이 주어진다. 이 중 단순히 어느 한쪽만으로 판단하는것은 어려우며 왕징웨이가 여러번 권력투쟁과 냉철한 국제정세로 인하여 좌절하게 되면서 그의 민족주의가 변질되게 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대개 비판론이든 희생론이든 각자의 주장을 어느 정도 반영하며 실수론은 비판론이나 희생론에서도 상당히 인용된다.
2.4 비참한 말로
왕징웨이는 일본군과의 화친이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내에서의 파벌은 국민당과 비교가 안될정도로 지독했다. 결국 여러번의 혼란과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무책임함이 더해져 결국 정권 수립은 매우 어렵게 진행되었다. 우선 정권이 발족하고 수개월이 지나고나서야 일본이 간신히 승인했고, 기존의 일본괴뢰정권들은 왕징웨이에게 크게 반발했다. 결국 왕징웨이 정권의 몇차례의 권력 회복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일본군은 그의 이름으로 점령지에서 무척이나 잔인한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와중에 왕징웨이는 1944년에 일본에서 골수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후 유언에 따라 쑨원의 곁에 안장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장제스가 왕징웨이의 묘를 다이너마이트로 화끈하게 폭파시켜 버렸다. 완벽한 부관참시의 부활. 이완용도 이 꼴을 당했어야 되는건데 그 시점에서 이미 왕징웨이는 중국인 모두에게 매국노로 낙인찍힌 지 오래라 장제스가 하지 않더라도 부관참시를 감행할 사람은 차고도 넘쳤다. 왕징웨이도 그걸 예측했는지 콘크리트로 단단한 묘역을 만들어달라고 유언했다. 그와 함께 일본의 괴뢰정부에 들어갔던 천궁보 등은 모두 비참하게 죽어갔다.
3 여담
정말 여담이지만, 민국 시절에는 정가에서 손꼽히는 미남 중 한 명이었다. 후세에는 주은래, 매란방, 장학량 등과 함께 4대 미남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다만 후일 나이도 들고, 병도 들면서 외모가 급격하게 망가졌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 폴아웃3의 DLC인 오퍼레이션 앵커리지의 최종보스격 인물인 징웨이 중공군 앵커리지 전선 사령관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름의 한자 精衛도 똑같고, 왕징웨이가 친일파였다는 걸 감안한 건지 플레이어의 설득 스킬이 높을 경우 죽을 때 할복자살을 한다. 이건 뭐 일본군도 아니고......
오늘날 중국에서는 매국노의 대표격으로 불리운다. 참고로 이 사람 이전에는 매국노의 대명사로 이완용이 대신 거론되었다. 해외에도 펼치는 매국의 위엄
영화 <색계>의 시대적 배경은 왕징웨이 난징정부 집권기다.
조선경비대 창설인원중 한명이 이 사람의 군대 출신이였다.
중국에선 차이잉원이 왕징웨이의 환생이라고 까는 경우가 보인다.(...)
4 참고문헌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5 매체에서
영화 신해혁명에 등장한 젊은 왕징웨이. 배우 여소군이 분했다.
- ↑ 이곳은 현재 구이저우 성에 속한다.
- ↑ 1905년 11월 청조의 요구로 일본 문부성(文部省)은 청국유학생취체규칙(淸國留學生取締規則)을 공포해 유학생의 행동을 제한하려했다. 이에 유학생들은 일본 헌법이 보장한 '행동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항의했고 2천여명의 유학생이 귀국하고 그 외의 수천명의 유학생들이 40일의 동맹휴업을 진행하였고 결국 1906년 1월 일본의 정계에서 주거에 대한 규정을 완화시켜 동맹 휴학은 성과를 거둔채 끝났다..
- ↑ 다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량치차오의 우세라고 판단하고 있다. 애초에 입헌파의 상징이었던 신민총보에서는 량치차오 혼자 논쟁을 진행한 반면 민보측에서는 장병린,왕징웨이,후한민 세명이 일방적으로 두들겨패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정상적인 토론이 진행되는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한쪽은 한번 의견을 개진하는데 세번을 반복해야하는데 한쪽은 한 사람의 주장을 세번 비판하니 토론이 진행될수가 없었다.) 게다가 입헌파측이 견지한 '제국주의의 간섭'과 '대다수 국민들의 의식 부족'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해 결국 입헌파의 주장을 완전히 반박하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 ↑ 사형이 선고되지않은 이유는 민심을 안정화시키기 위함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