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개인은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는 명제에 기초하여 출발한다. 이는 '경험주의 사상'의 한 거목이었던 데이비드 흄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1]
역사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19세기 산업 혁명과 산업 자본주의의 형성에 따른 다수 노동자의 피폐한 삶이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 사상이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을 노동자들에게 나누자'는 사회주의와 동시대에 등장한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더욱 확실해진다.
대표적인 사상가로 제러미 벤담과 제임스 밀, 그리고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 등이 있으며 경험론이 득세했던 영국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이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명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공리주의자에게는 최대 다수가 최대 행복을 느끼게 하는 행동이 '선'하고 '정의'로운 행동이라는 뜻이다. 이 점 때문에 전체주의를 합리화하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된 논리로, 전체주의는 '개인이 집단에 속해있다.'라는 집단주의를 전제로 하는데 반해, 공리주의는 개인주의를 전제로 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집단의 행복은 개인들의 행복의 총 합이다'라는 정의가 전제되어 있으며, 이 정의 또한 개인주의의 '집단은 개인의 합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공리주의는 전체주의와 달리 집단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의 공리주의자의 대표격으로는 피터 싱어가 있다. 피터 싱어는 극단적인 공리주의를 주장하는데, 극단적인 공리주의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와 같은 상당수의 사상들과 충돌하기 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받고 있다. 피터 싱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그를 비판하기도 하고[2] 싱어의 공리주의는 엄격한 논리에 근거한 척 하면서 실제로는 현실에 맞추어 적당히 짜깁기한 것이라고 비판한기도 한다.
참고로 싱어의 공리주의에서 공리의 척도는 쾌락과는 미묘하게 다른 '선호'라는 것이다. 이를 선호공리주의라 부르는데, 선호의 충족을 공리의 척도로 본다. 이 점 때문에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구체적인 논의에 있어 기존의 공리주의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몇 가지 주제들에 관해서는 난해한 결론이 도출되기도 한다. 그의 저서 '실천윤리학'을 보면, 이런 난해함을 해결하기 위해 싱어는 '도덕장부'와 같은 새로운 개념을 몇 도입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는 이러한 태도는 이 책의 초반에 보이는, 기존의 통념들을 단호하게 부정하면서 모든 논의를 엄격한 논리만으로 진행하겠다는 듯한 태도와 불일치하며, 이런 면에서 상술된 '현실에 맞추어 적당히 짜깁기'했다는 비판이 발생하기도 한다.
윤리(교과) 등으로 공리주의를 가볍게 배운 사람들이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지만, 공리주의는 절대 '개인의 행복보다 공공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사상이 아니다.[3]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공리주의에서는 '개인의 집단'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는 '공공'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고, '공공의 행복'은 '∑개인의 행복'과 같은 뜻이기에 둘을 비교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4] 경제학에서 공리주의 사회후생함수를 공부해 보면 이해가 확실히 되는데, 이 함수에서는 타인의 효용이 증가하지 않는 제자리이고 특정 개인의 효용만 증가하더라도 사회 총합의 후생수준은 증가한 것으로 본다. 공리주의 사상가 밀을 공부하면 알 수 있듯 공리주의는 당시 유럽을 휩쓴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사상이며, 따라서 무작정 개인의 행복을 희생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공리주의의 등장이 당시 자유주의 사상이 놓치고 있었던 공공의 이익을 일깨우는 계기로 작용하여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
공리주의는 '개인의 행복 추구를 기초로 하여 입법과 행정을 운영할 것을 주장하며, 이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에 부합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활동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이는 영국에서 19세기 선거권의 확대를 비롯한 노동자의 권리 확대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지는 복지국가의 형성으로 나타났다.
물론 엄격한 공리주의자에게는 자유, 재산권 등 현대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침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러가지를 포함하여 그 어떠한 것도 '행복'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닐 수는 없기 때문에 정확히는 공산주의 쪽이 공리주의적으로는 바람직한 체제이다. 다만 이러한 이상적인 체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어떤 공리주의자도 이 세계 완벽한 공리주의의 실현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공리주의는 개인 행복 총합의 최대화만을 유일무이한 옳음으로 여기며, 그 외의 그 어떠한 것도 가치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복이 아닌 어떤 것을 위해서라도 행복을 희생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2 평가
열 명을 살리기 위해 한명을 죽인다면, 그것은 열 명의 살인자를 만드는 일이지. [5]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마이클 샌델, <정의> 제 1강, 벤담의 공리주의 (EBS)#
절벽 아래 철로에 열 명의 인부가 작업을 하고 있고 열차가 달려오고 있지만 인부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 당신은 절벽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절벽 끝에 매우 뚱뚱한 사람이 한 명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당신이 지금 당장 그를 밀면 그는 달려오는 열차 앞에 바로 떨어져 열차를 멈추고 열 명의 인부는 살아날 것이다. 그 외에 당신이 달려오는 열차로부터 열 명의 인부들을 구할 방법은 없다. 이때,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이클 샌델의 강의에서는 대부분이 밀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공리주의적으로 보자면 먼저 미는 것과 안 미는 것의 결과를 구별해 보는 것이 좋겠다. 전자의 경우에는 열 명의 인부들은 살아나서 미래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고, 떨어진 사람에 대한 동정심, 미안함, 슬픔을 느끼고 떨어진 사람은 떨어지는 동안의 공포를 느끼며 미래의 행복을 잃을 것이다. 크게 보았을 때 이득이 되는 것은 열 명의 인부들의 생명, 손실이 되는 것은 떨어진 사람의 생명과 떨어지는 동안의 공포다. 그리고 절벽 위의 남자의 자유권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부분이 다른 도덕과 공리주의의 차이점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봐도 이 자를 미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좀 더 단순화시키면 열 명의 생명과 한 명의 생명을 비교하는 것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개개인의 삶의 질은 비교하기 어렵겠지만 그 수가 확연히 차이난다면 더 많은 쪽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인부들은 죽었겠지만 내가 이 사람을 밂으로써 살 수 있을 사람을 내가 죽였기에 죄가 된다고 주장한다면 내가 미는 것과 밀지 않는 것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행위(行爲)와 무위(無爲)의 차이가 있다고 믿는 것인가? '내가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이, 이미 내가 있는 상황에서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밀릴 사람의 자유가 침해된다고 주장할 셈이라면 한 명의 자유와 생명이 열 명의 생명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녔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인부의 숫자를 늘려보자. 내가 이 자를 밀지 않으면 100명, 아니 1억 명, 아니 온 지구의 인간이 죽는다고 비현실적인 가정을 해 보자. 숫자가 극도로 늘어나면 이 자를 미는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10명은 안 되고, 지구 전체는 된다니? 이 둘의 차이는 숫자 뿐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유도, 그 기준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생명과 비교 및 저울질 될 수 있는 가치에 불과한 것이 맞잖는가?
공리주의는 위와 같이 자유나 권리 등을 별개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보는 여러 윤리 사상들을 거부하고 행위와 무위의 차이를 부정한다. 판단과 선택의 유일한 기준으로 행복/이익만이 있기에 어떤 행위의 생명, 권리, 자유 등등의 보장/침해 여부도 그것의 보장/침해가 몇 명에게 어느 정도의 행복이나 불행을 가져오는지 외에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행복 이외의 가치를 주장하는 모든 사상과 충돌하며, 옆 동네의 프로이트에 맞먹는 엄청난 어그로를 자랑한다. 도덕이나 윤리를 다루는 책이라면 일단 공리주의는 한번 까 보고(...) 넘어가는 일이 많다. 고등학교 도덕 교과서도 마찬가지.
정말 엄격한 형태로 공리주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상당한 막장 테크를 타게 된다. 이런 것을 진심으로 주장하고 행하게 된다면 일단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만 남기고 전 재산을 빈민들에게 기부해야 할 텐데, 현대에 가장 극단적인 공리주의자로 꼽히는 피터 싱어조차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거기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것은 딱히 인간만을 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야생동물이나 소나 돼지, 닭과 같은 가축의 행복을 인간의 행복과 동등하게 고려한다고 생각하면 사실상 인류가 존속할 수가 없다. 하지만 자유를 옹호한다고 자유지상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자유지상주의를 논박하는 근거로 자유주의자를 비난할 수 없듯이, 공리주의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도 약간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공리주의는 우선 이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비판을 많이 받는다. 우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느껴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여러 사람의 행복을 어떻게 비교할 것인지, 그리고 행복의 '질'에 관한 논쟁도 있다. 세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얻는 행복과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위키질을 하면서(...)얻는 행복은 동등할까? 물론 공리주의의 대답은 'Yes'이지만, 여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행복과 육체적인 행복을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지도 문제가 되며, 동물의 행복도 고려해야 할지도 문제가 된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저울질해야 할 때가 생기는데, 어디까지의 미래를 고려대상에 넣어야 하는지,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같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라면 이자율 혹은 할인율을 적용해야 하는지, 한다면 몇 %로 정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많이 비판받는 것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소수의 행복'은 조금 침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다수를 위해 소수의 자유를 희생하는 행위는 언제나 일어난다. 대표적인 예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일부 범죄자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감옥. 결국에는 정도의 차이인데, 공리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금 '덜 절실한' 상황에서까지 다수를 위한 정책을 지지한다.
그리고 '공리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실제로는 공리를 저해할 것이다' 라는 식의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대다수가 집단 내의 소수를 제거하는 것에 계속적으로 찬성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전체 집단이 붕괴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공리주의자라면 나치의 행태를 묵인하는 것이 미래에 불러올 일들을 모두 고려하여 생각해본 후, 나치에 대항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결국 이 주장은 '공리주의를 시행할 때에 조금 더 똑똑하게 결과를 계산해야 한다' 라는 조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개인의 행복 추구에 법률이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공리주의'를 '이기주의'와 혼동하면 안 된다. 공리주의는 모두가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이지,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다. 도덕과 법률은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과하게 추구하여 타인의 행복과 충돌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즉 토머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불행한 소수의 행복 추구를 법이 막는다는 등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법률에 관한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법의 기본적인 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공리주의에 반대된다.
공리주의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한 명의 완벽한 인간이나 완벽한 시스템이 생산과 분배를 비롯한 모든 것을 매우 적절하게 조절하는 사회이다...만 이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은 없고 완벽한 인간이란 신이라도 만들어낼 수 없으니 전혀 의미가 없다. 현실적으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분배와 통제를 적절히 시행하는 게 최선일 듯.
3 현실
위에서 언급한 근본적인 논쟁거리들을 제쳐놓고 보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이념은 일상적인 수준에서는 문제시 되지 않는다. 일상적인 판단의 수준에서 혼자만 잘 되려는 것을 나쁘게 본다거나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것을 선호한다거나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보는 보편적인 윤리의식이 공리주의와 부합한다. 하지만 현재 이것을 넘어서서 엄격하게 공리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거의 찾기 힘들다. 다른 도덕 윤리와 마찬가지로 여러 면에서 현실과 타협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
공리주의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키지만, 도덕 철학 중 거의 유일하게 그 원칙에 순환논리가 아닌 일관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점 덕분에 아직도 부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정의론을 보면, 존 롤스는 사람들이 '원초적 입장'에 선 상태로 결정한 것이 정의라고 전제하고 이를 기반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결국에는 인간이 가진 도덕적 직관에 의존한다는 것인데, 왜 이것이 정의인지에 대한 물음에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데이비드 흄이나 칸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링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행복과 고통에 대한 공리주의적 견해에 동감하는 한[6] 공리주의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사실 다른 도덕 철학도 마찬가지이지만.) 결국에는 인간의 직감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논리를 믿을 것인지 하는 개인의 선택이 된다. 때문에 이런 도덕적 직관이 약한, 그러니까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개인일수록 공리주의 원칙에 동의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 실험으로 밝혀져 있다. 물론 모든 공리주의 신봉자가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그 역도 성립하지 않으니 지나친 일반화는 자제하자.
현실에서의 공리주의자 코스프레하는 정치인들은 1인1표에 의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타인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개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선택하게 하여 개개인의 판단을 종합하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모든 개인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자신의 결정에 뒤따를 결과를 잘 알고 있으며 이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현실에서 사람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상당히 많아 문제가 된다.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모두에게 한 표, 즉 같은 권리를 주었을 때에는 각자의 절실함과 같은 행복/불행의 정도가 반영되지 못하기 때문에 공리주의에 정확히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만 이는 공리주의가 아닌 보편적인 윤리로도 다수결 투표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점이기는 하다.
행복을 추구하고 개인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인 전쟁에 공리주의를 적용시킨다면 전쟁 수행의 목적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되 최소한의 피해(주로 인명피해)를 입거나 입히도록 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한 입장은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느냐, 아니면 민간인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압도적인 화력을 투입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느냐는 두가지 갈래로 나뉘어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후자는 커티스 르메이의 전쟁 수행 방식과 원자폭탄의 투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란 것이 애초에 윗대가리 분들의 욕심으로 무고에 가까운 수많은 사람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비극이란 점에서 (물론 아닌 전쟁도 드물게 있긴 하지만..) 이런 정당화가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진정한 공리주의자라면 야메로! 이런 전쟁은 모 야메룽다!를 외쳐라
4 창작물에서 공리주의
어떤 사상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인물을 그려내는 것이 흔한 창작물에서는 공리주의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인물을 그리는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이미 수정이 가해진 부분이 있는 고전적인 초기형 공리주의인 것이 대부분이라 극단적이고 일그러져 공리주의자들에게도 비판 받을 수준의 인물들도 많다.
4.1 사례
- 나이트런 - AL
- 단간론파 어나더 -또 하나의 절망학원- - 킨조 츠루기
-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 큐베[7]
- 죠죠의 기묘한 모험 7부 스틸 볼 런 - 퍼니 밸런타인
- 왓치맨 - 오지만디아스[8]
- 원피스 - 해군(원피스)[9]
- 얼음과 불의 노래 - 브린덴 리버스, 바리스?
- 은하영웅전설 -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 천원돌파 그렌라간 - 로제놈, 로시우 아다이, 안티 스파이럴
- 파운데이션 시리즈 - 하리 셀던
- 헝거 게임 시리즈 - 플루타르크 헤븐스비
- 히어로메이커 - 스노우 삼
- Fate 시리즈 - 에미야 키리츠구
- PSYCHO-PASS - 시빌라 시스템
- Warhammer 40000 - 타우 제국[10], 인류의 황제, 이단심문소
- 앙상블 스타즈! - 아오바 츠무기
- ↑ 존 스튜어트 밀 같은 경우에는 귀납법을 총정리한 사람이기도 한데, 공리주의를 주장한 것 또한 이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 엄격히 공리주의적인 논리에 따르면 윤리적인 사람은 최소한의 생활에 필요한 자금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빈민들에게 기부해야 한다. 하지만 피터 싱어 자신은, 몇몇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바로는, 꽤나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고가의 시계를 차고 다닌다. 물론 이는 피터 싱어 자신에게 확인된 적은 없으며,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싱어의 저서에 의하면 '올바른 것'과 '현실에서 권장할 것'은 현실의 한계로 인하여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문제 없는 설명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 ↑ 이건 사실 수능 윤리 시험에서도 나온다. 즉, 개인의 행복을 경시했다 이런식으로 나오는 선택지는 틀린거다
- ↑ 다시 말하지만, '공리'는 '모든 개인의 행복(이익)의 총합'을 뜻한다. 집단이 그 구성원들의 행복의 총합과는 다른 어떠한 별개의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한 행동으로 초래될 개인의 불행이 그로 인해 얻어지는 집단의 행복보다 크다면, 이익을 얻는 쪽이 한 가족이건 도시이건 국가이건 간에 상관없이 그 행동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집단이 커지면 이익을 받는 개인이 많아져서 이익의 총합이 커지기도 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이다.
- ↑ 이는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측의 의견이다.
- ↑ 글에서 언급한 피터 싱어는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원칙에서 채식주의를 견지하는데, 참고로 이런 식의 채식주의 논리에 대한 반박 중 하나가 고통을 느끼는 존재에 해를 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고통을 느끼지 않는 존재에 대신 해를 끼쳐야 한다는 것은 고통을 느끼는 존재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인간 위주의 차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 ↑ 본편에선 개인의 행복을 완벽히 침해하는 시스템을 계속 끌고가더니 극장판에선 공리주의에 완벽히 부합하는 개량형 시스템을 호기심 하나 충족시키겠답시고 원환의 섭리를 박살내고 악마 하나를 만들어내는 끝에 본래 시스템으로 회귀해버린다
이 쌍놈들 - ↑ 핵전쟁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모종의 계획을 통해 뉴욕 시민 수백만명을 죽이고 관련자들도 제거
- ↑ 공리주의가 정식 신념이지만 정도는 병사 개개인마다 다르다.
- ↑ 대의 사상을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