瀬島龍三
1 개요
일본의 군인, 기업인, 관료, 정재계 막후 실세. 그리고 전범이다. 소설/드라마 <불모지대>의 모델이기도 했다.
2 일생
2.1 군인 시절
젊은 나이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44기 차석으로 졸업하고 대본영(일제시대 일본군 참모본부)에 들어간다. 2차대전 기간에는 대미 전쟁의 작전문서를 작성하면서 보내다가 만주로 전출되었다. 나중에 세지마가 자화자찬으로 참모본부 시절과 만주 전출을 떠벌렸지만, 실상은 직속상관인 작전과장 핫토리 다쿠시로가 세지마의 대미작전지도가 시원찮다는 점을 깨닫고는 자신이 과장임기 종료후 관례대로 연대장으로 부임할 때 세지마를 만주로 쫓아버린 것이라고 한다.
일본이 패전한 뒤에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어 전범으로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고생을 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으나, 정작 그렇게 고생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사실은 포로수용소의 사무를 돌보는 직위에 있었다고. 세지마는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서 소련 검사 측의 증인으로 나왔는데, 후에 밝혀진 바로는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대가로 이렇게 편히 지냈다고 한다. 일종의 사법거래. 한마디로 배신자다. 이런데도 정작 소설 및 드라마에서는 낫과 삽을 들고 등골빠지게 뺑이 친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므로 주의할 것. 드라마든 소설이든 <불모지대>는 결국 '픽션'이다. 심지어 드라마에서는 본 작품은 실제 사건이나 인물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던걸 명심하자.
이다가키 세이시로의 아들도 장교로서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공산주의 선전활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는데, 귀국선에서 세지마에게 "네놈이 한 짓은 본토에서 반드시 심판당한다"고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근데 자신은 재판에서 동료를 팔아먹었니?
2.2 기업가 시절
귀국해서 이토츄 상사에 거의 말단사원으로 들어가 회사를 굴지의 거대기업으로 성장시킨다. 나중엔 그 회사의 총수에 올라선다. 그런데 정작 실무를 장악한 사장직은 취임을 못했고 부회장과 회장직으로 취임했다. (일본기업의 구조상 회장직은 그렇게 권력이 센 것도 아니다.) 사장불취임에 대해서 본인은 도중 입사라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이토츄 상사에 재임 후 가장 인맥을 잘 써먹은 사례가 F-104 스타파이터의 공자대 계약이 될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F-104와 F-106을 놓고 방공 전투기로 쓸 전투기를 조달할려고 하고 있었는데 당시에 안정성을 추구하는 쪽은 F-106을. 보다 빠른 스크램블 속도와 가격을 추구한 쪽은 F-104를 각각 밀고 있었다. 이에 록히드 측의 일본 대리인을 담당하고 있던 이토츄 상사에서는 세지마 류조의 군 재직당시의 인맥을 활용 전방위 로비를 펼쳐 F-104 스타파이터의 납품을 성사해낸다. 그리고 이때 스타파이터를 팍팍 지지해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겐다 미노루 되시겠다.
뛰어난 국제정세 분석능력과 예지력으로 무역회사인 이토츄 상사에게 큰 이익을 만들어주었다. 오일쇼크도 예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토추 상사를 성장시키는 이야기를 야마사키 도요코가 불모지대로 소설화시켰다. 대놓고 이름은 안나오지만 세지마 류조가 모델 맞다. 작중 이름은 이키 타다시.
2.3 성향
극우의 대부였다. 그것도 자기가 직접 나섰던 건 아니고, 극우 단체나 출판사를 지원하는 형식이었다.
아세아 대학의 이사장도 되었으며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개혁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2.3.1 대한민국과의 관련성
의외로 지한파[1]였다.
괴뢰국가 만주국의 만주군 장교를 했던 박정희가 매우 존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가 졸업한 2년제 만주국육군군관학교는 4년제인 일본육군사관학교 시험에서 떨어진 일본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졸업 후 일본육사 편입이 가능하였고, 일부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들도 만주군관학교 줄업후 일본 육사 편입이 가능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은 열등의식과 함께 일본 육사 출신들을 경외하는 모습이 보여지는데, 대표적으로 박정희가 국군내에서도 일본 육사 출신에 대해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 그래서 세지마도 박정희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한국에 자주 와서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만났다고 한다.
이는 전두환, 노태우에까지 이어졌다. 특히 이들 신군부가 집권했을 때, 아직 전두환이 대통령을 취임하기도 전에 한국을 방문해서 전두환에게 한국의 국가발전과 체제안정을 위해선 올림픽[3]이나 엑스포 같은 국가적 거대행사를 유치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보라고 조언한다. 3S?! 이것은 MBC의 제5공화국(드라마)에서도 잠깐 나온다. [4]
이후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상회담이 성사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 공헌으로 나카소네는 현직 일본총리 기준으로는 최초로 한국에 방문하였고, 방한한 그 자리에서 노신영 외무부장관과의 밀담을 통해 40억 달러의 경제협력을 약속하는 것으로 집권 초기 전두환 정권에게 활력을 열어줬다.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는 노신영과 류조의 밀땅을 다루면서 노신영의 뻔뻔한 정도의 협상 요구에 세지마가 놀라 "겉은 잘 길들여진 말인데 속은 사자. 한번 붙잡은 먹이는 놓치지 않겠다"라면서 전두환에게 극찬하는 장면도 나온다.
1990년 3당 합당[5]에서도 일본 자유민주당의 경우를 들어 막후 조언을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우파들은 대한민국이 번영해야 북한과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의 안위를 지킬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세지마 역시 한국에 강력한 반공 정권이 세워지길 바라는 뜻에서 이런 조언을 해준 것. 근데 북한은 남았지만 소련이 망했어요... 그렇기에 지한파라는 것이 꼭 한국에 우호적이라는 것이 아니라는게 구로다 가쓰히로, 코다마 요시오, 기시 노부스케의 경우를 통해 바로 드러난다. 애초에 세지마 류조 본인부터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후원자였다.
세지마 개인도 한국 거물들과 인연이 많은 지한파였다. 군부 출신 대통령 외에도 포항제철(포스코)의 박태준 회장과도 절친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과 친해서 이병철이 사망한 이후에는 조문단으로 방한하기도 했다. 애초에 전두환과 세지마 류조가 만난 것이 삼성의 사외이사였던 권익현이 이병철을 통해서 주선한 것이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세지마 류조는 한국 전경련의 특별고문으로 위촉된 적도 있다.
자기의 한국내 인맥을 이용해서 경쟁사들을 물먹였다는 이야기도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이 포항종합제철 1기 건설에서 미츠비시 상사에게 발주가 예정되어 있던 장비를 박정희와의 안면을 이용해서 이토츄 상사로 바꿔버린 것.
3 이야기거리
만 95세의 나이로 노환으로 사망.
하나회 군인들이 그의 일대기를 다룬 불모지대를 탐독했다고 한다. 한국 재벌중에서도 불모지대를 읽고 일빠였던 사람들이 많다. 강덕수 STX 전 회장이 이 소설을 탐독했다고 하는데, 그런 구라를 읽고 감명받더니 결국 그룹은 공중분해..
참치로 유명한 동원에서도 교육때마다 심심하면 불모지대 드라마틀어주고 하앜거린다. 새역모를 후원하는 사람을 빨다니 프로매국노 일빠기업
물론 모델로 한 것은 틀림없지만 세지마 류조와 이키 타다시는 엄연히 별개의 인물이다. 실존인물을 모델로 했다고는 해도 픽션을 픽션일 뿐. 전체적인 큰 줄기만 비슷할 뿐이며 세세한 행보는 차이가 상당히 많다. 이토츄상사의 회장직까지 역임하고 편한 노후를 보낸 세지마와는 달리 이키는 석유발굴을 성공시킨 후에 긴키상사를 퇴직하고 시베리아 억류자 친목회의 회장이 되어 일본군 패잔병의 유골을 찾는 데에 여생을 보낸다.
한국의 일반인들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드라마 제5공화국, 그리고 그에 앞서 2005년 4월 16일, KBS 미디어 포커스에서 '세지마 류조로 본 한일 극우 커넥션과 언론'이라는 제목으로 다루면서 그 실체가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막상 파고 보니 끝도 없었다고 한다(...)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중앙일보이다. 이유는 역시 본문에서도 언급된 삼성 이병철과의 커넥션 때문.
개인적으로 좀 허풍이 심한 면이 많았다. 자서전에서 자신과 쇼와 덴노와의 막역한 관계를 자랑했다는데, 정작 쇼와 덴노는 세지마를 만난 일도 없었다. 사실 더 말할 것도 없는 거짓말이다. 당시 일본에서 덴노는 살아있는 신이었고 세지마는 차고 넘치는 일개 육군 장교에 불과했으니까. 장성도 아니고 (애초에 쇼와는 일본 군부를 싫어했다.) 역적 패드립 고인드립
- ↑ 여기서 말하는 '지한파'는 한국의 군사독재정권 세력과 밀접한 연관을 한 '지한파'를 의미한다. 7~80년대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일본 극우정객들(세지마 류조를 비롯해 A급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훗날 수상까지 오른 기시 노부스케, 야쿠자 코다마 요시오 등),전범출신들을 '친한파'내지 '지한파'로 표기했었기 때문. 한국현대사 학자인 서중석 명예교수는 '일본 극우세력과 한국의 군부독재 세력, 친일반역 세력들은 서로가 매우 밀접하게 친했다'고 한다.
- ↑ 대만(중화민국)의 총통 장개석과도 같은 일본 육사 선후배 관계였으므로 당시엔 대만과 한국 관계가 좋았다고.
- ↑ 이게 그야말로 충공깽인게, 이 문제의 올림픽이 1988 서울 올림픽이고, 그 경쟁상대는 다른 곳도 아니고 일본 나고야였다.
근데 당시 나고야가 일본 사회당의 텃밭이라는 점과 세지마의 정치적 성향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다 - ↑ 일본도 1960년대 체체변혁을 내세운 진보좌파 성향의 학생운동, 노동운동이 대단히 격렬하였다. 그러나 1964 도쿄 올림픽,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대성공과 자유민주당(일본) 정권의 대대적인 복지확대, 대규모 토목공사 시행으로 인한 부동산 가치 상승 등으로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면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모두 급격하게 사그라들었다. (물론 좌파진영이 적군파 등 지나치게 과격해지면서 자멸한 부분도 대단히 크다.) 세지마 류조가 신군부에 올림픽 유치를 제안한 것은 단순한 3S 정책뿐 아니라 이러한 일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도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과 3저호황에 따른 경상수지 흑자, 부동산과 주식붐 등으로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급진적인 학생운동, 노동운동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 ↑ 민주정의당(노태우) + 통일민주당(김영삼) + 신민주공화당(김종필)
- ↑ 육군대학교 수석졸업을 가지고 꼭 능력이 대단하다고 볼수 없는 것은 츠지 마사노부를 보면 알 수 있다. 츠지 마사노부도 육군대학교를 최상위권으로 졸업했다.
와이드본, 앤드류 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