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Henry Gerhard Appenzeller |
생몰년도 | 1858년 2월 6일 ~ 1902년 6월 11일 |
출생지 | 미합중국 펜실베니아주 숀더튼 |
학력 | 프랭클린 마샬대학교 졸 |
드류 종합대학 졸 | |
가족 | 아내: 엘라 다지 아펜젤러 장남: 헨리 다지 아펜젤러 장녀: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1] |
종교 | 개신교(장로교) → 개신교(감리교) |
1 소개
Henry Gerhard Appenzeller.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 보통 헨리 G. 아펜젤러라 표기한다. 올란도 블룸닮았다.
미주 펜실베니아주의 숀더튼의 독일계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2] 동주 소재지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 주의 드류 종합대학의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졸업했다.[3] 개신교 중에서도 감리교 신자로, 한국에선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했다. 같이 한국을 방문한 언더우드처럼 장로교 신자였으나, 성장하며 종파를 바꾸었다.
희비교차가 되는 부분인데, 처음에는 한국이 아니라 인도 제국(...)에 선교활동을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는 언더우드도 마찬가지로 인도 제국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1883년 커네티컷주 하트포트에서 개최된 전미 신학교 연맹 수련회에서의 기록까지만 봐도 인도행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로 미국인의 선교 활동이 자율화 되자 조선행이 가능해졌던게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아펜젤러의 변화는 1884년 프린스턴 신학교 선교모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1885년 부활절인 4월 5일에 갓 혼인한 그의 아내 엘라와 함께 장로교 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 그리고 같은 감리교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턴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과 삼일소학당[4]의 설립자.</ref>과 그녀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 으려고 했는데 조선땅을 밟자마자 미군측의 폴크 대사가 조선의 정세가 위험하여 젊은 여성(아펜젤러 부인)은 입국할 수 없다고 불허하였다.[5] 결국 아펜젤러 부부는 잠시 일본으로 가 머물다가 7월 29일에 다시 입국하였다. 언더우드는 홀몸이라고 바로 입국이 가능했다 비록 입국이 미뤄졌으나 그 날짜에 의의가 있기에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언더우드, 스크랜턴 모자, 아펜젤러와 함께 이 날을 한국 개신교 최초의 날로 본다. 여담으로 이 때 배에서 내려 입국할 당시, 처음에는 무심코 아펜젤러가 먼저 내리려 했다. 그러다가 최초로 한국 땅에 발을 내딛는 중요한 순간임을 깨닫고, 자신의 아내인 엘라가 먼저 내리게 했다.
이후 조선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이자 감리교 종립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감리교를 학교 이념으로 하여 세워지긴 했지만,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처럼 종파와 교리에 상관없이 조선인들에게 선교활동을 펼치라고 가르침을 행했다. 어째 요즘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보다도 150년전 사람들이 더 낫다 [6]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다. 배재학당의 학훈인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겨라.' 를 만들었고,[7] 그의 아들인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배재교가를 작사작곡했다.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의 응원가를 개사해 만들었다고 한다. 롸롸롸롸 씨스뿜빠 배재학교의 교표가 프린스턴 대학의 교표와 비슷한 이유도 바로 이것.[8]
1902년에 충청남도 보령시에 위치한 어청도 앞 바다에서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대판산성주식회사의 구마가와마루 호에 타고 있다가 같은 회사의 선박 기소가와마루 호와의 충돌사고로, 성격번역 작업에 동참하기 위해 같이 승선한 조한규와 정신여학교 학생을 구하려 탈출을 미루었고 결국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직하였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인양하지 못했으며,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가묘가 만들어져있다. 이런 아펜젤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서천 지역에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이 세워져 운영되고 있다. 한편 호러스 언더우드와는 친우관계이기도 했고, 교류도 왕성하여 정작 이 둘의 제자들은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을 두고 사반세기간 생사투를 벌였지만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연세대학교에는 아펜젤러의 이름을 딴 아펜젤러관(사적 제 277호)이 있다.
인성적인 면에서든 활동적인 면에서든 일제시절의 인물들 중 여러모로 귀감이 되는 이로, 현대에서도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 개신교계를 비롯해 역사학계와 교육학계에서도 그의 업적과 행보에 따른 역사적 의의 때문에 연구하는 이들이 많다. 또한 직접적인 조선의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거나 당시 조선에서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이들을 교육 및 계몽하는데 힘써 독립운동사에도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학생인권단체이자 독립운동단체였던 협성회를 조직한것도 아펜젤러가 최초이다.[9] 또한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는 독립운동가들의 산실 중 하나였다. 일단 종교 시설로 당시 경찰행정의 손에서 피할 수 있었고,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운영하고 있으니 일제로서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유관순 열사의 장례가 치뤄진 곳도 바로 정동제일교회.
배재고등학교는 창립자를 기리기 위한 아펜젤러의 동상과 초상화 등을 소장중이다. 관심이 있는 위키러라면 외부인 개방 시간에 배재고등학교 정문의 수위실에 문의를 하고 직접 볼 수 있으니 참고. 그 외엔 정동제일교회 근방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운영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10][11]
그의 아들 내외와 딸의 묘역은 합정역 인근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다.
2 종교 학술 및 선교 활동
지식인 출신 선교사 답게 조선에 있어서도 독자적이거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합하여 학술 활동을 꾸준히 하였는데, 이 같은 아펜젤러의 노력은 한국의 개신교의 근본에 큰 기여를 했다.
- 입국 직후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선교사회 설립.
- 배재학당 설립.
- 한국 성경번역부에서 언더우드와 게일 등을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마가복음, 마태복음 한국어 번역.
-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설립.[12]
- 서울지역과 인천지역에 내리교회 설립.
3 여러 에피소드
시대가 시대인지라 지금으로서 보면 참 기상천외한 일들도 많고 아펜젤러의 대인배스러운 면모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이승만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는데,[13] 이승만이 젊었을 적에는 하도 자주 불순행동 사유로 순경들에게 붙잡혀가 구금되어(...) 관할 경찰서에 가서, 어려서 실수를 한 것이라고 해명하여 구치소에서 빼오는 것이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이승만은 협성회 활동 및 만민공동회 활동으로 5년간 투옥된다도로 아미타불 - 그의 아들인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교장직을 맡으며 배재학교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다만 아펜젤러의 후손들이 직접적으로 학교 운영에 손을 댄 건 헨리까지.
- 헨리 다지 아펜젤러 이후의 아펜젤러의 직계 후손들도 배재재단과 현재까지 관계를 맺고 있다. 매년마다 그의 후손들이 한국과 배재고등학교를 방문하며, 상술한 아펜젤러의 동상 앞에서 조상의 봉사와 희생을 기리는 시간을 갖는다.
- 한편 조선에서 태어난 딸 앨리스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제6대 당장이 되었다. 앨리스는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고, 이화여전을 정동[14]서 신촌으로 옮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 한복도 즐겨 입었다고 한다. 아내와 자녀들에게도 한복을 입히기도 하고. 아펜젤러와 그의 가족들이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
- 1886년도에 한양에 콜레라가 크게 창궐하자 조선 왕실은 제중원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국고를 쏟아 부었는데 중간에 탐관오리들이 이 구제비를 야금야금 빼어가자 화가 몹시나 아펜젤러의 평소(?) 이미지와는 다르게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리들에게 가열찬 독설을 쏟아 부었다.[15]
- 하루는 자택에서 쉬던 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노비 계급의 어린 여자아이가 쓰러져 죽음 바로 직전에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 역시도 콜레라에 걸려있었는데, 아펜젤러는 감염을 무릎쓰고 자신의 집안에 들여 아이의 마지막 길은 그나마 따뜻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 ↑ 한국 최초의 외국인 2세...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좀 뭣하다. 하멜이 조선에서 체류중일때 분명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기 때문.
- ↑ 미들네임과 성을 보면 된다
- ↑ 미국 유학에 관심있거나 신학에 좀 안다 싶은 이들은 다 알겠지만, 드류대는 신학대로 굉장히 유명하고 저력있는 명문대학교이다. 물론 다른 학부도 유서깊다. 아펜젤러가 엘리트 계급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 ↑ 현 매향중학교와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의 전신
- ↑ 당시 갑신정변 발생 직후로 나라가 뒤숭숭했다. 그리고 엘라 아펜젤러는 임신 2개월차이기도 했다.
- ↑ 배재학당-배재고등학교에 종교적 특성이 두드러진건 오히려 광복이 이뤄진뒤 한참 후로, 국민들이 살만해지자 학교측에서도 차츰 종교 이념을 안착하였다. 그런 뒤 현대에 들어오면서 다시 종교 색채가 옅어졌다고.
- ↑ 정확히는 아펜젤러가 직접 한글로 적은 것은 아니고, 이는 훗날 배재고교의 교사 중 한명이 영어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 ↑ 헨리 다지 아펜젤러가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이었던 것 처럼 언더우드 역시 프린스턴 출신이기에 연세학당의 교표도 프린스턴 대학과 흡사하다. 이것이 그대로 이어져 연세대학의 교표가 되었다.
- ↑ 따라서 협성회 활동은 배재학당이 중심이 되었다.
-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은 인터넷 열람 서비스를 제공하며, 주말 구분 없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매주 월요일과 법정공휴일에는 폐관.
-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은 본디 배재학당의 동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으나 정부의 학군 편중 현상을 해소하기위한 정책으로 배재학교가 고덕동으로 터를 옮기며 기념 건축물로 운영 하였다가 2008년 부터 박물관으로 리모델링 하였다.
- ↑ 때문에 배재고등학교에서는 졸업생들을 수능 직전에 데려가는 것이 연례 행사라고 한다.
- ↑ 이승만은 개교 이후 초기의 제자 중 한명이었다.
- ↑ 중등과와 고등과는 정동에 그대로 남았고, 오늘날 이화여고와 이화외고로 이어 내려오고 있다.
- ↑ 그도 그럴것이 여러 항목으로 나뉘어진 구제비(제약비, 인건비 등) 중에서도 당시 돈으로 1만달러(!) 가량이 제물포 등지에 임시 진료소를 설치하고 운영에 쓰도록 책정되었는데, 이를 탐관오리들이 홀라당 먹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