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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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완틴수유
Tawantinsuyu
[1]
국기
250px
1438년 ~ 1533년
위치서 남아메리카 대륙 일부
수도쿠스코#s-1
정치체제군주제
국가원수사파 잉카[2]
언어케추아어
민족잉카족
종교잉카 토종 종교
주요사건1438년 건국
1529년 ~ 1532년 남북전쟁
1533년 피사로의 침략->멸망[3]
(1572년 왕실 폐지)
성립 이전쿠스코 왕국
멸망 이후에스파냐 제국의 식민지

1 이름과 이름에 대한 오해

보통 잉카 제국이라 하나 진짜 이름은 타완틴수유로 이는 4방위의 나라란 뜻이다. 잉카는 쿤티수유, 친차수유, 안티수유, 코야수유 네 개의 수유(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잉카는 이 나라를 다스린 귀족들을 일컫던 이름이지 황제를 '잉카'라 했던 것이 아니다. 황제는 사파 잉카라고 따로 이야기했으며 모든 잉카는 자신들이 태양신 인티의 자손이라 여겼다. 수도는 쿠스코로 이곳을 세상의 배꼽이라 생각했다.[4] 또한 케추아족이 잉카를 세웠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잉카족이 뒷날 케추아족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일 뿐이며 사실 케추아족 같은 것도 엄밀히 말해선 존재한 적 없다. 케추아는 지역 특성을 일컫는 이름과 부족명을 헷갈려 했던 에스파냐 사람들이 오해해서 붙인 이름을 '케추아족' 본인들이 받아들여버린 것이다.

2 역사와 사회

타완틴수유는 잉카족이 쿠스코에 자리를 잡은 뒤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통해 커갔다. 새로 임금이 된 잉카는 거의 언제나 전쟁을 해야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제위 계승에서 밀린 혈족에서 분가해서 법적으론 '고아'가 되어버리고, 또한 그렇게 자신을 떠나보낸 황족에게 이전 사파 잉카의 개인 재산(국가 재산 말고)을 다 물려줘야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알거지'가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어떻게든 정복을 해서 자기 땅을 얻어야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잉카가 사실은 둘이었고 잉카 가운데 하나는 쿠스코에 머물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 있는 이원제였다는 설을 요즘 정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커가고 있다. 잉카 가운데 하나는 하난(Hanan)이라 했고 다른 하나는 우린(Urin)이라 하였는데, 하난은 정복 활동에 종사하고, 우린은 수도에 머무르며 농경 활동에 관련 제사를 맡았다고 한다. 하난과 우린 계승 의식은 틴쿠이(Tinkuy)라 했는데 겉보기엔 전쟁과도 같았고, 승자는 하난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형제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자가 아니라 틴쿠이 의식을 통해 결정된 하난 잉카였다. 페루 역사학자 프랭클린 피즈의 간략한 페루 현대사에서는 이런 잉카 이원왕정을 오해 반, 고의 반으로 완전히 왜곡해 버린 게 에스파냐측의 식민사학이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역사 연구가 상당수가 그렇듯 아직 다른 의견도 있고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믿거나 말거나.

잉카는 시민들을 미타(mit'a)라는 노동력 단위의 세금으로 관리했다. 잉카의 시민들은 1년에 108일동안 국가에 자신의 노동력을 바쳐야 했다. 도로를 닦고, 요새를 건설하고, 신전을 건설하는 등 노동을 해야했다. 또한, 노동을 하는 날짜를 가족들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었는데, 가족이 4명일 경우 1인당 36일을 일하고, 가족이 12명이면 1인당 9일을 일하고, 가족이 54명이면 1인당 이틀을 일한다(15~60세의 남자에게만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잉카의 가족은 대부분 대가족이었다.

당시 잉카의 인구는 총 천만 명에 육박하였는데, 잉카 정부는 이를 원시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관리했다. 10개의 푸릭(가구)을 충카라고 불렀으며, 충카의 관리자를 '충카 카마욕'이라 하였다. 그리고 충카 카마욕, 파차카 카마욕, 우이랑가 카마욕, 우노 카마욕이 각각 10개의 하위 카마욕들을 관리하였다. 이것이 잘 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보는 자'라는뜻의 '토코이리콕'이며, 우노 카마욕과 토코이리콕의 상관이 전국 88개 지방수도를 담당하는 '톡리코 아푸', 톡리코 아푸의 위에는 '아푸'라고 하는 4개의 수유(쿤티수유, 친차수유, 안티수유, 코야수유)를 관리하는, 사파 잉카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최고 귀족들이 존재했다.

잉카는 보통 포위 전술로 지역 사람들을 쫄쫄 굶긴 다음에 살살 달래서 알아서 무릎꿇게 하는 식으로 정복했다. 그리고 그곳 풍습을 인정하고 그곳의 우두머리를 쿠라카(curaca)란 관리로 인정하여 고향을 다스리게 했다.가장 작은 행정 단위로는 아이유라는 집성촌 비슷한 것을 만들고 한 사람이 열명씩을 책임지고 이런 책임자 몇몇을 또 다른 한 사람이 책임지고 하는 식으로 사회를 구성했다.

아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 집성촌 같은 것으로 잉카가 정해준 땅을 마을에서 함께 관리했다. 마을 땅, 종교행사에 쓸 물건을 얻으려고 쓰는 땅, 잉카의 땅으로 나뉘었는데 뒤에 나오는 두 땅을 일구는 게 세금이었다. 물건이나 돈(그런게 있지도 않았지만)으로 내는 세금은 없었다는 게 정설. 전쟁에 징병되는 것도 세금의 하나. 잉카는 백성들이 놀고 먹는 것을 싫어하여 엄청 가난한 사람들은 해마다 벼룩(이?)을 잡아서 바치게 했다. 일을 할 수 없을만큼 늙었거나(50세 이상이 기준) 병든 사람, 과부들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마을에서 무조건 도와주도록 되어있었다. 어쩌다 가뭄이라도 나면 마을 창고를 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잉카의 창고를 열어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또한 제국차원에서 의료제도도 상당한 수준으로 정비되어서 평민들도 병이 들면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의료혜택을 받을수 있었다. 이처럼 신분제 국가이기는 해도 평민들을 위한 사회복지제도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토지도 적절하게 배분되어 빈부격차도 적은데다가 거지는 없었고 잉카인들은 심각한 격차없이 비슷한 생활수준을 누렸다. 유럽에서 현대적인 형태의 사회복지제도가 도입된것이 19세기 중반에서부터 20세기 중반 시기라는걸 감안하면 수백년은 족히 앞선것이라고 볼수있었으며[5], 빈부격차가 심각한 현대의 중남미 국가와도 비교되는 모습이기에 잉카제국을 신권적 사회주의 국가니 사회주의 제국이라고 칭하는 후대의 사가들도 있다.

3 종교

나라 종교로 인티(태양)을 섬겼고 사파 잉카의 형제나 그 밖의 가까운 친척이 대사제 일을 맡아 했다. 야마나 그 밖의 동물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도 없지않아 있었으나 메시카(아즈텍)처럼 무더기로 죽여대는 수준은 아니었다. 사파 잉카가 아프거나 하면 하늘로 보내는 사자(…)로 사람을 뽑아 죽였다. 메시카에서처럼 태양신님 목 마르실텐데 주스(피)라도 드시죠가 아니다. 순장 풍습 또한 있었으나 자발적(?)이었고 이제 그만 자살하라고 정부 쪽에서 말렸다고 한다.

사파 잉카의 권한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반면, 그만큼 사파 잉카를 얽매는 풍습도 많았다. 가령 사파 잉카는 태양과 동일시되었으므로, 모든 물건은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버려졌다. 태양이 하루에 한번 지면 다시 새로운 태양이 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파 잉카가 하루 입은 옷은 하루가 지나고 나면 불태워졌으며, 사파 잉카가 신던 신발도 역시 하루가 지나면 불태워졌다. 사파 잉카가 한번 동침한 여자도 마찬가지로 하루가 지나면 그걸로 끝났다.[6] 사파 잉카는 스스로 걸을 수 없었으며, 어딜 가든 황금 가마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누구든 사파 잉카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차스키(Chasqiy)라고 불린 파발꾼들은 사파 잉카에게 보고할 때 먼저 '대리인'에게 보고했고, 그 대리인이 사파 잉카에게 다시 보고하면, 사파 잉카가 이에 대한 조치사항을 대리인에게 지시하고, 그 대리인이 다시 차스끼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아무리 고관이라 하더라도 사파 잉카의 얼굴을 직접 보는 행위 또한 금지되어 있었다. 그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파 잉카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 밖에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이 수녀로 잘못 안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아클라(Aclla)라고 한다. 이들은 예쁘거나 핏줄이 좋거나 해서 뽑혔다. 죽을 때까지 처녀로 한곳에 모여 살면서 고급 직물을 짜고, 술을 빚고, 이런 저런 일을 해야 했다. 이 중 일부는 사파 잉카가 후궁으로 삼거나 쿠라카들에게 역시 첩으로 선물하기도 했다. 하렘과는 좀 다른 것이 아클라들이 사는 수녀원(?)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고 잉카라도 맘대로 이 여자들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아클라를 건드리는 보통 남자는 처형, 그 가족까지 모두 죽였다. 한 때 이를 중동의 하렘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잉카가 여성을 매우 억압적으로 대했다는 근거로 보는 시각도 있었으나 현재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오히려 최근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잉카 제국 이전 시기에 존재했던 문명 중 하나인 모치카 문명에서는 여제들도 많았다.

죽은 사파 잉카들은 미이라로 만들어 살아있었을 때처럼 모셨다. 그리고 이따금씩 '무덤'(비록 땅 위에 있긴 하지만)에서 끌어내어 말도 걸고 밥도 주고(?)하였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춤 추자고 끌어내는 것 말고는 뭐든지 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도 흔히 돌아가신 분들을 살아계신 것처럼 부르고 밥 차려드리고 하니까 그렇게 이상하게만 볼 것은 아닐성 싶다.

4 기술과 문화

바퀴를 쓰지 않고(즉, 수레가 없었다)[7] 도 쓰지 않아서 뒤떨어진 문명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미 정밀한 태양력을 사용하는 고도의 천문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땅심이 쉽게 빠지지 않는 계단식 밭이나 도시를 흐른 수도 시설, 면도칼 하나도 들어가기 힘들만큼 정교하게 짜맞춘 바위벽[8] 같은 것을 보면 단지 발달 분야가 다를 뿐이지 어떤 면에선 당대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잉카의 채취 기술은 에스파냐가 이 지역을 정복한 뒤로도 한참 동안 계속 쓰였고 특히 풍부한 은광이 있지만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 포토시에서 각광받았다. 당시의 에스파냐식 기술로는 산소가 부족한 이 지역에서 고열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72년 획기적인 수은 아말감법이 개발되면서부터는 잉카의 재래식 은 채취법은 씨가 말라버린다.[9]

타완틴수유 곳곳으로 뻗은 잉카의 도로 역시 유명하다. 마치 로마의 도로들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의 도로들의 경우 현재에는 일부만이 도로로 사용되는 것과는 달리 잉카의 도로들은 상당수가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10]. 그러한 도로들은 산을 오르는데 가장 효율적인 경사를 따라서 놓였기 때문이며, 해발 4000m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차도는 사치다(...). 잉카의 다리 제작 기술 또한 대단하였는데 식물섬유를 꼬아서 깊은 낭떠러지나 높은 계곡 사이에 구름다리를 만들수 있었다. 이 들중 상당수가 19세기까지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오늘날에도 험준한곳에 자리잡은 시골동네에서는 꽤 자주 보인다. 해마다 다리를 보수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어 현대의 다리와 견주긴 뭣하지만 처음 이 다리를 본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에겐 놀라운 건축 기술로 보였을 것이다. 천길만길 낭떠러지 사이에 어떻게 저런 걸 만들었나 싶었을지도. 무엇보다도 이 다리는 방어에도 효과적이였는데, 외부세력이 침략해올 경우 다리를 끊어버리게되면 상대측 입장에서는 이 마을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리를 새로 구축하려 한다 하더라도 마을에서 견제가 가능할테고.

잉카 문자가 있었다, 없었다 말이 많은데 아직까지 정설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키푸라 하여 매듭으로 숫자를 나타내는 방법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키푸카마욕이란 관리들이 키푸를 다루었는데 이 방법은 에스파냐의 정복 이후에도 한동안 쓰였고 키푸카마욕들은 지역 정보를 지닌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지위를 누린 듯하다. 돈 잘 벌어 무역선을 산 사람도 있었다.

5 몰락

상세한 내용은 프란시스코 피사로 항목과 곤살로 피사로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에스파냐의 침략자들이 쿠바멕시코 일대를 장악한 뒤 눈을 돌린 곳은 광대한 남아메리카 대륙이였다. 앞서 아즈텍을 몰락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의 사촌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그 선봉으로, 당시 황제인 아타우알파의 병크와 맞물려 손쉽게 제국을 거덜내버린다. 아타우알파는 순진하게도 침략자들에게 황금을 건네주면 지레 감격해서 물러갈 거라고 짐작했지만, 오히려 침략자들은 정복전에 제대로 환장해버렸던 것이다. 이야 처음본 놈이 금을 막 퍼주네 저놈 집엔 얼마나 더 있다는거야?! 호옹이 황제는 이들을 만나 회담을 하였는데 에스파냐인들이 성경을 건넸고 이 성경에 어떤 신령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황제는 귀를 대었으나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땅에 내던졌고 이것을 본 에스파냐인들은 황제를 곧바로 사로잡았다.[11]

황제는 생포된 뒤 그들에게 자신이 감금된 방을 가리키면서 자신을 풀어주면 그 방을 황금으로 채우겠다고 하였다. 피사로는 이것에 동의하였고 그 이후로 계속 황금을 상납받게 되었다. 그러나 피사로는 황제가 풀려나면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될 것을 알았으므로 어느 정도 몸값을 받은 시점에서 황제를 살해한다.

그렇게 아타우알파를 죽이고 그 아우 망코를 괴뢰 왕으로 삼았는데 반전이 일어났다. 망코가 에스파냐인들의 막장 행각에 분개. 자신의 아내[12]까지 피사로의 형제에게 빼앗겼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구금당했을 때는 욕을 듣는 것도 모자라 에스파냐인들이 몸에 오줌을 갈기고 수염에 불을 붙이는 등, 갖은 치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몰래 빌카밤카로 도주하고는 대규모의 반에스파냐 봉기를 선동했다. 잉카군은 수적 우세를 기반으로 에스파냐군을 곳곳에서 물리쳤고, 한때 쿠스코가 잉카군에게 포위, 함락될 뻔한 상황도 연출되기도 했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잉카군의 화공으로 쿠스코는 건물 한채를 빼고는 모조리 불타서 이후 페루의 거점은 해안도시 리마로 옮겨졌다.

쿠스코에서 약탈한 부를 이용해 신도시 리마의 건설에 착수하던 피사로는 알마그로와의 갈등 끝에 내분이 일어나고 결국 피사로가 사태를 평정하게 되지만 이후 알마그로의 잔당세력에게 끔살당하고 만다. 또한 잉카를 통치하던 그의 형제들도 차례차례 불운을 겪게된다. 하지만 대개 자업자득이었던 셈(...) 한편, 망코는 에스파냐인 탈영병들[13]을 받아들여 기병과 화기병 등을 보유하게 되기도 하지만 자신이 받아들였던 에스파냐인들에게 암살된다. 아타우알파가 살해되고 망코 잉카가 등극한지 11년째인 1544년의 일이었다. 이후 잠시 잉카는 에스파냐인들과 화친하지만, 망코잉카 사후 28년 뒤인 1572년에 전쟁이 재발하였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잉카의 패배로 끝났고 이로써 잉카는 완전히 멸망했다.

잉카를 정리한 침략자들은 이후 일사천리로 남아메리카 전역의 군사력이 약한 부족들을 차례로 짓밟으며 구석구석 쓸고 다닌다. 피사로의 휘하였던 아귀레도 일단의 병력을 끌고 황금이 묻혀있을 남미의 오지를 원정하러 나섰는데, 그 비참한 여정은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에 잘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곳을 그렇게 휩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에스파냐의 군대는 끝내 마푸체족을 평정하지 못했고 덕분에 19세기 후반까지도 남아메리카 남쪽 원뿔 지역은 에스파냐 제국의 통제권을 벗어나 독립을 유지하였다. 에스파냐가 그 지역을 모두 지배했다는 것은 신화일 뿐이다.

잉카의 수도 쿠스코의 처참한 말로와는 대조적으로 아즈텍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이 지금도 여전히 멕시코시티로 존속하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격세지감이라 할 만하다.[14]

6 군사

warriors-of-the-inca-empire.jpg
잉카의 군대 모집력은 가히 대단했다. 망코가 봉기를 일으켰을 때, 몇 주만에 20만의 대규모 전사들을 모집할 수 있었던 것도 앞서 말한 '미타'의 힘이다. 잉카 정부는 시민들을 '미타'로 빠르게 불러모아 무장시켰다.

이렇게 모인 시민군을 루나시미(잉카의 공식언어)로 '와카 카마유크'라고 한다. 와카 카마유크는 투석부대, 투창부대가 주력이었다. 투석부대는 루나시미로 '와라카'라고 불렸다. 와라카들이 사용했던 슬링인 볼라는 위력이 굉장히 강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철제검을 두동강내버릴 정도라고 했다.[15]

투창부대는 아틀라틀과 유사한 투창기를 사용했다. 이들 중에서는 '아이유스'라고 흔히들 말하는 볼라를 싸우는 병사들이 있었는데, 이 무기는 대기병용이었다. 이걸로 기수나 말을 넘어뜨릴 수 있었다고 한다.

잉카 군대에서는 궁수를 거의 쓰지 않았다. 궁수들은 안티스(아마존)에서 지원받은 부대로, 극소수였다. 하지만 궁수와 같은 사격 병력이 소수에 불과하니 에스파냐인들한테 큰 피해를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7 후예

프란시스코 피사로 일당에게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에스파냐인들의 입성 2년만에 멸망한 아즈텍 제국과는 다르게 쿠스코 점령 후에도 망코 잉카, 투팍 아마루 등의 살아남은 잉카인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항전해서 잉카 전체가 에스파냐에 정복될때까지 거의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에스파냐의 식민지배가 확고해진 18세기에도 투팍 아마루의 후손을 자처한 원주민 독립운동가 투팍 아마루 2세(1742~1781)에 의해 원주민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페루와 우루과이에서 투팍아미루 2세의 이름을 딴 무장단체가 등장하는 등 라틴아메리카에서 투팍 아마루는 해방과 혁명의 상징이다. 이 잉카인들이 숨긴 황금의 양이 어마어마할 것이라 하고, 이를 찾아 헤매다 하이럼 빙험이 마추픽추를 발견하기도 했다. 근데 정말 숨긴 황금이 있었는지 지금에 와선 알 수 없다.

8 역대 통치자들

파차쿠티 이전에 잉카를 다스렸던 통치자들의 재위기간 및 생몰년도는 정확한 기록이 부족한 상태이다. 역대 통치자 목록에 니난 쿠요치가 우아이나 카팍, 우아스카르 사이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우아이나 카팍이 죽고 니난 쿠요치는 즉위하기 전에 전염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통치하지도 못했다.

순서이름재위기간생몰년도비고
01망코 카팍
Manco Cápac
1200년?~1230년?? ~ 1230년?잉카 건국시조
02신치 로카
Sinchi Roca
1230년?~1260년?? ~ 1260년?
03료케 유판키
Lloque Yupanqui
1260년? ~ 1290년?? ~ 1290년?
04마이타 카팍
Mayta Cápac
1290년?~1320년?? ~ 1320년?
05카팍 유판키
Cápac Yupanqui
1320년? ~ 1350년?? ~ 1350년?
06잉카 로카
Inca Roca
1350년? ~ 1380년?? ~ 1380년?하난 왕조의 시조
07야와르 우아카
Yáhuar Huácac
1380년?~1410년?? ~ 1410년?
08비라코차
Viracocha
1410년? ~ 1438년? ~ 1438년
09파차쿠티
Pachacuti
1438년 ~ 1471년? ~ 1471년잉카 제국 성립
10투팍 잉카 유판키
Túpac Inca Yupanqui
1471년 ~ 1493년? ~ 1493년
11우아이나 카팍
Huayna Capac
1493년 ~ 1527년1468년? ~ 1527년전염병으로 사망
12우아스카르
Huáscar
1527년 ~ 1532년1503년 ~ 1532년아타우알파에게 폐위됨
13아타우알파
Atahualpa
1532년 ~ 1533년1500년? ~ 1533년카하마르카에서 에스파냐인들에게 살해됨
14투팍 우알파
Túpac Huallpa
1533년? ~ 1533년에스파냐의 괴뢰황제
15망코 잉카 유판키
Manco Inca Yupanqui
1533년 ~ 1544년1516년~1544년에스파냐의 괴뢰황제였으나 에스파냐인들에게 대항하여 봉기한 뒤 빌카밤바에서 망명정부 수립
대립황제파우유 잉카
Paullu Inca
1536년 ~ 1549년1518년 ~ 1549년에스파냐의 괴뢰황제로 망코 잉카 유판키의 빌카밤바 망명정부와 대립함
16사이리 투팍
Sayri Túpac
1544년 ~ 1560년1535년? ~ 1560년빌카밤바를 떠나 에스파냐에게 영지를 받음
17티투 쿠시
Titu Cusi
1563년 ~ 1571년1529년 ~ 1571년의문사
18투팍 아마루
Túpac Amaru
1571년 ~ 1572년1545년 ~ 1572년잉카 제국의 완전한 멸망

9 그 밖

멸망 당시 1200만명의 인구를 자랑했다. 이는 중국의 명나라를 제외하면 신성 로마 제국(약 1100만으로 추정)보다 강역이 넓고 인구도 못잖게 많은 것이었다. 참고로 당대 오스만 제국의 인구도 신성 로마보다 조금 적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참고로 조선, 일본 역시 16세기 경 인구가 저 정도였다고 한다. 오오 동아시아 오오[16]

사파 잉카 가운데 둘은 이름이 참 희한했다. 한 사람은 이름 뜻이 '쓸모없는 놈'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재앙'에 가까웠는데 그렇게 이름이 붙은 사연이 있긴 하지만 현대인이 보기엔 참 희한해 보인다.

베네수엘라 아야쿠초 전자도서관에서 잉카에 대한 연대기를 내려받아 볼 수 있다. 에스파냐어가 되는 사람은 심심하면 보도록 하자.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는 황금도시 언급도 나오는 등 번영하고 있다. 영국인들이 여기서 용알좀 사려다 실패했다.

페루의 국민 음료수인 잉카 콜라가 이 문명에서 이미지를 따온 음료수다. 코카콜라가 페루에서 이기질 못해 결국 생산 회사 지분을 사서 소유해버렸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마켄키!에서는 망고(マンゴー)가 망코(マンゴ)와 발음이 비슷한 점으로 인해 섹드립이 나오면서 잉카 제국의 초대 황제인 망고 카팍이 언급된다.

총,균,쇠에 따르면 아즈텍 제국과는 의외로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아니 서로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사실 당연한게 두 문명은 4,200km의 밀림과 고산지대를 사이에 두고 있고, 조선해운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세계 지도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니다.
  1. 잉카제국 언어인 케추아어의 한글 및 로마자 표기
  2. 케추아어로 대충 '위대한 존재'란 뜻이다.
  3. 사파 잉카 왕실은 그대로 유지
  4.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한다. 관계 없는 이야기일지 모르나 리마(Lima)는 'Rimac'을 에스파냐 사람들이 잘못 부른 것이다. Rimac은 '왕들의 도시'란 뜻이었다고 한다.
  5. 아닌게 아니라 현대의 중남미 국가들보다 나은점이 한두가지가 아닌데다가, 유럽기준으로 봐도 제도상으로는 19세기보다 나았을 지경이다.
  6. 죽이거나 한 건 아니고, 태양의 처녀로 만들어 평생 사파 잉카를 위해 이런저런 잡일을 했다.
  7. 그래서 발빠른 사람을 써서 물자 수송을 했다. 그들을 차스키라 부른다.
  8. 한때 마법이나 초고대문명의 기술이니 그랬지만,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구리나 석재 끌로 깎아내고 모래로 맞춰지는 면을 연마한거다.
  9. 여담으로 이 때 생산된 은은 가격혁명으로 유럽 경제를 뒤흔들어 놓고, 몇세기가 지나 이 은은 모두 명, 청대의 중국으로 흘러든다. 최후의 승리자 중국. 그리고 그 은은 아편 사느라 다 날려먹는다(...) 진짜 최후의 승리자 영국.
  10. 물론 그 모두가 차도로 쓰인다는 것은 아니고 보통 보도로
  11. 또는 에스파냐인이 성경을 건네며 '여기엔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라고 했고, 황제는 그 말씀을 들으려 성경에 귀를 대었으나 들리지 않자 땅에 던졌다는 설도 있다. 사실 이는 황제의 무례한 행동이라기 보다는 나름대로 그쪽의 전통에 의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피사로 항목 참조
  12. 후궁은 많았으나 그 중에서 본부인은 따로 있었다.
  13. 특히 피사로를 살해하고 도주한 알마그로의 잔당세력들
  14. 하지만 쿠스코도 에스파냐의 침략과 잉카군의 화공 이후에 재건되어 거의 원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잉카시대의 석벽 위에 에스파냐 양식의 건축을 지어놓아서 이질적이면서도 독특한 느낌이 든다. 과거 태양신전이었던 코리칸차(Coricancha) 위에는 성당이 들어섰는데, 과거 쿠스코에 지진이 발생했을때 성당은 반쯤 부서졌지만 기단인 코리칸차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리고 쿠스코 근처에는 꽤 유명한 요새인 삭사이와만(Sacsayhuamán=배부른 송골매 요새)이 남아있다.
  15. 에스파냐인 병사들이 이 무기에 의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망코의 봉기 당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인 후안도 이 무기에 의해 사망했다.
  16. 벼농사 지역의 인구 부양 능력은 예전부터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