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존황양이(尊皇攘夷) 혹은 존왕양이(尊王攘夷; そんのうじょうい 손노죠이)란, 천황의 이름을 높이고(존황), 외세를 배격(양이) 하자는 이론이다. 일본 에도 막부 말기에 주로 사츠마, 초슈 등의 웅번에서 발흥하여 메이지 유신의 기틀이 된다. 본디, 중국 춘추시대에서부터 사용된 표어로서 존왕양이이라는 표현이었으나 메이지 유신을 거쳐오면서 명분론이 강해져 존황양이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이용된다.
2 사상적 기틀
존황론과 양이론이 결합된 것이다.
전반적인 핵심 개념은 일본식 유교인, 미토가쿠(水戸学, みとがく) (후기) 사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유교는 중국과 조선과는 달리, 그 영향력과 파급력이 작았다. 가장 큰 이유로 일본 특유의 정치적 상황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천황의 조정과 쇼군의 막부로 대표되는 이원화된 정부체제가, 누구에게 충성을 바쳐야할지 아리까리한 상황을 자아내고 있었다. 유교는 동아시아 여러 왕조에서 왕권을 드높일 의도로 많이 연구되고 차용되었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군(君, 임금)'이 누구를 말하는지 일본에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에도 막부가 설립되고 사회가 안정화되자, 막부의 권위을 튼실히하고자 충효사상을 강조하는 주자학(강항) 등의 유교가 본격적으로 이용되었다. 원칙대로라면 충의 대상은 황제, 왕이 주군이지만 일본에서는 실권은 쇼군이 쥐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해서 천황의 군림은 이해하되, 실권자는 쇼군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다. 즉, 천황은 권력을 쇼군에게 잠깐 양도한 것이다. 이를 '대정 위임론'이라고 하나, 딱히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관습법?![1] 같은 섬나라인 영국이 마그나카르타로 군림하는 왕과 실권자가 다르다는 것을 규정한 것과는 다르다. 오규 소라이와 고쿠가쿠(国学 こくがく)의 경우에도 이 점에 대해서는 두루뭉술 넘어가게 된다. 하여, 일본의 유교는 명분론보다는 실리론에 치우쳐진 경향이 크다 천황을 따라야 합니까? 쇼군을 따라야 합니까? 그냥 그때 그때 다르다. 힘이 센 놈 따르면 된다.
미토가쿠 사상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대일본사를 편찬한 미토 고몬이 시작한 학파로 유학(주자학,양명학), 사학, 국학, 신토가 결합한 형태였다. 후기는 미토번주였고 열렬한 존황양이론자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2]가 주도했다. 오규 소라이와 국학의 사상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에도 막부 말기에 이르러, 미토카쿠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 아이자와 야스시(会沢安) 등이 중심이 되어, "천황을 세우고, 오랑캐를 쫓아낸다"라는 고대 중국의 춘추시대의 표어를 차용하여 존황양이론을 도입한다.
하지만 이들 유학자들이 결코 막부를 타도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존황 사상을 주장했지만, 에도 막부를 반대하던 토막파의 존황양이 사상과는 달리 천황의 권위를 바탕으로 막부 중심의 정치 개혁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학자들 : 완전소중 천황! / 막부 : 뭐 뒤질래? / 유학자들 : 그러니 우리는 천황의 직속 부하인 막부를 따라야 합니다.
3 존황양이파의 등장
에도 막부 말기에는, 사츠마, 조슈, 미토, 토사로 대표되는 웅번들의 정치-군사력이 강해져, 막부로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당시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사다 후계자 문제와 와중에 벌어진 쿠로후네 사건 등으로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특히 쿠로후네 사건에 일본 전국이 심하게 동요하며 막부에 대해 성토하는 여론이 강해진다. 웅번들은 막부의 정치적 헤게모니에 대해서 큰 의구심을 품고 있었고, 꼴보기 싫은 막부를 우회하고자 정치적 허수아비였던 천황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는 존황론이 대두되는 시점이었다. 안그래도 외세 배타적인 풍토였던 일본에서, 막부가 미국에 굴복하자 양이론이 크게 대두되어 존황-양이론이 합체발굴된다. 그리고 일련의 정치적인 사건으로 이들의 반막부 정서가 표출된다.
1858년 7월 29일, 막부의 대로(大老)이자 실권자인 이이 나오스케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고메이 덴노의 칙허를 받지 않고 체결한다. 막부의 힘이 강했을 때에는 별 것 아닌 일로 치부될 수 있었지만, 분위기는 이전과 달랐다. 고메이 덴노는 '니가 먼데 맘대로 외국과 조약 체결이냐'는 식으로 빡쳐했고, 조약 체결을 빌미로 모가지가 날아간 양이파 미토 번 가신들은 야마가 돌때까지 돌 정도였다. 이 사건은 고메이 덴노가 미토 번에 무오의 비밀칙서를 내려 전례없는 파란으로 결말이 난다. 덴노가 직접 다이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은 이전에는 없었던 탓에 이이 나오스케는 이 사태에 크게 분노했다. 이 개새X들이 증말!
이이 나오스케는 여기에서 큰 정치적인 실수를 감행하는데, 그것은 안세이 대옥이다. 이이 나오스케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 웅번들의 세력(특히 미토 번)을 약화시키고자 미일수호통상 조약을 맺은 해인 1858년부터 다음 해까지 100여명의 존황양이파 및 히토쓰바시파 인사를 대량 숙청하였다.
여기에는 많은 수의 사츠마, 조슈, 토사, 미토 번주 인사들의 희생당하는데, 특히 초슈의 요시다 쇼인이 사형당하자, 반발은 극렬해진다. 요시다 쇼인은 당시, 지방의 조그마한 사립 학원 원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이토 히로부미, 기도 다카요시, 타카스기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들은 근대 일본을 수립한 자들로서 행동파이자 쟁쟁한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스승이 비명횡사하자, 극단주의 노선을 걷게되었다.
조슈 번뿐만 아니라 다른 웅번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동안 막부에게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반막부파 세력은 안세이 대옥을 기점으로 일본 역사 전면에 등장하고, 존황양이라는 기치로 체제 전복을 목표로 두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이 나오스케는 대낮에 문 앞에서 비명횡사하게 된다. 이이 나오스케 항목 참고
4 존황양이파의 성격
존황양이라는 단어는 명분과 주장으로 이루어진 표어이다. 사실 존황론은 웅번들에게 있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천황의 권력을 정말로 높일려고 하기보다는 천황의 이름을 빌려, 막부를 찍어누르기를 원했다. 이와쿠라 도모미 같은 웅번 가신들은 각종 비밀칙서를 천황 이름으로 다이묘들에게 하달하였다. 내 말이 곧 천황말임 후에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림으로써 천황 중심의 정치체계로 제편되었지만 이것은 허울 좋은 명분이었을뿐 실제론 사츠마,조슈의 가신들을 비롯한 세력이 중심에 서있었고 천황 또한 자신에게 돌아오는 권력의 집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웅번들에게 휘둘렸다.
웅번들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권력의 재편과 외세를 몰아내는 양이였다. 난학이라 불리는 서구의 문물을 제한적으로 수입하고는 있었지만, 쿠로후네 사건과 미일수호통상조약 이후 갑작스런 외세의 진입은 웅번들에게 있어 커다란 위협이었다. 안 그래도 꼴보기 싫은 막부가 새로운 위협인 외세에 굴복하고 통상조약을 맺자, 반발은 극심해졌고 안세이 대옥으로 인한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게되고 이로 인한 불만의 형태가 막부에 대한 항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영국 대사관 방화 사건과 외국인·개화파에 대한 암살의 테러가 일본 전국에서 행해졌다. 그 와중에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되는 사쿠라다문밖의 변이 일어나고 막부에 대한 불만은 더욱 더 짙어져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카모토 료마가 대표적인 개화파 인사 카츠 카이슈를 암살하려고 했었지만. 그의 행동에 감화되어 개화파로 돌아서기도 했다.
그리고 1860년대에 이르면 웅번들의 활동도 큰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사츠마에서는 시마즈 히사미쓰가 행차할 때, 말에서 내리지 않고 예를 표하지 않았다며 영국인 관광객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나마무기 사건) 이것이 일본의 무사도다 영국은 이에 대해 범인의 색출 및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으나, 사츠마는 이 요구를 거부하고 막부는 대신 10만 파운드를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하지만 영국은 만족하지 않았고 괘씸한 사츠마에게 본 때를 보여주고자 함대를 파견한다. 이것이 사쓰에이 전쟁(1863년 8월 15일 ~ 1863년 8월 17일)이다.
사츠마는 의외로 분투하여 영국군을 놀라게 하였으나, 결국 승리는 영국에게 돌아간다. 영국의 힘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뒤 서양 국가의 군사력을 비롯한 각종 제도와 기술의 발전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발전했다는것을 경험하게 되자. 사츠마에서는 단순히 서양 세력을 배척하자는 인식보다. 외국 기술의 적극적인 수용과 통상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초슈에서도 1864년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하여 서구 국가들의 힘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초슈의 경우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4국 함대의 뜨거운 불 세례를 받았다 초슈 번 인사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때의 경험이 강렬했는지, 큰 전쟁은 일단 피하는 의식이 강해졌다고 한다
각 웅번들은 명분(존황)과 주장(양이) 중에서, 양이가 더 이상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게되자 실상 막부의 정책과 같은 길을 걷게 되어버린다. 이에, 웅번들은 노선을 바꾸고 존황양이중 양이를 버리고 명분론인 존황에 집중한다. 이후 막부의 존속 여부에 집중하는 정치적인 풍토가 1865년 이후 정립되는데. 막부를 타도하자는 도막파(倒幕派)와 막부를 옹호하는 좌막파(佐幕派)[3]가 그것이다.
1867년의 대정봉환으로 신정부가 성립되고 무진전쟁으로 좌막파 잔존 세력이 어느정도 정리되자, 실상 도막파, 좌막파의 이분화된 구조도 유명무실하게되고 존황양이의 세력을 이끌었던 두 주요 세력인 사츠마, 초슈 중심의 한바츠(藩閥) 시대가 열리게 된다. 명분에 지나지 않았건만 이들의 권력의 최대 이념이었던 존황론은 발전·심화되어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신토로 격상되고 더 나아가, 극단적인 천황 옥쇄론이 대두되어 일본 제국이 미친짓(카미카제, 반자이 어택)을 하는 사상적 토양이 되어버린다.
상기한 일들이 벌어지기 100년도 전에, 조선의 한 선비가 막부와 조정으로 대비되는 일본의 이중정부 모순을 지적하고, 존황양이파가 등장하여 사태가 발생, 천황이 바로서게 되어 향후, 이것이 조선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성호 이익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