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강을 통한 수운이 발달한 한반도에서는 수상 교통의 비중이 높았다.
1 역사
1.1 신라의 수군
- 조분 이사금 대에 왜군이 쳐들어와 해상에서 화공전을 펼쳤다.
- 유례 이사금, 자비 마립간 때 대비책의 하나로 병선을 수리했다.
- 지증왕 6년(505년) 11월에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했고, 13년(512년) 6월에는 그 유명한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 있었다. 함대를 먼 바다로 보낼 정도의 능력이 생겼다는 것.
- 진평왕 5년(581년) 1월에 선박 관련 업무를 분리시켜 선부(船部)를 설치했다.
- 신라 수군이 기벌포 전투에서 23번 싸워 당나라 수군을 격파해 나당전쟁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 장보고가 남해의 섬 완도에 설치한 청해진은 중국 산둥 반도에서 일본 큐슈에 이르는 해상을 통제하여 사실상 공식적인 수군으로 활동했다. 이 때 병선을 교관선이라 한다.
- 신라 말엽 894년에 배 100척과 2천 5백명의 병력으로 일본을 습격하여 크나큰 피해를 주었는데 이 때 일본 측에 포로로 붙잡힌 현춘은 자신들이 왕의 명으로 파견된 군대라고 주장하였다.
1.2 후백제의 수군
일찍이 태봉 시절부터 고려에 비해 수군이 빈약하여 후방 나주를 왕건에게 내주고 있던 후백제였으나 932년 후백제왕 견훤의 명을 받아 상귀가 함대를 이끌고 황해와 예성강을 타고 북상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을 공격, 고려 함대를 급습하여 100여척을 불사르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저산도에 상륙하여 고려군이 기르던 군마 300여필을 약탈하고는 유유히 돌아갔다. 이후 상애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공격, 고려의 장수 만세장수만세가 이끄는 함대를 무찌르고는 다시 저산도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하다가 유금필이 의병을 일으켜 항거하자 돌아가버렸다.
1.3 고려의 수군
고려의 탄생은 사실 수군과 함께했다. 왕건은 궁예에게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임명되었으며, 903년 3월 후백제의 후방을 기습하여 나주 일대를 점령했다. 왕건은 나주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후백제의 사신단을 해상에서 나포하거나, 서남해의 섬들을 평정하였다.
고려 중기에도 지속적인 수군 활동이 있었으며, 고려 동해안 및 일본 연안을 노략질하던 여진족 해적과의 교전 기록이 일본측 사료에 남아있다. 또한 삼별초의 난 및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도 고려 수군의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려주는 사료들이 남아있다.
고려 말엽, 왜구에 시달리던 고려는 다시 한 번 수군의 활약으로 국난을 모면했다. 최무선은 화포를 제조하여 배에 탑재하는 혁신적인 시도를 하였으며,[1]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1.4 조선의 수군
조선 수군문서 참조.
2 배의 종류
2.1 신라
2.2 고려
- 누선 - 배 위에 다락집(누각樓閣)을 설치한 배를 부르는 말. 중국 한나라 때 기록에도 나오는 말이며, 판옥선도 종종 누선이라 불렸다. 여기서 말하는 고려시대 누선은 <고려사>에 나오는 것으로, 태조 왕건이 10척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 16보 길이의 대형선을 말한다.[2]
- 과선
2.3 조선
조선 수군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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