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명령 9066호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미국이 공표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정책. 아무래도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타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행위이긴 하나, 이 사건은 미국의 화려한 흑역사들 중에서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한 흔치 않은 사건 중 하나이다. 미국 내에서 꾸준히 역사교육 차원에서 거듭 강조되고 반성적으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아시아인인 일본인에 대한 미국 및 연합국의 시선은 독일인이나 이탈리아인 등에 대한 시선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서로 싸우면서도 서로를 무시하지는 않고 적수로 여기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끼리의 전쟁과는 달리,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 것은 미국인들의 엄청난 분노와 경멸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사회의 어엿한 일원이었던 흑인에 대한 인식도 미묘했던 시절이니 동양인들에게는 오죽했겠는가?

또한 이 조항으로 일본계 이주민 뿐만 아니라 30만명 이상의 독일계 이주민과 70만명 이상의 이탈리아계 이주민에 대해서 지문, 사진을 등록하고 주소지를 조사해 이주를 제한당하였다. 또한 자체적으로 판단한 위험 인물에 대해서는 수용소에 보내거나 추방했는데, 대략 11,000명 이상의 독일계 이주민이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4,000명 이상이 남미로 추방되었다. 이탈리아계 주민도 3,000명 이상이 수용소에 강제 수감되었다. 같은 이유로 일본계가 많은 하와이에서는 일본계 이주민들의 격리는 제한적으로 진행되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행정명령은 당시 미국 헌법 및 국제법에 의거해 명백히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였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사실 연합국은 추축국의 병크가 워낙 크기도 하고 승자이기도 하다보니 전쟁범죄에 대한 심판을 제대로 받지 않았을 뿐 저지른 사건도 많고, 그나마 이 사건은 미국이 냉전으로 공산주의 진영과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필요하였기에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필리핀 침략전쟁 같은 경우는 2000년대가 되기 전까지는 필리핀 폭동, 반란 정도로 다루어졌을 정도니 말 다한 것. 애초에 전쟁의 승리라는 대의 때문에 인권을 무시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대부분의 전쟁범죄도 비판받을 여지가 줄어들고, 의도는 무척 좋았던 구 공산권의 여러 정책들도 정당화될 것이다.

그러나 설령 이 행정명령이 없었더라 해도 당시 인권의식 수준 등을 따져봤을 때 원조 미국인들이 일본계를 가만히 놔뒀을리는 없다. 또한 미국계 일본인들이 일본에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받은것에 비하면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한 대우는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물론 피장파장의 오류 아니냐는 논란은 있겠지만, 적어도 두 집단이 받은 대우는 절대 피장파장이 아니었다. 절대 이 사건을 미국의 전쟁범죄 식으로 과장해서 추축국의 전범 행위를 희석시켜선 안된다.

이 당시와 그 후의 일본계 미국인의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조지 타케이TED 교토 스피치를 참조해도 좋다.

2 1941년 이전

19세기 중후반 새로운 희망을 찾아 신대륙 미국으로 떠나는 이민자 중에는 아시아계도 상당했다. 서부개척지대의 건설현장 및 광산, 농장 등에 필요한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미국에게 아시아계 이민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이 당시 중국인들의 대량 유입으로 쿨리라는 단어가 정착될 정도였다.

아시아계 노동력은 크게 중국계와 일본계로 나뉘어졌으며 물론 한국계도 상당히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하와이캘리포니아, 워싱턴, 오리건 등 미국 서부 및 태평양 연안지역에 주로 분포하여 정착하고 살았다. 이들의 이민은 이후 꾸준히 계속되어 현지 사회에서 자기들만의 사회를 조직하면서 동시에 미국 사회에 동화되고 기반을 쌓았다.

그러나 유럽계가 대부분인, 명백한 백인 국가 미국으로서는 아시아계의 이러한 모습을 곱게 보지 않았다. 미국 주류사회는 아시아계를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길 꺼려했고, 크고 작은 차별이 잇달았다.

그나마 중국계에 대해서는 차별이 약간 덜 하였으나, 1920년대 이후 지속된 미일관계의 악화로 일본계에 대한 차별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그래도 일본 이민사회는 이러한 편견에 맞서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였고, 악화되는 미일관계 속에서도 별 일이 터지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그 별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것도 엄청 스펙터클하게(...)

3 개전 직후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 사회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집안에 보이는 MADE IN JAPAN은 모조리 파괴해버리고, 일본에서 보내준 벚꽃나무를 베어버리는가 하면, 일본계 미국인들이 직장에서 해고되었으며 일본계가 거주하는 집이나 상점에 돌이 날아드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개전 초의 불리한 전황과 함께 더더욱 심화되어 일방적인 분노와 적대감의 표출, 그리고 이에 따른 공포감 조성으로 이어졌다. 진주만 공습 당시에도 현지 일본계 주민들에 의한 테러 우려로 전투기들을 활주로 가운데에 모아두었듯, 미국인들은 일본계들이 테러나 사보타지 활동에 나서며 일본에 동조할 거라고 불안해 했다.

더군다나 일부 일본계 이민 1세대는 고국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어서, 미국과 일본이 전쟁중인 와중에 고국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병크를 저지르고 있었다.(...) 2세대들 중 일부도 1세대들 못지 않은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니하우 사건이다. 요약하자면 하와이에 불시착한 일본인 조종사를 지킬려고 하와이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들이 조종사와 함께 원주민들과 대치해 원주민 1명이 총상을 입고 조종사 포함 일본인 2명이 죽었다. 조종사는 몸싸움 중에 살해됐고, 조종사를 도와 준 일본인은 자살했다. 게다가 이들은 민간인인 원주민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거나, 도주하는 과정에서 16세 소년을 납치해 인질로 삼기도 했다. 이 사건이 본토로 알려지게 되자 이미지는 더더욱 안 좋아졌다.

특히 당시 일본계 미국인 1만 명이 일본 군인연맹에 소속되어 일본 육군에게 기부금을 보내고 있었으며, 5천 명이 제국 동지회에 가입하여 미군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기로 결의한 상태였다. 또한 전시 일본군에 입대한 일본계 미국인은 최소 1648명에 달했다. 미국으로서는 당연히 일본인들의 이반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2월 19일,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했다. 이로서 미국은 적성국민들을 강제적으로 거주지에서 내쫓아 수용소에 강제 수용시키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당시 미국의 교전국은 일본 외에도 독일이탈리아가 있었지만 주 타겟이 일본계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4 시행

행정명령 9066호에 따라 주로 미국 서부지역과 아리조나 주 남부에서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이 그저 일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와이오밍, 콜로라도, 아이다호, 유타, 아칸소 등에 건설된 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야말로 일본 출신이라면 무조건 끌고 갔다고 볼 수 있으며 재산권 또한 일체 행사할 수 없었다. 몇 안되는 예외가 바로 일본계 미국인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서 전부 수용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하와이에 살던 사람들과 백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계 여성.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경제적, 정치적으로 모두 미국의 식민지나 다를바 없던 쿠바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다만, 여긴 미국과 달리 공평하게도 일본계 이민자 말고도 이탈리아계 및 독일계 이민자 수천여 명까지 임시 수용소에 수감했고 1년 정도 있다가 모두 석방되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 재산도 찾을 수 있었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일처리가 상당히 개념있게 진행되어서 이제는 현지인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5 수용소 생활

강제 수감된 이들은 빈약한 시설 속에서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일본계 미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즉 조국 미국에 대한 충성을 입증하기 위해 새로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일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식료품 및 생필품 외에도 군이 요구하는 전시물자 생산에도 적극 협력했으며, 미국 역시 이들을 잘 써먹으면서 어느정도 자유로운 영내 행동을 보장하거나 학업 문제가 있다면 외박은 안 되더라도 외출을 허용해주거나 의료 시설을 갖추는 등 기본적인 의식주 정도의 지원을 해주었다. 그나마도 수용소에 따라 마굿간 등에서 살아야했던 곳도 있었다고.

물론 엄연히 강제 수용소이다 보니 주변에 철조망이 쳐지고 무장병력이 경계를 서고, 탈출 시도를 하다가 사살당하는 일도 벌어졌다.물론 국운을 건 총력전을 펼치던 유럽 국가에서야 진영을 가리지 않고 이 정도 조치는 일반적이었지만[1] 당시에 본토가 전장이 된 적도 없는 미국과는 사정이 다르기에 같은 조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미국이 입은 피해를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미국은 국가의 존폐를 걸고 타국과 전쟁을 한 적이 없는데 당장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일본조차 미국이 전선을 확대하는 것을 꺼려 자신들과 협상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미국을 점령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게다가 격리 수용소임에도 노동 수용소마냥 전시물자 생산 등에 동원했던 것 또한 전후 이들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다.[2]

6 전후

전쟁이 끝을 보기 시작하던 1944년부터 수용소가 하나둘 폐쇄되기 시작하였고, 종전 후 수용되어 있던 일본계 미국인들은 모두 풀려나서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전쟁 전 이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들은 대부분 이미 몰수되었거나 급처되었으며 잃어버린 기반을 되찾으려 노력한 수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간신히 일구어 두었던 미국에서의 기반을 거의 잃고 말았다. 실제로 재산을 되찾은 사람은 별로 없다.

즉 이들은 자신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짧게는 3년, 길게는 4년간 강제 수용을 당하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으며 이는 거의 되찾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이 행정명령이 얼마나 심각한 병크였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소련 및 중국의 견제에 있어 일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지자 미국 정부는 이러한 과거에 대해 간헐적으로 사과하기 시작했으며 최종적으로는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한 사과와 1인당 20,000달러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보상금은 80년대 후반 당시 생존자에게만 지급된 것으로, 이 부분은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다. 여담으로 이 건에 대해서 끊임없이 언급하면서 결국 미국이 사과하는 형태를 만든 사람 중 하나가 위안부 문제로 유명한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관련기사

7 제 100대대

1941년 당시 하와이 해안경비대에는 일본계 병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진주만 공습이 있게 되자 당연히 무장해제를 당한다. 하지만, 미육군의 Delos Emmons소장은 일본계 젊은이들 중에도 미국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지원병을 모집한다. 이 과정에서 약 2,000명의 지원자가 모였지만 미국방부는 처음에 이들을 군대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이후 미육군은 하와이 해안경비대출신 병사들과 수용소에서 지원한 병사들 1400여명으로 구성된 100대대를 편성했다. 다시말하면 이들은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군대에 지원한 지원병이지 미국이 강제로 군대에 몰아넣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방부는 이 부대의 편성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이 합병해 버렸기에 없는 나라였고, 보통 이민올 때 국적을 일본이라고 쓰는 사례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이 사건이 터졌을 때는 한국계도 일본계로 취급되어 같이 수용당하거나 100대대에 들어가기도 했다. 2차대전 전쟁 영웅중 한명인 김영옥 대령이 이 부대 출신이며, 이 사람이 한국계임에도 100대대에 들어간 이유도 미국에서 그를 일본계로 취급했기 때문이다.[3] 또한 미국 상원에 최다 선출 기록을 가진 대니얼 이노우에라는 의원도 이 부대 출신이다.[4]

군대에 입대한 100대대 대원들은 반쯤 인질로 잡힌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으로 인정[5]받고 싶어했으며, 그래서 유럽 전선에 투입되었을 때 정말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이 100대대를 니세이 부대(2세 부대)라고 불렀는데, 어찌나 잘 싸웠는지 나중에 100대대를 본딴 다른 니세이 부대를 창설했을 지경이다. 그것이 저 유명한 442 연대전투단. (원래 1, 2, 3대대와 552 야전포병대대, 232 공병대대와 기타 지원대로 구성됐는데, 후에 100대대가 442의 1대대로 통합된다.) 442 연대전투단은 부대 모토가 "Go for Broke!(가서 죽어라!)"일 정도로 가열차게 잘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일화 중에 하나가 당시 김영옥 대령이 소대장으로 있을적에 직접 수류탄 들고 기관총좌에 돌격하다 총에 맞자 울컥한 100대대 부대원 전부가 "반자이~!"라고 소리지르며 기관총좌에 반자이 어택(!)을 감행해서 독일군들을 충공그깽에 몰아넣었고, 사실 김영옥 대령 본인은 경미한 부상만 입었기에 쓰러진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수류탄을 독일군 총좌에 까 넣어 부대원을 엄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후에도 다른 인종 사람들은 그냥 'JAP'(일본인에 대한 멸시 칭호)으로 취급했으나, 대략 1960년대쯤부터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미국 정부에서 반성적인 태도를 취하고 미국인들 또한 이들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일본계 미국인 사회에서 이들 100대대 출신을 비롯한 2차 세계대전 참전자들의 발언권은 상당하다. 나이도 나이거니와 국가[6]에 충성하기 위해 자원해서 전장으로 간 사람들이기 때문. 일례로 캘리포니아 의회에서 위안부 관련 결의를 채택하려고 할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이 채택 반대 로비를 벌이고 있었는데 김영옥 대령을 비롯한 2차대전 참전자들이 우리가 유럽에서 싸운 것이 뭘 위해서였습니까?라는 말로 설득하여 로비를 그만두게 했다는 얘기가 있다.

8 대중문화 속에서

미국의 흑역사 중 하나라서 미디어화가 많이 된 편은 아니다.

1976년작 영화 미드웨이에서 찰턴 헤스턴의 아들이 일본계 미국인 여성과 사귀고 그 여성의 가족이 수용소에 들어간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여기서 그 일본계 여성이 헤스턴에게 "우리가 독일, 이탈리아계 미국인과 다른 게 뭐죠?" 하고 물으니까, 헤스턴이 핵심을 찌르는 대사를 날린다 "글쎄, 진주만 아닐까?"(...) 근데 마지막 장면에는 그 여성이 하와이에서 항모를 맞이하고 있다. 뭥미? 전에는 개드립이라는 의견이 있었으나 진주만 공습이 미국에 준 충격과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고위 정치가들의 아들들[7], 스타 운동선수들, 영화배우들, 변호사, 은행가같은 엘리트 청년들까지 죄다 눈이 뒤집혀서 군대로 달려갔으니... 반면 독일,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같은 백인인 것도 있지만 직접 맞은 것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반감이 덜했다.

앨런 파커의 "컴 앤씨 더 파라다이스"가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소수자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다루는 영화로 데니스 퀘이드는 이태리계 사회주의 노조 활동가, 약혼자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당연히 진주만 공습과 함께 여주인공 일가는 수용소로 직행하는데. 수용소 장면의 고증은 상당한 수준이다. 데니스 퀘이드도 전력이 탄로나 결국 감옥으로 고고씽...한국에서는 개봉하지 않았고 대신 '폭풍의 나날'이라는 이름으로 비디오 출시되었다. 미국 내 흥행은 그다지 안 좋았다.

미국 드라마 콜드케이스에서도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필라델피아에 거주하고 있던 한 일본계 가족이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모두 수용소로 끌려간다. 가족들은 열악한 수용소 환경에서도 어렵게 견디며 살아가지만, 아들은 군에 입대하여 싸우다가 아군을 위해 희생하며 전사한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에서 해방된 후 필라델피아에서 살해되었으나 범인은 찾지 못하고 미결 사건으로 남게 된다. 수십 년 후 딸이 릴리 러시에게 찾아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릴리 러시는 이 사건을 수사하게 되며 사건을 해결한다. 아들의 백인 친구가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후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이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해 오는 아버지를 충동적으로 살해해 버린 것.

70년대 미드 원더우먼에서도 원더우먼이 자신의 형제를 죽였다고 오해한 염동력을 쓰는 초능력자 이시다와의 대결이 나오는 2시즌 3화 The Man Who Could Move the World도 이를 배경으로 다뤘다. 일본에선 드라마 원더우먼을 처음 수입해 방영할 때는 이 에피소드가 빠진 채 방영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가공전기물에서는 대부분 수용소에 갇힌 일본계 미국인들을 정의의(...) 황군이 구출하는게 결말이다. 근데 애초에 원인제공자들은 니들이잖아?

진주만 공격 당시 3차 공습이 진행돼서 태평양 함대와 연합함대의 수상격전이 시작되는 내용인 뉴트 깅그리치의 대체역사소설 Days of Infamy에서는 행정명령 9066이 실제보다 빨리 진행될 것을 암시한다. 주인공중 하나가 일본인 여성과 사귄다는 점에서 주요한 떡밥이지만 2권 이후로 출판이 되지 않아서 결말은 모름.

일본이 하와이를 점령한다는 내용의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The End Of beginning에서는 "해방"시켜준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해서 막상 일본군들은 좋은 입장을 가지지 않은 걸로 나온다. 심지어 하와이 거주 한국인들을 일컬어 "미국인 행세하는 인종들"이라고 표현한다. 유일한 예외인 이민 1세대 어부 노인은 방송 요원으로 활약하지만 작품 마지막에 간신히 일본군 패잔병들과 함께 탈출해서 나가사키에 정착한다. 흠좀무.

일본에서는 2010년 11월 3일부터 5회에 걸쳐 TBS 계열을 통해 방송된 '99년의 사랑 - JAPANESE AMERICAN~ 에서 이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일본의 유명 각본가인 하시다 스가코가 각본을 담당했으며, 주연은 쿠사나기 츠요시(초난강), 나카마 유키에, 나카이 키이치, 마츠야마 켄이치, 오오스기 렌 등.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일본의 한 가족이, 일본계 1세를 구성하고 전쟁 등을 겪으며 종전까지 이야기가 진행된다. 행정명령 9066호의 묘사는 2화, 3화를 통해 그려진다. 4화, 5화에서는 일본계로만 구성된 전투부대 442연대 전투단의 활동, 그리고 종전 후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묘사가 두드러진 것이 특징.

그린호넷 코믹스인 Kato: the origin 1권은 이 당시를 다루고 있다. 케이토는 리드가 한국계로 위장시켜서[8] 무사했지만, 한국인으로 알려진 식료품 가게 주인이 원래 일본인 스파이였다는걸 알고 배후를 캐기 위해 케이토 홀로 수용소에 잠입, 일본 스파이들과 싸우게 된다.

린킨 파크의 멤버 마이크 시노다도 자신의 프로젝트 그룹인 Fort Minor의 앨범인 Rising Tied에 Kenji라는 음원을 수록하였다. 마이크 시노다의 할아버지인 켄지 시노다는 1905년에 이주해온 1세대 일본계 미국인이었는데 일본에서 LA로 이민을 왔을 때는 15세였다. 그리고는 뼈빠지게 일하면서 자신의 꿈인 자신의 가게를 여는 것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FBI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수용소로 데려갔는데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이 방 곳곳에 쓰레기를 던졌고, 유리창은 깨졌고, 문은 박살이 났고... 벽과 바닥에는 일본놈들은 당장 니네 나라로 꺼져버려라![9] 뭐... 진주만 공습 이후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이런 취급을 받았는데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군대로 가는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꽤 있었다.

폴아웃 시리즈의 과거에선 미중전쟁을 치루는 동안 이 명령이 중국인을 상대로 한번 더 재탕되어 빅 엠티라는 군사실험연구소에 '리틀양쯔'라는 수용소가 생긴다. 무엇보다 단순한 수용소를 넘어서서 목에 폭탄 목걸이를 체우고 수용인들을 상대로 온갖 실험을 자행했다. 그 시설은 폴아웃: 뉴 베가스의 DLC Old World Blues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대총통령 3066호로 은근슬쩍 비틀어서 나온다. 3066호가 무엇인고 하면 군 내부의 이슈발 인들을 모조리 숙청함과 동시에 국가 연금술사들을 동원해 이슈발에 대한 대대적인 섬멸전을 한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다. 작가의 성향상 극우적 사관과는 관련없이 단순히 이름만 빌려온듯. 게다가 아메스트리스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슈발인이란 이유만으로 많은 숫자의 군인, 관료들이 숙청되고 아예 이슈발인이란 민족 자체를 말살하려 한 것이니 어찌보면 비슷한 내용이다. 훨씬 막나가지만

조지 타케이, 레아 살롱가, 마이클 리 등의 배우들이 참여한 뮤지컬 얼리지언스 (Allegiance)는 행정명령 9066호를 비롯한 어려움들을 안고 살아간 일본계 미국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1. 영국에 거주하던 6만 여명의 독일계 주민들도 반나치 인사를 제외하고는 수용소 생활을 하거나 거주지 제한조치를 당했고, 7,500명 이상의 주민이 추방되었다. 당시 시설이 베리, 리버풀, 맨 섬에 건설되었고 지금도 일부 시설이 남아있다.
  2. 다만 소련굴라그 같은 강제 노동 수용소는 아니었고, 나치스 같은 절멸 수용소는 더더욱 아니었으니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
  3. 그의 상관들도 그가 한국계인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었으나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남게 되었다고 한다.
  4. 이 양반에 대한 자세한 것은 명예 훈장 항목 참조.
  5. 그럴만도 한게 그냥 순수 한국 or 일본인이였으면 미국에서 배척받으면 그냥 생활기반이 있는 고향인 한국 or 일본땅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100대대 대원들은 혈통만 한국 or 일본계이지 완전히 미국에서 나고자란 사람들인지라 모든 생활기반이 미국에만 있기 때문에 그 미국에서 배척받으면 말 그대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였다. 떄문에 자신이 미국에 충성심이 있다는걸 전공을 통해 증명해보이고 싶어했기에 필사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
  6. 당연히 미국.
  7. 대표적으론 존 F.케네디가 있다. 이쪽은 전후에 참전경력이 유력할 수 있다고 계획적으로 입대한 것이긴 하지만.
  8. 그런데 이름을 그렇게 쓰고도 정작 심문하러 온 형사는 케이토가 한국인인줄 알아서 케이토가 백인들을 비웃는 장면이 있다
  9. 가사 원문에는 Japs Not Welcome Anymore 라고 쓰 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