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기록 속의 이순신

1 개요

이순신 장군은 전사 이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칭송을 받게 된다. 뭇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때 부풀러지고, 신격화가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금만 자료를 찾아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이순신 장군은 조선시대 내내 위대한 장수이자, 영웅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또 세운 전공이 전공인지라,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 제도, 특히 수군의 경우는 모든 것이 이순신 장군이 했던 그대로 시행하라는 것이 모범답안이 되버린다. 사대주의가 더욱 더 심해지는 조선에서 말이다. 물론, 이 때문에 유명수군도독이 후대에 명을 숭상하려는 분위기에서 만들어졌다라고 하지만, 이 발언이 유일하게 여러번 등장하는 군주가 혈연적으로 부계는 물론, 모계에서도 선조와 연결되는 정조라는 점에서 논란은 사그라 들기 힘들지만 말이다.

2 조선왕조실록

형 군문의 관사에 나아가 군량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다.

미시(未時)에 상이 형 군문(邢軍門)의 【형개(邢?). 】 관사에 나아갔다.

군문이 말하기를,

"이순신은 마음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다가 끝내 전사하였으니, 저는 너무도 애통하여 사람을 시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국왕께서도 사람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소서. 또 그 아들을 기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순신과 같은 사람은 얻기가 쉽지 않은데 마침내 이렇게 되었으니 더욱 애통합니다."[1]

선조 31년 11월 26일 정미 3번째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수군의 활약상에 관한 치계를 올리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인(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인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인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번째기사

비변사가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요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이 지난날 한산도에서 승첩을 거두어 큰 공을 세웠고, 주사가 패몰된 뒤에는 잔파된 나머지를 수습하여 기계와 군량을 전날과 다름없이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노량 해상에서 밤새워 혈전하여 적의 괴수를 불에 태워 죽이고 전함 2백여 척을 포획하기까지 하여 의기를 동남지역에 크게 떨치자 적추는 혼비 백산하여 밤에 도망쳤으니, 국가를 회복시킨 공에 있어서 이 사람이 제일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탄환에 맞아 목숨을 잃게 되었지만 숨을 거두면서도 조용히 처치하였으니 옛날 명장의 풍도를 지녔다고 이를 만하였습니다. 이제 성교를 받들어 관에서 장례를 치러주고 자식들도 모두 관직에 제수하였으니, 충의를 격려함이 이에 이르러 더할 나위 없이 되었습니다. 해변에 사당을 세우는 일은 좌수영 본진에 설립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전사한 장사들에게 휼전(恤典)을 내리는 일도 해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2]

선조 31년 12월 1일 임자 5번째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의 포장을 요청하다.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장계에,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元均)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3]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古今島)로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閑山島)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유 제독(劉提督)이 힘껏 싸우는 데 뜻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大事)를 전적으로 수병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 그는 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捷報)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양향(糧餉)을 조치하는 등 모든일에 있어서 요리해야 할 일들이 매우 광범위한데 하루 아침에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면 필시 죄다 산실될 것입니다. 특별히 새 통제사를 임명하시어 마음을 다해 요리하고 장병들을 위무하여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소서. 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褒奬)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선조 31년 12월 7일 무오 5번째기사

조여매와 이방춘의 관소에 가서 담소하다.

부총이 말하기를,

"이순신(李舜臣)은 충신입니다. 이러한 자가 십여 명만 있다면 왜적에 대해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

선조 32년 1월 6일 정해 1번째기사

강상으로 나아가 마 제독을[4] 맞이하여 위로하다.

제독이 말하기를,

"이순신(李舜臣)이 혈전을 벌이다가 죽었는데, 저는 그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하였으나 탄복할 만합니다. 그의 자손에게 포상하여 그 충렬을 정표(旌表)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이미 추장(追奬)의 은전을 존교(尊敎)대로 하였습니다."

선조 32년 1월 9일 경인 1번째기사

미시에 서 관란이 시어소로와 담소를 나누다.

급사가 말하기를,

"충신·의사(義士)로 의에 죽은 사람에게 모두 정표(旌表)를 해야 하며, 전진(戰陣)에서 죽은 장관(將官)들에 대해서도 마땅히 치제하여야 합니다. 죽은 이를 후대하여야 산 자가 충성을 다하는 법입니다. 이순신(李舜臣)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자손을 녹용(錄用)하고 봄 가을로 치제하는 일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필시 잘 거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수병(水兵)을 조련하고 양향을 준비하는 일 등이 모두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인이 우리 나라를 위하여 곡진하게 분부하시니 매우 감격스럽소이다."[5]

선조 32년 1월 21일 임인 2번째기사

비변사가 수군에서 거북선을 만들고 기계 갖추기를 청하자 허락하다.

비변사가 하교로 인하여 아뢰기를,

"옛날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 이순신(李舜臣)은 기이한 꾀를 내어 왜적을 막으면서 바다를 방위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순신이 왜적을 방어하던 법식에 따라 거북선을 만들고 기계를 갖출 일을 전라 좌수사와 우수사에게 명백하게 지시하여 보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빨리 순신의 거북선을 만들며 무기를 수리하고 사졸들을 훈련시켜 착실히 변란에 대비하기를 한결같이 순신이 한 것과 같이 하도록 각별히 말해 보내라."

하였다.

광해 14년 7월 22일 병진 4번째기사

이완·심명세 등을 인견하고 모 도독을 대우하는 문제 등을 의논하다.

"이순신(李舜臣)이 중국 장수와 함께 일을 할 적에도 그들의 환심을 얻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중국 사람들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이순신은 중국 사람들을 잘 대우하였는데, 호궤할 때도 매우 성대하게 했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이순신을 이야(李爺)라고 불렀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대하게 호궤해 준 것은 다만 여사(餘事)에 불과했다. 죽은 뒤에 중국 사람들 역시 통곡을 하였는데, 이는 필시 그들의 환심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인조 2년 11월 17일 정묘 5번째기사

둔전을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체신(體臣)이 여러 곳에 둔전(屯田) 설치할 것을 청하였는데, 만약 전례대로 관리자를 차송(差送)한다면 끼치는 폐단은 필시 많고 이익은 없을 것입니다. 일찍이 들으니, 고(故) 수신(帥臣) 이순신(李舜臣)이 수사(水使)로 있을 때 여러 섬에다 둔전을 널리 설치하였는데, 이 섬들은 모두 방수(防守)하는 곳이어서 입방(入防)하는 군사들이 대대적으로 농사를 짓되, 경작과 수비 또는 망을 보는 것도 모두 군사들을 이용하였으므로 백성들에게는 털끝만큼도 폐해는 없으면서 소득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선책(善策)이라 말한답니다.

이제 둔전을 설치한 전라도 해변도 우수사(右水使)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고자 하는데 이응순(李應順)은 나이가 노쇠할 뿐만 아니라 재주도 없어 이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전 병사(兵使) 유림(柳琳)은 원래 부지런하다고 소문난 사람이니, 해조로 하여금 차송하여 겨울 이전에 때맞춰 요리하게 하되 이순신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인조 5년 11월 30일 계사 1번째기사

고경명·이순신·조헌에게 증시하는 것 등에 대해 의논하다.


공조 판서 윤휘(尹暉)가 아뢰기를,

"증시(贈諡)하는 전례(典禮)는 예로부터 있는 것인데, 고경명(高敬命)·이순신(李舜臣)·조헌(趙憲) 등은 아직도 증시를 받지 못했으니, 이는 진실로 흠전(欠典)[6]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7]

인조 20년 5월 13일 신사 1번째기사

사냥하는 명은 정지하고 대군의 집에 가 제사지내는 일을 거행하라 명하다.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현재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은전을 시행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에서 충신으로 드러나 칭송할 만한 이는 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만한 이가 없는데도, 묘소에 아직까지 조그만 표석(表石)조차도 없으니, 이는 자손들이 미약한 소치입니다. 조정에서 본도로 하여금 세우게 한다면 풍성(風聲)을 수립하는 도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르고 이어서 그 자손들을 등용하도록 명하였다.


효종 9년 6월 11일 정축 1번째기사

남해의 싸움터에 충무공 이순신의 비를 세우다.

남해의 싸움터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비(碑)를 세웠다.

효종 10년 윤3월 28일 무자 2번째기사

첨지중추 심광수가 근래의 재이에 대해 아뢰다

상이 승지 이경억(李慶億)에게 이르기를,

"아침에 이순신(李舜臣)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효종 10년 윤3월 30일 경인 1번째기사

예조가 남해 노량의 이순신을 위해 세운 사우의 액호와 교서를 예문관으로 하여금 속히 지어 올리게 하라고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교리 민유중이 지난번 경연 석상에서 계달하기를 ‘남해(南海) 노량(露梁)은 곧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순절(殉節)한 곳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세웠던 사우(祠宇)가 좁고 퇴락하였으므로 정익(鄭?)이 통제사로 있을 때 새로 개축하였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묘액(廟額)을 내려 절의를 높이고 후인을 권장하는 발판으로 삼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께서 이미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셨습니다. 액호(額號)와 교서(敎書)를 예문관으로 하여금 속히 지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현종 3년 2월 2일 병오 2번째기사

서원 및 사우의 제사 등에 관해 의논하다.

유중이 아뢰기를,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은 곧 이순신(李舜臣)이 순절한 지역으로서 그곳의 사우(祠宇)에는 이미 ‘충렬(忠烈)’이라고 사액(賜額)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통영(統營) 또한 순신이 처음 개설한 곳이므로 장사(將士)들이 일찍이 사우를 세워 존모(尊慕)하는 정성을 바치고 있다 하니, 거듭 사액하는 데에 구애받지 마시고 노량의 예에 따라 ‘충렬’의 호를 내려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현종 4년 10월 5일 기해 1번째기사

재이에 따른 방책을 논의하다.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전선(戰船)을 많이 모아 바다에 침몰(沈沒)시키고 달아났으나, 이순신(李舜臣)이 십여 척으로 적(賊)을 격파(擊破)하였는데, 쓰인 배는 또한 모두 위급한 상황에 임하여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장차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배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또한 어디에 쓰겠습니까?"

숙종 7년 5월 3일 을묘 2번째기사

충청도 유생 서후경이 아산에 충무공 이순신의 사당 건립을 청하다.

충청도(忠淸道) 유생(儒生) 서후경(徐後慶)이 소(疏)를 올려, 고(故)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위하여 아산(牙山) 땅에 사당을 세우기를 청했으니, 이는 이순신이 생장(生長)한 고향이고, 구묘(丘墓)가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숙종 30년 5월 16일 갑인 2번째기사

이순신·을지문덕 등의 사우에 호를 내리다.

충청도 아산(牙山)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우(祠宇)에 ‘현충(顯忠)’이란 호(號)를 내리고, 평안도 안주(安州)에 고구려(高句麗) 대신(大臣) 을지문덕(乙支文德)·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최윤덕(崔潤德)·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대사헌(大司憲) 김덕함(金德?)을 아울러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하게 하고 ‘청천(淸川)’이란 호를 내렸다.

숙종 33년 2월 6일 기축 5번째기사

전라도 고금도의 관왕묘에 진린과 이순신을 향사하는 일을 논의하다.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命)은 말하기를,

"기자(箕子)의 예(禮)를 관묘에 준용(準用)함이 거의 옳을 것이요, 도독의 지위(地位)는 석성(石星)·이여송(李如松) 등 여러 공(公)의 반열(班列)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묘우를 일컬어 편액(扁額)을 거는 것은 근거할 바가 없지 않으나, 단지 선액(宣額)이라 일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묘(文廟)에도 우리 나라의 선현(先賢)들을 많이 종향(從享)하였는데, 봄·가을의 석전(釋奠)에 관원을 차견(差遣)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대개 그 소중함이 성묘(聖廟)에 있기 때문입니다. 2품 이상의 무신(武臣)으로 조용(調用)되었다가 졸(卒)하였을 경우, 조정에서 또한 오히려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데, 이순신의 공로(功勞)는 국조(國朝) 이래로 없던 것이었으니, 비록 사묘(祠廟)에서 거행하는 향사(享祀)라 하더라도, 해마다 두 번 관원을 보내는 것이 숭배하여 보은(報恩)하는 도리에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좌상(左相)의 의논을 쓰도록 명하였다.

숙종 36년 12월 17일 정축 2번째기사

이인좌 등 적이 청주성을 함락시키다.

적(賊)이 청주성(淸州城)을 함락시키니, 성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이날 밤에 이르러 적이 이봉상이 깊이 잠든 틈을 타 큰 소리로 외치며 영부(營府)로 돌입하니, 영기(營妓) 월례(月禮) 및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문을 열어 끌어들였다. 이봉상이 창황하게 침상 머리의 칼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적이 끌어내 칼로 위협했다. 이봉상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충무공(忠武公) 집안에 충의(忠義)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

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드디어 죽였다.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淸州)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表忠祠)라 사호(賜號)했다.[8]

영조 4년 3월 15일 을축 6번째기사

황해 수사 박문수는 황당선의 어로와 밀무역을 근절시키기 위한 계책 등을 아뢰다.

황해 수사(黃海水使)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당선(唐船)이 어채(漁採)하는 것을 이롭게 여겨 여름이 되면 오지 않는 해가 없는데 이를 인하여 연해의 백성들과 물건을 교역(交易)하는 등 그들이 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하는 습관이 더욱 조장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추포(追捕)하기 위해 온갖 계책을 다 썼지만 힘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에 있어 최상의 계책은 비선(飛船)을 많이 만들어 밤낮으로 바다 위에 띄워 놓고 당선의 어채의 이익을 빼앗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에 먼저 비선 20척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만 본영(本營)의 재력으로는 실로 착수하기가 어렵습니다. 감영의 유고전(留庫錢)과 병영의 별비전(別備錢) 각 2백 민(緡), 상정미(詳定米) 50곡(斛)을 특별히 획급해 주도록 허락하면 제때에 배를 만들어 쓸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그 말을 따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戰般)을 만들었었는데 옹진(瓮津)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帥臣)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하였다.[9]

영조 20년 2월 27일 을해 2번째기사

호조 판서 박문수가 상서하여, 용관을 줄이고 주현을 합치는 등의 변통론을 아뢰다.

"적을 막는 길은 오로지 장수다운 사람을 얻고 못 얻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元均)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李舜臣)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영조 26년 7월 3일 계묘 3번째기사

화협옹주방의 외상을 갚아주고, 균역을 실시한 뒤의 폐해에 관해 의논하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장수가 되어서는 폐전하였고 이순신(李舜臣)이 장수가 되어서는 승전(勝戰)했으니, 장수의 잘하고 잘못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선척의 낙인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영조 29년 2월 22일 무신 1번째기사

예관을 보내 고 통제사 이순신에게 치제하게 하다.

예관(禮官)을 보내어 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는데, 선묘(宣廟) 임진년의 공을 돌이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영조 48년 2월 5일 경오 6번째기사

비변사에게 어염세를 사목에 따라 징수하도록 아뢰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전선의 체제의 척수(尺數)를 줄이는 것에 대해 전후 갑론 을박(甲論乙駁)이 한두 번뿐만이 아니었으나, 필경 옛날 체제대로 하기로 한 것은 대체로 이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남긴 제도로서 충무공이 적군을 깨뜨린 공이 대부분 큰 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조 10년 10월 4일 갑진 2번째기사

황조의 부총병 등자룡을 강진 탄보묘에 배향하고 관리를 보내 제사지내다.

황조(皇朝)의 부총병(副摠兵) 등자룡(鄧子龍)을 강진(康津) 탄보묘(誕報廟)에 배향하고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전교하기를,

"근래에 이 충무(李忠武)의 유사(遺事)를 보다가 노량진 싸움을 추억하면서 저도 모르게 넓적다리를 만지면서 길게 탄식하였다. 중국의 부총병 등자룡은 70세의 노장(老將)으로 2백 명의 용사(勇士)를 이끌고 넓은 바다 위를 마음대로 횡행하면서 손에 침을 뱉으며 교활한 왜적을 섬멸할 것을 맹세했으니, 그 호탕한 담력은 대장부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수공(首功)을 차지하고자 하여 충무공의 배로 뛰어올라 곧장 앞으로 돌격하여 수없이 많은 포로를 잡았으나 우연히 화기(火器)를 건드려 중류(中流)에서 불이 붙자 적이 달라붙었는데도 오히려 힘껏 싸웠다. 충무공이 달려가 구해주다가 함께 죽었으니, 이 일은 서희진(徐希辰)의 《동정기(東征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내가 일찍이 불쌍하게 여겨 《명사(明史)》 본전(本傳)을 상고해 보니 ‘조선에서 묘식(廟食)을 받고 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애당초 묘식함이 없고 강진의 도독(都督) 사당에도 또 배향하지 못했으니, 흠전(欠典)·궐사(闕事)로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는가. 평양 무열사(武烈祠)에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추가로 배향하자고 도백이 건청(建請)하여 이미 허락하였다. 같은 때 같은 일을 한 사람의 공덕을 보답하는 전례가 어찌 한 사람은 하고 한 사람은 하지 않아서 중국 장수의 영혼이 깃들 곳이 없게 하겠는가. 중국 부총병 등자룡 공을 진 도독(陳都督)의 사당에 승배(陞配)해야 하는데 처음에 듣기로는 사당이 남해(南海)에 있다고 하여 이제 평양의 낙공을 추배할 때에 미쳐서 함께 거행하고자 하였다. 다시 듣건대 도독은 충무공과 강진 땅 탄보묘 옆에 배향하였다고 하니 등공의 별사(別祠)도 마땅히 이 사당에 배향해야 한다. 승배(陞配)하는 날에 관원을 보내 치제하되 충무공을 이미 함께 배향하였으니 일체로 치제하라. 제문은 모두 마땅히 친히 짓겠다. 치제는 비록 명이 있지만 이때에 주전(廚傳)하는 데 폐단이 있으니, 헌관(獻官)은 부근의 문관인 원 가운데서 차출해 보내라. 등 총병은 충무공과 동시에 노량에서 목숨을 바쳤는데 충무공은 남해의 충열사(忠烈祠)에서 전향(專享)하고 있다 한다. 충무공의 유사를 근래에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전서(全書)로 찬(撰)하게 하였으니 인쇄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1본(本)을 본 사당에 보관하고 인하여 치제를 행하라." 하였다.

정조 16년 8월 19일 을유 1번째기사

충무공 이순신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한다고 전교하다.

승지를 보내어 황단(皇壇)의 위패를 봉안(奉安)한 방을 봉심(奉審)하게 하고, 행 부호군 이원(李源)은 선무사(宣武祠)를 봉심하게 하였으며,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에게는 의정부 영의정을 더 추증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날이 무슨 날인가. 아, 신종(神宗) 황제가 우리 나라를 구원하여 다시 있게 해 준 은혜는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다. 비풍(匪風)의 감상(感傷)과 하천(下泉)의 쓰라림093) 을 장차 어디에 그 만분의 일인들 표시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근신(近臣)을 보내어 위패를 봉안한 방을 대신 봉심하게 하였으며 거듭 무신(武臣) 이원(李源)을 시켜 선무사에 가서 두루 돌아보게 한 것은 주로 이 날을 기억하려 함에서이나 이것으로 어찌 기억이 되겠는가.

덕을 본받고 공을 갚는 데는 나라의 밝은 법규가 있는데, 더구나 작은 나라 배신(陪臣)으로서 명나라의 은총을 입어 천하의 명장이 된 사람은 바로 이 충무공이다. 옛적 무령왕(武寧王) 서달(徐達)의 비석을 황제가 직접 글씨를 쓰고 유사(有司)가 비 세우는 일을 맡아 하였었다. 우리도 삼가 이를 모방하여 일찍이 그 도로 하여금 비석을 깎아놓고서 비석 머리에 새길 전자(篆字) 글씨를 써서 내려보내고 명시(銘詩)를 지어 보일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였었는데, 작년에는 민생에 관한 일로 바빠서 미처 하지 못하였다. 이에 오늘 충무공 후손을 불러 물어보고 그 공역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또 생각해보면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威武)로서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加贈)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유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 공신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덕풍 부원군 행 정헌 대부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겸 삼도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하라. 비석을 세우는 날의 치제(致祭)에 대하여는 전에 명을 내려 알렸는데, 벼슬을 추증하고 선고(宣誥)하는 일도 그날 함께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춘추(春秋)》를 읽을 만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삼전(三傳)을 묶어 높은 데 얹어놓지 말라. 이 의리(義理)는 우주간에 영원히 존재하고 있어 해·별과 함께 광채를 빛낼 것이다. 어찌 이를 강명(講明)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날이 무슨 날인가." 하였다.

정조 17년 7월 21일 임자 1번째기사 [10]

임금이 지은 고 충신 이순신의 상충 정무비 인본을 나누어 주다.

임금이 지은 고(故) 충신 이순신(李舜臣)의 상충 정무비(尙忠旌武碑) 인본(印本)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앞서 상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탁월한 공적과 충절을 생각하여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친히 지었다.[11] 그리고 송(宋)나라 부필(富弼)의 묘비(墓碑) 제목을 전자(篆字)로 썼던 예를 본따 그 비의 제목을 전자로 써서 ‘상충 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하고, 내각에 명하여 안진경(顔眞卿)의 가묘(家廟)의 비(碑)에서 글자를 모아 쓰게 하였다. 그리고는 호남의 도백(道伯) 이형원(李亨元)에게 명하여 돌을 캐내어 그 묘에 세우게 하였는데, 갑인년에 그 일이 마무리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내각이 탑본(榻本)을 바치자 다섯 군데의 사고(史庫) 및 관각(館閣)과 태학(太學)에 나누어 보관토록 명하였다.

정조 19년 5월 11일 신유 2번째기사

《충무공이순신전서》를 발간하다.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를 발간하였다.

이에 앞서 내각에 명하여 이순신의 옛날 행적 및 유고(遺稿)를 모아 한 책으로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편찬해 올리니, 하교하기를,

"이번 일은 충의를 드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며 무용(武勇)을 드러내고 공적을 표창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편집할 때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관심을 표명했었으니 이제 인쇄할 때에 와서도 역시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마땅하다. 이제 내탕(內帑)의 돈 5백 민(緡)과[12] 어영(御營)의 돈 5백 민을 내려주어 책을 인쇄하는 비용을 보조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 19년 9월 14일 임술 1번째기사

충무공 이순신의 치제문을 친히 짓고, 통영의 충렬사에 제사를 올리게 하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치제문(致祭文)을 친히 지은 뒤 통제사(統制使) 이득제(李得濟)에게 명하여 통영(統營)의 충렬사(忠烈祠)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정조 19년 12월 5일 임오 1번째기사

정조 대왕 행장(行狀)

《이충무전서(李忠武全書)》를 편찬하였다. 왕은 충절을 높이고 공로를 보답하는 길이라면 아끼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지만 유독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에 대해서는 그를 최고로 여겨 그들의 유문(遺文)과 유사(遺事)를 편집하고 충무공은 《전서(全書)》, 충민공은 《실기(實紀)》라 하여 인행(印行)하였다.

전 통제사 이당을 소견하고 통영의 폐단에 대해 순문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순신의 사적(事蹟)이 무슨 책에 있는가?"

하니, 승지 박종훈(朴宗薰)이 말하기를,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손으로 조정에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이인수(李仁秀)·이승권(李升權)이 모두 그 자손입니다." 하였다.

순조 8년 1월 10일 정미 2번째기사

연로에 있는 선비들과 이름난 신하들의 사당들에 모두 치제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아! 우리 선조 임금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때에 충성을 다하여 큰 공훈을 세웠으니 천년이 지나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행차가 호서(湖西)를 지나면서 큰 나무를 바라보니 깊은 감회를 금할 수 없다. 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무덤에 지방 관리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순종 2년 1월 7일 양력 3번째기사

3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을 거치면서 상당부분이 손실되었기때문에, 인조 이전의 승정원일기는 볼 수가 없다.

자정전에서 통제사 구굉을 인견할 때 좌부승지 윤지경 등이 입시하여 주사로 왜적을 방어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李舜臣)이 만든 거북선은 그 제도가 아주 좋은데 통영(統營)에 지금 이 배가 있는가?”

하니, 구굉이 아뢰기를,

“전투에 임해 적진으로 돌진하는 데에는 거북선만 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듣건대, 통영에 단지 거북선 한 척과 판옥선(板屋船) 네 척만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신이 부임해서 더 만들려고 하는데 다만 물력(物力)이 넉넉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전에는 영중(營中)의 물력이 풍부하여 급료(給料)로 지급하는 수량만도 700석(石)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이수일(李守一)이 그 수를 줄이고 이완(李浣)이 또 줄인 상태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본영(本營)에 비축해 둔 것이 1만 □천 석뿐이고, 각 도(道)에 비축해 둔 것도 3만 석에 불과하다고 하니, 줄어도 너무 심하게 줄었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단 물력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적임자를 얻지 못한 탓도 있다.” 하였다.

인조 7년 기사(1629, 숭정2)

흥정당에서 완평부원군 이원익을 인견할 때 도승지 이성구 등이 입시하여 유흥치의 사망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인조 9년 신미(1631, 숭정4)

흥양현의 군병을 밖으로 내어 쓰지 말 것 등 8조목의 폐단을 진달하는 상소

장수를 적임자를 얻으면 병사가 많고 적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난 정유년(1597, 선조30)에 전선(戰船) 300척을 거느리고 원균(元均)이 원수가 되었을 때 한산도(閑山島)에서 패망하여 10척만 남게 되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통솔하여 명량(鳴梁)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신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니, 지난 일을 통해 분명히 징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잘 살피시고 재결해 주소서.

인조 14년 병자(1636, 숭정9)

조경을 인견할 때 동부승지 최유연 등이 입시하여 일본과 교유하고 천조에도 사신을 보내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조경이 아뢰기를,

“오늘날 주사(舟師)[13]를 추가로 부방(赴防)하게 하는 일은 참으로 유사시를 대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만약 불의의 변란이 있을 시에는 이것 역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오합지졸인 주사를 이끌고 한창 기세등등하던 왜적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 원문 빠짐 - 이때 원균(元均)은 앞서 대패하였는데 이순신은 승전보를 바쳤습니다. 이로 볼 때 비록 주사 - 원문 빠짐 - 훌륭한 장수가 아니면 도리어 무용할 뿐입니다. 신은 오늘날의 수신(帥臣) 중에도 이순신과 같은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인조 16년 무인(1638, 숭정11)

통제사 유림을 인견할 때 참찬관 이후원 등이 입시하여 왜의 실정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유림이 아뢰기를,

“거제(巨濟)의 남쪽은 바로 등산(登山), 옥포(玉浦), 지세포(知世浦)입니다. 이순신(李舜臣)이 전라 좌수사로 있을 때 적선이 견내도로 오자 격파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기의 견고함은 장수를 적임자로 얻느냐에 달려 있다. 원균(元均)은 패배하고 이순신은 승리하였으니, 진실로 사람이 하기에 달려 있다.”

하였다. 유림이 아뢰기를,

“어찌 원균과 이순신 두 장수의 승패만 그런 것이겠습니까. 자고로 적임자를 얻으면 큰일을 할 수 있고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작은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인조 17년 기묘(1639, 숭정12)

김상용(金尙容) 등을 치제하는 날에 함께 제사를 지내라는 비망기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충의(忠義)와 구원일(具元一)ㆍ황선신(黃善身)ㆍ강흥업(姜興業) 세 사람이 순절한 일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으니, 이번 치제하는 날에 어찌 다르게 대우할 수 있겠는가. 함께 제사를 지내라. 그리고 통영(統營)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사당에는 본도로 하여금 또한 치제하게 하여 충절을 표창하여 세상을 격려하는 나의 뜻을 보여 주라.” 하였다.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연생전에 영의정 김병학 등이 입시하여 《시전》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 선박이 아무리 공교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깨뜨릴 날이 없겠는가. 지난 임진년에 원균(元均)이 패전한 뒤로, 이순신(李舜臣)이 거북선으로 적병을 대파하였다. 지금 만약 이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근심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고종 8년 신미(1871, 동치10)

희정당에서 약방이 입진하고 대신 등을 인견할 때 도제조 이유원 등이 입시하였다

박규수(朴珪壽)는 아뢰기를,

“대장의 명칭이 등단(登壇)이 된 것은 우리나라의 속칭(俗稱)입니다. 무릇 장수가 되어 자기 군사를 통솔하는 자로서 누구인들 단(壇)에 올라 호령을 내지 않겠습니까. 한 고조(漢高祖)가 단을 설치하고 거기에서 한신(韓信)을 대장에 제수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 말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관(官)이 대장에 이르면 등단이라고 칭하는데, 근래에는 통제사(統制使)도 대장이 되어 외등단(外登壇)이라고 칭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제사는 장신(將臣)을 거친 뒤에 하는데, 장신에 통망하기 전에 하기도 한다.”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서 곧바로 통제사에 제수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명 나라로부터 수군 도독(水軍都督)에 봉해졌고, 여덟가지 물건을 하사한 일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그 사적은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통제사는 대장을 더해 주지 않더라도 체례(體例)가 본래 위중(威重)하고 각별하니, 대장의 호칭이 굳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옛날 충무공 이순신이 군영을 설치한 처음에 그가 대장이어서 공렬이 저와 같이 대단하였겠습니까. 지금에는 마침내 외등단의 예가 있게 되었는데, 만약 장신(將臣)의 직임을 거친 자만을 차송한다면 반드시 한 사람이 여러 번 제수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아장(亞將)을 차송할 경우, 한 번 통제사가 되면 곧 대장이 되어 장차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대장이 많게 될 것입니다. 통제사를 대장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당 성상께서 잘 참작하여 헤아리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통제사는 체통이 중대한 직임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한 것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통영(統營)의 관할 지역에서는 통제사만 알고 감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연전에 고성(固城)에서 버틴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군중에서는 장군의 명령만을 듣습니다.”

하고, 이경하가 아뢰기를,

“우리나라 주사(舟師)의 제도는 통영을 가장 일컫고 있습니다. 전함 가운데 좌선(座船)에는 수천 명을 태울 수가 있습니다. 또한 거북선이 있는데, 이는 바로 이 충무공의 유제(遺制)입니다. 그밖에도 칠전선(七戰船)이 있는데, 항상 항구에 매두고 군대의 각종 기계와 군량을 쌓아 두고 있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포수들과 노질을 잘하는 군사들은 선창을 떠나지 않고 있어 즉시 전투에 나갈 것처럼 대기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고종 11년 갑술(1874, 동치13)

선조(宣祖)의 존호를 추상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李舜臣)이 전사한 것은 임진년 뒤에 있었던 일인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그의 죽음은 전공(戰功)이 거의 이루어진 날에 있었으니, 아마도 6, 7년 뒤에 있었던 듯합니다. 나라를 중흥시킨 무공(武功)으로는 이순신이 1등 공신이 되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고종 29년 임진(1892, 광서18)

이순신의 묘소에 지방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아! 우리 목릉(穆陵 선조(宣祖))이 중흥할 때에 충성을 다하여 큰 공로를 세웠으니, 천년의 뒤엔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호서를 지날 때에 큰 나무가 눈에 들어오니 더욱더 깊은 감회를 금할 수 없다. 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묘소에 지방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는 교지를 받들었다.

순종 2년 무신(1908, 융희2)

4 일성록

일성록은 왕의 일기로, 정조가 처음 작성한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내가"라는 부분은 바로 정조 자신을 가리킨다.

성정각(誠正閣)에서 승지 이성원(李性源)을 소견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통영(統營)의 형세는 어떠한가?”

하니, 이성원이 아뢰기를,

“통영은 지세가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다가 바다 입구로 들어가므로 산이 둘러싸고 바다에 막혀 있으니,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형세가 여기에서 끝나게 됩니다. 기세가 웅대하고 조치(措置)가 공고하며 한산도(閑山島)가 그 남쪽을 제압하고 있어 무성하게 기각(掎角)의 형세가 있으며, 이순신(李舜臣)이 성채를 만들고 싸워서 정벌한 터와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공수(攻守)한 제도를 두루두루 살필 수가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내린 땅입니다.” 하였다.

정조4년 경(1780,건륭 45)

각도에 어염세(魚鹽稅)를 중첩되게 거두지 말라고 신칙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연해의 전선(戰船)이 매우 커서 선소(船所)에 물이 빠지면 계속 육지에 있게 되니, 앞으로 전선을 새로 건조할 때는 크게 하지 말고 가볍고 빠르게 하는 데 힘쓰며, 물이 없는 곳에 있는 선소는 모두 물이 있는 포구나 항구로 옮겨 설치하는 일이었습니다. 전선의 규모를 줄이는 것에 대해 전후로 한두 번 갑론을박(甲論乙駁)한 것이 아니었으나, 필경 옛날 체제대로 하기로 한 것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남긴 제도로서 충무공이 적선을 격파한 공이 대부분 큰 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조선(漕船)과 상선(商船)은 모두 급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배이니, 어찌 반드시 옛날 제도를 고쳐야만 비로소 가하겠습니까. 선소를 옮겨 설치하는 한 가지 일은 전에 이미 각도의 수영(水營)에 공문을 보내어 편리한 대로 포구를 파도록 하였으니 지금 다시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정조10년 병오(1786,건륭 51)

유성룡(柳成龍)과 이순신(李舜臣)의 직계 자손에 대해 각각 한 사람씩 이름을 지적하여 초기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우리나라를 다시 살려낸 황제의 은혜 때문에 석 상서의 후손을 거두어 녹용하는 조처가 있었다.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직계 자손 중에 유생과 무사를 막론하고 거두어 녹용하기에게 합당한 자를 이조와 병조로 하여금 장신과 상신의 집에 물어서 각각 한 사람씩 이름을 지적하여 초기하게 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정조15년 신해(1791,건륭 56)

이 충무공(李忠武公)의 세 아들을 포상하고 장려하는 법에 대하여 해당 조(曹)로 하여금 대신에게 물어본 뒤 초기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검교직제학 서유방(徐有防)이 아뢰기를,

“신은 마침 말이 나왔기 때문에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아들 이면(李葂)은 어린 나이로 세 명의 왜적을 사살한 뒤 군진(軍陣)에서 죽었고 서자 이훈(李薰)은 무과에 급제하여 이괄(李适)의 난에 순국하였고 이신(李藎)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증 병조 판서 이완(李莞)과 함께 난리에 순국하였는데, 아직까지 포상하고 장려하는 은전(恩典)을 입지 못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면에게는 정려를 세워 주고 이훈과 이신에게는 증직의 은혜를 베풀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은전에 관계되는 일이니 상께서 대신에게 물어보아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전교하기를,

“해당 조에서 대신에게 물어본 뒤 초기하게 하라.” 하였다.

정조16년 임자(1792,건륭 57)

충무공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더 추증하고, 이어 추증한 벼슬을 선고(宣誥)하는 일을 비석을 세우고 치제(致祭)하는 날 함께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날이 무슨 날인가. 아,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우리나라를 구원하여 다시 있게 해 준 은혜는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다. 〈비풍(匪風)〉의 감상(感傷)과 〈하천(下泉)〉의 쓰라림을 장차 어떻게 그 만분의 일인들 표시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근신(近臣)을 보내 봉실을 대신 봉심하게 하였으며 거듭 무신(武臣) 이원을 시켜 선무사에 가서 두루 돌아보게 한 것은 이날을 기리기 위해서이나 이것으로 어찌 기리기에 충분하겠는가.

덕을 본받고 공에 보답하는 것은 나라의 밝은 법규인 데다, 더구나 작은 나라의 배신(陪臣)으로서 명나라의 은총을 입어 천하의 명장(名將)이 된 사람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바로 이 충무공이 그 사람이다. 옛적 무령왕(武寧王) 서달(徐達)의 비석을 황제가 직접 글씨를 쓰고 유사(有司)가 비 세우는 일을 맡아 하였었다. 우리도 삼가 이를 모방하여 일찍이 해당 도로 하여금 비석을 깎아 놓고서 비수(碑首)에 쓸 글을 써서 내려보내고 명시(銘詩)를 지어 보일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였었는데, 작년에는 민생에 관한 일로 바빠서 미처 하지 못하였다. 오늘 충무공의 후손을 불러 물어보고 그 공역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또 생각해 보면 충무공의 그 충성과 그 위무(威武)에 대해 죽은 뒤 아직까지 영의정을 더하여 추증하지 못한 것은 실로 흠이 되는 일이다. 유명(有明) 수군 도독(水軍都督) 조선국(朝鮮國) 증(贈)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행 정헌대부(行正憲大夫)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制使)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더 추증하고 이렇게 추증하는 일을 오늘 하비(下批)하라. 비석 세우는 날의 치제에 대해서는 전에 통지해 두었으니, 추증한 벼슬을 선고하는 일도 그날 함께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춘추(春秋)》를 읽을 만한 곳이 없다고 하거나 삼전(三傳)을 묶어 높은 데 얹어 놓아야 한다고 말하지 말라. 이 의리(義理)는 우주 사이에 영원히 존재하고 있어 해와 별과 함께 그 광채가 빛날 것이다. 어찌 이를 강명(講明)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날이 무슨 날인가.” 하였다.

정조17년 계축(1793,건륭 58)

2차 정사를 하였다.

증 좌의정 충무공 이순신에게 영의정(領議政)과 예겸직(例兼職)을 더 추증하였다.

정조17년 계축(1793,건륭 58)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치제(致祭)와 선고(宣誥)는 서울 본가에서 행하고 비석을 세우는 날에 작질이 높은 수령으로 하여금 비석 앞에서 비명(碑銘)을 선유(宣諭)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충무공의 사판(祠板)이 시골집에서 올라왔다고 들었다. 치제하고 선고하는 일을 서울 본가에서 행하고 비석을 세우는 날에 도내의 작질이 높은 수령으로 하여금 비석 앞에서 비명을 선유하게 하라고 예조 및 충청도에 분부하라.” 하였다.

정조17년 계축(1793,건륭 58)

어제(御製) 고(故)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상충정무비(尙忠旌武碑) 인쇄본을 반사(頒賜)하였다.

이에 앞서 충무공 이순신의 탁월한 공적과 충절을 생각하여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친히 지었다. 그리고 송(宋)나라 부필(富弼)의 묘비(墓碑)의 제목을 전자(篆字)로 썼던 예를 본떠 그 비의 제목을 전자로 써서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하고, 내각에 명하여 안진경(顔眞卿)의 가묘(家廟)의 비(碑)에서 글자를 모아서 쓰게 하였다. 그리고 전라 감사 이형원(李亨元)에게 명하여 돌에 새겨 그 묘에 세우게 하였는데, 갑인년(1794, 정조18)에 그 일이 마무리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내각이 탁본(拓本)을 장황(粧潢)하여 바쳤으므로, 전교하기를,

“첩(帖)으로 만든 것 1건, 책(冊)으로 만든 것 1건, 장황하지 않은 것 12건을 대내(大內)로 들이고, 첩으로 만든 것 1건, 책으로 만든 것 1건, 장황하지 않은 것 4건을 서고(西庫)에 보관하고, 첩으로 만든 것 1건, 책으로 만든 것 1건은 외규장각에 보관하며, 책으로 만든 것 8건은 5군데의 사고(史庫)와 내각, 홍문관, 성균관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라.” 하였다.

정조19년 을묘(1795,건륭 60)

내각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전서(全書)를 인쇄하여 반포하라고 명하고, 이어 전서를 인쇄할 비용을 하사하였다.

이에 앞서 내각의 신하에게 명하여 이순신의 전고(典故)와 유고(遺稿)를 모아 한 책을 완성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가 되어 편찬하여 올렸다. 전교하기를,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8책을 교정하여 편찬해서 올렸으니, 내각에서 40건을 인쇄하여 들이게 한 뒤에 10건은 서고(西庫)에 보관하고, 또 각 1건씩을 5곳의 사고(史庫), 홍문관, 성균관, 순천(順天) 충민사(忠愍祠),[14] 해남(海南) 충무사(忠武祠),[15] 통영(統營) 충렬사(忠烈祠),[16] 남해(南海) 충렬사(忠烈祠),[17] 아산(牙山) 현충사(顯忠祠),[18] 강진(康津) 유사(遺祠),[19] 거제(巨濟) 유묘(遺廟),[20] 함평(咸平) 월산사(月山祠),[21] 정읍(井邑) 유애사(遺愛祠),[22] 온양(溫陽) 충효당(忠孝堂),[23] 착량(鑿梁) 초묘(草廟)에[24] 누어 보관하고, 나누어 줄 것은 32건을 인쇄하라. 이 일은 충의를 드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며 무용(武勇)을 드러내고 공적을 표창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편찬할 때에 누차 부지런히 자문(諮問)하였으니, 이것을 인쇄할 때에도 특별한 조치를 해야 한다. 지금 내탕고(內帑庫)의 전(錢) 500민(緡)과 어영청의 전 500민을 내려 주니, 전서를 인쇄하는 비용에 보태게 하라.” 하였다.

정조19년 을묘(1795,건륭 60)

충무공 이순신의 치제문을 지어서 내리고, 통제사 이득제는 통영의 충렬사에서 치제하며 새로 인쇄한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를 의민공 이억기와 충신 정운의 집안에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어제 영남의 수령이 하직 인사를 하였는데 가는 길에 새로 인쇄한 《충무공전서》를 가지고 가 통영의 충렬사에 보관하게 하였다. 밤에 또 촛불을 밝히고 자세히 읽어 보았는데 그 위인의 충효에 감동해 백년을 뛰어넘는 감회에 젖어들어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앉아서 밤을 지새우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새벽닭이 우는 시각이 되었다. 책이 완성된 후 치제하라고 일찍이 하교를 내려서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묘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니, 지금은 마땅히 그 사원(祠院)에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이다. 사원 중에서 통영의 충렬사가 충무공의 공적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니 통제사로 하여금 치제하는 날을 택하게 하며 제문은 지어서 내릴 것이니 가지고 가게 하라. 수령을 집사관으로 삼고 나머지는 부근의 수령으로 차정(差定)하라. 뜰에 늘어서는 반열과 제품(祭品)은 모두 제문에서 조목별로 열거하는 데에 따라 거행하라. 또 《충무공전서》 1건을 의민공 이억기의 집안에 주되, 그 손자인 완천군(完川君) 이명규(李明奎)를 불러 직접 받게 하라. 이로 인해 생각해 보니, 영암의 충신 정운의 충렬은 충무공의 질문에 대답한 내용과 스스로 맹서하여 검(劍)에 새긴 명문(銘文)을 살펴보면 그의 높은 절개를 이미 잘 알 만하다. 하물며 그 위대한 업적과 큰 절개가 참으로 늠름하였으니 나는 항상 의민공의 공렬만 표창하고 정운의 충성은 선양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이는 다만 세상의 습속이 그런 것으로 세력과 지벌(地閥)에 좌절당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은가. 그 집안에도 《충무공전서》 1건을 나누어 주고 그 사손을 찾아가 만나 본 다음 장계로 보고하라고 전라 감사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정조19년 을묘(1795,건륭 60)

이창희(李昌熙)를 구전 정사로 서로 자리를 바꾸게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창희는 신병이 갑자기 심해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우선 개차(改差)하고, 후임을 즉시 이조로 하여금 구전 정사로 차출하게 하여 수향(受香)하고 배진(陪進)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전교하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손(祀孫)을 어찌 벼슬자리에서 떨어지게 하겠는가. 이조로 하여금 구전 정사로 서로 자리를 바꾸게 하여 수향하게 하라.” 하였다.

정조23년 기미(1799,가경 4)

5 홍재전서

증 좌의정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에게 영의정을 더 증직하라는 하교

오늘이 무슨 날인가. 아, 신종황제(神宗皇帝)가 다시 나라를 만들어 준 은혜는 하늘과 함께 다함이 없으니, 명 나라가 쇠망한 데 대한 감회를 장차 어디에다 만의 하나라도 표시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근신(近臣)을 보내어 봉실(奉室)을 대신 봉심하게 하였고 거듭 무신 이원(李源)으로 하여금 선무사(宣武祠)에 가서 두루 살펴보게 하였으니, 대개 이날을 드러내어 알리려는 것이나 이것만으로 어찌 드러내어 알릴 수 있겠는가.

덕을 본받고 공을 갚는 데에는 나라의 밝은 전례가 있는데, 더구나 작은 나라의 배신(陪臣)으로서 천조(天朝)의 은총을 입어 천하의 명장(名將)이 된 사람은 바로 이 충무공(李忠武公)이다. 예전에 무령왕(武寧王) 서달(徐達)의 비(碑)를 황제가 직접 글씨를 쓰고 유사(有司)가 그 일을 맡아 하였는데, 삼가 이를 본떠서 일찍이 해도(該道)로 하여금 돌을 깎아 놓고서 비석 머리에 새길 전자(篆字) 글씨를 써서 내려 보내고 여기에 새길 시(詩)를 지어 보일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런데 작년에는 백성의 일로 바빠서 미처 하지 못하였기에 오늘 충무공의 후손을 불러 물어보고 그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또 생각건대, 충무공과 같은 충성과 무용을 지닌 이에게 숨을 거둔 뒤로 아직까지 영의정의 증직을 빠뜨리고 하지 않았으니, 실로 잘못된 일이다. 유명 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効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시 충무공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더 증직하라. 증직은 오늘 비답을 내리게 되었는데 비석을 세우는 날 치제(致祭)하는 데 대해서는 전에 명을 내려 알린 바 있었으니, 증직과 선고(宣誥)를 아울러 그날 함께 거행하도록 하라.

《춘추》를 읽을 만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삼전(三傳 좌씨전(左氏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을 묶어 높은 시렁에 얹어 놓지 말라. 이 의리는 길이 우주 사이에 남아 해와 별과 함께 광채를 보전할 것이니, 어찌 강구하여 밝힐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날이 무슨 날인가.

홍재전서 제34권

통영(統營) 충렬사(忠烈祠) 치제문

만력(萬曆) 기원인 계유년(1573, 선조6) 후 222년 11월 정축일에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를 인쇄하여 반포하고 한 본을 통영(統營)의 충렬사(忠烈祠)에 보관하였다. 12월 임인일에 통제사 이득제(李得濟)에게 명하여 현황제(顯皇帝)가 하사한 도독구첩전(都督九疊篆), 동관방(銅關防) 및 영패(令牌), 귀도(鬼刀), 참도(斬刀), 독전기(督戰旗), 홍령기(紅令旗), 남령기(藍令旗), 곡나팔(曲喇叭)을 진설하고, 또 정독(旌纛), 총통(銃筒), 가고(笳鼓) 등속을 사당의 내외에 진설하고 각기 토양에 맞는 음식과 한 말의 술과 한 마리 돼지를 위패 앞의 갑옷에 드려서 유명(有明) 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에게 제사드리고 고하게 하노라.

경을 알고자 한다면 / 欲聞卿者
이 전서를 볼지니 / 視此全書
혁혁하고 빛나는 글이 / 奕奕焜焜
열네 편 남짓하다네 / 十四篇餘
전쟁의 공적을 이루고 / 戰爭之績
합변의 형세를 알았으며 / 合變之勢
거북선을 만들었으니 / 伏龜之舫
기러기 소리 들리는 물가였네 / 聽鴈之澨
도독 진린(陳璘) 총병 등자룡(鄧子龍)과 합세하여 / 曰陳曰鄧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여 지켰으니 / 湖嶺連營
바다에 서약하고 산에 맹세하니 / 誓海盟山
초목도 이름을 알았었네 / 草木知名
책으로 어찌 공의 경중을 논하랴만 / 書豈輕重
책을 보면 곧 드러나기에 / 賴書乃顯
내탕고(內帑庫)의 재물을 덜어 인쇄에 부치니 / 捐帑付劂
비로소 광전을 닦은 것이라네 / 肇修曠典
이 책을 보관하는 곳이 / 于以藏之
바로 충렬사(忠烈祠)이니 / 忠烈之祠
이에 통제사에게 명하여 / 爰命統帥
경건히 잔을 드리게 하노라 / 虔奠泂巵

홍재전서 제23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치제문

남쪽 바다를 헤아리건대 / 請量南溟
천자의 은혜가 가득하니 / 帝恩盈盈
작은 티끌도 움직이지 않고 / 纖塵不動
전함이 절로 종횡하였네 / 戰艦自橫
누가 천위에 의지하여 / 孰仗天威
길이 동토를 안정되게 하였던가 / 永奠東土
시기에 응하여 나온 이로 / 膺期而出
충무공이 있었다네 / 曰有忠武
옛날 왜적이 돌연히 침범함에 / 昔者豕突
여러 군읍이 와해되자 / 列郡解瓦
눈물을 뿌리고 노를 쳤으니 / 灑涕擊楫
경은 당시의 사아였네 / 卿時士雅
한 번 북을 울려 적장을 쓰러뜨림에 / 一鼓殲酋
하례하는 술을 장차 거르려 했는데 / 賀酒將釃
단거가 와서 대신하니 / 單車來代
경은 당시의 망저군(望諸君)이었네 / 卿時望諸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고 상처를 싸매고 / 拾燼裹創
다시 회절을 어루만져 / 再按淮浙
성벽에 광채가 더해지니 / 壁壘增彩
경은 당시의 이광필이었네 / 卿時光弼
종거가 바뀌지 않았기에 / 鐘簴不改
남녀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여 / 士女相慶
하늘이 사직을 위하여 낳았다고 하니 / 天生爲社
경은 당시의 이성이었네 / 卿時李晟
명 나라 원병과 더불어 / 偕我王師
왜적의 소굴을 치려고 했는데 / 夬擣巢穴
차마 오장원(五丈原)을 말할 것인가 / 忍說五丈
제갈량(諸葛亮)의 죽음이 슬프도다 / 嗚呼諸葛
아산(牙山)의 언덕에 / 維牙之阡
묘소의 추백이 푸르디 푸른데 / 楸柏靑靑
공적이 비석에 새겨지고 태상(太常)에 기록되니 / 篆首紀常
아아 무공으로 나라를 편안케 하였네 / 吁嗟武寧
경이 하사받은 바가 있어 / 卿有所受
만력 연간 명 나라 천자께서 / 萬曆天子
기장과 새서(璽書)를 내려 주셨으니 / 旗章璽票
남쪽 변방을 진압한 때문이었네 / 鎭伏南紀
도독은 옛적의 두터운 은총이고 / 都督舊渥
영의정에 추증됨은 새 영광이니 / 上相新榮
습령의 생각에 / 隰苓之思
또한 경에게 잔을 드리네 / 亦酹於卿

홍재전서 제23권

이 충무공(李忠武公)이 등자룡(鄧子龍)과 함께 석만자(石曼子)를 협공할 때 창해(滄海)가 치솟아 오르고 풍운이 아연실색하였으니 수전(水戰)의 장대함이 자고로 이보다 큰 적이 없었다. 일찍이 그에 대한 기실문(紀實文)을 보았는데 초라하여 보잘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의 비문을 지어 그의 공로를 기술하여 드러내려고 하였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인물 중에 문무를 겸비한 사람을 꼽는다면 충무공 한 사람만이 해당된다 하겠다.

내가 절의 있는 인물에 대해 높이 장려하고 표창하여 일찍이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예를 들어 근래에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의 유사(遺事)와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의 실기(實紀)가 그 한두 가지 일이다. 이순신(李舜臣)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漢) 나라의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규획하는 데 방략(方略)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열성조께서 하사하고 추증하는 은전은 더할 수 없이 극진하였으나 문자로 새겨서 기리는 것은 아직 부족한 점이 있다. 내가 등극한 이래로 늘 사적을 모아 한 편으로 편찬하고, 또 묘에 비석을 세우고 생석(牲石)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아직까지 겨를이 없다가 근자에 와서야 비로소 이 일에 뜻을 두게 되었다.

홍재전서 제173권

국가에 충성한 공을 높이 숭상하고 보답하며 무공(武功)을 세운 이를 드러내어 표창하는 것은 옛 선왕들이 세상을 격려하고 다스리는 도구이며 내가 언제나 힘쓰는 일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을 찾아내고 드러내어 빛내어 포상하고 총애하는 증직(贈職)을 내린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지만 큰 공이나 충절을 사람들이 모두 환히 알고 있어서 그러한 이름을 얻어서 부끄럽지 않고 그러한 포상을 시행하여도 과장된 말이 아닌 이를 논한다면 바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이 가장 드러난 이들일 것이다. 나는 충민에 대하여 이미 묘비의 명(銘)을 짓고 다시 그의 유문(遺文)과 유사(遺事)를 모아 인쇄하여 온 나라에 반포하였다.

임자년(1792, 정조16) 가을에 대보단(大報壇)에 참배하여 우리나라를 다시 세우도록 도와준 중국 황제의 은혜를 생각하고 이어 우리나라의 충신까지 기리어, 중국 조정으로부터 도독(都督) 인장을 받은 충무공의 후손에게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내각에 하교하기를 “충민은 이미 실기(實記)를 인쇄하여 반포하였거니와 충무만은 아직 없다. 충무와 같은 공과 명성이 있는데도 그의 평소 저술과 다른 이들이 그에 대해 기록한 글들을 모은 책이 아직껏 없으니 어찌 아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마침내 각신(閣臣) 윤행임(尹行恁)에게 명하여 공사 간의 기록을 널리 모아 충무전서(忠武全書)로 꾸미고 첫머리에 전교(傳敎), 하유(下諭), 사제문(賜祭文), 도설(圖說), 세보(世譜), 연표(年表)를 싣고 그다음에 시문(詩文), 그다음에 장계(狀啓), 그다음에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싣고 다시 비장(碑狀), 사기(祠記) 및 후인들의 기술(紀述) 등을 부록으로 6권을 만들어 뒤에 붙여서 을묘년(1795, 정조19)에 비로소 완성하였다. 이어 내탕전(內帑錢)을 비용으로 대어 정유자(丁酉字)로 인쇄하여 혼령을 모신 여러 곳에 소장하게 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통영(統營)의 충렬사(忠烈祠)에 치제(致祭)하고, 통수(統帥)에게 명하여 명 나라 조정에서 내린 전서로 새긴 도독(都督) 구첩(九疊) 동인(銅印)과 관방령패(關防令牌), 귀도(鬼刀), 참도(斬刀), 독전기(督戰旗), 홍령기(紅令旗), 남령기(藍令旗), 곡나팔(曲喇叭) 등을 진열하고 큰 술잔에 술 올려 일을 마치도록 하유하였다.

홍재전서 제184권

유명(有明) 수군도독(水軍都督) 조선국(朝鮮國) 증(贈)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행 정헌대부(行正憲大夫)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制使) 시(諡)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신도비명(神道碑銘)

살았을 때 거복(車服)으로 사랑을 표시하고, 잔치를 베풀어 공로를 치하하고, 그의 공로를 관현(管絃)에 올려 악으로 연주하고, 죽은 후에는 제물로 오정(五鼎)을 차리고, 자손들에게 대대로 녹을 주고, 기폭(旗幅)에도 그의 공로를 새겨 그의 빛나고 훌륭한 절의가 상하에 소명되게 했으며, 산천(山川)에도 배향하여 그로 하여금 음직(陰職)을 맡아 백성들에게 많은 복을 주도록 했던 것이 옛날 선왕(先王)들이 공신(功臣)에게 한 예우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법이 주(周) 이후로 점점 없어져 갔다. 그러나 비를 세우고 명(銘)을 하여 옛날 기폭에다 쓰던 유풍은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임금이 직접 명을 쓰는 일이다. 왕조(王朝)의 전수(篆首)로는 지덕(至德)이 있고, 원로(元老)와 서달(徐達)의 전수로는 충지무자(忠志無疵)라는 것이 있지만 몇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그러한 예우를 받은 분이 과연 몇이나 되던가.

아, 우리나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공로가 이 명법(銘法)에 해당한 분이다. 그래서 내가 그분의 명을 쓰려고 하는데, 혹시 욕되지나 않을는지 모르겠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이고 덕수인(德水人)이다.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변씨의 꿈에 시아버지가 나타나 하는 말이, 이 애가 태어나면 틀림없이 귀히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舜臣)으로 하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 정(貞)이 그 말을 듣고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점을 쳤더니 점괘가 좋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나이 50에 절월(節鉞)을 짚고 명장(名將)이 되었는데, 애초부터 그 이상한 조짐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나고 또 뜻이 컸었다. 자라서는 활 솜씨가 탁월하여 만력(萬曆) 병자년 무과(武科)에 합격하고 처음에는 변지 근무를 했는데, 누차 뛰어난 전과를 올려 나라 사람들이 장재(將才)라고 일컬었다.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강력 천거하여 드디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때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고 도발의 조짐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였다. 충무공은 그것을 깊이 걱정하면서 밤낮으로 군졸 훈련과 병기 단속 등 전수(戰守)의 준비를 착실히 하고, 또 엎드린 거북 모양을 한 새로운 형태의 배를 창안하여 거북선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배를 타고 수전(水戰) 연습을 한 자들은 그 배를 몽충(蒙衝)에다 비유했던 것이다.

임진년에 왜구가 대거 침입하여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시키고 길을 나누어 서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충무공은 그때 즉시 군대를 이끌고 옥포(玉浦)로 가서 적선 20여 척을 불태워 버리고 경상 수군절도사(慶尙水軍節度使) 원균(元均)과 노량(露梁)에서 회동하여 적을 양쪽에서 공격하고는 이어 사천(泗川)으로 가 또 10여 척의 적선을 불태우고, 당포(唐浦)로 진군했다가 거기에서 또 적선 20여 척과 마주쳤는데, 그 전투에서는 추장을 죽이고 적군을 섬멸하였다. 그리고 나서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와 당항포(唐項浦)에서 합세하여 적의 추장이 탄 3층 누선(樓船)을 격파하고, 나머지 적을 다시 한산도(閑山島)로 유인하여 크고 작은 전함 70여 척을 또 격파했다. 그리고 북으로 안골포(安骨浦)까지 적을 추격하여 또 40여 척의 적선을 불태워 그로부터 군성(軍聲)이 크게 떨쳤다. 적군은 겁에 질렸으며, 대첩 소식이 들릴 때마다 곧 가계(加階)를 하여 위계가 정헌(正憲)에 이르렀다.

계사년(1593, 선조26)에 조정에서 처음으로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두면서 공으로 하여금 본직을 띠고 겸임하도록 명하고 진(鎭)을 한산도로 옮겼는데, 그렇게 되자 원균이 충무공에게 절제(節制)받는 것을 수치로 여겨 자주 유언비어를 퍼뜨려 언관(言官)을 충동질했으므로, 결국 충무공은 적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핵받게 되고 원균이 대신 그 자리를 지켰는데, 그로부터 몇 달 안 가서 우리 군대가 패배를 당하고 원균은 도망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다시 충무공을 통제사로 삼았는데, 이때 충무공은 패하고 남은 몇십 기(騎)를 거느리고 순천부(順天府)로 달려가서 10여 척의 병선(兵船)을 확보하고 흩어졌던 병졸도 다시 모아 난도(蘭島)에서 적을 쳐부수고, 또 적을 벽파정(碧波亭) 아래로 끌어들여 배 30여 척을 격파하고 적장 마다시(馬多時)의 목을 베니, 적이 버티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무술년(1598, 선조31)에 명(明) 나라 장수 진린(陳璘)은 광병(廣兵)을, 유정(劉綎)은 천병(川兵)을, 등자룡(鄧子龍)은 절직병(浙直兵)을 각기 이끌고 연이어 들어왔다. 이때 충무공은 고금도(古今島)를 점거하고 진린과 합세하고 있었는데, 진린은 충무공의 재책(才策)과 기간(器幹)에 대해 마음으로 탄복하고는 군중의 모든 기밀을 다 공의 자문을 받아 결정했으며, 우리 선조(宣祖)에게 말하기를,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였고, 또 그 사실을 현황제(顯皇帝)에게도 아뢰어 공에게 도독(都督)의 인수(印綬)를 내리게도 했다. 얼마 후 일본 관백(關白)이 죽자 행장(行長)이 철병을 하려면서 곤양(昆陽)과 사천(泗川)에 있는 적들과 약속하여 그날로 노량(露梁)을 함께 진격하기로 하였다. 충무공이 명 나라 장수들과 함께 주사(舟師)를 정비하고 침략군을 완전 소멸할 다짐을 하고는 곧바로 배 위에 올라 축원하기를, “오늘은 진정 사생결단을 낼 터이니 하늘이시여. 나로 하여금 저 적들을 섬멸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는데, 축원을 마치자 하괴성(河魁星)이 떨어져 그것을 본 군중 전체가 나쁜 예감을 받았던 것이다. 그날 밤 새벽이 가까울 무렵 적을 맞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 전투에서 아군은 적선 2백여 척을 불태우고 계속 추격했는데, 남해(南海)에 이르자 적들이 명 나라 군대를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그것을 본 충무공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직접 진두에 서서 포위망을 뚫고 돌진을 꾀하다가 싸움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적의 유탄에 맞아 죽고 말았는데, 공이 태어난 을사년으로 따질 때 54세가 되는 해였고, 그 이듬해에야 아들 회(薈) 등이 아산(牙山)으로 반장했던 것이다. 갑진년에 책훈(策勳)을 하면서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무로 했으며, 전쟁 유적지에는 사우(祠宇)를 세워 지금까지 제사를 올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공로를 충분히 보답했다고야 하겠는가. 슬픈 일이다.

우리나라 인재가 배출되기는 목릉(穆陵) 시절이 최고였다고 하고, 또 중국에서 응원군으로 뽑아 보낸 장수들도 다 그 한때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었지만, 물고기가 뛰고 새우가 튀어 바닷물이 뒤집힐 때는 90리쯤 도망가서 이럴까저럴까 망설이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데도 8년 동안을 싸웠다 하면 반드시 이기고, 지키던 곳은 반드시 끝까지 지켜서 나라 형세가 그에 의하여 좌우되고, 적의 예봉이 그에 의하여 꺾이어 전 국토에 굴을 파 놓고 출몰하던 교활한 오랑캐들이 끝내 저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열조(烈祖)로 하여금 중흥의 공을 이룰 수 있게 뒷받침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충무공에게 특별히 명(銘)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 할 것인가. 내가 알기로는 증민(烝民)의 시(詩)는 번후(樊侯)의 공적을 노래한 것인데 선왕(宣王)의 아름다움이 그 안에 들어 있으니, 신하가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은 임금이 현명해서인 것이다. 임금의 명을 받아 그 일을 잘 마침으로써 공을 세우고, 그 공에 임금의 아름다움을 실어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옛날의 도였다. 지금 이 명도 그러한 시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니, 내 어찌 이 명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 그리하여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추가 증직하고, 그의 시호를 따라 비수(碑首)에는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새기고, 이어 서(序)를 쓰고 명을 써서 사씨(史氏)에게 고하는 것이다.

옛날 사훈씨가 책에 명하기를 / 稽古司勳氏之銘于策也
훈, 공, 다, 용, 로, 력이라 하였다 / 曰勳曰功曰多曰庸曰勞曰力
충무공 같은 이는 / 若忠武者
누군들 일이나, 전쟁이나, 임금이나, 나라에 훈로(勳勞)가 있다 하지 않으리오 / 孰不曰于事于戰于王于國
한 번 싸워 한산섬이 소탕되고 / 一戰而閑山盪
두 번 싸워 벽파진이 편안해지고 / 再戰而碧波晏
세 번 싸워 노량에 왜구가 없어졌으니 / 三戰而露梁無倭
이것이 다가 아니겠는가 / 斯不亦多乎
모사가 혀를 내두르고 / 謀士掉其舌
호신이 목을 움츠릴 때 / 虎臣蹙其頸
천자의 명으로 / 而用天子命
너희 속국의 외로운 군대라 했으니 / 惟汝屬國之孤軍
이것이 훈이 아니겠는가 / 斯不亦勳乎
천자의 군대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 翠華反於土中
백성들은 다시 안정을 찾아 / 赤子奠於席上
이 나라 억만년 대계를 다시 회복시켰으니 / 重恢我萬億年大東
이것이 공이 아니겠는가 / 斯不亦功乎
아, / 於虖噫嚱
마을에는 홍살문이 세워지고 / 烏頭在閭
무덤에는 비석이 세워졌으며 / 牲石在隧
끝내는 왕의 총애로 이 명까지 씌어졌으니 / 以卒受寵于篆首之章
강한같이 깨끗한 영령 / 江漢濯其靈
일월과 그 빛을 함께하리 / 而日月齊其光

홍재전서 제15권

6 서애

여해(汝諧) 이순신(李舜臣)에게 줌[25]

무더운 바다에서 효리(孝履)[26]께서 평안하신지 우러러 생각합니다. 제독(진린(陳璘)을 이름)도 그곳에 합세하여 진을 치려고 하니 호응하는 계책과 군량을 징발 수송하는 모든 일은 오로지 영감의 선처만을 믿습니다. 바라건대 모름지기 동심협력하여서 큰 공훈을 이루십시오.
도감의 포수 1백 명이 내려가는 편에 안부를 묻습니다. 바라건대 오직 나라를 위하여 몸을 보살피십시오.

서애선생 별집 제3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애도함

한산도 고금도 / 閑山島古今島
넓은 바다 속 두어 점 푸르구나 / 大海之中數點碧
이때 백전 노장 이 장군이 / 當時百戰李將軍
한 손으로 친히 하늘 한쪽을 붙들었네 / 隻手親扶天半壁
고래를 다 죽이니 피가 파도에 번지고 / 鯨鯢戮盡血殷波
맹렬한 불길은 풍이의 소굴 다 태웠어라 / 烈火燒竭馮夷窟
공이 높자 시새우는 모함 면하지 못했으니 / 功高不免讒妬構
홍모 같은 목숨 아낄 것 없노라 / 性命鴻毛安足惜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 君不見
현산 동쪽 한 조각 돌에 / 峴山東頭一片石
양공 간 뒤 사람들이 눈물 흘린 것을 / 羊公去後人垂泣
쓸쓸하다 두어 칸 민충사는 / 凄凉數間愍忠祠
비바람에 해마다 원문 3자 빠짐 / 風雨年年□□□
원문 5자 빠짐 수리하지 않으니 / □□□□□不修
때로 섬 사람들이 소리 죽여 우네 / 時有蜑戶呑聲哭

서애선생문집 제2권

7 약포

신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사람을 살펴볼 때 난이 평정될 징조가 있으니, 목성의 색이 푸른 것이 그 하나요, 큰 나라가 원조하는 것이 그 둘이요, 민심이 이반하지 않는 것이 그 셋이요, 풍년이 드는 것이 그 넷이요, 수군에 이순신(李舜臣)을 장수로 얻은 것이 그 다섯입니다.

정탁 약포집 제6권

이순신 옥사에 대한 의론〔李舜臣獄事議〕

저의 의론은 이렇습니다. 이순신의 옥사는 일의 성격이 매우 중대하여 진실로 가볍게 논의하기 어렵거니와, 처리하는 일도 관계됨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노들이 다시 준동(蠢動)하여 쳐들어올 적에 제때 차단하지 못한 것은 그 사이의 정세에 대해 논할 만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정의 명령이 제때 전달되었는지 여부와 바다에서 바람의 형세가 순풍이었는지 역풍이었는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순신과 같은 자는 또한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순신은 오래도록 수군을 거느려서 변방의 정세를 자세히 알고 있고, 일찍이 극악한 왜적을 무찔러 위엄과 명성이 꽤 있습니다. 왜노들이 수군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반드시 여기에 있습니다. 적들 가운데 이순신을 도모하려는 자는 진실로 하루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없는데, 몇 냥의 황금도 쓰지 않고 하루아침에 가만히 앉아서 우리나라가 갑자기 현륙(顯戮)을 가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적들의 행운이 될까 두렵습니다. 이순신은 죄 때문에 이미 의금부에 송치되어 있고 죄목도 매우 중대합니다. 만일 이 때문에 끝내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된다면 적들이 이 소식을 듣고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여 서로 경하할 것이고, 또 남방 변경의 많은 장사들은 모두 맥이 빠지게 될 것이니 이것이 매우 염려됩니다. 일개 이순신의 죽음은 진실로 애석할 것이 못되나, 국사에 있어서는 크게 관계됨이 없지 않습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주관(周官)의 팔의(八議)에 의공(議功)과 의능(議能)의 형(刑)이 있어서 대명률(大明律)에도 이 조목이 실려 있습니다. 신하 가운데 열 가지 악을 범한 자가 있어도 간혹 이로써 용서해 주었으니 이는 고금에 통용되는 의리입니다.

이순신은 이미 능력으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조정에서 통제사의 칭호를 내려 주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공과 그의 능력에 대해 혹시 논의할 만한 것도 있을 듯합니다. 지금 이순신이 옥에 갇힌 것만 해도 이미 율명(律名)이 매우 엄중하다는 것은 보여 주었으니, 다시 그가 공이 있고 재능이 있다는 의론으로 특명을 내려 사형을 감해 주어 그로 하여금 공을 세워 스스로 보답하게 한다면, 조정에서 처리하는 도리가 마땅함을 잃지 않을 듯합니다. 신이 부질없는 소견이 있어서 감히 이렇게 성총(聖聰)을 번거롭게 하고 더럽히게 되어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주상 전하께서 재가하여 주십시오.

정탁 약포집 제3권

신구차

8 백사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노량비명(露梁碑銘)

옛 임진년에 남쪽 왜구(倭寇)가 제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전함을 줄줄이 띄워서 바다를 건너왔는데, 조령(鳥嶺)으로부터 호서(湖西)까지가 그 병폐(屛蔽)는 한산(閑山)이고, 그 경계는 노량(露梁)이며, 그 요충지는 명량(鳴梁)이었으니, 만일 한산을 잃고 노량을 지키지 못하여 곧바로 명량을 축박해 온다면 경기(京畿) 일대가 마음을 동요하게 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때 누가 능히 공을 이루어 삼도(三道)의 적을 막아 내었던가. 그가 바로 원후(元侯) 통제(統制) 이공(李公)이었다.

병신년에 이르러서는 무능한 장수가 통제사를 대신함으로 인하여 한산이 패몰되었으므로, 이에 수군(水軍)의 패장(敗將)과 분졸(奔卒) 및 남토(南土)의 백성들이 모두 탄식하면서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이 통제(李統制)가 만일 그대로 있었다면 어찌 이 적들로 하여금 일보(一步)의 땅이나마 호남(湖南)을 엿보게 하였겠는가.” 라고 하였다.

지난 임진년에 / 在壬辰年
미친 왜구가 역심을 품고 / 狂寇不臣
이웃 조선을 침학하기 시작하였네 / 虐始於隣
열군이 산산이 궤멸되어 / 列郡瓦裂
수많은 적들을 맞아 싸움에 / 迎敵津津
마치 무인지경을 밟듯 했는데 / 若蹈無人
이때에 오직 이공만은 / 時維李公
그 용기를 더욱 떨치어 / 其氣益振
바닷가를 진무하였네 / 扼拊海漘
황제께선 그 무공을 이뤄 주려고 / 皇耆其武
수많은 군사를 내보내면서 / 出師甡甡
용맹한 신하 진린을 장수로 임명했네 / 命虎臣璘
그러자 번갯불은 기치를 흔들고 / 列缺掉幟
바다 귀신은 시각을 맡아 도우니 / 玄冥司辰
적들이 군박하여 허둥지둥하도다 / 賊窘而嚚
험난한 골짝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 師于阨巷
그 언덕에서 큰 싸움을 벌일 제 / 大戰其垠
화살들이 뱀에게로 집중되었네 / 矢集脩鱗
죽은 뱀이 꼬리를 흔들어서 / 斃蛇掉尾
공의 몸에 추한 독을 뿌리매 / 毒于公身
신의 보우를 받지 못하였도다 / 不佑于神
노량에는 대포 소리 요란하고 / 露梁殷殷
물은 오직 깊기만 한데 / 維水淵淪
여기에 이 비석 세우노니 / 樹此貞珉
영원토록 실추되지 않고 / 後天不墬
공의 비석 우뚝하게 서서 / 公石嶙峋
오직 제사를 길이길이 받으리 / 維永宗禋

이항복 백사집 제4권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

백사집 제4권

잡기(雜記)

원균(元均)의 경우는 다만 남을 의지해서 일을 성취시킨 자이니, 진실로 감히 이순신(李舜臣)과는 공을 겨룰 수가 없다. 따라서 이순신의 공은 당연히 수군(水軍)에 으뜸이다.

이항복 백사별집 제4권

9 난중잡록

전라 좌수사 이순신으로서 삼도 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였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한산도에 결진(結鎭)하여 거제에 있는 적과 대치하여 한 달이 넘지 않아서 수비(守備)가 이미 완전히 준비되었다. 때때로 거북선을 발동시켜 나오는 적을 잡으니, 적은 겁내고 움츠러져서 감히 나오지 못하여 경상 우도의 연로(沿路)와 호남의 일면이 안전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으면서 지은 20운(韻)의 시 가운데, “바다를 두고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을 두고 맹세하니 초목이 아네.” [誓海魚龍動盟山草木知] 등의 구절이 있다.

조경남 난중잡록 3

요시라(要時羅)가 우리 나라에 말을 전하기를, “청정이 한 척의 큰 배로 건너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작은 섬에 며칠 동안 정박하였는데, 내가 급히 통제사 이순신에게 통지하여도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지 않아서 일을 그르쳤소.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이순신이 헛되게 큰소리 쳐서 임금을 속였다고 허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문초하고, 전라 병사 원균(元均)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나주 목사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남도 백성들이 한산도를 보장(保障)으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사람들이 기댈 데가 없어서 짐을 꾸렸다.

조경남 난중잡록 3

적병이 수군을 습격하여 통제사 원균이 죽었다.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건장하여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ㆍ4마리를 먹었다. 평상시에도 배가 무거워 행보를 잘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싸움에 패하고는 앉은 채 죽음을 당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기롱하였는데, 곡성에 사는 생원 오천뢰(吳天賚)가 시를 짓기를

한산도는 나라의 남문인데 / 閑山一島國南門
무슨 일로 조정에서 장수를 자주 바꾸었나 / 底事朝廷易將頻
처음부터 원균이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 不是元均初負國
원균의 배가 원균을 저버렸네 / 元均之腹負元均
하였다.

조경남 난중잡록 3

노량(露梁)의 일이 들려오자 임금께서 슬퍼하시고, 이순신에게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을 추증하시고, 그 자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그 뒤 경자년에 시호를 충민(忠愍)이라 내리고, 비석을 전라의 좌수영(左水營)에다 세워 제사를 내렸다. 부하 군사들도 또한 돌을 세워 사모하며 이름하기를, ‘타루비(墮淚碑)’라 하고, 비음(碑陰)에, “영하(營下)의 수졸(水卒)이 통제사 이공을 위하여 짤막한 비석을 세웠다.” 하였다. ‘타루(墮淚)’라고 이름 한 것은, 양양(襄陽) 사람이 양호(羊祜)를 그리워하여 그 비석을 바라보는 자는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갑진년에 논공함에 미쳐 협력선무원공(協力宣武元功) 18명을 녹훈하는데 첫째를 차지하였다. 아들 이회(李薈)에게 임실 현감을 제수하니, 이회의 깨끗하고 간소함이 잘 닮았다.

조경남 난중잡록 3

10 재조번방지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가 순신의 죽음을 듣고 진영이 연달아 통곡하기를 자기 어버이같이 하였고, 관을 운반해 가는데 이르는 곳마다 인민이 곳곳에서 제를 지내고 수레를 당기면서 울며 말하기를,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오.”

하고, 길이 막혀 수레가 나아갈 수 없었고, 길 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의정부 우의정으로 증직(贈職)하였다. 형개가 말하길,

“바다 위에 사당을 세워 충혼을 표창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으나, 일이 마침내 행해지지 않았다. 이에 바닷가 사람들이 서로 솔선해서 사당을 세워 민충(愍忠)이라 부르고 철마다 제사를 지내며 그 밑을 지나는 장삿배도 모두 제사를 지냈다. 이초객(李楚客)이 수영(水營)을 읊은 시가 있다.

땅의 형세는 남극에 연하였고 / 地勢連南極
웅장하게 해 뜨는 동쪽 자리 잡았네 / 雄臨日出東
외로운 성은 좌수영이 앞인데 / 孤城前左水
한 섬은 고금도의 바람일세 / 一島古今風
지켜 막은 관방은 중요지인데 / 控禦關防重
단청한 해묘만이 비어 있구나 / 丹靑海廟空
슬프다. 이 통제여 / 哀哉李統制
천 년을 기이한 공 칭송하리라 / 千載誦奇功

또 민충사(愍忠祠) 시가 있으니, 이러하다.

중흥의 제일가는 장수께서 / 第一中興將
어려울 제 우리 동방 살려내었네 / 艱危活我東
산하엔 성낸 기운 남아 있는데 / 山河餘怒氣
우주엔 웅장한 바람 있도다 / 宇宙有雄風
대마도엔 봄 물결 조용해지고 / 對馬春濤息
부상엔 새벽 안개 자욱하구나 / 扶桑曙靄空
여태껏 넓디 넓은 바다 위에서 / 至今滄海上
뉘라서 큰 공훈 다시 이으리 / 誰復嗣戎功

또 칠언(七言) 율시를 지어 그의 전사한 상황을 슬퍼하였으니, 이러하다.

위명은 오랫 동안 견양(犬羊 일본을 말함)에게 떨쳤고 / 威名久懾犬羊群
위대한 공훈은 천하에 알려졌네 / 蓋世奇勳天下聞
요사스러운 기운은 밤에 조수 밖 달 아래 사라지고 / 蠻祲夜收潮外月
장수별은 새벽에 바다 속 구름에 떨어졌도다 / 將星晨落海中雲
바다 물결은 영웅의 한 풀어주지 못하고 / 波濤未洩英雄恨
역사에는 공연히 전공만 기록되네 / 竹帛空垂戰伐勳
오늘날 남아다운 이 몇이나 되겠는가 / 今日男兒知幾箇
가련하다, 충의로운 이장군이여! / 可憐忠義李將軍

26일. 진 도독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는데 육로를 거쳐 서울에 왔다. 그가 갈 때에 순신의 영위에 들어가 곡하고 그 아내와 아들을 조문하였다.

신경 재조번방지 5

11 기타 문집

통제사 이 충무공의 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

윤휴 백호전서 제23권

통제사(統制使) 증 좌의정 이공(李公)의 시장

이식 택당선생 별집 제10권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에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이 나라를 위해 활약하여 공로를 세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선생에게 있어 조그마한 일에 불과하다고 나는 여긴다. 오히려 그보다 더 큰 공로가 있다. 당시에 나라를 잃지 않은 것은 오직 이 충무공(李忠武公)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충무공은 일개 비장(裨將)에 불과하였으니, 유 선생의 추천이 아니었더라면 단지 일반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 이름 없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나라를 중흥하여 안정시킨 공은 과연 누구를 통해 이룰 수 있었겠는가. 근세에는 이러한 옛 법도를 실행한 예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현인을 추천하기는커녕 이러한 인물에 대해 시기와 질투나 하고 있으니, 슬픈 일이다.

이익 성호전집 제56권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諱言死〕

무술년(1598, 선조31) 11월 18일 적의 예봉이 이미 노량(露梁)에 이르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도독(都督) 진린(陳璘)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앞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것보다는 묘도(猫島)로 진을 퇴각했다가 다시 장수들과 약조하여 전의를 다져 결전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도독이 그 말을 따랐다. 이날 3경(更)에 공이 배 위에서 하늘에 축원하며 말하기를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이니 하늘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 하고는, 스스로 정예 군사를 이끌고 먼저 노량으로 나아갔다.

19일 4경에 적군이 도독을 포위하여 매우 다급해지자 공이 곧장 앞으로 나아가 구원하여 직접 화살을 무릅쓰고 손수 북을 울려 독려하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공은 휘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군중을 경동시키지 말라.” 하였다.

도독은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배에서 허둥지둥 세 번이나 넘어지고는 “함께 큰일을 할 자가 없어졌구나.” 하였다. 남녘의 백성들은 소식을 듣고 거리로 뛰어나와 곡하였다.

이익 성호전집 제8권

선조조 고사본말


이날 밤 삼경에 순신은 꿇어 앉아서 하늘에 빌기를, “오늘은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하늘은 반드시 왜적을 섬멸시켜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빌기를 마치고 직접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노량으로 갔다.


19일 사경에 적이 진린을 포위하여 형세가 몹시 급하므로 순신은 바로 앞에까지 가서 구원하였다. 순신이 화살과 돌을 개의치 않고 직접 손으로 북을 치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고 넘어졌다. 순신의 죽음을 듣자 진린은 배에서 엎어지고 넘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면서, “함께 일할 이가 없구나.” 하였으며, 남쪽 백성들은 순신의 죽음을 듣고 쫓아와 골목을 메우고 곡하였고, 시장에 간 자는 술자리를 파하였다. 상여가 돌아오자 남도의 선비들은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노인과 어린이들도 길을 막고 곡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명병도 고기를 물리고 먹지 않았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제17권

무술년 명 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이순신의 전공(戰功)을 명 나라 황제에게 주달(奏達)하여 알리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도독(都督)의 인(印)을 내렸다. 지금도 영에서 간직하고 있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제8권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이경준(李慶濬)에게 내린 교서

돌아보건대 우리나라는 태평세월이 오래되어 편안하게 지내는 습관에 물든 탓에 장수는 군대의 일에 대해서 모르고, 백성들은 전쟁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적에 왜적들이 상륙하자마자 각 군영의 성채는 모두 왜적들의 모습만 바라보고서도 와해되어 적들의 예봉을 꺾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 당시에 이순신만이 전선을 거느리고 나아가 바다 가운데에서 적들과 싸워 대승을 거두어 왜적들을 몰살시켰다. 이에 선왕께서는 그 업적을 훌륭하게 여기셔서 드디어 바다에 있는 삼도(三道)의 주사(舟師)들을 모두 그에게 소속시켰다. 그러고는 이어 형세가 편리한 곳에 주둔하게 하여 수전을 하는 데 필요한 병기를 더욱더 많이 수리하게 하였다. 통제사(統制使)라는 직제를 설치한 것은 실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뒤로는 왜적들이 감히 다시는 호남의 바닷가를 엿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정유년에 이르러서 잘못 바꾸어 앉혔는데, 그런 다음에는 한산도를 지켜내지 못하여 남원이 무너졌고, 남원이 무너지면서 왜적들이 경기 일대까지 쳐들어왔다. 이것으로 본다면 통제사가 훌륭하냐 휼륭하지 못하냐에 따라서 한 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다고 말하더라도 역시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니 이 자리를 맡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정경세 우복집 제3권

생각건대, 신라ㆍ고려 때에 왜구가 우리 서해(西海)를 여러 번 침범했고, 만력 임진년과 정유년 난리에는, 다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힘을 입어서, 왜적이 울두홍(熨斗谼)을[27] 넘지 못했다. 만약 그때에 왜적이 이곳을 넘었더라면 나주 열두 섬이 맨 먼저 뱀과 돼지 같은 놈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정약용 경세유표 제3권

우리나라의 장재로서 예전에는 김종서(金宗瑞)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李舜臣)을 칭하는데 종서는 문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

거칠고 호방(豪放)한 무부(武夫)는 끝마침을 잘못하는 자가 많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덕행을 보는 것은 문무에 구별이 없어야 할 것인데 무(武)라 해서 어찌 등한히 할 수 있는가?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며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은 “순신이 김귀영(金貴榮)의 사위됨을 사양했으니 그 절조(節操)가 탁월했다.”고 칭찬했으니 무신도 반드시 덕행을 보아야 이와 같은 사람이 나올 것이다.

정약용 경세유표 제15권

한산도(閑山島)가 무너지자 적이 호남을 범했는데, 순찰사 박홍노(朴弘老)는 갑자기 체직을 당하고, 새로이 황신(黃愼)이 명을 받고 당도하니 대군은 이미 흩어져 수습하기 어려웠습니다. 53고을에 한 곳도 군병을 둔취(屯聚)한 곳이 없었으니, 적도의 화를 입은 것이 호남이 특히 심했던 것은 실로 일도(一道)에 주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순신(李舜臣)이 파면된 뒤에는 백성의 심리에 안도감을 더욱 주지 못했습니다.

임진년에 포로된 사람으로 적을 따라 들어간 자는 모두 말하기를 ‘정유년 7월 15일에 왜장이 날랜 군사를 뽑아 가벼운 배를 타고 우리 군사의 동정을 정탐하려고 가 보니, 우리나라 수군은 곳곳이 코고는 소리뿐이었으며, 적도가 당장 두 방의 총을 쏘자 우리 군사는 다투어 뱃줄을 끊고 놀라 자빠져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적도는 잽싸게 병선을 몰아와 일시에 진공하여 한산도가 방비를 잃었다.’ 했습니다. 원균(元均)의 패전한 죄는 목을 베어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적이 이긴 기세를 몰아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이순신이 10여 척 병선으로 백만 정예를 쳐 쫓아, 적장이 혹은 패해 죽고 혹은 바다에 떨어져, 겨우 죽기는 면했으나 움츠리고 물러가 감히 꼼짝도 못했으니, 순신같이 나라에 충성하고 수전에 능숙함이 당세에 어찌 짝할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큰 공이 겨우 이뤄지자 시기와 미움이 따라 이르러 마침내 파직되고 말았으니, 추악한 적도들도 모두 원통하다 일렀거늘, 어찌 크게 통석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희득 해상록(海上錄) 제1권

한산도에 가려다가 비에 막혀 가지 못하다〔欲往閑山島 阻雨未能〕

한산도가 멀리 보이는 가운데 있는데 / 閑山島在莽蒼間
듣자니 가벼운 배로 한나절이면 갔다 온다지 / 聞說輕帆半日還
만선을 빌려 충무공 영정에 참배하려 하니 / 欲借蠻船拜公像
하찮은 선비가 부끄럽지 않을 수 있으랴 / 腐儒能不愧生顔
한산도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영정각(影幀閣)이 있다.

조긍섭 암서집 제6권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있는 이충무공기사비(李忠武公記事碑) 음기(陰記)

이 충무공(李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라도 좌수사(全羅道左水使)로 바다를 막고 왜적을 공격하였으며, 이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를 겸하였는데, 끝내 노량대첩(露梁大捷)의 공을 이루고 목숨을 바쳐 순국하였다.

적이 물러가 사태가 진정된 뒤에 조정에서는 전라 좌수영은 실로 충무공이 맨 먼저 일한 곳이니 군사와 백성들의 추모함이 더욱 깊다 하여 사우(祠宇)를 세우고 큰 비〔穹碑〕를 세우게 하였다. 이는 거룩한 충렬을 장려하고 백성들의 소망을 위로하는 것을 이곳 말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유공이 또한 전라 우수사로 있다가 승진하여 통제사에 임명되어 이 일을 경영하였는데, 비를 세우는 일이 끝나기 전에 체직되어 황해 병사(兵使)로 이임되자, 강음(江陰)에서 큰 돌을 얻어 강으로 내어다가 바다를 항해하여 운반해 왔다. 뒷사람들이 이 일을 계속하여 비가 완성되자, 또다시 작은 비갈(碑碣)을 그 곁에 세워 이 비를 세우게 된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아, 충무공의 몸이 죽어 공업을 이룸과 유공이 다행히 함께 죽지 않아 뒤의 일을 도운 것과 수사군(水使君)이 선조의 발자취를 이어서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일을 이어간 것이 모두 기록할 만하다. 이에 기록하는 바이다.

남구만 약천집 제19권

이수광(李睟光)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전선(戰船)은 제도가 매우 굉장하였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선 수십 척이 우리나라의 전선 한 척을 감당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창조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니, 대개 선박의 이로움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원균(元均)이 이순신을 대신해서는 100여 척의 전선으로도 여지없이 패배하였고, 이순신이 다시 원균을 대신해서는 13척의 전선으로 바다를 뒤덮은 600척의 배를 탄 적을 꺾었으니, 또한 장수에 적임자를 얻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이유원 임하필기 제19권

오호라! 우리나라가 의지한 것이 수군(주사)이었는데, 원균이 원래 통어할 만한 인재가 아니었음에도, 갑자기 이순신(李舜臣)을 파직하고 원균으로써 대신하게 했고, 원수 권율(權慄)은 원균을 곤장까지 쳤다. 원균이때문에 성이 나서 급히 군사를 몰아 나가면서 세력의 많고 적음도 고려하지 않고, 계속 바다에 배를 띄워 다 함께 침몰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는 실로 조정의 정책이 마땅함을 잃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서, 원수의 방략이 어긋나 날마다 함부로 전투를 벌여 일의 기틀을 크게 잃은 것이다. 원균 같은 자야 죽어도 아까울 것 없지만, 나랏일을 어찌하며 백성들은 또 어찌 할 것인가! 온 나라 사람이 한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듣고, 너무나 놀라 모두 이제 다 죽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정경운 고대일록 제2권

적장(賊將) 평행장(平行長)이 도망쳤다. 숭정대부(崇政大夫) 전라 좌수사 겸 통제사(全羅左水使兼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죽었다.

애석하도다! 이 통제(李統制)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아, 전례(前例)가 없는 공로를 세우고서 장순(張巡)과 같은 죽음에 이르렀으니, 바로 ‘그 몸은 죽었지만 그 정신은 죽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만고의 충성이 있고, 아들은 백행의 근원이 있다. 이씨(李氏) 가문에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 어질도다!

정경운 고대일록 제3권

통제사(統制使) 이 충무공(李忠武公)의 신도비명

김육 잠곡유고 제13권

유정은 행장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였고, 동일원은 또 사천에서 패하였으며, 경리는 청정을 공격하여 외책(外柵)을 빼앗았으나 포위한 상황이 오래되어 전세가 불리하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깨지고 패한 나머지 잔병들을 모아 진린(陳璘)과 함께 남해 앞바다에서 적을 만나 대파하니, 행장과 심안돈오가 모두 달아났고 연해에 주둔한 적들도 각자 후퇴하였다. 이순신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죽었지만, 적이 완전히 꺾여 서쪽으로 진격할 뜻이 없어진 것은 실로 이순신의 힘이었다.

허목 동서기언(東序記言)

벽파진에서

정유년 왜적 재침 때 일이 가장 위태했으니 / 丁酉年間事最危
벽파정 앞바다가 온통 왜적의 깃발이었지 / 碧波亭外盡倭旗
역사는 악의가 참소 입은 날을 가련해했고 / 史憐樂毅罹讒日[28]
하늘은 분양이 재기용되도록 돌봐 주었네 / 天眷汾陽起廢時[29]
만번 죽은들 어찌 전공을 바란 적 있었던가 / 萬死何曾戰功計
이 마음을 모름지기 무신들이 알아야 하리 / 此心要使武臣知
지금 여기가 왜놈 배들이 지나갔던 곳이라 / 至今夷舶經行地
손가락 깨물며 명량대첩비를 가리켜 보네 / 咋指鳴梁指古碑

황현 매천집 제2권

  1. 이같은 형개의 발언으로 인해 4일 뒤, 예조에선 "형 군문(邢軍門)이 이순신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여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냈고, 우리 나라에서도 제사를 지내게 하려고 하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합니다. 순신의 직품은 정 1품이었으니 자연 법전(法典)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겠지만, 형 군문이 이처럼 말하니 먼저 별도로 제사를 지내야 합니까, 아니면 준례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 합니까?"라고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2. 이때 세워진 사당이 여수의 충민사이다. 흔히들 아산 현충사가 충무공을 모신 최초의 사당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사실이다. 충민사는 1601년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이 현지시찰을 하고 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의 주관 아래 건립, 사액(賜額)된 충무공 관련 사액사당 제1호다. 엄밀히따지면 충무공관련 1호 사당은 왜란 1년 후인 1599년 수군들과 지방민들이 설립한 통영의 착량묘가 먼저라고 할 수 있다.
  3. 이 부분에서 원균이 조정의 고위관리들에게 이순신 장군을 험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 여느 중국 장수와 마찬가지로 제독 마귀 역시 이순신 장군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같은 날, 선조를 다시 만난 자리에선 이순신이 어느 지방 사람이냐고 물은 뒤, 그의 전사를 애석한 일이라고 말한다.
  5. 선조 입장에선 만나는 명나라 장수들마다 이순신 장군을 칭찬하니 상당히 배알이 꼴렸을 것이다.
  6. 흠이 되는 일
  7. 이때 내려진 증시가 바로 "충무"이다.
  8. 이봉상은 이후 아산 현충사에 조상님인 충무공과 함께 배향되기도 한다.
  9. 한마디로 충무공은 전란중에도 알아서 배를 만들었는데 아무리 피폐되었지만 전란 중만 하겠느냐? 그러니 알아서 배를 만들어라는 뜻이 된다.
  10. 이 내용이 논란을 가진 유명수군도독이 등장하는 내역이다.
  11. 정조가 지은 어제신도비는 현재 이충무공 묘소 앞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왕이 신하를 위해 친히 비명을 지어 내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12. 내탕금은 임금의 사사로운 돈으로써, 정조는 자신의 비자금까지 사용하여 충무공 전집을 편찬해 냈다.과연 조선시대 이충무공 팬클럽 회장 답다.
  13. 주사는 수군을 뜻한다.
  14. 순천부(順天府) 수군절도영(水軍節度營) 동쪽에 있다. 처음에 본영(本營)의 교리(校吏) 박대복(朴大福)이 조그마한 사옥(祠屋)을 지었다가 1601년(선조34)에 이항복(李恒福)이 통제사 이시언(李時言) 등과 함께 사당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받았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보성 군수(寶城郡守) 안홍국(安弘國)이 배향(配享)되어 있다.
  15. 해남현 용정리(龍井里)에 있으며, 1652년(효종2) 호남 유지들이 세웠다. 통제사 유형(柳珩), 영유 현감(永柔縣監) 이유길(李有吉)ㆍ이계년(李桂年) 등이 배향되어 있다.
  16. 통제영(統制營) 세병관(洗兵館)의 서쪽에 있다. 1606년(선조39)에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왕명으로 세운 것으로, 1663년(현종4)에 해남의 충렬사와 함께 같은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만을 배향하며, 매년 후대 통제사들이 제사를 지냈다. 명조팔사품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7. 남해현(南海縣) 노량(露梁)에 있다. 1658년(효종9)에 통제사 정익(鄭榏)이 세운 것으로, 1663년에 사액을 받았다.
  18. 아산현(牙山縣) 동쪽에 충무공의 무덤이 있는 곳에 있다. 1704년(숙종30)에 충청도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사당을 세웠고, 1707년에 사액을 받았다. 이순신의 조카인 강민공(剛愍公) 이완(李浣)과 5대손인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이 배향되어 있다.
  19. 강진현(康津縣)의 남쪽 고금도(古今島)에 있다. 이순신이 명(明)나라 수군 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과 함께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는데, 1666년에 유비연(柳斐然)이 중수(重修)하고 두 사람을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배향하였다. 이후 관왕묘의 뜰에 있어 사액을 받지 못하다가 정조가 1781년(정조5)에 어필(御筆)로 탄보묘(誕報廟)라는 액자를 내려 주었다.
  20. 거제부(巨濟府)에 있으며, 통제사 이운룡이 세운 이순신의 사당이다.
  21. 함평읍(咸平邑) 동쪽에 있다. 1712년(숙종38)에 고을 사람들이 이덕일(李德一)의 사당을 세웠는데‚ 1731년(영조7)에 충무공과 이덕일의 옛 사적이 당포(唐浦)에 있으므로 당포에서 멀지 않은 월산(月山) 아래로 옮기고 충무공을 주향(主享)으로 삼았다. 배향된 인물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 이덕일이다.
  22. 정읍현(井邑縣) 남쪽 진산리(辰山里)에 있는데, 1681년에 이순신이 정읍 현감을 지냈다고 하여 고을 사람들이 만든 사당이다.
  23. 정퇴서원(靜退書院)이 온양군(溫陽郡) 남쪽 설아산(雪峩山)에 있는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제사 지냈다. 이곳 왼쪽 편에 충효당이 있어 충무공 이순신을 충(忠)으로‚ 창암(牕岩) 강봉수(姜鳳壽)와 양심당(養心堂) 윤현(尹俔)을 효(孝)로 모셔 제사 지냈다. 후에 충효당이 무너져 정퇴서원에 합사(合祀)하였다.
  24. 거제부의 착량에 있다. 왜적(倭賊)이 물러간 뒤 해상의 군인과 백성들이 충무공의 충절에 감동하여 초가집을 짓고 공을 제사 지냈다.
  25. 전란 기간 내내 이순신 장군과 서애 류성룡은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지만, 현재 남아있는 편지는 극소수이다.
  26. 상제(喪制)를 뜻함. 이 당시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상과 함께, 아들상까지 당한 상태였다.
  27. 울둘목의 한자 표기
  28. 악의(樂毅)는 전국 시대 연 소왕(燕昭王)의 장수였는데, 그가 일찍이 연(燕), 조(趙), 초(楚), 한(韓), 위(魏) 다섯 나라의 연합군을 거느리고 강대한 제(齊)나라를 쳐서 70여 성을 빼앗고 그 공으로 창국군(昌國君)에 봉해졌으나, 소왕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해서는 혜왕이 제나라 전단(田單)의 이간질한 말을 믿고 악의를 의심하자, 악의는 마침내 연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史記 卷80 樂毅列傳》 여기서는 이순신 또한 임진왜란 때 여러 차례의 수전(水戰)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올랐으나,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통해서 전해 온 왜적의 흉계에 빠진 우리 조정의 잘못 내린 명령을 즉시 따르지 않은 데 대하여, 평소 이순신을 시기해 오던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이순신을 극력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마침내 원균의 말만을 믿고 즉시 이순신을 파직하여 서울로 압송해다가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모진 고통을 겪게 되었던 것을 악의의 일에 빗대서 한 말이다.
  29. 분양(汾陽)은 당대(唐代)의 명장(名將)으로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진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키는데, 그는 숙종(肅宗) 연간에 안사(安史)의 난(亂)을 평정한 것을 비롯하여 그 후 토번(吐蕃), 회흘(回紇) 등의 군대를 격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우고, 덕종(德宗) 때에 상부(尙父)의 호를 하사받고 벼슬이 태위 중서령(太尉中書令)에 이르렀던바, 그가 한때 행신(幸臣) 어조은(魚朝恩)의 참소를 입어 파직되었다가, 뒤에 다시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으로 기용되어 연달아 큰 공을 세웠던 데서 온 말이다. 《新唐書 卷137 郭子儀列傳》 전하여 여기서는 곧 충무공 이순신 또한 참소를 입어 파직당하고 모진 고통을 겪다가 겨우 죽음을 면한 채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시작하여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된 후 끝내 왜적을 연달아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던 것을 곽자의의 일에 빗대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