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패잔병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각지에 남은 일본군 패잔병을 말한다.

1 배경

당시 아시아에서 제일 잘 나가던 일본 제국일본군중국동남아, 태평양 등에 보내 침략전쟁을 벌였다. 중국미국,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에다가 현지 저항군과도 동시에 싸우는 짓거리였는데 뭐 결과는 다 알다시피 패전개망했다. 1945년 8월엔 소련까지 일본을 공격하면서 일본군은 완전히 패배한다.

2 태평양 전쟁 패잔병

태평양 전선은 다른 전선보다 사정이 나았다. 그나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가장 민주적인 제도에 따르고 인권 문제에 민감했던 곳이 미군이었다. 포로들은 수용소에 있다가 전범의 경우엔 사법 처리 됐고 단순 포로는 해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일본군 내부가 심각했던 것. 내부적으로 조선이나 대만 출신의 군인이나 군속을 차별했고 이 중 상당수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와는 별개로 종전선언을 못 들었거나 들어도 무시한 채 날뛰던 애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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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이 쇼이치(横井庄一).1915년생으로 아이치 현 출신. 패전 당시 계급은 오장이었다. 요코이는 의 정글 속에서 스스로 만든 지하 방공호에서 28년간 생활하던 중1972년 1월 24일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강가로 갔다가 현지의 새우잡이 어부에게 발견되었고 매스컴에 알려져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죽은 줄 알았으나, 오랜 시간 동안 최초로 귀환한 일본군이었다. 그는 "부끄럽지만 돌아왔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귀국할 때까지 벌벌 떨었다고 한다. 자신은 미군에게 잡혔다고 생각하고 조사가 끝나면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것에 공포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일제의 전체주의, 군국주의가 일반인들을 얼마나 세뇌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일본에 돌아왔지만 적응하는 것에 대해 힘들어 했으나, 다행히도 고향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아래에 서술된 오노다 히로에 비해 철저한 생존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옷은 나무껍질로 원시인들이 입었던 누더기 수준으로 기워 만들어 입었고, 게, 생선, 나무열매, 새, 야생동물을 잡아 먹고 수렵을 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을 파서 살았다고 한다. 현지인들과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한 이유는 '포로가 되느니 자살해라' 라는 일본군의 막장 명령(...) 때문에 처벌 받아 죽기 싫어서 그냥 정글 속에서 숨어버린 것이기 때문. 한마디로 그는 전형적인 소시민에 불과했다. 요코이는 자신의 괌 생활을 바탕으로 궁핍했던 생활의 평론가로 전국을 돌며 강연했고 오노다 히로의 등장 때문인지 관심이 적어져 강의 대신 토기를 구워 생활하다가 1997년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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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 1922년생으로 와카야마 현 출신. 패전 당시 계급은 소위였다. 오노다는 1974년까지 필리핀의 루반 섬에서 숨어 살았다. 29년 동안 필리핀 정글에 숨어 살았는데 지역 순찰대와 게릴라전을 벌였고 약 30명의 필리핀인을 살해하고 100명에게 부상을 입힌 혐의가 있다. 진정 미친놈이라 할 만하다. 29년 동안 농사나 짓고 평화롭게 산것도 아니고, 군인이라는 작자가 민간인을 상대로 살해, 강도, 강간 등 갖은 추악한 짓거리를 저지르고 다녔다. 절도는 덤. 필리핀에서 오노다 히로의 이름은 현지 필리핀인들에게 관광수익의 대상이지만 한편으로는 증오의 대상이라고 한다. 1974년 귀환 당시에 필리핀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일본 군국주의를 빨리 몰아내고 싶었는지 그냥 사면해줬다. 사실 그것보단 당시 필리핀이 일본에게 차관을 많이 받은 터라. 근데 이 인간 종전한 거 당연히 알았다. 수색하던 사람들이 일본 현지의 신문 같은 걸 남겨뒀기 때문. 귀환 당시에 일본 정부는 100만엔의 위로금을 지급하려고 했지만 오노다는 거절했다. 정작 일본에 와선 적응을 못 했고 아버지랑 사이가 좋지 않아 반 년만에 브라질로 이민 갔다. 브라질에선 목장을 했다고. 오노다는 요코이를 무시했는데, 그 이유는 요코이의 총이 녹슬어 있었다는 이유였다(...) 천황에게 받은 무기를 녹슬게 한 작자와 마주치기 싫다는 것. 오노다의 총검은 녹이 슬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한 부분에서 정신승리하는 일본군의 똥군기 그러다가 일본으로 귀환했다. 생존주의 학교니 뭐 그런 거 하고 일본군 위안부 매춘론을 주장하거나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고 그 대가로 일본 정부와 극우단체에서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거금으로 호화롭게 살다가 2014년 1월 16일 91세의 나이로 죽었다. 더럽게 오래 살았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된대로 요코이의 일자리를 본의 아니지만 빼앗기까지 했다. 필리핀인들에게 만행을 부리고 동료의 밥그릇을 뺏고 온갖 망언만 일삼다가 죽은, 참 여러가지로 민폐만 끼친 한심한 인간.

요코이와 오노다의 상반된 부분을 살펴보면, 요코이는 일본 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다가 입대한 평범한 징집병 출신이었던 데에 반해, 오노다는 육군 소위 출신으로 일본군의 막장행각에 대해서도 옳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철저한 군국주의자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떻게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철저하게 달라지는 부분이다.

패잔병들 중 어떤 부류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해당 국가에 남아서 독립전쟁에 가담하여 싸운 일도 있는데, 그 사례 중 하나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때는 구 일본군 출신자들이 인도네시아 독립군의 일원으로 네덜란드군과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군에 징집되어 인도네시아로 파견되었던 조선인도 있었는데 바로 양칠성(1919~1949)이라는 사람.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때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라는 일본 이름으로 일본군에 징집, 패망 때까지 자와 섬 포로 수용소 감시원으로 있었다. 돌아가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아, Komarudin이라는 이름으로 독립군에 가담해 싸우다 잡혀 1949년에 다른 일본인 2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인도네시아군 고위 장성이 된 옛 동료들의 노력으로 1975년 세상에 알려졌으며,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를 외국인 독립 영웅으로 공인하였다. 양칠성은 현재 자카르타의 칼리비타 국립 묘지에 안장돼 있으며, 현재 그의 묘비에는 KOMARUDIN YANG CHIL SUNG, KOREA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무려 인도네시아 교과서에까지 이름이 실렸다.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있는데 한동안 인도네시아에서는 그의 창씨개명만 보고 일본인이라고 생각해왔고,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독립영웅으로 추서된 뒤에 일본의 유족에게 유골을 전달하는데 야나가와 시치세이라는 일본인(... )만 일본의 유족을 찾을 수 없었다(당연히). 그때 마침 일본에서 인도네시아에 와있던 무라이 요시노리, 우쓰미 아이코 교수 부부에게 야나가와 시치세이는 사실 조선인이라고 알려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 자카르타에 남북한의 대사관이 다 있었지만 왜 유족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느냐고 따졌더니 "일일이 그런 거 하기 귀찮다" 는 답만 돌아왔다고. 이에 빡친 교수 부부가 나서서 야나가와 시치세이, 즉 조선인 양칠성의 존재를 유족에게 알려주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에 돌아온 뒤 교수 부부가 기고한 글을 읽은 양칠성의 조카를 찾아냈고, 동진회 모임에서 함께 지냈다는 동료들로부터 그의 고향이 전라북도 완주군이라는 것도 알아냈으며 1978년에 방한해 그곳을 찾아갔는데 그때 이미 양칠성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이 남아있어 양칠성이 인도네시아 영웅묘지에 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더니, 여동생도 "알려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왜 좀더 일찍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오빠에 대해 자신은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고 죽은 줄도 몰랐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실 전범 항목에서 일본 제국의 경우에 설명된 것처럼 양칠성과 같은 조선인 출신 일본군 군속들(B,C급 전범)에 경우는 일본과 남북한 모두에게 존재 자체가 잊혀지다시피 한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국가기관의 조사와 함께 현대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씩 연구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일본에서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에 대해 활발히 연구되었다. 이 분야의 전문가로 손꼽히는 사람이 일본의 우쓰미 아이코 교수다. 관련 저서로 "적도에 묻히다",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등이 있다. "적도에 묻히다"는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진 김종익씨가 번역해서, 언론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1980년대에 양칠성을 소재로 가톨릭 어린이 잡지에 <영웅묘지의 꼬마루딘>이라는 소설이 연재되었고 1989년에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현재는 절판.

3 관동군 패잔병

관동군의 경우엔 일본이 패망하면서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고 지시를 받는다. 인간의 조건히키아게샤와 돌아오던 일본군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대다수는 도망 못 가고 소련군한테 잡힌다. 약 57만명[1]이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가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 이 기간 중 6만명 가량이 사망했다.

1956년에 일본과 소련이 국교를 회복하면서 일본으로 귀환하나 일본 공안 당국은 이들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1990년대까지 시찰 대상으로 봤다. 부사관 중엔 공산주의에 감화된 인간들이 꽤 많았다고. 정작 소련의 포로 관리자들은 장교를 우대했다. 일본군/포로를 참고할 것.

현재 이들이 일본 정부에 소송을 하고 있는데 법원에서 족족 기각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인 출신 포로들도 시베리아 억류 생활을 겪었는데, 이들도 일본 정부에 소송을 걸었으나, 마찬가지로 기각당했다. 관련 저서로 김효순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가 있다.

총리 우노 소스케가 1945년부터 47년까지 시베리아에서 포로로 생활했다.

시베리아덴노(シベリア天皇)란 용어가 있는데 포로 생활할 때 소련인들에게 잘 부비대고 일본인 포로들 사이에서 왕노릇하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카포와 유사한 말인 듯. 유명한 인물로 세지마 류조가 있다.

4 일본으로 돌아와서

GHQ일본군 장교 출신의 자위대 입대를 금지했지만 실제 조직 운영에서 문제가 나타나자 허용했다. 자위관 항목에서 각 주요 자위관 군종지휘관을 보면 일본군 좌관(영관)급과 위관급에서 일부가 자위대로 흡수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독일연방군의 경우와 비슷하다. 다만 자위대의 인원은 일본군에 비해 제한적이었으므로 상당수의 일본군 출신은 그냥 민간인이 되었다.
  1. 일본에선 65만명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