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군선옥론

1 개요

Clean Wehrmacht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국방군을 좋아하는 밀리터리 매니아들 중에서 독일을 과하게 옹호하는 입장이 강한 사람들은 제3제국 휘하 군대가 벌인 막장 전쟁범죄는 '사악한 나치당의 사병'인 슈츠슈타펠의 책임으로 전부 몰아가고, 국방군은 그저 나라를 위한 전쟁을 수행했을 뿐인 '군대'였음을 강조하며 국방군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슈츠슈타펠만큼은 아니지만 국방군도 상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일반인들의 통념과는 다르게, 국방군이 그저 전쟁만 수행한 깨끗한 군대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이 독일에서 그렇게 기세등등할 수 있었던 것에서 보이듯이, 당시 독일 국민의 상당수는 친위대만큼은 아니더라도 나치 이념에 동조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당연한 원리로 이런 성향의 국민들이 징집되어 구성된 국방군 역시도 나치 신봉자 비율이 상당했다. 슈츠슈타펠 포로,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전쟁범죄를 도맡아 한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국방군 역시 무장친위대와 같은 급은 아니라도 동부전선에서 전쟁범죄에 가담하였다. 제3제국 휘하 군대가 벌인 각종 전쟁범죄는 나치당과 슈츠슈타펠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국방군이 나치당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전쟁범죄를 벌인 피해자라는 소리는 어불성설이고, 결국 이들도 전쟁범죄를 일으킨 가해자였다.

2 국방군의 전쟁범죄

독일의 전쟁범죄 항목 참조.

3 냉전 상황에서의 이미지 세탁

실상은 이런데도 전문적인 역사학계의 학설에 기반한 국방군옹호론이 일반인들에게까지 상당히 퍼져 있었다. 꽤나 최근까지도 학계에서는 '더러운 SS, 깨끗한 국방군'이라는 통념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학계의 문제가 아니라 종전 직후의 국제정세에서 기인한 문제였다. 냉전 당시에는 독일의 전범행위 반성여부와 관련없이 서독의 재무장이 필요했고[1], 독일의 종전 직후 사회분위기 자체가 공산주의와 나치당에 책임을 돌리는 풍조가 강했으며, 이에 따라 독일이라는 국가의 오점은 최소화하고 나치당의 전범행각을 부각하는 학계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소련 역시 동독의 재무장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러자면 독일 국방군 출신들에게 어느 정도는 일을 맡겨야 했기 때문에 역시 비슷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런 입장은 2차 세계대전 세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70~80년대[2]가 되어서야 변화를 보였고, 보수적일수밖에 없는 독일군이 깨끗한 국방군 이론(Saubere Wehrmacht, Legende von der sauberen Wehrmacht)을 내려놓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3]

당시 독일인들의 인식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친 것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영국/미국에 대한 적의가 크게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폴란드소련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이었는데, 폴란드에 대해서는 1차대전 이후 폴란드가 독립할 때 독일 제국의 영토 일부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적대적이었다. 폴란드 회랑 지방은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갈라놓았으며, 여기에 기존의 폴란드를 비롯한 슬라브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우월감이 1차대전 이후 독립한 폴란드와 갈등을 치르면서 인종적 적대감으로까지 번졌다.

1차 대전 이후 독일 본토 일부가 할양되었을 때 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나라가 폴란드였으며,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는 전쟁을 회피하려던 독일 군부조차 폴란드 침공을 적극 옹호할 정도로 독일은 폴란드에 적대적이었다.[4]

소련에 대해서는 당시 독일 사회에 횡횡했던 유대ㅡ공산주의의 본산인 소련이 독일인의 삶의 터전을 위협할 것이라는 생각이 독일인들 사이에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은 거의 1천년에 가까운 동방진출의 역사를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제 3제국까지 이어지면서 동유럽을 독일이 당연히 먹어야 할 땅으로 인식했다. 여기에 앞서 말했듯이 슬라브인들에 대한 독일의 기존의 우월감까지 겹치면서 이러한 공포는 인종적 적대감으로 번졌으며, 이에 따라 저 놈들 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그러니까 죽기 전에 먼저 선빵때려서 다 먹어치우자라는 실로 병맛스러운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그래서 그 소련이랑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폴란드를 갈라먹은 건가? 음?

따라서 폴란드 및 소련과의 전쟁은 생존영역을 두고 싸우는 혈투지만, 영미 연합군과의 전쟁은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5] 이 때문에 국방군은 서부전선에서는 대체적으로 신사적으로 전투에 임했고 이것이 깨끗한 국방군 이론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 물론 동부전선에 비하면 미미하기는 하지만 서부전선에서도 어느 정도 전쟁범죄가 있었다.[6]

이러한 실태와 달리 깨끗한 국방군론이 퍼질 수 있게 된 원인은 종전 직후의 국제정세에서 기인한 문제였다. 종전 이후 독일은 군을 완전히 해체당했으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의 낙인을 받고 군대를 조직할 수 없게 되었지만, 당장 미국과 소련 모두 전범국이고 뭐고 간에 일단 방패막이로써의 독일군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독일군'의 재건이 필요했고, 이를 위한 과정에서 국방군의 전쟁범죄는 대부분 슈츠슈타펠에게 뒤집어 씌워지게 된 것이다. 슈츠슈타펠이 옹호할만한 조직은 결코 아니지만, 어찌 보면 남이 한 일까지 뒤집어 쓴 셈이다.

전후에 살아남은 국방군 복무자나 장성들 역시도 회고록을 비롯한 서적들을 집필하면서 모든 책임을 히틀러와 나치당, 슈츠슈타펠에게 돌리는 책임전가자기합리화의 진수를 시전했는데, 이들의 의견 역시도 깨끗한 국방군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이들 가운데 오직 나라를 위해 복무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들도 본의든 아니든 결국 침략전쟁을 수행한 일원임에는 분명하며, 독일군의 전쟁범죄는 이러한 '깨끗한 일부'로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는 점이다.

국방군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연방군(서독군)은 자신들이야말로 이런 "국방군 무죄설"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국방군의 모든 것들을 흑역사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전통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물론 국방군의 군국주의의 원천이었던 구프로이센 영역이 모조리 공산국가인 동독이나 폴란드나 소련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인적 유입이 없어진지라, 서독군이 전통을 내세우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냉전시대에는 오히려 동독군이 프로이센군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강조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그리하여 2차대전 당시 개별 장병들의 전공은 인정해주었지만, 국방군으로부터 내려오는 군복, 군기, 부대, 조직의 전통은 깡그리 부정하고 전후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7]

이러한 '깨끗한 국방군'을 비판하는 서적으로는 볼프랑 베테가 저술한 <독일 국방군 - 2차 대전과 깨끗한 독일군의 신화>가 있다.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다. 다만 해당 서적은 역자 후기에서 비판했듯이, 자료를 잘못 인용한 경우도 많으며 본문에서도 '~~했을 것이다' 하는 식으로 추측식 서술로 인한 무리한 논리 전개와 치우친 관점으로 공정성의 논란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국방군이 학살에 조직적으로 개입, 방관했다는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차 대전 당시 육군 원수였던 발터 모델은 "군대는 반드시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하며 무력으로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책무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을 비판한 바 있다. 군인은 당연히 현 정부에 대하여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믿어온 만큼 정치적 발언조차 금기시켰으며, 정 하고 싶으면 군복을 벗은 다음에 하면 된다고 자신의 부관에게 말할 정도였다. 한 예로 1944년에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에서 SS 국가지도자 겸 보충군 사령관인 하인리히 힘러 장군이 진압 병력을 바르샤바로 파견할 것을 명령했을 때 모델은 "바르샤바 봉기는 폴란드인에 대한 나치당의 가혹한 통치로 인한 것이며, 이러한 후방 지역의 민간인 소요 사태에 절대로 군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며 거절한 바 있다.

그러나 죽기 하루 전인 1945년 4월 20일,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라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히틀러 정권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모델의 군적은 루르의 B집단군이 해산한 4월 17일 자로 말소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정치적 발언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인터넷에 보이는 일부 밀덕들이 독일 국방군을 옹호하고 있는데, 위에 서술한 것들이 전부 무효라고 쳐도, 국방군 역시 히틀러의 만행에 방관한 건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방관은 악을 꽃피우는 법이다.

4 기타

일본군에는 비슷하게 해군선옥론이 있다. 이 쪽은 일본군이 저지른 온갖 악랄한 짓은 다 육군이 한거고, 해군은 착하게(?) 전쟁만 했다는 내용. 실제로 해군이 육군에 비해서 양호한건 사실이지만 이건 당시 전 세계적으로 해군이 지상군에 비해 좀 더 매너있게 싸운 경향이 큰지라 일본 해군만의 특징은 아니다.

5 매체에서

국방군 옹호론의 모습을 보이는 작품들 중 상당수는 대중들에게 각인된 이미지를 반영한 것일 뿐이지 진짜 옹호론을 펼치는 것이 아닌 경우도 많다. 아무래도 국방군보다는 SS를 악역으로 만드는 게 주인공들 편에서 잔혹한 짓을 해도 훨씬 덜 비난받는 편이기 때문이다.

5.1 국방군 무죄론을 내세운 작품들

  • 강철의 누이들 - 주인공 김한얼의 생각 중 "성질 좋은 국방군 장교와 성질 더러운 친위대 장교"라는 등 기본적으로 친위대는 나쁘고 국방군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생각이 자주 드러난다. 저것만 있다면 김한얼의 생각일 뿐이라고 옹호해볼 수 있겠으나 이 소설은 1인칭이고 김한얼은 주인공이다. 주인공이 공공연히 그런 주장을 하고 제3제국이 모티브인 미테란트의 군인으로 연일 개가를 울리며 나치가 저지른 전쟁범죄는 소련모티브로한 국가에게 몽땅 떠넘겼으니 단순히 그만의 생각이라고 볼 수 없다.

5.2 국방군 무죄론을 부정하는 작품들

  • 브레스트 요새 - 독일 육군 병력들이 수술이 진행중이던 병원에 처들어가 의사와 간호사를 폭행하거나(다만 실제론 전쟁 초기엔 이정도는 아니었다는 학자들의 반론과 증거도 있어서 의외로 논란이 있다.), 소련 육군 포로들 중 유대인정치장교를 사살하는 등의 모습이 그려진다.
  • 요한의 타이거 - 주인공인 육군 전차장 요한이 대전 초기 자신의 행적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과 포로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소련 육군 포로를 일렬로 세워놓고 권총으로 직접 죽이는 장면에서는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
  • 컴 앤 씨 -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을 다룬 영화. 작 중 악역의 대부분을 육군이 담당한다. 아직도 깨끗한 국방군 이론을 주워섬기는 사람이 많은 독일에서는 SS와 국방군을 착각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감상을 많이 내놓는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 - 작중 자신을 살려준 밀러 육군대위를 사살하는 독일 육군과, 반대로 업햄을 살려주는 빠박이 무장친위대 장병이 함께 등장한다. 무장친위대의 사악하게 나오지 않으며 오히려 독일국방군인이 더 나쁘게 나오는(물론 이것도 고의는 아니다.) 드문 영화지만 한국에선 이것을 잘 몰라 유대인인 스필버그가 독일만 차별한다는 편견이 있었다.
  • 바르샤바 1944 - 작중 무장친위대의 학살이 더 비중이 많은데 그거야 고증에 맞춘 것이고[8] 국방군도 전혀 무고하게 나오지 않는다. 후반에 주인공을 살려주는 육군 병사가 나오기는 한다만 그 병사는 폴란드인들이 목숨을 구해준 군인이다. 오히려 그 병사들의 동료들은 민간인이 대량학살된 현장에서 "야 신난다"며 교성 지르며 즐거워하며 수색을 한다. 전혀 무죄론 작품이 아닌데 영화를 잘못 본 유저 때문에 무죄론에 올라가는 수모를 당했다.
  •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 1화에서부터 빌헬름이 전투중 잡은 소련 육군 정치장교를 중대장이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지뢰밭을 만나자 프리트헬름이 소련의 농부들을 지뢰밭에 앞장세우자고 제안하며 다들 거기에 기꺼이 찬성한다. 2화 에선 마을 민간인을 처형하는 장면이 나온다. 근데 이건 슈나이더 상병이라는 모스크바 공방전부터 함께해온 베테랑 육군 병사가 마을사람들에게 죽어서다. 3화에선 프리트헬름이 폴란드에서 주둔중에 빨치산을 도와준 마을사람들 처형하며 다닌다. 다만 도망가는 소년을 자신이 셋을 셀테니 쏴죽이라 지시한 지휘관은 SS 보안대 소속 대령이다.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 주인공인 에른스트 그래버 병장이 소속된 중대는 소련 민간인들을 무고하게 빨치산으로 몰아 처형하곤 한다. 물론 주인공인 그래버와 그의 동료인 임머만, 사우어, 베르닝, 슈나이더 등이 모두 '꼭 이렇게 해야만 할까?' 라면서 처형하기를 꺼려하고, 히른쉬란트라는 병사는 소련 민간인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자살하는 장면까지 나오며, 슈츠슈타펠 출신 병사인 슈타인브레너만이 학살하기를 매우 찬성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국방군의 전쟁 범죄를 부정하는 작품 아니냐 하겠지만 일단 국방군 병사들이 민간인들을 처형하는 명을 받는다는 장면이 나오고, 병사들의 심정이야 어떻든 일단 민간인들을 쏴 죽이긴 죽였으니까 국방군 옹호론을 부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중대장인 라에와 소대장인 뮬러, 주임원사인 뮤케 등은 모두 국방군이면서 나치즘에 잔뜩 중독된 인물들로 묘사된다. 또한 이 작품의 원작을 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매우 극렬한 반나치주의자이다. 당연히 그가 국방군 옹호론이 담긴 작품을 쓸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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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실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섬나라라는 지정학적 특성과 평화헌법이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존재했기에 일본은 군을 부활시키는 대신 명목상 자위대를 조직했고, 미국 등은 이를 실질적인(de facto) 군대인 상태로 존재하도록 묵인했다. 물론 소련이 홋카이도를 공격한다같은 시나리오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졌기에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실제로 이 모든 것은 미국의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경계심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프랑스나 소련같은 경우는 독일을 아주 말려 죽이려고 할 정도로 증오심이 대단했었다. 실제로 현재에도 프랑스와 러시아, 그리고 폴란드, 벨기에, 네덜란드 등은 국민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아직도 독일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저 다섯 나라 모두 대표적인 반독 국가.
  2. 육군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전후 서독 연방군 재건 자문을 맡았고,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육군상급대장 프란츠 할더 장군은 미 육군 전사연구관으로 일하며 민간 공로훈장을 받았다. 대전 말기에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육군대장 아돌프 호이징어 장군은 신생 서독 연방군의 첫 국방참모총장, 북대서양 조약기구 군사위원회 의장직을 수행하였으며, 육군원수 에르빈 롬멜 장군의 참모장이었던 육군대장 한스 슈파이델 장군은 북대서양 조약기구 연합지상군 사령관을 지냈다. 국방군 제7야전군 참모장이었던 육군중장 막스요제프 요한 펨젤 장군은 울름 주둔 연방군 제2군단장을 역임하고 1961년 9월 30일 예편하였다. 이들 구 국방군 고위층이 현직에서 물러나거나 세상을 떠나고서야 국방군을 다시 보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3. 다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독일 정부가 어쨌건 나치 독일의 후계자로 그 유산을 그대로 갖고 출발했기 때문에 당시 독일국방군과 독일 사회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무장친위대는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나치당의 사병이었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4. 하지만 폴란드 입장에서는 폴란드가 독립 이후 차지한 영토는 폴란드 분할 이전에도 폴란드 영토였으며, 해당 지역은 폴란드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폴란드인들은 원래대로라면 폴란드 영토가 되었어야 할 그단스크국제연맹 하의 자유도시가 된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
  5. 가령 육군 전차 에이스인 오토 카리우스 기갑중위같은 사람은 물론이고 높게는 히틀러도 '연합군이 우리와 힘을 합쳐 소련군을 몰아내주겠지?" 라는 생각을 했는데 일반인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하고 한판 붙었다가 밀리고 중립국이었던 미국의 선박을 무자비하게 격침시켜놓고서 연합군이 자기들이랑 힘을 합쳐서 소련을 몰아내줄거라고 생각한게 어이없기는 하지만.
  6. 다만 서유럽의 연합군 포로의 사망률은 2% 수준이지만 동유럽에서는 57% 수준이다. 저게 어느정도인지 감이 안온다면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미군의 사망률이 27%이고 중국군 포로까지 집계해서 최대로 잡아도 40% 전후임을 감안하면 엄청 높은거다.
  7. 하지만 서독군(독일연방군)의 초기 지휘관들은 대부분 국방군 출신이었다. 이는 사실 소련군이 재건한 동독군도 마찬가지. 물론 어쩔수는 없는 일이다. 숙련된 장교 한명을 육성하는데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 생각해보면 된다.
  8. 바르샤바 봉기 진압 당시, 악명을 떨친 디를레방어 여단, 카민스키 여단이 무장친위대 소속이었고 이후 봉기 생존자와 폴란드 민간인 20명이 학살당한 불라 학살을 저지른 에리히 폰 뎀 바흐 장군 역시 무장친위대 소속이다. 튿히 폰 뎀 바흐 장군은 아예 작중에서 언급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