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Alan Waits (1949년 12월 7일~)
1 개요
"톰 웨이츠의 음악을 모른다면, 당신은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잃고 사는 것이다."- 영화 감독 짐 자머시
2006년 미국 음악 잡지 페이스트 선정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 100인 중 4위[1]
뮤지션들의 뮤지션이자 싱어송라이터의 스승
음악계 못지 않게 영화계에도 열혈 추종자들을 가진 뮤지션
미국의 싱어 송 라이터이자 배우이다. 1973년 앨범 Closing Time으로 데뷔하였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블루스나 재즈를 기초로 한 악곡과 특유의 쉰 가성과 특기인 피아노에 의한 음유시인 이미지로 많은 인기를 모았다. 1980년대 이후로는 독창성을 더욱 가미해 루트 음악에 기인하면서도 전위적인 사운드 때문에 화제몰이를 했다.
배우로서도 활동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짐 자머시 등이 감독을 맡은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1999년에는 펑크 락으로 유명한 레이블 Epitaph과 계약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뮤지션 사이에서도 인기가 놓아 이글스, 로드 스튜어트, 브루스 스프링스틴, 라몬즈 등이 그의 음악을 리메이크하였다. 특히 롤링 스톤즈의 키스 리처즈와 교류가 깊어서 롤링 스톤즈의 앨범 [Dirty Work]의 코러스로도 참여 함은 물론이고 리처즈 또한 웨이츠의 앨범 [Rain Dogs]에서 많은 곡의 기타 연주를 해주었다. 한국에서는 어어부밴드가 웨이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살짝은 그로테스크한 음악 때문에 국내에서 인지도가 영 좋지 않지만, 이분도 닐 영, 폴 매카트니같은 거목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살아있는 전설이시다.
2 삶
1949년 12월 7일, 캘리포니아 포모나에서 태어났다. 무난한 유년기를 보내다가 1959년에 부모님이 이혼하여, 두 누이와 어머니와 함께 샌디에이고로 이주. 샌디에이고에 살면서 이웃집에서 피아노를 배웠고, 깁슨 기타로 기타 연주도 연습했다. 그리고 1965년부터 1970년까지 나폴레옹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밥 딜런의 노래를 밥먹듯이 듣고 히피의 아버지라 불리는 작가 잭 케루악과 비트제너레이션 작가들의 작품에 심취하였는데, 이는 이후 그의 작품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역마의 기질이 다분했던 그는 열여덟살 때부터 맘 맞는 친구와 캘리포니아 주에서 애리조나 주까지 히치하이킹을 하고는 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1971년, 근처에 있는 트루버도어라는 유명한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프랭크 자파의 매니저였던 허브 코언의 눈에 띄어 데뷔를 한다.[2]
그리고 엘비스의 [Mystery Train],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 비틀즈의 [Rubber Soul], 롤링 스톤즈의 [Satisfaction]이 나오기까지 불과 10년밖에 안 걸렸다고 평가받는 록 음악의 최부흥기였던 70년대 중반기 때 톰 웨이츠 또한 [Small Change]와 [Foreign Affairs]를 릴리즈하며 인지도를 차근차근 쌓아나간다. 하지만 허브 코언과의 불평등한 계약[3] 때문에 웨이츠에게 오는 수익이 몇 푼 없었기에 계속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던 그는 1976년 여름, LA 실버레이크에서 트루버도어 근처에 있는 트로피카나 모텔로 거처를 옮긴다.
트로피카나 모텔로 거처를 옮긴 웨이츠는 시카고의 무명가수였던 리키 리 존스와 만나 많고 탈도 많았던 3년간의 연애를 하지만, 1979년, 존스가 [Rickie Lee Jones]로 그래미 신인상을 받는 등 메이저 가수로서 입지를 한껏 굳힌 반면에 웨이츠는 좋지 않은 투어의 성적과 출연할 수 있던 영화가 무산되는 등 인생 최악의 슬럼프를 겪으면서 둘은 이별하게 된다. 서른 두 살의 웨이츠는 이별 후 1980년, 허브 코언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뉴욕으로 건너가 인생의 제2막을 준비한다.
80년대가 시작되고 나서, 웨이츠의 음악에는 전위적인 색채가 점점 강해졌고, 이는 커리어 중 최고의 앨범이라고 불리는 [Swordfishtrombones]와 [Rain Dogs]로 나타났다. 이 두 앨범은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고, 1986년에는 <프랭크 와일드 이어스>라는 작품으로 연극계에도 데뷔하는 등, 웨이츠는 엄청난 활동량을 보였다. 이에 상업적인 성공도 뒤따라오면서 그의 인생에는 드디어 광명이 찾아왔다. 90년대에는 92년작 [Bone Machine]이 그래미에서 최고의 얼터너티브 음악상을 수상[4], 영화 <커피와 담배>, <숏컷> 등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써의 커리어도 탄탄히 쌓는다. 2001년에는 ASCAP 팝뮤직상에서 공로상을 수상, 2011년에는 역사적인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다! 엄청난 다작을 하시던 분이 2006년작 이후로부터는 뜸해지더니, 2011년작 [Bad As Me]로 또 한번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았다.
3 디스코그래피
- Closing Time (1973)
- The Heart of Saturday Night (1974)
- Nighthawks at the Diner (1975)
- Small Change (1976)
- Foreign Affairs (1977)
- Blue Valentine (1978)
- Heartattack and Vine (1980)
- Swordfishtrombones (1983)
- Rain Dogs (1985)
- Franks Wild Years (1987)
- Bone Machine (1992)
- The Black Rider (1993)
- Mule Variations (1999)
- Blood Money (2002)
- Alice (2002)
- Real Gone (2004)
- Orphans: Brawlers, Bawlers & Bastards (2006)
- Bad as Me (2011)
4 트리비아
- 누가 기인 아니랄까봐, 어머니가 만삭 상태로 산부인과로 가던 중 진통이 너무 심해서 택시 뒷좌석에서 자신을 낳았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산부인과 기록을 열람한 어느 팬에 의해 구라로 판명. (...)
- 웨이츠는 자신이 목소리 하나로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다. 그런데 한번은 어린 아이가 팬레터에 그의 목소리를 폭죽과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 표현이 맘에 들었는지 당장에 "바로 그거야! 내 노래 들어 줘서 고마워."라고 답장을 보낸 적이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 존똑
- 스칼렛 요한슨은 톰 웨이츠의 열정적인 팬으로 유명한데, 그녀의 가수로써의 데뷔 앨범 [Anywhere I Lay My Head] 은 톰 웨이츠 트리뷰트 앨범이며, 전곡이 웨이츠의 커버 곡이다. 이외 한국에서는 박찬욱과 이무영이 톰 웨이츠 팬으로 유명하다. 박찬욱은 아예 웨이츠 찬양글을 하나 썼을 정도며, 박쥐 영어 제목도 Black Wings라고 지을려고 했다고.
- 리바이스, 도리토스로 유명한 제과회사 프리토레이, 아우디, 오펠 등 기업들의 광고에서 그의 목소리를 무단으로 도용한 것들에 대해 전부 소송을 걸어 인실좆을 거나하게 맥인 적이 있다. 자신의 초기 앨범들에 대한 저작권 행세를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이 그가 저작권법에 민감한 이유가 됐다.
- 애처가로 유명한데, 부인이자 음악적 파트너인 캐서린 브레넌과는 연말 파티에서 단 한 번 보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원 프롬 더 하트>의 음악 작업을 하면서 눈이 맞아 연애한 지 4개월 만인 1980년 8월에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허가증, 주례, 결혼사진, 꽃까지 포함한 예식비용이 단돈 49달러에 24시간 서비스였던 원스톱 결혼 서비스를 통해 한 결혼이라 매우매우 조촐한 결혼식이었다고...
- 애가 생기고 난 뒤, 학부모 면담을 하러 갔는데 담임 선생님은 그를 못 알아보고 되레 노동자들이 그를 알아봤다고 한다.
- ↑ 참고로 1위는 밥 딜런, 2위는 닐 영, 3위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선정됐다. 놀라운 것은 5위가 폴 매카트니(!), 그리고 5위 아래에는 키스 리처드, 믹 재거, 브라이언 윌슨, 루 리드, 지미 페이지, 데이비드 보위, 스티비 원더, 로저 워터스, 데이비드 길모어, 조니 미첼 등 2006년 당시에 생존해 있던 이 레전드들을 가벼이 제칠 정도의 영향력 있는 인물임을 증명한다.
- ↑ 이 이후로 트루버도어 클럽은 브루스 스프링스틴, 레너드 코언, 빌리 조엘, 밴 모리슨, 건스 앤 로지스, 콘, 라디오헤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콜드플레이, 데미안 라이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뮤지션과 밴드들이 데뷔 공연 및 신보 쇼케이스 무대로 서기 위해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핫플레이스이자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한다.
- ↑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계약서에는 모든 곡의 저작권을 코언이 소유하고 있던 레코드사 비자레/스트레이트와 저작권사인 피프티 플로어에 양도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웨이츠에게는 자신의 곡과 앨범 판매 수익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일곱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수많은 투어를 해도 빈털터리가 될 수밖에. 물론 웨이츠는 뒤늦게야 불평등한 계약을 깨닫고, 1980년작 앨범은 광고 등의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이 앨범은 코언과의 마지막 작업이었으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꼴이다. 지금까지도 초기 앨범 7장의 음원 수익들을 웨이츠는 한푼도 받을 수 없다고 하니, 그야말로 천하의 개쌍놈. 때문에 초기작들은 아직도 리마스터가 안 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나온 CD가 전부.
- ↑ 이 때 보인 반응이 아스트랄한데, "웬 얼터너티브냐"면서 팔짝 뛰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