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劉敬
생몰년도 미상
전한의 인물로 본래 성은 누(婁)씨다.
본래 제나라 사람으로 한고제 5년 병사로 징집되어 농서로 배치받아 가다가, 한고제가 수도를 낙양으로 정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자 동향 사람인 우장군이라는 사람을 통해 한고제를 직접 알현하고 충언을 올렸다.
유경은 본래 이름이 누경으로 제나라에서 수자리를 하러 농서까지 소집되어 터덜터덜 걸어가던 도중 당시 유방이 근거하던 낙양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 때 제나라 출신인 우장군을 만나서 유방을 만나야겠다고 했는데 누경이 원래 좀 유명했던지 우장군이랑 알던 사이였고, 이게 또 만나게 된다. 이 때 우장군은 유방에게 보고하러 가기 전에, '양털 가죽옷을 입고 황제를 보려고?'라고 하며 자기가 옷 한 벌 사주겠다 하니 누경이 '지금 내 옷이 비단옷이면 비단옷으로 보는 거고 베옷이면 베옷으로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이 얘기를 들은 유방이 심심했는지 흔쾌히 청을 받아들여 만남이 이루어진다.
누경을 만난 유방은 이야기하기 전에 밥부터 먹으라며 누경에게 밥을 먹인다. 이후 누경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경이 낙양에 도읍하신다고 들었는데, 주나라를 따라하는 거냐고 묻고 유방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이에 누경이 본격적으로 유방에게 진언한다.
"폐하께서는 낙양에 수도를 두어 옛 주나라 왕실의 융성함과 겨루고자 하십니까?""그러하다."
“폐하께서 천하를 얻은 것은 주왕실과 다릅니다. 주나라의 선조는 후직(后稷)인데 대대로 덕을 쌓고 선정을 베푼 왕조입니다. 주나라 성왕 때 낙양을 성읍으로 정한 것은 천하의 중심지이고 각 지역의 제후들이 조공과 부역을 바치기에 적당한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낙양이라는 곳은 덕이 있는 왕이면 정사를 펼치기 쉽지만 덕이 없는 왕이라면 쉽게 망하는 곳입니다. 주나라가 덕으로 천하 백성을 이끌자 사방 오랑캐들마저 의와 덕을 사모하여 다 같이 천자를 섬겼습니다. 그 후 동주 서주로 나뉘면서 제후들이 떠나갔는데, 그것은 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형세가 쇠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패현에서 일어나 촉과 한을 점령하시고, 삼진을 평정하시고, 항우와 더불어 교전하시고, 성고의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해 싸우시고, 여하간 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셨습니다. 그러나 천하 백성들은 간과 해골로 거리에 나뒹굴고 있고, 아비와 자식은 뼈로 남아 들판에 버려져 있습니다. 전쟁으로 부상당한 이들은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주나라의 융성함과 비교하신다고 하십니까? 진나라는 산이 에워싸여 있는 천혜의 요충지입니다. 위급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백만 대군을 바로 배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나라의 터전을 차지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함곡관에 들어가 그곳에 도읍을 정하시면 진나라의 옛 터전을 보존할 수 있고, 천하의 숨통을 한손에 쥐는 것입니다.”
-사기, 유경숙손통열전
위의 기록이 전하는 누경의 주장은 까놓고 말해 다른 왕에게 했다 밉보였으면 당장에 참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인데, 그 내용을 풀어보면 뭔가 하니
'주나라는 원래부터 뼈대있는 가문이 여러대를 내려오며 인심을 얻고 친목질을 해서 제위에 오른 거라 소통에 편리하도록 교통의 요지인 낙양에 도읍한 거 아니요? 근데 걔네도 몇 대 지나서 상황이 안 좋아지는 걸 낙양에서는 통제가 불가능했는데, 폐하로 말하자면 아무 것도 아닌 밑바닥에서부터 전쟁으로 박박 기면서 올라오신 거 아니쇼? 그렇게 전쟁질하시는 통에 아직도 산이며 들판에 시체더미가 가득하고 시국은 아직도 불안정 하지 않수. 근데 사방이 뻥 뚫린 낙양? 차라리 반란이 일어나도 괜찮게 방어에 용이하고 경제력 빵빵한 진나라 땅 챙길 수 있는 관중 안으로 들어가시죠.'
더 짧게 요약하면 근본도 없고 여태까지 한 건 전쟁질로 사람 죽인것 밖에 없는 양반이 주제넘게 덕있는 주나라 흉내 내서 낙양이라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선택 하지 마라 관중이면 일이 안좋게 굴러가서 말아 먹어도 본전은 건질수있다라고 황제의 면전에 대고 말했다는 것. 그것도 군역 살러가는 지나가던 군발이가 황제에게 대고 말이다(...)
유방은 누가 들어도 화가 날만한 이런 말을 듣고도 오히려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중신들과 논의하지만 대부분 관동(關東) 출신들인 공신들은 "주나라는 수백년간 왕조를 유지했으나 진나라는 단 2세만에 망했습니다. 주나라 도읍인 낙양을 택하소서."라고 주장하며 유방이 파촉에 처박힐 때도 그랬듯 다 이겨놨는데 고향과 먼 땅에 가기 싫어서 반대한다. 이에 유방이 장량에게 의견을 물어 장량이 함곡관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고 잘라 말하니 유방은 그 날로 짐싸서 관중땅으로 이사간다. 그리고 항우가 불질러 파괴한 옛 진나라 수도 함양 바로 옆 장안(시안)을 건설해 한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누경을 불러서 그를 칭찬하고는 누랑 유랑 발음이 비슷하니 아예 유씨 하라면서 봉춘군으로 봉했다.
그 후 흉노의 묵돌 선우가 한을 침범하여 고제는 흉노를 친히 정벌하러 나섰는데, 이때 사전 정탐을 위해 보낸 사신들은 모두 "흉노를 정탐하니 늙어빠진 군사들이 병든 말을 타고 있었습니다.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경만 홀로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을 한다면, 이는 마땅히 자신들의 장점을 부풀려 보여주는 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이 가보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비루먹은 가축과 노약자들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단점을 일부러 보여주어 우리 한군을 유인하여 매복전으로 승리를 취하려는 기병계(奇兵計)입니다."
하지만 유경이 그 말을 하였을때는 이미 한나라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던 참이었고, 출전하는 와중에 재수없는 소리를 한다고 여긴 고제는 유경에게 "이 색히, 아가리만 살았구나!" 라고 욕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돌아와서 손봐줄 요량이었는지, 유경에게 족쇄와 수갑을 채워서 광무(廣武)에 가둬두고 말았다.
하지만……
유경의 걱정대로 고제를 포함한 한나라 군대는 포위에 걸려 전멸당할 위기에 빠졌고, 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고 막대한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백등산 포위전 문서 참조.
돌아온 고제는 유경을 석방하고 복직시킨 후 대책을 물었고, 유경은 "천하가 평정되었지만 사람들이 지쳐 우리는 저들을 무력으로 물리칠 수 없다. 그러나, 장구하고 원대한 미래를 계획하면 우리의 후손은 저들을 신하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우선 지금은 유방의 맏딸인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보내 묵돌의 아내로 삼게 하고, 많은 보물을 주어 적당히 다독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에 노원공주는 이미 조왕(趙王) 장오(張敖)[1]의 아내였다.
유방은 유경의 이러한 계책에 대해 "좋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여후(呂后)는 밤낮으로 울면서 유방을 설득했다. 아무리 대국적인 결정이라고 해도 여후가 이렇게까지 하자 유방도 차마 진짜 딸을 보내지는 못하고, 결국 다른 여자[2]를 데려와 공주라고 속이고, 유경을 통해 선우에게 보내 혼인을 하게 하면서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3] 이때부터 한나라는 매년마다 흉노에게 무명, 비단, 술, 곡식 등을 보내주기로 했다.
화친 이후 유방은 유경의 제안에 따라 수도인 장안이 있는 관중 지역으로 인구 10만을 이주시켰다. 하지만 화친에도 불구하고 한신, 왕황, 조리등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수시로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강성한 족속들을 멀리 옮기고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흉노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徙彊族,都關中,和約匈奴;明朝廷禮,次宗廟儀法. 作劉敬叔孫通列傳第三十九)라고 유경의 업적을 열전에 남긴 까닭을 밝혔다.
2 劉京
생몰년도 미상
전한의 인물로 자는 태현(太玄).
남양 사람으로 한문제 때 낭을 지냈다가 세상을 버려 한단의 장군이라는 사람에게 도를 배워 주영환방을 전수받아 이를 조제해 복용했으며, 나이 130에 마치 30살 쯤 되는 사람의 모습을 했다.
뒤에는 계자훈을 스승으로 모셔 오제령비륙갑십이사, 신선십주진형 등의 비요를 전수받아 그 비결을 근거로 시행해 매우 효험이 있었으며, 능히 귀신을 부려 그 자리에서 바람과 구름을 일으키거나 이들을 불러 여행 중에 요리를 시켰다. 그 자리에 앉으면 귀신들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으며, 길흉이 일어날 날을 미리 알아 사람들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수명을 연장시켜 10년을 더해주지만 그 날짜가 되면 모두 죽었다.
명산과 오악을 돌아다니면서 왕진과 동행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위나라의 조조 때 황보륭이 자신을 따라다니자 운모구자환, 교접지도 등의 비방을 전수했으며, 222년에 형산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2.1 관련 사료
- 신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