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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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983년 7월 14일~ 2009년 5월 18일 | ||
장소 | ||
스리랑카 | ||
교전국 | 스리랑카 인도 평화유지군(1987~1990) |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 인도 공화국(~1987) |
지휘관 | 주니우스 리차드 자야와데네(2대 대통령) 라나싱헤 프레마다사†(3대 대통령)[1] 딩기리 반다 위제퉁가(4대 대통령) 찬드리카 쿠마라퉁가(5대 대통령)[2] 마힌다 라자팍사(6대 대통령)[3] 사라스 폰세카(18대 육군참모총장)[4] 라지브 간디(6대 총리)[5] |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창설자/1대 지도자) 셀바라사 파트마나탄†(2대 지도자) 틸라이얌팔람 시바네산†(해군사령관)[6] 샨무갈린감 시바샨카르†[7] 발라세가람 칸디아르†[8] 바이틸링검 소르날링엄†(공군 담당)[9] 고팔라스와미 마헨드라라자">">">">">">">">">">">">">">">">">">">">">">" />[10] |
결과 | ||
LTTE의 항복, 스리랑카군의 승리 | ||
병력 | 스리랑카군 15만 9천 명 인도 평화유지군 10만 명 | 3만 명[11] |
피해규모 | 스리랑카군 - 전사 2만 3천여 명 - 부상 6만여 명 인도 평화유지군 - 전사 1,200여 명 | 전사 2만 7천여 명 포로 1만 1,644명 |
▲ 스리랑카의 지도
▲ LTTE 반군과 교전을 벌이는 스리랑카군 병사
▲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 반군 병사.
1 개요
1983년 7월 14일 시작하여 2009년 5월 18일 종식된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내전. 다수 싱할라족 스리랑카 정부군과 소수 타밀족 타밀엘람해방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반군 사이에서 일어났다. 내전의 기간이 무려 26년이나 된 관계로 스리랑카는 아직까지도 내전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배경
남아시아 인도양 남단에 위치한 실론 섬은 약 2000년전부터 실론 섬 북동부 지방과 인도 남부 지역에서 살았던 타밀족과 기원전 540년경 인도 북부에서 건너온 아리안족 계통의 싱할라족들이 살고 있었다. 실론 섬의 타밀족들은 인도의 힌두교를 믿으며 불교를 신봉하는 싱할라족들에게 저항하기도 했었으나 이들은 불안정하지만 평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그러나 실론 섬은 1815년경 대영제국의 침략을 받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실론 섬을 식민지화한 영국은 식민지 지배 협조를 위해 싱할라족들의 지지를 끌어들이려 했었다. 그러나 싱할라족들은 영국을 침략자로 보고 격렬하게 저항했고 결국 싱할라족의 지지를 얻어 내는 데 실패한 영국은 그 대신 소수의 타밀족들의 지지를 끌어냈고 이후 영국은 싱할라족과 타밀족끼리 대립과 분열을 부채질하여 실론 섬을 지배하였다. 거기다가 영국은 인도 남부 지역에서 살고 있던 타밀족들을 차밭에 쓸 노동 인력으로 끌어와 이주시켜 싱할라족의 분노를 더욱 부풀리기까지 했었다.
그러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료되고 이후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이 소유하고 있던 해외령 영토과 해외 식민지에서 탈식민지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실론 섬 역시 1948년 실론이라는 국호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독립 과정에서 실론의 모든 주요 권력들은 다수 싱할라족들이 장악하였고 이들은 소수 타밀족들에 대한 차별 정책을 펼쳤다. 실론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다시피한 싱할라족들은 실론 국내의 타밀족들에게 타밀어 사용을 금지하고 싱할라어 사용을 강요하는 한편, 군대와 경찰, 장관 역시 타밀족들이 차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요르단 강 서안 지구과 가자 지구에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살던 마을을 파괴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세우듯이 타밀족들이 거주하는 실론 섬 북부, 동부 지역에 싱할라족들을 대거 이주시켜 타밀족 마을을 부수고 싱할라족 정착촌을 세웠다. 거기다 심지어 교육 정책에서도 인구 비례를 적용해 타밀족들을 억눌렀다.
이러한 싱할라족의 타밀족 억압과 차별에 타밀족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결국 정부의 타밀 정책에 맞서고자 정당과 단체 등을 만들어 시민권 확대와 자치권 확대, 타밀족 차별 정책 폐지 등을 요구하였고 타밀족 출신 국회의원 입후보자를 주요 총선과 지방 선거등에 보내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1972년 국호도 타밀어인 실론에서 싱할라어인 스리랑카(Sri Lanka)로 변경되고 스리랑카 정부의 싱할라족 중심의 정책이 더욱 더 강화되고 타밀족 억압이 더 강력해지자 이 시기에 스리랑카 타밀족 사회에서도 폭력적인 무력 투쟁으로 스리랑카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타밀족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경 세력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 스리랑카 타밀족 사회는 평화적으로 정부와 타협하여 자치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온건파 세력과, 무력으로 스리랑카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에 타밀족만의 타밀 민족 국가 수립을 주창하는 강경 세력들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6년 무력을 통한 타밀족 독립 국가 건설을 주창하는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 등 일단의 급진적 타밀족 강경 인사들이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이라는 이름의 반정부 게릴라 저항 단체를 결성했다. 결성과 함께 LTTE는 인도 타밀족들의 자금 지원, 소련과 동유럽 공산 독재 국가 등의 무기 및 군사 고문단 등의 지원을 받으며 게릴라전과 폭탄 테러 등으로 스리랑카 정부 청사와 경찰서 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LTTE의 세력은 온건파 타밀 세력들에 비해 상당히 그 힘이 미미하였다. 애초에 시작이 민병대 비슷한 것이었으니 국가의 정규군과 비등한 화력이나 인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3 시작
▲ 1983년 반 타밀족 폭동을 일으킨 싱할리족 폭도.
그러던 1983년 7월 여름 LTTE는 스리랑카 북부 자프나 반도를 순찰하고 있던 스리랑카 정부군 차량에 총기를 발포하여 정부군 13명을 사살하였고 그 사살당한 정부군 병사의 사체가 TV 방송을 통해 공개되자 이를 보고 격분한 스리랑카의 싱할라족들은 급기야 수도 콜롬보를 비롯한 스리랑카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켜 타밀족들을 공격하고 때리고 죽였다. 그 결과 3000명에 달하는 타밀족들이 싱할라족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학살당했고 결국 싱할라족들의 타밀족 학살을 계기로 상당수의 타밀족들의 급진, 강경 노선으로 등을 돌아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주장하던 온건파들은 결국 힘을 잃고 말았다. 그 결과 LTTE는 급속도로 힘을 키워 스리랑카 타밀족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수많은 타밀족 자원병들의 증가로 LTTE는 스리랑카 전역에서 대대적인 무력 봉기에 돌입하면서 결국 스리랑카는 타밀족 LTTE 반군과 싱할라족 스리랑카 정부군 간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군사력이나 규모에 있어서 LTTE는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열세였고 이들은 북,동부 타밀족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전과 야간 기습전 등으로 스리랑카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LTTE는 스리랑카 북, 동부의 싱할라족 정착촌을 공격하여 비무장 싱할라인들을 학살하고 정부군도 타밀족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내전의 양상은 보복에 보복을 거듭했고 1985년과 1986년에 들어서면서 내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4 인도의 개입
한편 이런 스리랑카의 종족 분쟁 상황은 스리랑카의 인접국이었던 인도에게도 큰 파급력을 일으켰다. 사실 인도 역시 인도 남부 지역에 1억 명 가까이 되는 타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인도의 타밀족들은 북인도 중심의 중앙정부의 힌디어 공용어화 정책에 맞서 정부의 힌디어 공용어 정책을 무산시키고 타밀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였고 북인도 중심의 인도 정부의 정책에 매번 반기를 드는 등 인도의 타밀족 역시 북부 인도에 대한 정서적 반감이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스리랑카의 내전 상황을 방치하여 스리랑카의 타밀족들이 독자적인 타밀족 독립 국가를 수립하거나 싱할라족이 지배하는 현 스리랑카 정부를 전복시킬 경우 그 영향력이 인도 타밀족에게 미쳐 분리 독립 운동을 고무시키고 나아가 다른 인도 내 종족들과 타 지역들에게까지 영향력이 닿아 인도의 국가 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리랑카 정부를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인도의 간접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의 내전 상황은 더욱 격렬해졌고, 결국 내전이 장기전 태세로까지 번지자 인도 정부 내부에서도 내전 중인 스리랑카에 군대를 파병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1987년 스리랑카 리처드 자야와르데네 대통령과 인도 라지브 간디 총리 등 스리랑카와 인도 양국 정상은 내전이 진행 중인 스리랑카 북, 동부 지역들의 인도군 주둔과 LTTE의 무장 해제, 스리랑카의 평화 정착을 골자로 하는 인도-스리랑카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동년 평화유지군 형태의 인도군 조직인 '인도 평화유지군(IPKF)'이 결성되었고 이들 IPKF는 인도-스리랑카 협정의 내용대로 LTTE의 무장해제와 스리랑카의 평화 정착 달성을 목표로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에 파병, 주둔하면서 인도는 스리랑카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는 스리랑카에게 IPKF 인도군을 주둔시키는 대가로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에 주둔중인 스리랑카군 완전철수와 주둔권, 지역 치안권, 평시 교전권과 전시작전통제권을 인도 측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이에 스리랑카 정부는 그런 권리를 인도에게 넘겨 줄 수 없다고 반발하였으나 인도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비상시 교전권과 전작권 등을 제외한 채 모든 권리들을 사실상 인도 측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 LTTE 반군을 상대로 교전을 벌이는 IPKF 인도군
그러나 스리랑카 정부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던 LTTE는 급기야 IPKF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스리랑카 내전은 IPKF와 LTTE 반군간의 전쟁으로 번졌다. 이에 IPKF는 공격헬기와 전차 등을 동원해 LTTE 반군들을 진압하려는 여러 진압 작전들을 펼치기 시작했고 LTTE는 IPKF에게 열세로 밀리기 시작했다.
▲ M16 소총으로 무장하고 전선을 둘러보는 LTTE 반군 대원.
그러나 이러한 IPKF의 진압 작전에도 불구하고 LTTE는 좀처럼 저항을 멈추려 들지 않았고 결국 이런 인도군의 스리랑카 내전의 군사적 개입은 스리랑카의 평화 정착은커녕 타밀족과 싱할라족간의 민족 분쟁만 더욱 악화시켜 버렸다. 더욱이 스리랑카에 주둔 중이었던 IPKF 병사들은 현지 주민들과 민간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과 인권 유린, 약탈, 학살 등 반인륜 범죄를 일삼으면서 결국 IPKF는 그나마 남아 있었던 현지주민들 사이에서도 인도 평화살해군, 민간인 학살군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더욱이 스리랑카 현지 상황에 대해 잘 모르던 스리랑카 파견 인도군 장성들의 행태와 개입 초 스리랑카로부터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의 군대 주둔권과 전작권 등을 사실상 빼앗아 독점한 인도의 개입은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 주둔권을 제외한 교전권과 전작권 등을 스리랑카에게 돌려준 뒤 스리랑카군까지 끌어들여 스리랑카군과 합동으로 LTTE 반군 진압을 시도했지만 LTTE를 굴복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더욱이 막대한 국가 예산들이 스리랑카에 주둔 중이던 IPKF 인도군의 전쟁 비용으로 들어가면서 이러한 인도의 스리랑카 내전 개입은 인도 경제에도 큰 타격을 입혔고 끊이지 않는 LTTE의 공격으로 IPKF 역시 사상자들을 여럿 냈다.
파일:Attachment/스리랑카 내전/1e.jpg
▲ 스리랑카에서 철군하는 인도군.
결국 1990년 3월 인도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스리랑카에 주둔하던 인도군 병력을 철수시켰다. 결국 1천 명에 달하는 전사자 및 2,250명이 넘는 부상자를 낸 채 인도의 스리랑카 내전 개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인도가 스리랑카 내전에 무력 개입을 중지하자 목적을 잃어버린 IPKF는 해산되고 말았다.
5 인도군 철수 이후
▲ 1991년에 촬영한 LTTE 반군 병사.
그러나 인도는 철수 과정에서 인도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의 군대 주둔권과 치안권을 스리랑카 정부에게 넘기지 않은 채 급히 스리랑카에서 철수해 버렸고 결국 인도군이 떠나고 난 스리랑카 북, 동부 지역은 공백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인도가 스리랑카에서 철수하자 이에 LTTE는 공백 상태에 빠진 스리랑카 북, 동부 지역을 재빠르게 점령했고 스리랑카 정부군과 전투를 재개하면서 스리랑카는 다시금 내전이 벌어졌다. 이에 스리랑카 정부군은 LTTE를 초토화하기 위한 진압 작전을 벌였고 LTTE 역시 스리랑카 정부군에 맞서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스리랑카는 정부군과 LTTE 반군 간 전투와 상호 간 학살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한편 정부군과의 내전 기간 동안 LTTE는 1987년 인도의 스리랑카 내전 개입을 결정한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를 1991년 폭탄 테러로 암살하고 1993년에는 노동절 행사에 참석했던 라나싱헤 프레마다사 대통령을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하는가 하면 1999년에는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대통령을 폭탄 테러로 큰 중상을 입히고 여러 유력 정치 인사들을 암살하는 등 LTTE는 일개 반군 조직에서 벗어나 폭탄 테러와 암살도 서슴치 않는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로 전 세계적인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LTTE 해군인 Sea Tigers
LTTE 공군인 Air Tigers
그러던 1991년 12월 25일 LTTE에게 큰 위기가 닥쳐왔다. 1976년 결성과 더불어 LTTE에게 지원을 해 주던 소련이 붕괴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TTE는 인도 타밀족들의 자금 지원 하에 어렵게나마 세력을 유지하였고 심지어는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해외에 거주하는 타밀족 이민자들의 자금 원조도 받아 내었다. 인도 타밀족들과 기타 해외 거주 타밀족 이민자들의 지속적인 자금 지원으로 LTTE는 정부군과의 군사력 전력 차이를 어느 정도 극복했고 심지어는 단순한 반정부 게릴라 저항 단체 수준에서 벗어나 육군, 공군, 해군, 정규군, 민병대까지 갖춘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장 단체로 재탄생되었다.[12] 1990년대 초반에는 스리랑카 해군과 LTTE 해군 고속정 간 해전(!)을 벌여 스리랑카 해군 초계함이 격침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특히 LTTE의 해군인 "Sea Tigers"는 스리랑카 해군과의 해전에서 스리랑카 해군 전력의 3분의 1을 격침시켰고 공군인 "Air Tigers"의 경비행기, 무인기, 전투 헬기는 스리랑카 공군 기지를 급습해 큰 피해를 주어 스리랑카 정부를 충공깽에 빠드릴 정도였다.
한편 LTTE가 폭탄 테러, 게릴라전, 제한적인 정규전 등으로 완강하게 저항할 정도로 정부군을 위협하자 다급해진 스리랑카 정부는 상당수 국가 예산을 전쟁 비용으로 들여 가며 이스라엘,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르헨티나, 중국, 파키스탄 등 수많은 나라에서 전투기, 지상공격기, 소총, 기관총, 기관단총, 대전차 화기, 전차, 장갑차, 공격헬기 같은 무기들을 대거 들여와 정부군 전력 강화에 나섰다. 한편 LTTE도 이에 뒤질세라 스리랑카 북, 동부 반군 점령지에서 어린 아이들을 소년병으로 강제 징집시켜 부족한 반군 병력을 채웠고 점령지 타밀족 주민들에게도 치밀한 세뇌 교육과 총기 제공 등으로 이들을 반군의 구성원으로 확보하는 등 군사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며 정부군에게 항거했다.
내전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기에 들어서면서 격렬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스리랑카의 내전을 해결하고자 LTTE 반군과 스리랑카 정부 간 평화 협상도 진행되었으나 대부분 입장 차이로 협상은 결렬을 반복했다. 그렇게 결렬에 결렬을 반복하던 터에 기나긴 전쟁에 LTTE 반군은 극심하게 과격해져 이젠 중립을 지키던 기독교나 이슬람교 교도들에게까지 공격을 퍼붓고 만다.
LTTE 반군이 1998년 무슬림이 다수 살고 있는 바티칼로아 주가 원래 타밀족 땅이라고 공격하여 비무장 무슬림을 116명 학살해버리고 다른 지역에서도 연이어 기독교인에게도 테러를 가하면서 여론적으로 증오를 받고 고립되게 된다. 나아가 내전에 참여하지 않은 동족 타밀인까지 마구 죽이거나 테러를 가하기 시작한다. 즉 아군 아니면 무조건 적이라는 극단적 논리를 보였는데 이러한 타밀 반군에 대하여 같은 타밀족이지만 테러범이라고 비난하던 타밀족 국회의원인 더글라스 데바난다까지 암살을 시도했는데 데바난다는 겨우 목숨을 구했지만 이 일 이후, 노골적으로 LTTE을 증오하여 강경파가 되어 버린다. 2001년 7월, LTTE는 콜롬보 국제공항을 습격하여 국영 항공기 5대를 불태우기에 이른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이 일로 스리랑카 최대 국제공항까지 이런 게 드러나 관광객이 뚝 줄어든 건 당연했다. 반대로 스리랑카 여론은 최대 국제공항까지 참 잘도 쉽게 뚫린다고 신나게 욕하면서 빡친 정부군은 가만두지 않겠다며 반격한다.
이렇게 내전이 극렬해지면서도 스리랑카의 스리랑카 정부와 LTTE 반군 간 평화협상은 2002년 노르웨이의 중재 하에 새로운 협상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LTTE는 타밀족의 피해가 막심하다보니 정부와의 협상 과정에서 타밀족 분리 독립 입장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고 동시에 반군의 무장 해제와 제한적인 자치권이라도 받아들이겠다며 결성 초기 내걸었던 분리 독립 노선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LTTE의 무장 해제와 스리랑카 국내 타밀족 자치 정부 수립 등을 골자로 하는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내전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그러나 노르웨이 등 외부 국가들의 중재 하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음에도 불구하고 LTTE는 휴전 협정의 내용대로 무장 해제를 준수하지 않았다. 거기다 스리랑카 정부 역시 LTTE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휴전에 합의하면서 약속했던 타밀족 자치 정부 수립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휴전 와중에도 정부군과 LTTE는 서로를 꺾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였고 가끔씩 정부군과 LTTE 반군끼리 총격전이 벌어지는 등 내전이 재발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6 종말
이렇게 정부군과 반군 간 불안정한 휴전 상태에 놓여 있었던 스리랑카의 내전 상황은 2004년 3월 카루나 무라다타란 LTTE 반군 대령이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항복, 귀순하면서 급격하게 변하고 만다. 당시 LTTE 동부 전선 지휘관 카루나 무라다타란 대령은 6천명이 넘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정부군과의 협상에 나섰는데 LTTE 반군 총사령관이였던 프라바카란은 이러한 정부군과의 협상을 허락,승인하지 않고 무라다타란 부대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결국 총사령관의 공격에 분노한 무라다타란은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LTTE에 대한 모든 주요 정보들을 제공하여 정부군 측에 항복해 버렸다.[13] 이 일로 2004년부터 LTTE 요충지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넘어가면서 타밀 반군은 전선에서 큰 타격을 받고 만다. 거기에 내부 분열도 터지면서 여러 세력으로 나누어져 서로 싸우고 더 나아가 LTTE 반군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반군 점령지와 전선에서 탈영하거나 스리랑카 정부군에 속속 항복, 귀순하며 스리랑카 정부군에 합세해 LTTE를 배신하기까지 했다.
이런 LTTE의 내분으로 인해 정세는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몹시 유리해졌고, 2005년 스리랑카 대통령 선거에서 강경 싱할라 민족주의자였던 마힌다 라자팍세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라자팍세는 LTTE 무력 진압을 통한 내전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람이었고 대선 이후 새로 들어선 스리랑카 라자팍세 정부와 LTTE 반군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스리랑카 정국은 내전 재발이라는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6년 스리랑카 정부군은 LTTE를 다시 공격하면서 스리랑카는 다시 내전 상태로 돌입했다. 더불어 스리랑카는 외교전으로도 나서서 미국을 주축으로 한 나라들이 타밀족의 자금력을 막고자 금융을 동결시켜 이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 줬다.
한편 LTTE와의 내전이 진행되어 가던 2007년 스리랑카 정부군은 LTTE가 점령한 반군 점령지를 하나씩 무력으로 뺏어 점령해 나가는 전술을 사용하여 LTTE 세력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LTTE는 스리랑카 북, 동부 지역에 구축해 왔던 점령 지역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렸다. 결국 LTTE는 동부 지역들 대부분을 상실했고 2008년 라자팍세 정부가 2002년 체결되었던 LTTE와의 휴전 협정을 파기하면서 분쟁은 더욱 심각해졌다.
▲ 2000년대 내전 말기 LTTE 반군의 점령지 상실. 짙은 녹색으로 칠해진 곳이 내전 당시 LTTE 반군이 점령, 통치했던 지역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8년 말 스리랑카 정부군은 대대적인 LTTE 토벌 공세에 돌입하였고 2009년 1월 2일 LTTE의 최대 거점지인 북부 킬리노치치를 공격하면서 내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동년 1월 25일과 2월에는 물라이티부와 LTTE의 지휘본부가 있었던 중요 지하 벙커들까지 정부군에게 함락되면서 LTTE는 패색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킬리노치치와 물라이티부등 상당수의 거점을 빼앗기게 된 LTTE 측은 라자팍세 대통령에게 휴전 협상을 제안했지만 라자팍세 대통령은 LTTE의 이러한 협상 제안을 거부했고 오히려 LTTE가 점령하고 있는 스리랑카 북부 지역에 대해 전투기 공습과 무제한 포격등으로 반군 진압을 더욱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군의 강력한 진압 공세에도 불구하고 LTTE는 남아 있는 북부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진지 구축과 같은 방어전 등으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전세는 LTTE가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정부군에게 유리해져 있었고 정부군 측의 강력한 무력 공세에 스리랑카 정부군은 LTTE가 장악하였던 스리랑카 북부 지역 영토 상당수를 탈환하는 데 성공해 LTTE를 좁은 해안가 지역으로 내몰면서 내전은 사실상 스리랑카 정부군의 승리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내전이 LTTE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프라바카란 LTTE 총사령관은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동년 5월 18일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인도로 탈출하려 했으나 스리랑카 정부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결국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 뒤를 이은 셀바라사 파트마나탄이 '그는 아직 살아 있다'라고 부정했으나 끔살된 프라바카란의 시신이 스리랑카군에 의하여 공개되면서 LTTE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잔존 세력이 남아서 파트마나탄이 조직을 이끌었지만 모든 게 허물어진 상황에서 7월 22일 무장 해제 및 패배를 선언하고 해산했다.
7 내전 종식 후
파일:Attachment/스리랑카 내전/Example.jpg
▲ 2009년 내전 과정에서 사망한 타밀족 민간인 시체들을 지나가는 스리랑카 정부군.
간신히 해외로 달아났지만 결국 파트마나탄은 8월 7일 말레이시아에서 체포되어 말레이시아 정부에 의해 스리랑카로 인도됐다. 이리하여 1983년 싱할라족들의 타밀족 학살로 시작되어 26년 가까이 이어진 스리랑카 내전은 10만여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들을 낸 채 스리랑카 정부군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내전의 종결이 싱할라족의 타밀족에 대한 강제적인 억압을 통해 이뤄진 것인데다 본질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스리랑카의 현 정부가 이를 개선할 생각도 전혀 없는 상황이므로, 언젠가는 내전이 재개될 것이 확실하다.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족 거주 지역에 학교를 세우고 정부 방침에 따르는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반란 진압에 하도 고생했던터라 내전 재발을 막기 위해 무조건적인 타밀족 억압을 하지 않고 회유책을 실시했다. 더불어 타밀족도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친 스리랑카파도 세력이 늘었고 이들은 스리랑카 정부 요직에 등용되며 이들이 타밀 거주 지역을 맡는 게 늘어나고 있다.
내전으로 인하여 스리랑카에는 관광객도 줄어들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2000년 초반 KBS에서 스리랑카 바닷가를 취재했는데 벨기에에서 온 백인 관광객이나 겨우 몇몇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그 벨기에 중년 남성은 인터뷰에서 '자신은 피서 때마다 여길 10년 넘게 왔음에도 총소리 한번 듣지 못한 평화로운 곳이라고 했는데 정작 벨기에에서도 내가 여기로 피서 온다면 사람들은 스리랑카는 전쟁이 한창이라 위험하지 않냐 하는 소리가 먼저 나온다.'고 안타까워했다. 그 지역은 타밀족이 거의 없어서 평화로운 곳임에도 외국에서 관광객이 거의 오지 않았기에 현지 싱할리인들은 인터뷰에서 타밀족을 욕하면서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전으로 인한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당연히 스리랑카 다수 서민들 삶은 어려워졌다. 게다가 스리랑카 정부가 오랜 전쟁으로 전쟁세를 특별히 받으면서 스리랑카 다수 여론이 갈등을 빚으면서 정치적 갈등도 빚었다. 그리고 당연히 다수 여론은 타밀족을 더 증오하게 되었는데 전쟁이 한창일 때 스리랑카 전역에서 타밀족에 대한 차별과 구타가 만연했고 일부에서 학살도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스리랑카 군인들이 내전이 끝나기 직전 타밀족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주장이 영국 채널4의 리포트에서 제기됐다. 유튜브 링크
그러나, 지금은 강대국들에 의하여 이들이 테러 분자로 낙인찍히면서 그런 학살도 죄다 잊히고 있다. 스리랑카를 찾아가서 취재한 정문태 한겨레 기자에게 타밀족들은 우리만 모든 비난을 다 받고, 정작 스리랑카 정부가 우리에게 해 온 일은 누구도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던 바 있다. 정문태 기자가 타밀족 구역으로 가려고 할 때 스리랑카군은 가서 지겹게 들을 타밀족의 정당화 헛소리는 무시하라면서 더불어 그런 짓을 옹호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사를 게재했을 때 정작 국내의 반응은 냉담했다. 역시 테러리스트라는 부정적인 시각. 90년대 후반에 중앙일보도 비운의 민족이라고 몇 번 보도한 바 있다.
2014년에도 여전히 스리랑카는 내전 지역으로 분류되어 여행자 보험이 가입되지 않는 지역이고,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족 난민의 국외 탈출을 묵인, 사실상 조장하고 있다. 과거 LTTE 점령지에는 군사 시설이 쫙 깔려 있고 타밀족 거주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개의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고 한다.
UN은 독자적인 전쟁 범죄 조사팀을 편성해서 2014년 8월 현재 조사 중에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증거 부족 및 여러 사정으로 조사는 난항을 겪고 있는 중. 게다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라는 희대의 쓰레기가 활개치는 바람에 여러 더 큰 국제적 분쟁이 터지면서 스리랑카 내전 조사는 국제 사회에서 아오안이 되어 가는 중이다.
한편 내전을 막은 점을 어필하며 2선 재선에 성공한 라자팍세는 2010년 3선 연임 법률을 바꾸며 미국과 서구권의 독재화라는 비난을 받고 낙하산 인사 및 비리에 휘말려 여론적 반발을 일으킨다. 결국 같은 정당이던 전 대통령 쿠마라룽가가 반대하여 다른 정당을 세웠으며 사무총장이자 동료이던 마히드라팔라 사리세나가 이 새로운 정당으로 옮겨가서 2015년 1월 선거에서 라자팍세의 3선을 막아내며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 LTTE 반군의 폭탄 테러로 사망.
- ↑ 여성 대통령이며, LTTE 반군의 자살 폭탄 테러로 인해 오른쪽 눈을 잃었다.
- ↑ 스리랑카군의 총사령관도 겸하고 있다.
- ↑ 내전이 끝나고 2달 뒤인 7월까지 직위 유지. 스리랑카군의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내전을 종식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자국민의 신망이 두터웠으며. 합동참모의장 등의 요직을 거친 후 2009년 11월 군에서 전역한 후 정계에 입문해 당시 대통령 마힌다 라자팍사와 대권을 겨룰 예정이었으나 뜬금없이 쿠데타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2015년부터 집권한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제7대 대통령에 의해 2015년 풀려난 후 동년 3월 다시 군에 복귀해 스리랑카군 최초로 원수로 진급하였다.
- ↑ 3대 총리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다.
- ↑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의 해군 부대(!)인 바다 호랑이(Sea Tigers)의 수장. 현지에서는 '수사이 대령(Colonel Soosai)'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2009년 5월 정부군과의 교전 중 로켓포에 피격되어 사망된 걸로 밝혀졌다.
- ↑ 현지에서는 '포투 삼촌(Pottu Amman)'이라는 가명으로 활동.
- ↑ 심리전 담당. 현지에서는 '발라이(Balraj)'이라는 가명으로 활동.
- ↑ 현지에서는 ‘샨카르 대령(Colonel Shankar)'라는 가명으로 활동.
- ↑ 인도 정보부에 기밀을 누설한 죄로 1994년 사형에 처해졌다.
- ↑ 준군사조직 포함.
- ↑ 그러다보니 LTTE는 세계 역사상 가장 강한 무장 단체로 등록되기까지 했다.
- ↑ 무라다타란은 2008년 스리랑카 민족화해부 장관 및 국회의원이 되어 지금도 정부 요직에서 잘 지내며 무라다타란을 비롯해 항복한 타밀 반군 측 다수는 스리랑카군 정규군으로 임용되어 장교가 되어 LTTE와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