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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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東星
1939년 7월 8일 ~ 1999년 8월 5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호는 여암(驪巖)으로, 고향인 여주군의 바위라는 뜻이다. 종교가톨릭으로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다.

1939년 7월 8일 경기도 여주군(현 여주시)에서 출생하였다. 1962년 경희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64년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경희대학교 학부 시절에는 학생회장을 역임하였다. 미국 웨스턴 리저브대학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1974년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으로 광주군-여주군-이천군 선거구의 민주공화당 차지철 국회의원이 박종규의 뒤를 이어 대통령경호실장으로 임명되자 그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관리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성남시-여주군-광주군-이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야 무소속 오세응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전두환이 집권하고 나서 민주정의당으로 당적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각각 민주정의당 후보로 여주군-이천군-용인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조종익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5년 김대중 직선제 반대발언 모함사건을 조작하여 논란이 되었다.

노태우가 집권하고 나서,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여주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3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90년 3월부터 12월까지 체육청소년부(1993년 문화부와 통합되어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되었음) 장관으로 있으면서 남북통일 축구대회 총 인솔단장으로 평양직할시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1992년부터 그의 정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5선을 노렸으나 정치신인인 민주당 이규택 후보에게 패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여주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설욕하려 하였으나 역시 통합민주당 이규택 후보에게 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대인 이규택 후보에게 정당방위를 이유로 가스총을 사용해서 검찰에 입건되기까지도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 8월 대통령이자 신한국당 총재인 김영삼의 야당 의원 빼가기 작전으로 이규택이 통합민주당을 탈당하여 신한국당에 입당하게 되자 여주군 지구당 위원장 자리도 내어야 했다.

한편으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1993년 3월에는 여주대학교의 전신인 여주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1999년 8월 5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