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

(장 폴 샤르트르에서 넘어옴)


1950년의 사르트르. 자세히 보면 눈이 사시이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에 자주 놀림을 받았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서 연약함 속에 존재를 이어가다가 우연하게 죽는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
<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2]
1963 - 게오르게 세페리스장폴 사르트르(수상거부)1965 -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

1 개요

Jean-Paul Sartre (1905년 6월 21일 ~ 1980년 4월 15일)

프랑스철학자이자 소설가, 극작가. 1905년 파리에서 출생하여 1980년 사망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하며 보부아르 역시 남편에 버금가는[3] 활동을 한 바 있다.

실존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4] 하이데거의 독일 현상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알베르 카뮈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자이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 및 현상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별명은 실존주의의 교황.

2 생애

6월 21일 파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장바티스트 사르트르(Jean-Baptiste Sartre)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의 해군장교, 어머니는 독일어교사였던 샤를 슈바이처(Charles Schweitzer)의 딸 안마리(Anne-Marie). 그들의 결혼은 1904년이다. 그가 태어난 지 15개월만에 아버지는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후유증인 열병으로 사망하고, 10살이 될 때까지 외가에서 엄격한 외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Charles Schweitzer, 1844년~1935년) 슬하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5] 후일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선천적 근시와 사시(斜視)[6] 그리고 외갓집의 낯설음 등으로 이 시절에 겪은 심리적 부담에 대해 밝히고 있다. 한편 외할아버지의 깊은 교양은 사르트르의 학문적 탐구심을 크게 자극하였고, 이에 사르트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외갓집과 외할아버지의 관심을 받기 위해 글쓰기에 점점 전념했다고 한다.

파리의 부르주아지 지식인 계층에서 자라난 사르트르는 1915년에 파리의 명문 리세(중고등학교) 앙리 4세 리세 ・ 루이 르 그랑에 입학하는데, 이때에 훗날 작가가 되는 폴 니장(1905년~1940년)을 알게 되었다.[7] 그로부터 2년 뒤인 1917년 어머니가 당시 공장장 조제프 망시와 재혼하게 되면서, 의붓아버지를 따라 1917년에 라 로셸(La Rochelle) 학교로 전학하며 이주하게 되는데, 사르트르는 전학한 곳에서 잘 적응하지 못했고[8] 이 시기에 어머니의 돈을 훔쳐 할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한 일이나, 아름다운 소녀에게 다가갔다가 실패하고 자신의 추함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라 로셸에서의 그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을 염려한 가족들에 의해 사르트르는 1920년 다시 앙리 4세 리세로 돌아왔고, 폴 니장과도 재회하였다.

1922년부터 2년 동안 리세 · 루이 르 그랑에서 국립 고등사범학교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에르(École Normale Supérieure) 입학을 위한 준비반 과정에서 니장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 해에 간행한 동인지 「무명 잡지」(Revue sans titre)에 단편소설 「병든 사람의 천사」를 발표하였는데, 고등사범학교에는 불합격되었다가 이듬해인 1924년 고등사범학교에 수석 입학한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레몽 아롱과 메를로 퐁티 등과 교제하였으며, 1927년에는 니장과 함께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교정하기도 했다. 1928년에 아그레가시온(1급 교원 자격) 철학시험에 낙제하였는데, 사르트르의 지인들은 모두 이에 놀랐지만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1929년 수석으로 합격했다(참고로 폴 니장도 같은 해에 합격했다). 같은 시험의 차석은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였으며, 이를 계기로 사르트르의 집을 방문한 그녀에게 사르트르는 1929년에 계약 결혼을 제안하게 된다.

사범학교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 해 11월 군에 입대하여 기상 관측병으로 18개월간 복무한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도 있었으나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제대 후인 1931년 그는 파리와 파리 근교의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 이때 그는 20페이지 분량의 「진리의 전설」을 집필하는데, 순전히 사르트르 자신의 지식만으로 저술된 이 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출판은 거부되었다. 1932년 베를린 프랑스 문화원의 강사로 있던 레몽 아롱으로부터 처음으로 후설의 현상학에 관해 듣고,[9] 다음 해에 프랑스 문화원의 장학생으로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현상학을 좀 더 깊이 연구한다. 1935년에 상상력에 대한 실험을 위해 친구였던 의사 라갓슈로부터 메스 모과 주사를 받았는데, 이때 온몸을 게와 낙지가 감싸고 도는 환각을 겪었고 때문에 반년 동안 우울증 증세로 괴로워했다.[10]

파리로 돌아와 다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36년 단편 <벽>을 완성했고 소설 《구토》를 출판(1938년)함으로써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소집되었다가 1940년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1941년에 가짜 신체장애 증명서[11]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파리로 귀향, 멜퐁티 등과 같이 대독 저항 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1943년에 《존재와 무》를 내놓아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그리 활발하지 않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당시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인 알베르 카뮈를 알게 된다. 그리고 종전 후인 1945년 10월 제3의 길을 알리기 위한 잡지 <현대>지를 창간하여 실존주의에 대해서 논하면서 소설, 평론, 희곡 등 다채로운 문필 활동에 종사하였다. 또 1945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각지에서 강연을 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제3의 정치 세력을 위해 민주 혁명 연합 준비 위원회를 결성했으나 친미화, 우익화로 내부 분열이 생겨 1949년 11월 해산되고 말았다. 1950년대 프랑스 공산당의 노동력과 용기에 감동해 <현대>지에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는 글을 썼으나 이로 인해 많은 동료들이 떠났다. 1960년대에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실천하였다. 1964년 <말>을 출판한 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올랐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1968년 5월의 68운동에서 사르트르는 청년들을 향해 정치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하였고, 그를 체포할 것을 권하는 참모들에게 당시 드골 대통령이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넣을 수는 없다"며 사르트르의 체포를 말렸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 한국의 시인 김지하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선동죄 혐의로 체포되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을 때,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의 번역본을 받아 읽어보고는 곧바로 석방 호소문에 서명을 해주었다고 한다(그리고 이듬해 2월에 김지하는 풀려났다).

이후 문학 저술을 계속해 1971년 플로베르 평전 <집안의 천치> 1, 2권을 출판하였으나 1973년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문학 저술을 중단했다.

1943년에 발표한 희곡 <파리떼>는 독일군 점령하에 파리에서 뒤랭에 의해 상연되었다. 그 후 <출구는 없다>가 성공을 거둔 이후 <무덤 없는 사자(死者)> <공손한 창녀> <더러운 손>과 <악마와 신> <네크라소프> <알토나의 감금자>등의 문제작을 발표하고 뒤마의 <키인>,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의 번안(飜案) 등을 합하여 실존주의 연극시대를 가져오게 했다. 사상적인 뒷받침과, 고전적인 극작법의 기술과, 철학자로는 보기드문 무대적인 감각과, 시사적인 소재 등을 고루 갖추어 세계적인 성공을 얻었다. 양식이나 내용상 희곡으로서의 신선미는 약간 부족하나 연극에 커뮤니즘과 크리스차니즘 이외의 사상을 가져오게 한 것은 큰 공적이다.

3 일화

  •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였고, 포로로 잡힌 적이 있다. 하지만 수용소 안에서도 유대인이 박해받은 이야기[12]에 빗대어 투쟁을 응원하는 연극을 벌이기도 했다.
덧붙여 자신이 사시임을 이용, 실명했다고 군의관을 속여 포로수용소에서 나왔다. 하지만 한편으로 독일군에게 정보를 주고 풀려났다는 설도 있다.
  • 1950년 중반 문인 알베르 카뮈와 인연을 끊었다. 이유는 알제리 독립전쟁에 관한 견해차이로, 알제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부모들은 모두 프랑스인(어머니는 스페인계 프랑스인)이던 카뮈는 알제리 독립전쟁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13]
  • 6.25 전쟁 당시 북한 측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지원하는 남한이 북침했다는 김일성의 개소리를 그냥 믿었다. 사르트르 외에도 서방의 상당수의 소위 지식인들이 '미제의 사주를 받은 남한 괴뢰분자'들이 북한을 쳤다는 북침 주장을 믿었다.[14] 문화대혁명 옹호와 더불어 길이 남을 흑역사다. 여담으로 이것 때문인지 일부 인터넷 엉터리 정보에서는 좌파이던 사르트르가 레닌을 만나 실망했다느니 헛소리성 왜곡글이 있는데 속지 말자. 사르트르의 나이를 봐도 알겠지만, 레닌이 죽을 당시 만 18세이던 사르트르가 레닌을 만났다는 게 말이 안 된다.
  • 영화 시민 케인이 개봉했을 때 매우 혹평했는데 그 이유가 사르트르가 보기에는 스토리와 연출이 매우 고리타분하다는 것(...). 농담이 아니고 "우리 프랑스에서는 이 따위 낡아빠진 영화 따위 만들 생각도 안합니다. 역시 천박한 미국놈들은 어쩔 수 없어요."라고 비웃었다.[15]
  •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 해방전선(FNL)에게 무기를 지원했다. 또한 알제리 독립을 주도하던 프란츠 파농의 저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파농이 사망하는 바람에 추도사가 되어버렸다.
  •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절하였다. 본인 왈 "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절한 적도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나는 자본주의가 준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생활이 곤궁해지자 변호사를 통해 노벨상위원회에 뒤늦게라도 상금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 사팔뜨기에다가 키도 작은 루저 남자였지만 페로몬이라도 뿜었는지 여자가 많이 꼬였다. 동정은 이미 중학생(..) 때 뗐다고 한다.[16] 여류작가이자 철학자, 페미니스트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17]으로 유명하다. 그외에도 많은 여성들과의 엽색행각도 유명하다. 말년에 넘쳐나는 인세로 여대생들과 사귀면서 생활비를 대줬다고 한다.
  • 말년에는 라비라는 유대인 조수를 두면서 사망 1달 전 유신론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사르트르는 "메시아유대교(예수를 받아들이는 유대교)"에 대한 호감을 느끼며 지지하게 되었다고 했다. 보부아르 등 무신론자들은 사르트르의 이런 전향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며 사르트르의 난잡한 사생활을 공개했다. 정작 어이없게도 사르트르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무신론자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져, '두려움에 가득 차 죽어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라는 황당한 주장이 나돌았다. 심지어는 가톨릭 매일미사(...)에도 간간히 올라오는 루머. 게다가 애초에 전향 여부 자체도 불확실하다. 항목 참조.
  • 냉전 초기 굴라그 등 소련이 인권을 마구 탄압한 사실이 밝혀지자 카뮈와 논쟁을 벌이며 소련측을 실드쳤다. 그러나 50년대 중반부터는 성향이 변하면서 1956년 소련의 헝가리 반소시위 진압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68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18] 그 직후에 창간된 리베라시옹 발행인을 지낸다. 이 시기에 마오이즘을 지지하기도 했으며 문화대혁명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으나, 70년대 이후에 서구 극좌조직의 테러에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 말타의 매할리우드의 스타 감독으로 떠오른 존 휴스턴프로이트에 대한 전기영화를 만들고자 각본가로 사르트르를 영입하려고 하였다. 이에 사르트르는 사례금으로 2만5,000탈러를 선불로 요구했고 완성된 시나리오는 300쪽에 달하는 길이였다. 이것은 영화가 최소한 5시간 이상은 상영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19] 결국 휴스턴은 시나리오 분량을 줄이기 위해 사르트르를 아일랜드로 초대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도착한 수정본은 첫번째 원고보다 더욱 포괄적이고 방대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20]
  • 샤를 드 골과 정말 사이가 안좋았는데, 사르트르는 드골을 프랑스의 히틀러라고 까고 드골은 사르트르를 아무 것도 모르고 입만 산 놈이라고 서로 신나게 욕을 해댔다. 결국 68운동 기간 중에는 아예 드골 정권에서 사르트르를 체포해버릴 것을 드골에게 건의했는데 드골은 "사르트르도 프랑스다."[21]라면서 거부했다고 한다.
  • 와이프인 시몬느 보봐르와는 51년동안 계약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던 걸로 유명했다. 2년마다 계약갱신 하였으며, 심지어 샤르트르의 제자였던 올가라는 여자와 함께 세 명이서 한지붕 아래 살기도하였다. 흠좀무..

4 작품

4.1 소설

4.2 철학서

5 관련항목

6 기타

  • 철학 계통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블랙 라군에도 딱 한 번 언급되는데, 작중 인물의 평을 빌리자면 변태 사팔뜨기 노인(...). 앞서 말한 여자를 후리는 능력(...) 때문이 아닐까 한다.
  • '샤르트르'는 완전 틀린 발음이다.[22] 덤으로 '오르셰'도 틀린 발음. 외래어 표기에도 맞지 않는다.
  1. Jean-Paul Sartre,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Paris: Nagel, 1970, p. 17. , 이 말은 하이데거를 인용한 것이다. 사르트르, 존재와 무 참조.
  2. 사르트르 본인이 수상을 거부했기 때문에 취소선 처리를 함
  3. 보부아르는 현대 페미니즘의 원론을 제시한 <제 2의 성性>의 저자이다.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적 페미니스트이다.
  4.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로 명명한 최초의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5. 샤를 슈바이처는 소르본 대학교의 독문학 교수로서 훗날 의료선교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백부이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모친과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사촌, 사르트르와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오촌 관계가 된다.
  6. 독감 후유증 때문에 각막에 백반이 생겨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게 결국 사시로 발전했다고.
  7. 덧붙여 2002년에 『제국 이후』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엠마뉴엘 토드는 니장의 손자이다.
  8. 사르트르 본인은 이 시기가 '좌절의 세월'이라고 술회했다. 그런데 이건 사르트르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등 본인이 너무 설쳐댄 탓도 있다(…).
  9. 1929년 후설이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한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를 놓친 것으로 보인다.
  10. 갑각류에 대한 공포는 이후 평생 지속되었다.
  11. 사시 증상을 실명이라고 우겨서 군의관을 속여 나왔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독일군에게 협력했다는 음모론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진실은 저 너머에.
  12. 당시 홀로코스트가 벌어졌을 텐데 저런 이야기를 골랐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것이다.
  13. 그 전부터 소련에 대한 견해 차이로 카뮈와 다소 껄끄러운 관계였다. 카뮈는 아나키스트적 기질이 강해 공산주의에 부정적이었던 반면 사르트르는 소련에 비교적 후한 평가를 내렸다.
  14. 정작 동구권인 유고슬라비아는 북한과 소련의 북침설에 만평까지 내놓으면서 비웃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판단 능력이란...
  15. 이는 사르트르의 영화 철학과 "시민 케인"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프랑스 영화계 흐름인 누벨바그와 깊은 관계를 맺는데, 누벨바그는 다소 거칠고 순간적인 장면을 포착하는 데 의의를 둬서 "시민 케인" 류의 영화와는 방향성을 달리 한다. 따라서 사르트르가 "시민 케인"을 혹평한 건 명작을 알아보지 못한 흑역사라기보다는 영화적 관점을 달리 이해한 것에 가깝다...라고 하기엔 편견 때문에 다른 가능성과 기술적 성취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흔한 과오일 뿐이다. 누벨바그가 오히려 당시 프랑스의 유행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이 평가의 얄팍함이 드러날 뿐이다. 한마디로 꼰대짓
  16. 사실 프랑스는 성생활이 서브컬처 속 일본급이다.(...)
  17. 말년까지 계약결혼을 계속했으며, 아를레르를 양녀로 들였다.
  18. 동시기 체코슬로바카이에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려진 사회개혁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여져서 시위세력간의 동질감이 있었고, 68운동 주도세력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19. 그 전에도 프랑스의 소설가 장 주네의 책에 서문을 본문보다 길게 쓴 적도 있었다고(...)
  20. <광기에 대한 잡학사전> 미하엘 코르트, 을유문화사.
  21. 날 욕하는 것도 프랑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그걸 처벌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
  22. 프랑스에 샤르트르 지방이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