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한민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에 속해있는 섬
풍도동은 해당 문단으로 리다이렉트된다. |
단원구의 법정동 | ||||
법정동 | 와동 | 고잔동 | 원곡동 | 신길동 |
성곡동 | 목내동 | 원시동 | 초지동 | |
선부동 | 화정동 | 대부동동 | 대부북동 | |
대부남동 | 선감동 | 풍도동 |
본격 오가사와라 제도 경기도 버전
경기도(휴전선 이남)의 최서단에 위치해 있다. 원래 부천군 - 옹진군에 속해 있다가, 1994년, 옹진군 대부면이 안산시로 들어오면서 안산시의 섬이 되었다. 구제 시행으로 단원구 소속.
된 건 좋은데... 안산 시내로 갈 수가 없다(…). 아니, 동사무소도 함부로 못 간다. 안산시를 안산시라고 부르지 못하고 그나마 섬 안에 안산단원경찰서 대부파출소의 풍도분소가 마련되어 있으며 이곳에 경찰관이 24시간 상주한다. 풍도에서 육지로 나오려면 하루 한 번 인천광역시 연안부두로 나오는 여객선 서해누리호를 타든가, 따로 요트, 어선과 같은 배를 빌려서 대부도나 서산시 삼길포항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보다 못한 국토교통부는 왕경5호를 대신하여 대부도 방아머리항과 이 곳을 오가는 차도선을 만들도록 하달하였고, 이에 2012년 12월부터 신규 투입된 차도선 '서해누리호'[1]가 대부도 방아머리항을 추가로 경유하면서, 진정한 안산 문화권으로 편입될 수 있게 되었다. 만세!
청일전쟁 때 이 섬 부근에서 해전이 발생했다. 이 전투는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비중있게 다루고 있어서 정작 본국인 한국 사람들보다 일본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찾아오고 있다나.
안산에서 가는 것보다 인천에서 가는게 더 쉽다는 점과 전화번호 국번이 032라는 점 때문에 인천 지역으로 오해받기 딱 좋다. 하지만 해경에서도 인천해양경찰서 관할로 뒀던 이 곳을 평택해양경찰서 개서 이후 평택서로 넘긴 점 등 인천의 굴레를 차츰차츰 벗어나고 있다. 하여튼 풍도야 우지마라
그냥 간단하게 풍도에서 대부도까지 서해대교나 영종대교급의 다리 하나만 놓으면 되는걸 가지고[2]
1박 2일 2014년 4월 6일과 13일 방송분에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4월 16일에 안산시 단원고 학생들이 탑승한 세월호의 침몰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세번째 방송분은 5월 11일로 연기.
2 중국 5대10국시대의 정치가
馮道. 881-954.
많은 왕조가 흥망하는 정치적 혼란의 시기에서도 변함없이 정상의 자리를 지킨 정치적 수완으로 유명하다.
무려 5개 왕조(후당, 후진, 요, 후한, 후주) 11명의 황제 밑에서 재상을 지냈다고 한다. 한마디로 황제는 계속 바뀌는데 재상은 그거랑 아무 상관 없이 계속 풍도였던 것(…).[3]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우유부단해서 적을 만들지 않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면밀하게 관찰하다가 왕조가 바뀌면 잽싸게 갈아타주며, 결정적으로 강자 앞에서는 넙죽 엎드려서 간도 쓸개도 빼다 바칠 정도로 비굴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신으로 요나라에 갔을 때 요 태종에게 "저는 재주도 덕도 없는 멍청한 늙은이입니다!"라고 말했던 일화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물론 5대10국시대의 주요 왕조가 싸움만 잘하고 내정능력은 바닥인 경우가 많으므로 실무경험이 많은 관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풍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재상인 풍도가 넙죽 넙죽 엎드렸기 때문에 무의미한 죽음을 피하고 자기 자신도 보신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으며, 유학의 보호자로 알려졌지만 후대 유학자, 심지어는 풍도 생존시의 학자들에까지 대체로 절조가 없다고 까였다. 워낙 5대10국의 주요 황제가 다 막장에 가까웠는지라 절조를 지킬 대상이 없다고 옹호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절조가 없긴 하다(…).
다만 왕의 말 한마디면 목이 뎅겅~ 하고 날아가는 전근대적인 시대에 절조 찾다가 역사에 이름도 못남기고 허무하게 죽어버린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누군가가 자기 목숨 버려가며 절조에 높은 가치를 둔다면, 누군가는 길게 오래 잘사는데 가치를 둘 수도 있는 거다. 지금이야 할 말 한다고 목이 날아가는 일이 없으니 아주 쉽게 옛 사람들에게 절조가 있네/없네 하고 평가하지만, 당신이 당장 3공, 5공때 말한마디 잘못해서 남산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받고 병신이 되어 나왔던 시대에 살고 있다면 절조 찾으면서 입바른 소리 할수 있겠는가? 일제시대때 수천만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괜히 입다물고 산게 아니며, 그 힘든 시대에 민족을 위해서 고난을 각오하고 바른 소리 했더 독립운동가들이 괜히 후세에 추앙받는게 아니다.
굳이 중립적으로 말하자면 '난세에는 보신의 천재, 평시에는 절조없는 인물'. 난세에는 '살아남는 것'이 절대 명제이고, 평화가 찾아온 뒤에는 그것을 유지할 '질서'를 강조하기 위한 차원에서 '충절'이 요구되니...
풍도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은 '설시(舌詩)'.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시로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할 때 자주 인용된다.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입은 재앙을 여는 문이고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혀는 자신을 베는 칼이니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입을 닫고 혀를 깊숙히 간직한다면 安身處處宇(안신처처우) 어디서나 거뜬히 몸을 편히 하리라 |
조선의 연산군은 풍도의 이 시를 내관들 허리춤에 차고 다니게 했다고 한다. 물론 자기한테 바른말 하면 조져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자기입장에서 충신인 간신들의 말은 듣고 진정한 충신의 간언은 씹겠다는 의미.
3 가면라이더 W의 주 무대인 도시
후토시의 한국식 발음. 후에 한국 방영판에선 그대로 '풍도'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