漠北之战 | ||||
Battle of Mobei |
흉노를 아직 멸하지 못했는데, 좋은 저택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
막북전투 | ||
날짜 | ||
기원전 119년 | ||
장소 | ||
몽골 고비사막, 바이칼호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전한(西漢) | 흉노(匈奴) |
지휘관 | 위청 곽거병 이광† 이감 조이기 공손하 공손오 이식 소건 조양 | 이치사 선우 비거기† 조신 |
병력 | 기병 10만[1] 보병 수십만[2] | 불명 |
피해 규모 | 전군의 3/10 이상 | 포로 7만 이상 |
결과 | ||
흉노 선우의 도주 | ||
기타 | ||
대 흉노전쟁에서 전한 최대의 군사적 성공 |
1 개요
중국 전한(西漢) 시기인 기원전 119년 전한과 흉노(匈奴)가 막북(漠北)에서 벌인 최대의 군사적 격돌. 이 싸움은 흉노 선우와 대장군 위청(衛靑)벌인 전투,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이 진격전으로 나뉘며 한나라군은 양쪽의 전투에서 모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한군은 백등산 포위전(白登之戰) 이후 지속된 전한에 대한 흉노의 우위를 거의 완벽하게 떨쳐버리게 되며, 이후로도 대규모 군사적 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흉노가 전한보다 압도적인 위치에서 내려다보던 시절은 지나가게 되었다.
2 배경
초한쟁패기를 지나고 통일 왕조를 이룩한 전한의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시대에서부터, 한 제국의 가장 큰 적은 북방의 강대한 세력, 흉노의 무리들이었다.
기실 흉노 자체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 조(趙), 연(燕) 같은 나라들과 대립을 벌이곤 했지만, 흉노가 강대하진 것은 진(秦) 제국이 무너지던 시점이었다. 그 이전까지 진나라의 장군 몽염(蒙恬)에게 눌려있던 흉노는 초한쟁패기의 혼란 동안 중국 북방 만리장성(萬里長城) 등의 감시와 수비가 헐거워진 틈을 타 세력의 확장을 시도했다. 이때 등장한 묵돌(冒頓)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흉노 무리를 통솔하며 동호(東胡), 월지(月氏)를 평정하여 막강한 세력을 이루었다.
이후 흉노는 본격적으로 중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연나라 지역과 대(代)의 영역을 침공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국 초기 이성왕(異姓王) 중에 한 명이었던 한왕 신 마저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왕 신을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 유방은 이후 쳐들어온 묵돌에게 백등산 포위전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초한대전 직후의 혼란, 흉노의 완강한 기세와 더불어 백등산 포위전의 패배로 인해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게 완전히 눌리는 안습한 처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흉노는 이후 수차례 한나라를 공격해 들어왔고, 흉노의 선우는 대놓고 여후를 희롱하였으며 한문제의 시대 무렵 등에서는 비록 쳐들어온 흉노는 막아도, 역으로 쳐들어가는 일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건국 후 장장 70여 년에 걸쳐 한나라는 흉노에 대해 저자세로 일관하며 쳐들어오는 공격을 얻어맞으며 막는 일에만 급급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고의 세월 동안 한제국은 중국이라는 문명권의 압도적인 생산력을 폭발시키고 있었고, 문경지치(文景之治)의 번영 속에서 차곡차곡 내실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반격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3 대 흉노공세의 시작
"오늘 흉노를 토벌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끝없이 해를 입을 것입니다. 전쟁 준비를 미리 하지 않으면 백성을 적에게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 염철론 中
한무제(漢武帝) |
문제, 경제의 문경지치를 겪은 후 즉위한 전한의 한무제(漢武帝)는 야심만만한 황제로써 흉노에게 그동안 밀리던 형세를 뒤바꾸기 위하여, 과거에는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대규모 원정을 계획, 실시하게 된다. 이리하여 기원전 133년, 한나라는 무려 3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동원해 흉노의 군신선우를 유인하려는 계획을 실시한다. 비록 이 계획은 작전이 누설되면서 실패로 끝났지만 한나라가 더 이상 흉노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보여주게 되었다.
이후 4년 뒤,[3] 한나라는 다시금 공격에 나선다. 이떄 공격에 참여한 지휘관들은 위청, 공손오, 공손하, 이광 등이었다.
BC123년 위청은 한무제의 조서를 받고 곽거병을 표요교위(剽姚校尉)[4]에 삼고 흉노 공격에 동행을 시켰다. 여기까지 모습을 보면 한무제가 아끼는 처조카에게 적당히 공을 세울 기회를 준 느낌이 든다.
이때의 전투에서 곽거병은 기병 800여 명을 거느리고 본대를 떠나 수백 리를 진격 하는 폭주를 보여주었다. 그런데……보통 이러면 각개격파당하고 포위당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오히려 곽거병은 2천여 명 이상의 흉노를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흉노 선우의 할아버지 뻘 되는 자약후 산(藉若侯)을 죽이고 선우의 막내 숙부 나고비(羅姑比)를 사로잡는 공을 세운다. 다시 말하지만 이때가 18살, 처음 출정 때의 일이다.
이 공격이 곽거병 본인의 폭주인지, 총사령관인 위청의 지시인지는 불분명하다. 사기의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이나 한서의 위청곽거병전(衛靑霍去病傳) 모두 그저 곽거병이 대군에서 벗어나 수백 리를 진군해서 적을 물리쳤다고만 나온 일이다. 일단 그 후 곽거병의 행적을 보면 이런 식의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주기도 했고, 위청이 보통 장수도 아닌데, 이렇게 위험부담이 큰 작전을 18살 애송이에게 맡겼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또, 위청은 간신배는 결코 아니지만 윗사람 눈치는 많이 살피는 사람이었다. 무제가 아끼는 처조카를 사지로 보냈을까?
여하간 이 싸움의 공이 전해지자 무제는 기다렸다는듯이 곽거병을 관군후(冠軍侯)에 삼았고, 군에서 으뜸의 공이라고 치켜세워주며 1,600호를 내려주었다. 반면에 위청은 공이 적다 해서 별 상을 못 받았는데, 위청의 안타까운 사연은 계속 이어진다(……)
4 곽거병, 몸을 일으키다
한무제 원수 2년인 BC 121년은 곽거병에게 있어 한없이 빛나던 시기였다. 이해 봄에 무제는 곽거병을 표기장군(驃騎將軍)[5]에 임명했는데, 초대 표기장군이 바로 곽거병이다. 이때가 표기장군이라는 처음 이름에 나온 걸 감안하다 쳐도, 이게 대장군 바로 다음 자리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흠좀무. 이때 곽거병은 21살이었다. 군부에 몸을 담은지 고작 3년이고 말이다. 더 무서운 건 2년 뒤에는 아예 대장군과 같은 녹봉으로 오른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국역사상 이례가 없는 파격적 행보였다고 볼 수 있다. 날고 긴다하는 중국의 대장군들도 21살에 이러지는 못했다. 춘추전국시대 수준으로 나라가 많고 전쟁이 빈번한 시절도 아니었다는게 더욱 그렇다.
그러나 곽거병에 대한 이런 파격적인 대우는, 그 후에 그가 벌이는 막대한 공을 생각하면 오히려 타당할 지경이었다. 표기장군이 되기가 무섭게 농서(陇西)에서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출정한 곽거병은 오려산(烏戾山)을 넘고 호노하(狐奴河)를 건너며, 엿새동안 다섯 부족을 지나며 무려 1천리를 나아가 백병전을 벌이며 이를 모두 격퇴, 흉노의 절란왕과 노호왕을 참수했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무리가 무려 8천여 명이 넘었다. 또한 흉노 휴저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쓰던 금인(金人)까지 탈취해왔다.
인상적인 기록으로 이 당시 기록으로 우리 군은 갑옷 하나 잃지 않고라는 식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장일 수 있으나, 대체로 흉노 원정에 대한 기록이 우리가 흉노 놈 10명을 족쳤다. 그런데 우리 병사 3명이 죽음. 이런식의 연속이라는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특이한 묘사이다. 그만큼 완벽한 승리였을 수 있다는 뜻. 이때 세운 공훈으로 곽거병은 2,000호를 더 받고 3,600호가 되었다 .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해 여름, 한무제는 표기장군 곽거병과 합기후(合騎侯) 공손오(公孫敖)를 북지[6]에서 출발시키고, 다른 쪽으로는 장건과 이광을 파견하여 흉노를 공략코자 하였다. 이광은 4천여 명, 장건은 1만여 명으로 도합 1만 4천의 병력은 흉노 수만 대군에게 포위 당했는데, 이광은 홀로 분전해서 4천여 명 가운데 2천여 명이 전사했지만 버티게 되고 장건이 도착하자 간신히 포위를 풀 수 있었다. 장건은 늦게 도착한 탓에 참형을 받을 처지가 되지만 속죄금을 내서 서민이 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양상은 북지에서 출발한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곽거병은 이미 흉노 땅 깊숙히 진격을 하였지만 뒤따르던 공손오가 길을 잃어 한참을 지체하게 된다.
연락이 끊겨 언제 도착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곽거병은 그야말로 과감한 행동을 취하는데, 공손오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흉노 땅 한복판으로 진격을 했던 것이다.
- 5,547m의 기련산(祁連山 치롄산)
곽거병은 거연수(居延水)를 배를 타고 건넌 후, 소월지(小月氏)까지 나아가 기련산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흉노 추도왕과 2500여 명을 사로잡았고 3만여 명이 넘는 적들을 참수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흉노의 왕 중 다섯 명과, 그 다섯 명의 어머니, 선우에 연지, 왕자, 상국에 장군, 당호, 도위 등을 수백여 명을 사로잡았고, 맞붙었던 흉노군의 7할을 분쇄하는 경이적인 전과를 올렸다. 이에 곽거병은 5000호를 더 받게 되었고 8,600호가 되었다. 곽거병을 따라왔던 조파노(趙破奴) 같은 장수들도 짭짤한 보상을 받았다. 반면에 공손오는 참형을 당할뻔한 걸 속죄금을 내어 간신히 목숨만은 건지게 된다.
이 전투의 결과는 흉노에게 있어서도 매우 뼈아픈 패배였다. 사기의‘흉노전 색은(索隱)’조에는 ‘서하구사(西河舊事)’란 흉노 민요 한 수가 실려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기련산 잃으니 육축이 번식할 수 없게 되고(失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
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육축(六畜)은 유목기마민족인 흉노인들에게 중요한 여섯 가지 가축, 즉 말·소·양·닭·개·돼지를 말한다. 유목민들에게 이런 동물들, 특히 말을 대규모로 키울 곳을 잃어버렸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
흉노의 선우는 혼야왕이 서쪽에서 계속 한나라의 군대에게 부서지고 있는데, 그 원인이 곽거병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매우 화를 내며 혼야왕을 죽이려 했다. 혼야왕은 휴저왕과 논의를 하고, 곽거병을 이길 자신도 없고 선우도 무섭고 하니 차라리 한나라에 투항해버리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무제는 이 소식을 들었지만, 만약 항복하는 척하면서 공격을 하면 큰 피해가 우려되었기에 이 일을 곽거병에게 맡겼다.
곽거병은 군대를 이끌고 혼야왕의 부대와 대치했는데, 혼야왕의 비장들 중에 항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해서 8천여 명을 죽이고 수만여 명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 공에 한무제는 근심거리가 없어졌다.면서 크게 치하하고 1,700호를 더해주었다.
이 모든 전투가 단 1년만에 거둔 전공이다.
5 곽거병의 마지막 불꽃, 막북전투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 ─ 전자는 산서의 북방에 이는 후흐호트 지역을 출발하였고, 후자는 북경 북서쪽에 있는 현재 선화 근처의 상곡을 출발하였다. 위청은 고비를 가로질러서 현재 외몽골에 있는 흉노의 본거지에 도착하였는데, 헤르만은 위청이 옹긴 강의 하류까지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곽거병은 대담하게 외몽골 툴라 강과 오르콘 강 상류까지 1천 킬로미터를 쳐들어갔다. 그는 80명 이상의 흉노 수령을 잡았고, 그들의 땅에 있는 산에서 신성한 희생의식을 거행했다. 곽거병은 귀환 직후인 기원전 117년에 죽었다. 섬서의 함양에 있는 이 위대한 장군의 무덤에는 흉노를 짓밞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을 표현한 커다란 조각상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中
원수 4년이었던 BC 119년 한무제는 장수들을 불러 의논을 했는데, 흉노 쪽에서는 한군이 보급 등 여러가지 문제로 사막을 건너서는 오래 싸우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점에 합의를 두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크게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취한다면 큰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해 봄, 한나라는 믿는 도끼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5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병을 동원하게 하는 동시에, 수십만이나 되는 보병과 치중병으로 이를 지원했으며 이광, 공손하 등 흉노 전쟁에서 나름대로 잔뼈가 굵은 무장들은 모조리 참전했다. 근 10만이 넘는 원정대가 사막을 넘기 시작했는데, 이 병력들이 원정군이라는 점, 그리고 사막과 계곡을 넘는 극히 힘든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숫자다.
출발하는데 있어서, 본래 곽거병은 정양(定襄)[7]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출발 직전에 포로를 문초해본 결과 선우는 동쪽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대군(代郡)에서 출발하여 진격하기로 하였다.
흉노 쪽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한나라 군대가 사막을 건너면 매우 피로하여 지칠 것으로 판단, 군수물자를 전부 먼 북쪽에 두고 정예병을 북쪽에 두어 천천히 기다리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그런 흉노 선우의 군대가 곽거병도 아닌 위청의 군대에게 포착되었다. 그리하여 곧바로 전투가 벌어지고, 위청은 압도적인 병력의 숫자와 힘으로 흉노 선우의 좌우익을 둘러싸 완벽하게 격파해버렸다. 꼼짝없이 사로잡히게 될 수순이었으나 날이 저물 무렵 흉노 선우는 수백 명의 기마대와 함께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포로를 통해서 선우의 탈출을 알아챈 위청은 200여리를 추격하였으나 선우를 잡는데 실패한다.
그 시기 곽거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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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북을 뚫을 기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장장 1천여 리를 행군한 곽거병은 고비 사막을 그대로 넘어가며 흉노의 영역을 완전히 가로질러 진군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쓴 르네 그루세의 말에 따르면, 곽거병의 진격은 북경 북서쪽 선화 부근에서 오르콘 강 상류 바이칼호 부근까지 이른다.[8]
그 자체만으로도 위업이라 할 만한데, 그렇게 사막의 모래폭풍을 뚫고 제대로 보급도 못하면서도 전투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9] 흉노 선우의 근신인 장거(章渠)를 사로잡고 왕호 비거기(比耆)를 참살했다. 흉노 좌대장의 군대와 싸워 물리치고 그들이 쓰는 깃발과 북을 빼앗았으며, 산과 강을 건너 흉노의 왕 3명을 죽이고 장군, 상국, 당호, 도위 등을 83명 이상 주살하였다. 그렇게 죽이고 사로잡은 흉노의 숫자가 무려 7만4천4백30여 명에 이르렀다.[10]
그리하여 흉노 땅 한복판에서 거창하게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흉노는 이를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본국에서의 보급은 요원하고, 흉노 땅에 딱히 거두어서 쓸만한 논과 밭 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보급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의문증이 들 수가 있는데.
이 해결법이라는것이 정말 어이가 없는 수준이다. 흉노 적군을 때려부수고 흉노 군사가 먹는 것을 빼앗아서 보급을 해결했다고 한다. 모전구렴야 장군이 이걸 보고 감동먹었다 카더라 말이야 쉽지 전투력이 저들보다 떨어지면 오히려 시도하다 패배하고, 결국 사막 한가운데서 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무모하면서도 대단한 싸움이었다.
이렇게 힘든 싸움이었던 만큼, 곽거병의 밑에 있던 부하 중에 이 싸움이 끝나고 많은 상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가 않았다. 곽거병 또한 한번에 5,800호를 증봉받았다. 그런데 위청은 흉노 선우를 패배시켬음에도 불구, 절호의 기회에서 사로잡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별다른 증봉도 받지 못했고, 수하중에 단 한 명도 후작 등의 고위 작위를 수여받은 인물이 없었다.
한나라 군대가 이번 싸움에 동원한 말이 무려 14만 필이 되었는데, 일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는 3만필도 되지 못하였다. 그만큼 힘든 싸움이었는데 위청은 그 대가를 인정받지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곽거병의 전공은 그 당시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중국이 조 무령왕의 시기부터 기병전술을 확립하긴 했지만 기마대는 유목민족의 전매특허였고, 중원의 군사가 성을 쌓거나 혹은 평원에서 방진을 펼쳐 기마대를 상대해서 이기는 경우는 많아도 기병전력을 중심으로 하여 이긴 경우는 많지 못했다. 더구나 유목민족이 자신들의 땅 깊숙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여 포위하여 승리하는 것은 그들의 주특기였다. 당장 유방이 묵특에게 패배했던 백등산의 싸움이나,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가 스키타이계 유목민인 마사게타이(Massagetae)와의 싸움에서 죽었을 때의 상황을 연상해보자.
하지만 한무제 때부터 정예기병을 육성한 한나라는 곽거병의 지휘 아래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는데, 정주민족의 군대가 오히려 자진해서 흉노 땅 깊숙히 들어가, 완전히 휩쓸어버리고 격파한 것이다. 이는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하지만 곽거병의 부대전술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로 인해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그런 식으로 계속 싸우다간 언젠가 큰 패배를 당할지 모른다고 말하는 의견도 있다. 확실히, 본대를 이탈하는 모습이나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싸우는 형태, 위험천만한 보급은 정석적인 용병술에서 한참을 벗어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곽거병은 병법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무제가 곽거병에게 병법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지금 쓸 전략이 무엇인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옛 병법을 체득할 필요는 없습니다."[11] |
라고 말할 정도였다. 즉 정상적인 범주의 용병술보다는 임기응변에 능했다고 할만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전략가로서는 뛰어나지 않지만 돌발상황이 닥쳤을 때 임기응변과 재치로 수습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보면서 좀 까는 사람들이 있는데,[12] 이런 비슷한 평가는 곽거병에게도 할 수도 있다. 확실히 그의 전술은 너무 위험하고 또 모험적이었다. 사마천조차도 "군대에 천행이 따라주어 곤경에 처한 일이 없다."고 쓸 정도다. 성공했으니 전설이 되었지만.[13] 그래도 육도삼략뿐이나 병법만 열심히 공부한 밀덕보다 훨씬 났다. 커리어가 비교가 안되는데
곽거병이 이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본인이 뛰어나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한무제가 밀어준 탓이라는 주장도 있다. 진순신이 이런 주장을 했는데, 이미 한나라의 국력은 몇배로 튼실해졌고 흉노는 쇠퇴기였는데 다른 장수들은 모두 죽을 쓰고 위청과 곽거병만 공을 세운 것은, 무제가 황후의 동생과 조카를 열후로 만들기 위해서 공을 세울 기회를 팍팍 밀어주었다는 것이다. 최고의 장비와 최강의 정예병을 팍팍 밀어주었으니 군사적 천재라는 것은 과장이라는 이야기다.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 위청은 처음 출전했을 때를 보면 양이나 치던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거기장군에 임명시켜서 보냈던 것이다. 또한 곽거병에 대해서는 항상 따로 정예병을 선발하였는데, 그 군사와 말과 병기가 다른 장수들이 거느린 수준에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무나 밀어준다고 해서 팍팍 성공하는것도 아니다. 처음 출전했을 때의 상황은 볼 것도 없이 뺵을 써서 들어간 수준이지만, 다른 장수들이 모조리 패배했을 때 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한무제는 훗날 이광리를 곽거병처럼 밀어주었지만 그 결과는 곽거병에 비할 바가 못된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조괄은 그렇게 밀어줬다가 장평대전의 참사를 낳았다.(...)
곽거병의 전공은 한무제의 밀어주기 + 본인의 넘치는 재능 + 타고난 운 등이 결합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반면에 이광 같은 경우는 본인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한무제의 지원이나 본인의 운에 관해서는(……)- ↑ 전마 14만필 이상
- ↑ 치중병 포함
- ↑ 한서에서는 원광 6년(기원전 129년). 사기에서는 원광 5년(기원전 130년)으로 기록됐다.
- ↑ 한서에 주석을 단 안사고의 해석에 따르면 표요는 굳세고 날랜 모습이라고 한다.
- ↑ 票騎將軍 이라고 하기도 한다.
- ↑ 감숙성 환현 남쪽
- ↑ 산시 성(山西省) 신저우(忻州)에 있는 현.
- ↑ 곽거병의 군대가 산에 올라 한해(翰海)를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김영수 역 사기 열전을 참조하면 한해는 고비 사막 혹은 바이칼 호를 의미한다고 한다.
- ↑ 지금도 후진국들은 자연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받지만 옛날에는 그런 정도가 더욱 심했고 강력한 군대들 역시 객관적인 사실들이 우세하더라도 자연환경 때문에 전쟁, 전투에서 허무하게 패배하는 일들이 많았으며 지구적 재해처럼 심각한 경우에는 국가 멸망의 위기가 되기도 했다. [1] 혹은 날씨가 바꾼 익사이팅 세계사, 곤경에 빠진 제국 등을 참조. 그런데 악조건 속에서 이긴 사례 중 하나를 남겼으니, 꽤나 놀라운 결과다.
- ↑ 다만 역시 무리한 싸움이라 한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열에 셋이 죽었다고 묘사를 하는데, 부상자를 포함하면 오할에 가까운 사상자다.
- ↑ 쉽게 말해 "지금 싸우는게 중요하지 그런건 중요하지 않음."이란 뜻
- ↑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대표적.
- ↑ 반대로 제갈량은 매번 철저한 계산으로 싸웠지만, 후방에서 엉뚱한 문제가 생겨서 성공하지 못한 걸 보면.
진인사대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