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인식지수 | 36 | 2014년, 세계 100위 |
언론자유지수 | 40.07 | 2015년, 세계 134위[1] |
1 개요
길고 긴 군부 정권의 정치로 우민화 정책이 사회 곳곳에 침투하고, 태국 국민들도 그 문제점을 잘 인식하면서도 완전히 손을 놓은 상황.
기득권층들의 비민주적, 독재적 횡포나 수탈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가끔 버스 요금이나 수도 요금을 면제해 주면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며 박수를 보낸다.
불교의 윤회사상을 이용하여, 현세에서의 국민들의 저항의식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왕실, 군부, 불교계, 부자 등 기득권층들의 나라. 헬타이
싱가포르가 독립 직후 국가 경제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던 군사 시설을 뿌리 뽑아 금융경제로 목표를 전환해서 대성공한 케이스와는 달리, 태국은 베트남전에서 미국과의 계약을 통해 번져나간 군사시설 및 유흥시설을 통한 단맛을 보았고 이를 끊지 못해서 정치가 심각하게 나빠졌다.
게다가 국왕이 고령으로 투병생활을 지속함에 따라 정치는 물론이고, 미디어, 사회문화 전반이 3S 정책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2 국왕
태국의 왕은 기본적으로 무조건 불교 신자여야하며, 불교 신자가 아니면 절대로 왕위를 받지 못한다. 절에 가서 수행하는 것은 필수적이며, 아주 오랜 시간의 수행을 마치면 왕에 즉위한다. 21세기의 태국의 왕은 살아있는 부처(...) 정도의 위치에 있다고 보면 된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유고 상태이므로 추밀원장이 임시 섭정을 하고 있다.#차기 왕으로는 짜끄리 왕조의 마하 와찌랄롱꼰(เจ้าฟ้ามหาวชิราลงกรณ)이 유력한다. 선왕은 라마 9세(푸미폰 아둔야뎃)
그래서인지 국왕에 대한 존경심과 왕가에 대한 자존심이 엄청나서 함부로 왕실에 대고 욕하거나 왕실 사람들의 사진이나 그림에 손가락질을 했다가는 외국인이고 뭐고 다굴 맞는다. 태국에서 국왕 모독죄가 적용받는 법정 최고형량은 징역 15년이며, 이는 사실상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는다(…). 실제로 술마시고 푸미폰 국왕이 미소짓는 큼직한 거리 간판에 낙서를 큼직하게 했던 백인 관광객을 체포하여 징역형을 먹이는 바람에 말도 많았다[2]
왜 여행 가이드북에는 국왕 칭찬 일색인지 알 수 있다. 험한 말이 쓰여 있다면 들고 다닐 수나 있을까.
다른 나라에서 국왕을 비판, 비난하는 것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유명한 탈북자 출신 기자 주성하가 태국 여행도중 거리 곳곳에 있는 국왕 초상화와 초상화에 절을 하는 국민들을 보고 김일성 우상화와 비교하는 글을 올렸는데 태국 대사관에서 우리 국왕님은 그러지 않아!(…)라며 공문을 보내왔다.[3]
국왕의 사진은 지폐, 달력, 도로 광고판, 택시, 버스 등등 여기저기에 엄청나게 붙어 있는데,[4] 멋모르고 "저 듣보잡은 누구심?" 하고 묻는 실수를 했다가는 골치 아파진다. 길거리에 떨어진 지폐를 줍겠다고 발로 밟았다가는 국왕 모독죄로 잡혀갈 수 있다. 군주제 국가이기 때문에 왕에게 정치적인 힘은 막강하며, 국민의 여론을 좌지우지한다는 점에서 가장 강력하다. 그러나 푸미폰 국왕 사후의 정세는 불투명한데, 자세한 내막은 아래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국왕은 쿠데타의 대상이 아니며[5] 오히려 국왕의 승인을 얻지 못한 쿠데타는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덕분에 군부에서 쿠데타 일으켰다가 국왕이 하지 말라고 해서 버로우 탄 적도 있다. 왕궁에 함부로 총질했다가는 아마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날지도 모른다. 왕 앞에서는 거의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인사를 하며, 이것은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총리까지도 마찬가지.
대략 이러한 식으로 알현한다. 위 사진은 1992년 5월 20일 밤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태국은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수찐다 크라쁘라윤 정권과 청백리로 유명한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이 이끄는 민주화 시위대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유혈 사태가 발생하는 등 사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는데 푸미폰 국왕이 이를 중재하기 위해 둘 다 입궁시켜 꿇어앉혀놓은 모습.[6] 왕이 손짓으로 다가오라고 하자 두 사람 다 무릎으로 기어갔다. 물론 허락이 있기 전까지 고개조차도 감히 들지도 못했고….[7] 참고로 현지에 나가 있는 한국 회사들도 왕이나 왕족이 방문했을 때 무릎을 꿇는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사실, 태국은 1932년 전까진 입헌군주제도 아닌 '전제군주국'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국왕은 말 그대로 '신'이나 다름없었으나, 당시 짜끄리 왕조가 무능과 혹정을 거듭하던 중에 1932년 6월 24일에 무혈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태국은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혁명을 주도한 사람은 중급 관리였던 쁘리디 파놈용과 쁠랙 피분송크람 장군. 이들의 무혈 혁명으로 인해 150년간 굳건하던 짜끄리 왕조는 일시적으로 힘을 잃고 라마 7세 왕은 영국으로 망명해 거기서 죽었다. 젊어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라마 8세[8]의 뒤를 이어 즉위한 그 동생인 푸미폰 국왕 역시 초기에는 군부 세력 및 그 후계자들의 조종을 받았으나 차츰 권력을 장악해 현재는 승리자가 되어 있다.
그러나 왕의 위엄이 몹시 강하기 때문에 사실 왕가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또한 탁신 축출에 푸미폰 국왕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온다는 것을[9] 보면 지금도 왕실의 권력은 막강한 셈.
태국 국왕은 삼종신기가 아닌 오신기를 물려받는다고 한다. 현재 국왕을 상징하는 색깔은 노란색이며 왕비는 파란색, 왕족들 중 가장 지지기반이 확고한 둘째 공주는 분홍색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는다. 선왕이 존경을 받았지만 뒤를 이은 마하 와찌랄롱꼰 [10]의 경우 한량스러운 인물[11]인데다가, 폭력적이고 감정기복이 심한 충동적인 성격이라 평판이 안좋아[12] 미 외교 대사에 따르면 태국 정세가 불안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왕실이 다 그렇지만 짜끄리 왕조도 상당히 재산이 많다고 한다. 무려 50억 달러나 있는데 세계 5위의 규모라고 한다. 특히 1위부터 4위가 죄다 기름 펑펑나는 나라인 걸 감안하면 정말 대단하다 볼수있다.
파일:Nytimes 2015 12 04 thai.jpg
왕실 재정 관리의 불투명성을 다루는 기사를 보도한 2015년 12월 3일자 뉴욕타임즈 태국판. 해당 내용이 위에 말한 왕실모독금지법때문에 검열삭제 당했다... 검열기사내용
3 군부 쿠데타
쿠데타 이후 수십 년간 태국 정부는 정권을 독점해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일단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해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주정이 들어설때도 있지만 몇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훼방놓여지기 일쑤였다. 1973년 학생항쟁으로 3년간 잠깐 민주정이 들어섰지만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학살당하는 참사가 벌어졌고,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로인해 진짜로 학생들이 분노하여 공산반군의 세가 크게 커지게 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머리를 조아렸고 공산반군의 세도 다시 약화되어가면서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가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내각의 비리를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 정부는 다시 전복되었다.
그러나 수쩐다 장군이 자신이 했던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는 아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이자 이에 시민들이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국왕도 이에 대해 시민들의 편을 들어서면서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섰고 태국은 엄연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토지개혁 부정사건이나 외환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상황이 영 좋지않게 돌아갔고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 총리가 취임한 이후 정부가 30밧 의료보험 등 하층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자[13][14] 왕가나 군부 등 보수파들이 크게 반발했고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 중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태국 내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쿠데타가 일어나고, 방송사가 자격 박탈되어 하루 아침에 방송 중단되는 등 태국인들을 이를 보고 분노하기보다는 완전히 외면하는 계층이 대다수다. 심지어 농담반 진담반 태국 정치의 쿠데타는 태국의 전통이라고 덮어두는 사람도 많다.
태국 정치는 쿠데타를 비롯해서 특수성이 여러면에서 드러나는데, 반쿠데타 세력이 반복적으로 지목하는 태국 정치 부패의 핵심은 추밀원을 지목하는 사람이 많다. 추밀원은 왕명에 따라 행동하는 특수 기구인데, 문제는 추밀원의 추밀원장이 과거 쿠데타로 유명했던 사람.
4 2013년 시위 이후
상기한 대로 태국의 정국은 결코 안정적인 편이 못되므로, 2~3년 마다 쿠데타 내지는 대규모 시위가 터지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버렸다. 2013년 12월 이후 대규모 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 중이다.
한국의 지상파 뉴스든 종편 뉴스든 시위 관련해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왜 저런 난리법석이 벌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짤막하게는커녕 일언반구도 설명이 없다.
특히, 한국의 조중동에 해당하는 보수 언론인 '네이션'과 '방콕포스트'의 보도만 해외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아서, 제대로 된 실상이 태국 현지 밖에서 알기 어렵다.
시위의 발단은 이렇다.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는데, 거기에 탁신 전 총리의 이름이 올라가있었던 것. 당연히 민주당에서는 크게 반발했고, 방콕의 기득권층/중산층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사면령은 철회되었지만 민주당은 이 기세를 놓치지 않았고 반 탁신 시민들 또한 이에 호응해 반 정부 시위로 번지게 된다. 사실상 사면령부터 무리수였다고 볼 수 있다 -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불우한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와 기득권층의 반발을 한몸에 사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사익추구를 위해 권력을 마구잡이로 남용한 사람이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인물을 뜬금없이 '용서와 포용' 운운하면서 사면하려고 하였으니...게다가 잉락 총리는 탁신의 막내동생으로 해외 망명 중인 탁신이 바지사장으로 세웠다는 평을 들을 정도이니 더더욱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사실상 자충수였던 셈.
잉락 총리의 두서 없는 BBC 인터뷰도 덤으로 까이고 있다.
물론 탁신 지지세력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 않아서 맞불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가 훨씬 많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부패고 뭐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다'라는 것. 실제로 탁신 이전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을 싸고 돌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 이는 큰 문제였다고 한다.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것은 우연이 아니다.
2013년 11월까지는 긴장이 고조되긴 했지만 나름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시위대가 정부 청사 등을 점거하고 총리가 군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등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12월 1일 결국 첫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반 탁신 시위에 참여했던 대학생 1명과 탁신 지지자 2명이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다. 시위가 발생한 지역의 대형 쇼핑몰, 대학 등이 전부 문을 닫았고, 정부는 시민들에게 집에서 나오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2013년 12월 1일, 일촉즉발의 분위기로 상황이 굉장히 혼란스럽게 돌아가고 있으나, 국왕의 생일인 12월 5일에 이르자 정부와 시위대가 휴전을 선언했다. 오오 국왕님
2014년 5월 7일,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2011년 타윈 플리안스리 전 국가안보위원회(NSC) 위원장을 경질한 것에 대해 태국 헌재에서 권력남용이라고 결정함에 따라 총리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전부터 오빠인 탁신의 추방령을 풀려고 하다가 반대 세력들의 어그로를 잔뜩 얻은 지라, 이번 총리직 상실의 정치적 여파가 반(反)탁신파와 친 정부파의 권력투쟁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대규모 시위가 이미 일어나고 있기도 하고...
결국 2014년 5월 20일, 군의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22일, 쿠데타가 일어나고 말았다.[15] 이로써 정국 혼란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16]
이번에도 국왕은 쿠데타를 승인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으며, 예상대로 국왕은 쿠데타를 승인했다. 쁘라윳 육군참모총장이 임시 총리직을 차지할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또한 이 쿠데타의 배후에 국왕과 왕세자 간의 권력다툼 문제도 끼어있다는 분석도 있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태국 전 지역을 여행자제 단계로 여행제한등급 상향 조정하였다.#
1년이 지난 2015년 8월 현재도 총선은 이루어 지지 않고 있으며 기사에 따르면 2017년 4월까지 미뤄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때까지, 계속, 쭉 쁘라윳 총리가 집권 연장을 해나갈 것이다. 그 와중에 30밧 의료보험 제도를 폐지하고 거액을 들여 잠수함을 구입하겠다고 하면서 어그로를 끌엇으며, 8월 17일 발생한 방콕 폭탄 테러도 쁘라윳 총리에 반대하는 세력의 소행이라는 주장과 쁘라윳 총리가 게엄령을 다시 내리기 위한 자작극이라는 주장으로 태국 정국을 더 혼미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더해 쿠데타와 군부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구금하는등 엉망진창이다.
이번 쿠데타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경제를 망쳤다는 것도 포함되었는데, 정작 이번 쿠데타 정부는 경제를 더더욱 망친 것은 물론이거니와 별다른 대책도 제시하지 못 하는 안습한 상황을 거듭하고 있다.
2014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나서 헌법초안위원회(CDC)를 구성해 기존 헌법을 대체할 개헌안을 마련한다고 하지만 노골적인 군부의 정치개입 때문에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개헌의 내용은 현재 절반은 투표로 뽑히는 상원 전원을 군부가 임명하며, 상원에게 하원이 만드는 법에 대한 거부권을 주는 것이다. 군부가 만든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2016년 8월 7일에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기사 결국 61%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방법은 오랫동안 미얀마 군부가 써왔던 방법이라는 것. 오늘도 태국 민주주의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5 관련 항목
- ↑ 수치가 높을수록 언론 자유가 없는 국가, 언론자유 최상은 0점, 언론자유 최악은 100점, 2013년 이전 자료는 수치가 넘어가는 것도 존재한다, http://en.rsf.org/press-freedom-index-2013,1054.html
- ↑ 물론 대부분은 국왕의 '자비로운' 결정으로 국외추방 당하는 데 그쳤다.
- ↑ 이런 법을 lese-majesty라고 부르는데, 소위 선진국으로 일컬어지는 북유럽, 서유럽 국가들에 아직도 남아 있는데다가 최근 판결 사례까지 있다
- ↑ 심지어
핑퐁쇼유흥업소 간판에도 붙어있다. - ↑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예로는 탁신 총리에 대한 쿠데타가 있다.
- ↑ 맨 왼쪽의 인물이 잠롱 전 시장이고 우측의 인물이 수찐다 총리. 참고로 잠롱 전 시장은 5월 18일에 시위 현장에서 무장 군인에게 연행되었으나 국왕의 호출로 이틀 만에 풀려났는데 본인 말로는 군인들이 정중하게 대해줬다고.
- ↑ 여담이지만 이 날 푸미폰 왕은 "국민을 위한 민주적인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로 사실상 수찐다 총리를 꾸짖었고, 그 날로 수찐다 정권은 무너졌다.
- ↑ 이 암살사건에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관련되어 있다거나 푸미폰 현 국왕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을 정도였다.
- ↑ 일단 태국 군부는 왕실을 지지하니 왕의 허가가 없었다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 ↑ 태국군의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고, 슬하에 5남 2녀를 뒀다.
- ↑ 부인이 3명씩이나 되고 이걸로도 모자라 정부도 뒀다.
- ↑ 게다가 에이즈나 C형 간염, 혈액암 등 혈액 관련 질환을 앓고 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또한 본국이 아닌 유럽에서 지내며 민심을 잃은데다가 2009년에는 셋째 부인인 스리라스미 왕자비가 팬티만 걸치고 왕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외설스러운 비디오가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 ↑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이었고 정책도 포퓰리즘적인 면이 없진 않았지만, 분명히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혜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태국 내 탁신 지지파는 대부분이 이러한 하층민들. 사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룡 전 방콕시장같은 인물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들도 딱히 탁신보다 부패면에서 낫다고 할 인물은 아니고(...) 탁신처럼 빈민층에게 딱히 당근을 내어주는 정책을 생각해낼정도로 그리 영리(?)한것도 아닌지라 북부지역에서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
- ↑ 사실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정책을 펼치기는 했다. 애초에 탁신이 기업인 출신이니 당연지사. 그러나 탁신은 그간의 경제개발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지역(덕택에 북부 지역은 태국이 상당히 산업화 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다.)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이나 농가부채 탕감 정책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 것. 그러나 남부지역에서는 지지율이 낮았는데 최남단 지역에서 이슬람교들의 저항을 무시하고 강경하게 진압을 나선다거나 하는 정책을 펼친것도 있기때문에 지지율이 높을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는 등의 사건이 겹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반탁신지역으로 돌아섰다.
- ↑ 그동안 쿠데타는 아니라고 잡아떼다가 태국 군부의 실질적 최고 실력자인 쁘라윳 짠오차 육군참모총장이 "우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22일에 공식적으로 선언한 정도고, 20일 계엄령 선포로 사실상 군부에 의한 민간정부 전복이 이미 이뤄진 상태였다.
- ↑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뒤엎는다고 해도 선거를 치르면 왕당파가 쪽수에서 밀리는 관계로 다시 탁신 진영으로 정권이 넘어가다 보니 왕당파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 과제인데, 해결을 못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결론은 무한 쿠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