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 Raymond McCarthy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1908년 11월 14일 - 1957년 5월 2일
1 소개
조셉 매카시 레이 출생: 1908년 11월 14일 그랜드 폭포, 위스콘신 사망: 1957년 5월 2일 (나이 48)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 묘지 장소: 세인트 메리 묘지 44 ° 14'40 "N 88 ° 26'30 "W 국적: 미국 정당: 공화당 (1944년에서 1957년 사이) 정당: 민주당 (1936년에서 1944년 사이) 배우자: 진 프레이저 직업: 변호사, 판사, 정치가 종교: 천주교 |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21세기인 지금까지 회자되는 정치인으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매장해버렸다.
- 매카시즘의 어원이 된 사람으로,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유럽은 예외이고 미국의 경우에도 매우 극단적인 정치세력을 제외하고는 이제 매카시즘이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만화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상원의원이 되기까지
알고보면 입지전적 인물의 전형이다. 매카시는 척박한 위스콘신 주의 농가에서 태어났고,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20세가 되어서야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다.
속성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밀워키에 있는 예수회 계통의 마켓 대학교에서 고학하였고, 그 학교의 법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위스콘신 주의 지방 판사가 되었다. 지방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아주 유명한 낙농업 판결로 단숨에 인지도를 올린다. 대략 판결은 이런 식이다.
1. 미연방정부가 농산물의 가격을 어느 일정기준 이하로 팔지 못하도록 최저가격제를 정하였다.
2. 이때 어느 낙농업자가 기준보다 낮은 가격으로 우유를 팔다가 연방정부에게 걸려서 기소가 된다.
3. 매카시가 짧고 강력한 판결문을 쓴다. '우유를 값 싸게 파는 것은 소비자에게 좋은 일인데 이런 재판을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상인들의 비율이 높은 곳에서 상인들에게 유리한 판결문을 작성한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인의 비율이 높은 위스콘신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고 전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판사로 돌아갔는데, 참전 이전 큰 인기를 모았던 판사였으므로 정계 입문 권유를 받게 되었다.
3 상원의원 매카시
그리하여 매카시는 1946년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미국 정계에서 비주류인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역으로 아일랜드계 정치집단에서 많은 후원을 받았으며, 특히 소속정당은 달랐지만, 역시 아일랜드계인 케네디家의 지원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여기까지는 근성으로 자수성가한 한 정치인의 초기 일화라고 생각되지만, 그 후로는…
4 저놈이 빨갱이다!
그 때까지 매카시는 정치적으로 햇병아리에 불과한 위스콘신 주의 초선의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일약 정치적 거물로 일으켜세울 것을 발견했으니, 그게 바로 반공이었다. 당시 미국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건국한 사실과 소련의 원폭실험 등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이 과대하게 퍼져있었고 매카시는 이를 잘 이용해먹은 셈이다. 그는 자신과 사상이 다르면 바로 사상검증에 들어갔으며 그의 검증을 통과못할시 그 대상은 (적어도 매카시에게는) 빨갱이였다.
그리하여 매카시는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극렬 반공 활동을 벌여, 조금이라도 사회비판적 성향이 있다면 무섭게 청문회에 소환하고 소련 스파이로 몰아붙여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키게 된다. 그의 마녀사냥에 희생된 사람으로는 찰리 채플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씬에서 연설한 내용이 공산주의 색채를 띄었다든가, 모던 타임즈가 산업주의를 까고 있다든가 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2]
그가 매카시즘으로 알려진 극렬 반공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집회였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명단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국무부내에 205인의 간첩이 있다면서 정체 모를 문건을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서류가방에 그 명단이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는 이후에도 기자들의 질문에 항상 웃으면서 이 안에 모든 이름이 있다!라고 계속 주장했다. 물론 가방을 열어보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3]
5 최후
하지만 그의 아무 근거도 없는 소련 스파이 (혹은 빨갱이) 사냥은 곧 밑천을 드러내게 되었고, 미국 저널리즘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CBS의 앵커 에드워드 머로가 자신의 프로그램 '씨잇 나우(See it now)'에서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매카시는 그 영향력을 잃게 된다. 이 과정은 조지 클루니가 감독한 굿나잇 앤 굿럭이라는 영화에 상세히 나와있다.[4] 또한 유명한 첩보 스릴러 영화인 1962년작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서도 매카시를 모델로 한 캐릭터가 나온다.
거기다 매카시는 궁지에 몰리면서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데, 바로 군부를 적으로 돌렸다는 것이었다. 매카시는 군부 내의 고위 장교 및 장성들 사이에도 소련 간첩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군 내부의 분노와 함께 군부 공격은 곧 원수 출신이던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 공격[5]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카시가 속했던 공화당조차 그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1954년 12월 자기가 속한 상원에서까지 비난결의가 채택되기에 이르렀고,[6] 이때 비록 상원의원으로의 신분은 유지했으나 그의 정치생명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의에 빠진 매카시는 지병인 편두통이 더욱 심해졌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매카시는 더욱 술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매카시는 실의에 빠진 채 1957년 만 4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다만 죽을 때까지 상원의원의 신분을 유지해서 장례식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과 양 당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긴 했다.
6 실제 그가 밝혀낸 내부 스파이들??
그의 사후 바켓 리스트의 159명중 오직 9명만이 스파이로 입증되었다.(...) #
핵에 대한 정보 등을 넘겨준 줄리어스와 에델 로젠버그 부부는 그 죄를 인정받아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 외 알저 히스# 오언 래티모어, 헤리 홉킨스#
이 정도면 그냥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다. 일각에서는 "100명을 잡아서 1명이라도 중요한 스파이를 색출할 수 있다면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옹호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으나, 애초에 대다수의 현대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7 영향
이러한 매카시즘의 열풍에 의해 불과 4년동안 사상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약 1만 명에 가까운 미국 행정부 내의 인사와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구속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현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거기다가 인문학/사회과학 연구는 침체되었고 대중문화와 예술이 극도로 위축되었으며, 사회비판적인 시민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7] 하지만 매카시가 주도한 전미반미활동 조사위원회는 결국 단 한 명의 소련 간첩도 색출해내지 못했다.[8]
그런데 매카시가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제 소련과 어떠한 형태로든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이 2003년 앤 쿨터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에 의하면 매카시에게 이 리스트를 넘겨준 것이 CIA라고 한다(…). 그러나 알아둬야 할게 앤 쿨터는 학자도 기자도 아닌 칼럼니스트에 불과하고, 미국에서도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예를 든다면 '이슬람교도는 비행기 탑승이 금지되어야 한다'라거나 '방사능 노출은 암을 예방한다' 같은 정신나간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매카시즘의 피해는 일부 좌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는게 앤 쿨터의 주장이지만, 이 견해는 사실 주류 학계와 언론에선 거의 부인주의[9] 취급당한다. 실제 매카시와 동시대에 FBI가 수행한 소련 간첩 색출 프로젝트인 베노나(Venona)와 대조해보면, "매카시 리스트"는 "베노나 리스트"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매카시 리스트의 참담한 적중률(9/159)도 그렇고, 매카시의 행동이 민주주의와는 엄청나게 떨어진 행동인데다 부적절하게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사실 또한 변함없다. 매카시 때문에 채플린이 1972년에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을 때까지 미국에 돌아올 수 없고 핵무기를 만드는 맨하탄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까지 소련 스파이로 몰렸다. 미국이 내세울만한 유능한 인재들도 이랬으니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매카시의 선동에 간첩으로 몰려 직장에서 왕따를 당하고 해고당한다거나 아이들까지 피해를 입어 자살하는 등 당시 미국 사회에 불합리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게다가 매카시의 반공쇼가 가져온 가장 큰 문제점은, 미국에서 민주사회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비판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매카시즘은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첸쉐썬을 비롯한 중국인 물리학자 및 공학 기술자 중 적지 않은 수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스파이로 내몰려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첸쉐썬 본인은 장인이 장제스의 고문이었고 미국에 유학을 올 당시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에서 신분을 보증할 정도였는데도 이 꼴을 당했다. 결국 미국에 실망한 첸쉐썬을 비롯한 중국인 과학자들은 정말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이들은 중국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중국의 핵개발은 더욱 늦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매카시의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 원칙과 전혀 공존할 수 없는 특정한 이념적 편향성이 가득한 이단심문소 성격의 위원회를 설치하여 어거지로 사람들을 잡아들여 마녀사냥적 재판을 벌여 사상 검증을 시도했다는, 즉 방법론적인 측면에 있다. 사실 매카시의 방법은 중세의 마녀사냥과 똑같았다. 간단히 말해서 고구마 줄기처럼 사람들을 엮는다. '미국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 그 사람을 잡아와 윽박지른다 → 너 소련 간첩이지? → 친구있지? → 그 친구 잡혀옴 → 친구있지? → 무한반복...' 이 부분에서 매카시즘은 여전히 날카롭게 비판받아야 한다.
매카시 선풍 당시 공개적으로 전향하고 반공열풍에 동조했던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1909~2004)[10]은 그 당시 행적 때문에 영화사적 공로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비난받았고 1999년 90세의 늙은 나이로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했을 때도 반대시위가 일어났을 정도였다. 공로상 시상 때는 모든 참석자들이 기립박수를 치는 것이 관례였는데 카잔이 받을 때는 참석한 영화인의 절반 정도가 일어서지도, 박수를 치지도 않았다고 한다. 대표적인게 팀 로빈스는 무표정하게 가만히 쳐다봤으며, 에드 해리스는 팔짱끼고 매섭게 노려봤으며 에디 머피는 머릴 긁적이며 외면했다. 숀 펜은 아버지가 그 리스트에 있었다. 나중에 만났는데 엘리아 카잔이 아버지인 레오 펜에게 인사했는데 무시하고 지나쳤다고 한다. 꼬마였던 숀 펜은 아버지는 늘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는데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박수를 치면서도 얼굴은 다른 곳을 본다든지, 눈 감고 박수를 치거나 천장을 보며 박수를 친다든지 박수쳐주는 것도 예의상 해주지만 꼴도 보기 싫다는 투로 대하는 이들도 상당했다. 참고로 그 시각, 바깥에 있는 시상식장 출입구 앞에서 푯말을 든 수백여명 사람들이 '엘리아 카잔에게 상을 수여하는 것은 아카데미의 수치!'라면서 야유하고 있었다. 당시 시상자로 나온 사람이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 니로였다. 드 니로는 매카시즘을 다룬 영화 Guilty by Suspicion 출연 직후 인터뷰에서 "(영화출연을 위해 관련자료를 수집, 연구하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엘리아 카잔도 나름 신념을 갖고 행동했던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언급을 했다. 영상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1분 30초부터 객석을 비추기 시작하는데, 사람들 표정이 가관이다(...).#] 매카시와 매카시즘이 미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예. 반면 매카시즘으로 1952년에 미국에서 추방당한 찰리 채플린이 1972년 아카데미가 바치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했을 때, 모든 헐리우드 관계자들은 기립 박수로 경의를 표했다.
이걸 가지고 헐리웃의 리버럴리즘조차 같은 사안에 대해 좌익에 대해서는 후하게 우익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대하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의 메카니즘이 존재함을 증명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오류가 있는 주장이다. 오해와는 달리 매카시즘 당시 공개적으로 반공을 천명하는 것은 절대로 영화계에서 매장되는 행위가 아니었다. 로널드 레이건도 그렇고 존 웨인도 그렇고 매카시즘 때 공개적으로 지지 표명을 했지만 훗날 그들의 경력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허나 엘리아 카잔이 이렇게 밉보인 것은 원래 진보였다가 동료들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고발하고 공개적으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즉, 자기 혼자 살자고 동료들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버린 쉽게 말하면 배신자 취급을 받았던 것.
매카시의 견책안 통과 보고를 받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워즘이다.(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라는 명언을 남겼다. be동사의 현재형, 과거형 변화를 가지고 한 말장난.
- ↑ 이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에게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사실 케네디도 정계 입문 초기에는 닉슨과 함께 강력한 반공주의 활동으로 입지를 다졌기 때문에... 케네디는 생각보다 훨씬 강경파인데, 한 예로 1960년 대선에서도 '미사일 격차'라는 일종의 정치적 수사로 닉슨을 유약한 인물로 몰아세웠다. 물론 이건 나중에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패러디, 풍자된다.
- ↑ 극작가 아서 밀러는 매카시즘 때문에 화가 나서 크루서블을 썼다.
- ↑ 실상 그 가방에는 위스키 1병과 건조안주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알콜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술을 즐긴 사람.
- ↑ 이 영화에는 공산주의자들을 고발하는 매카시의 연설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연기가 너무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시사회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장면은 배우가 연기한 것이 아니라 실제 매카시의 연설을 찍은 필름을 삽입한 것이었다고…
- ↑ 사실 여부를 떠나서, 군부 고위급에 스파이가 있다는 주장은 몇 년 전까지 군의 최고위층이었던 아이젠하워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아이젠하워는 민주당 20년 정권 끝내보자고(...) 공화당이 온갖 노력을 다해 영입해서 대통령까지 만든 인물이었다. 공화당으로선 자당 소속 대통령까지 팀킬할 수 있는 매카시의 지나친 돌출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 ↑ 이때 민주당에선 유일하게 존 F. 케네디가 기권했다.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이유였지만 아일랜드계에 대한 후원 때문에 일부러 기권한거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 ↑ 어떠한 사회든지 문제는 있기 마련이고 사회풍자적인 대중문화와 비판적 시민운동은 사회 문제를 건전하게 제기하는 역할을 하고 사회과학은 제기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게 위축되면서 각종 문제들이 속으로만 곪다가 베트남전을 계기로 한번에 터져나오면서 1960~70년대의 사회적 혼란을 연출하게 된다. 그때 그때 치료했으면 간단했을 증상이 그냥 방치해서 중병이 되버린 것이다.
- ↑ 참고로 미국에도 공산당은 존재하며 1960년대 대법원 판결에 의해서 합법정당으로 계속 활동하고 있다. 다만 그 숫자가 고작 몇 천명 수준이라 문제지.
- ↑ 사료 및 타당성 조사, 과학적 검증이 바탕이 된 역사적 사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나치는 유대인을 대량학살하지 않았다.식의 주장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포함한 수많은 증거와 증언이 있음에도 저런 극단적인 주를 하는 인사들이 간혹 존재한다.
- ↑ 제임스 딘이 출연한 에덴의 동쪽, 말론 브란도가 출연한 워터프론트의 감독으로도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