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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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1.1 조선

개신교의 한국 유입은 서학(가톨릭)의 전래보다 상당히 뒤 늦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회의 주도로 동양 선교에 적극적이었지만 개신교가 주류인 영국,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의 북구국가들은 18세기 까진 해외선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들어 영미를 주축으로 장로회감리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많이 오면서 유럽의 개신교 구성과 달리[1]우리나라의 개신교단은 장로회와 감리회가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의 전래에 가톨릭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가톨릭 교회가 조선에서 탄압을 극심하게 받고나서 지하교회화 되었고 구한말 이런 제약이 풀리면서 조선땅에 전래를 유도한 것도 가톨릭 신자들의 역할이 컸으며 선교사들을 도와 번역이나 통역 한국 안내까지 가톨릭(개신교로 개종한 신자 포함) 출신 신자들의 공이 적지 않다.

한국에 처음 개신교가 전파된 연도는 1832년으로, 유대계 독일인 루터교 목사 칼 귀츨라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귀츨라프는 중국에서 선교활동 중에 조선의 소식을 듣고 다른 지원 없이 '혼자' 개인자격으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1000t급 로드 암허스트호에 의사 겸 통역사로 낑겨(?)서 황해도와 군산만을 돌아서 1832년 7월 25일, 충청도 고대도 부근에 도착하였다. 수십여 일밖에 머무르지 않았지만 서양감자 파종법과 포도 재배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짧은 기간동안 귀츨라프 선교사는 직접 한글을 배워서 귀환 후에 중국 선교 잡지에 발표하여, 독일과 영어권에 소개했고 자신이 독자적으로 주기도문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조선에선 25일을 머문끝에 지방관과 필담을 나눴지만 중국의 허락없이 통상을 금한다는 조정의 뜻에 따라 순순이 조선을 떠나게 된다. 귀츨라프는 해당 교단과 선교회에서 허락을 맡지 못해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아서 자비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외부 지원도 없고 조선의 협조 또한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개신교계에서는 1866년 조선에 온 영국인 개신교 목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로 본다. 그런데 토머스 목사를 순교자로 볼것인지 여부는 개신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다. 선교중에 사망한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 때문. 다만 선교 목적으로 온 것은 맞긴 하다. 일단 무장상선을 이끌고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로 들어왔다는 반개신교 입진보들의 인식과 달리 토머스는 이미 이전에 한국에 와서 넉 달 정도 선교를 하다 배가 파손되어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간 뒤 미국 배를 빌려 타고 잠입 중에 사망한 것이다. 자세한것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참조.

이후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믿기 시작하면서 개신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개화기에 이르러 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개신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선교사들은 특히 교육 사업에 중점을 두어, 배재학당, 연희전문학교, 이화학당 등의 미션스쿨, 숭실대학 등이 설립되었다. 또한 서울 각지에 승동교회, 정동교회 등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 개신교의 산실이었고 평양신학교는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교의 전신이다..[2]

이렇게 개신교가 확장된 이유는, 양반 계층 입장에서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최단 루트가 개신교 선교사를 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고, 오랫동안 소외받았던 일반 민중 및 하층계급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평양은 오래전부터 권력에서 밀려난 비주류 세력의 지방이었고 상인들이 활동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교세가 확장될 수 있었다.

선교 초기부터 주류 양반 계층은 제사문제때문에 서학 가톨릭이나 개신교든지 부정적인게 사실이었다. 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겼기에[3] 기독교를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無父無君)' 사학(邪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항이후 선교제한이 풀리면서 청나라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서양인들이라 조선 조정에서도 역시 서양인들을 무서워했고, 이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수탈이 심한 지역에 들어가 백성들 대신 지방관들에게 대들어서 (주로 황해도 평안도) 지방관들이 전전긍긍했다. (아무래도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은 유림의 세가 상당했기 때문).민중들이 개신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유학자는 개종하면서 개신교를 위군위민(爲君爲民)의 종교라고 극찬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포교 과정에서 서양 신문물을 선물하며 선교했기에 신문물에 거부감이 없는 상인 계층들에게서 환영 받았고, 이전의 천주교처럼 아녀자들이 신도의 대다수가 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은 지역 무당들을 집중 공략했다고 하는데 무당에게 더 쎈 존재가 있음을 납득 시키면 동네 아낙네들이 줄지어 개종하게 되는 성과(?)가 많이 나왔다 [4]

특히 평양 대부흥을 기점으로 1907년 경에는 천주교와 신자수가 역전되어 개신교가 기독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되며 한반도의 근대,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사실상 개신교가 주도했다 보아도 틀리지 않을 수준이 되었다.

1.2 일제강점기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 개신교의 중요 사건은 저항과 파괴로 볼수 있다.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에게 받아들인 개신교과 민족 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아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으며, 반대로 일제말기로 갈수록 극심한 탄압을 거치며 많은수의 기독교인들이 변절하게 된 것.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는 인터넷상 반 개신교 성향에서 극딜하듯 친일에 적극 나선것은 아니다. 신사 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타종교, 비종교인과 오십보 백보 또는 도찐 개찐. 같은 비판과 내부적 반성은 타당하나 아무 근거없이 개신교 개독이 친일에 앞장서 같은 헛소리는 역사 왜곡이다.[5]

단적인 예로 일제시대 내내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은 종교는 천도교와 더불어 개신교 였고, 신사참배에 거부하여 2천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고 200여개의 교회가 강제폐쇄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50여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까지 구한말 민족사학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개신교계 학교들을 통폐합시켜왔으며, 서양학문을 토대로 민권 사상등을 가르치는 통로 여겨왔고 이는 해방까지 계속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중에 15인이 개신교측 인사였는데 이 당시 개신교의 교세는 전체 인구의 1.1~1.3%에 불과했다. 당연히 일제는 개신교를 통치에 방해되는 집단으로 여겼고, 지속적인 감시 대상이었다. 한편 식민지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개신교인을 비롯한 기독교인은 노동조합 참가자, 사회주의자들과 더불어 특별고등경찰[6]의 주 감시 대상이었는데 기독교의 교리상 국가 신토의 천황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

3.1 운동의 경우 처럼 제암리 교회 학살이 전세계에 널리 퍼진것도 한국교회의 희생과 선교사의 덕이었고, 3.1운동 과정 기독교인 체포자는 전체의 17.6%인 3천여명에 달했었다.(특히 유관순을 비롯한 여성 체포자는 470여명중 309명이 개신교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개신교는 구한말 신문물과 새로운 사상의 유입을 가져왔고 이는 민족의식을 가진 지도자들을 배출하면서 반일의 집결지가 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의 경우 개신교인이 92명이었고, 사실상 개신교단을 탄압대상으로 삼았다. 구한말 개신교 인사중 대표적인 인사들은 독립운동가중 상당비율을 차지하는데 남강 이승훈,양기탁,[이갑], 조만식, 여운형,[전덕기 목사],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강우규 전도사, 안창호 김구, 김규식,이승만등은 개신교도 였다. 개신교의 대표적 인물이라며 이승만만 찬양하거나 그렇다고 보는 편향된 인터넷 썰과는 정반대이다. 사실 근현대사는 독립운동가 인물중 개신교 인사들을 빼놓고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 개신교의 일제강점기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문제이다. 그러나 당시 이 문제에 가장 거세게 항의한 종교 역시 개신교였으며, 신사참배의 경우 불교(1911년), 천주교(1913년)에 비해 20년 이상 버티다가 1930년대 후반 일본의 전시체제로 인한 압력에 의해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로 했다. 이는 불교의 경우 딱히 신사참배를 막을 만한 교리가 없었고 조직은 일본승려에 장악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특유의 신불습합 문화가 그대로 조선에까지 유입되었고, 천주교는 일본의 천주교와 교황청에서 세속권력과 타협을 권했기 때문이다. [7]

그러나 서양 선교사와 선교사의 교단들마저 신사참배에 대해 극심하게 의견이 갈리고[8] 권력에 맛본 어용목사들이 하나둘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면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이 생존을 위해 친일하는 스텝을 취하자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이승만, 이동휘, 김규식, 여운형이 있다. 또한 아예 박헌영처럼 유물론을 받아들여 반기독교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기독교인은 여력을 다해 일본 황실을 받들 것이며 황은(皇恩)을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이며 국운을 융성하게 하며 총후(銃後) 만전을 도모하여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하라!
- 1937년 기독교보 사설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친일 행적은 너무나 많아 헤아릴 수가 없다. 지금까지도 개신교 내부에서는 친일 청산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실정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개신교인은 모두 58명이 선정됐는데, 이는 종교계 전체 202명 중 가장 많은 숫자다. 이와 관련해 CBS(기독교방송) TV본부에서는 8.15 특집 다큐멘터리로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를 통해 개신교계의 친일 역사를 최초로 방송하기도 했다. 방송에는 특히 교단 총회장과 지도급 인사였던 목사들이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심지어 교회 종까지 떼어다 바쳤으며 ▲십계명과 정면 배치되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황국신민사상을 전파하고 ▲청년들을 전쟁에 내모는 등 적극적 친일 행위를 한 것이 드러남에 따라 친일 개신교계 인사에 대한 재평가 및 한국 개신교의 도덕성 문제 등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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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조선 개신교계가 일제에 헌납한 교회 종은 1,540개였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개신교회 종이 헌납된 셈이다. 그것도 일제가 강제로 징수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가 스스로 갖다 바친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총연맹은 헌납한 교회 종과 미납된 교회 종 숫자를 파악해 헌납을 강요하려는 목적으로 전국 개신교회에 "헌종보고서 독촉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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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 개신교는 조선장로교도애국기헌납기성회를 조직해 1942년 2월 10일 전투기 1대와 육전기관총 7정 생산 자금으로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했다.

1944년 4월 15일 기독교신문은 "거듭 보국기 헌급운동에"라는 사설에서 비행기 헌금을 만든다고 하면서 교회 재산을 팔아버린 후 목사 퇴직금이나 주택이니 무슨 경비니 이름 지어서 다 제하고 나머지 부스러기만 비행기 헌금으로 내놓는 것은 반대한다며 일제에 모든 재산을 바쳐야 한다고 했다. 이것도 모자라 아예 교회 재산을 헌납하기 위해 교회 병합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때 독립운동가였던 박희도 감리교 목사는 1939년 <동양지광>이라는 친일잡지를 창간한 뒤 이 잡지를 통해 정인과, 전필순 등 친일파 교계 지도자들이 일제의 전쟁을 옹호하고 개신교 청년들에게 전쟁에 참가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박 목사가 창간사에 쓴 글은 다음과 같다.

이 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 속에 일본 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赤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황도의 선포국위의 선양에 정진하고, 그리하여 동양의 평화는 물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대 이상을 펴서 세계 인류의 문화 발달과 그 강영복지 증진에 공헌할 것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생각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 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1943년 6월호에서 그는 "진심을 헌납하라"는 글에서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하여 젊은이들의 "목숨을 헌납"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므로 현시의 반도 총후에서 국민의 헌납 운동이 날로 치열화되고 있음은 기쁜 경향이지만 그럼에도 더욱이 중요한 것은 충군애국의 진심이 진정으로 그 헌납품에 들어있는가 하는 문제다......(중략).....하물며 세계에 으뜸인 황군 병사로서 제1선에 참가할 때 죽음 등을 고려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한 목숨을 헌납할 때 그 죽음은 자기 동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한 죽음으로 실로 인간 최고의 영예인 것이다.

1944년 3월호에서도 "결전 비상의 때(秋)-궐기하라 반도 청년"이라는 글을 실어 청년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이러한 문필 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1937년 9월 6일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고, 1943년 11월 6일부터는 강원도 지역에서 학병독려의 강연 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동료들의 이름까지 빌려 자신의 잡지를 통해 친일논설을 펴 일제의 신임을 얻기에 열을 올렸다.

박희도는 이외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수많은 친일단체의 간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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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참배 결의한 직후, 평양신사를 참배하는 장로교 총회 임원들 모습. 1938년 9월 12일 자 <조선일보> 사진.

침례회의 경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44년 교단이 강제해산을 당한다.

그러나 성결교 같은 경우, 당시 연회록을 살펴보면 황국신민선서와 대동아전쟁의 승전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 창씨개명을 한 모습들이 보인다. 물론 신사참배 문제로 결국 교단을 자진해산하기는 했지만…

감리교는 아예 초반부터 대놓고 신사참배에 가담했다. 장로교는 1936-1937년에는 신사참배에 저항하다가 1938년 총회에 들어가서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를 선언하고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결의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지만, 감리교는 아예 교단의 높으신 분들이 앞장서서 초반부터 신사참배를 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겼다.

조금 오래 버틴 장로교의 경우, 아예 교단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동방요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1938년 총회에서 일어난 일인데, 당시 총회장은 다음과 같이 결의안을 날치기 통과를 시켰다. 원래 교단의 총회에서 어떤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는 '가하면 예 하십시오.'라고 물어서 동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한 다음, '부하면 아니오 하십시오.'해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지도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 총회장이라고 쓰고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읽는다은 대놓고 '부하면 아니오 하십시오.'를 생략한 다음 의사봉을 꽝꽝꽝 두드림으로써 문자 그대로 목사님 날치기 쓰신다를 시전하였다. 이는 물론 당시 총회장의 잘못이긴 하나, 당시 총회장 내에 칼찬 일본 순사들이 잔뜩 포진해 있어 칼치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결국 장로교회는 이렇게 신사참배 위협에 굴복했고, 신사참배 거부 운동은 교인과 목사 개개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물론 기관 차원에서 예외는 있었으니, 바로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여 스스로 학교 문을 닫아 버린 숭실대학교. 이 대학은 지금도 입시철만 되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우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여 스스로 문을 닫아 걸었다는 이야기다. 목사 가운데는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방계성 목사[9] 같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신사참배에 항거하면서 옥고를 치른 바 있다. 결국 이 해방 이후 문제로 인하여 개신교 교단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장로교의 분열이 시작되었으며(해방 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들이 반발하여 떨어져 나간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측 교단이다. 현재 고신대의 전신. 이후에 장로교는 연쇄분열을 시작하여 현재 답이 없을 정도로 사분오열되어 있다.

신사참배 문제는 두말할 것 없이 대한민국 개신교계의 최대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다. 간혹 개신교인들 중에는 일부 신자들만이 신앙을 지키지 못했으며, 대부분의 진실된 신앙인들은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조를 멋지게 지켜냈다고[10]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반대로 대부분의 교단들이 성경을 숱하게 인용하면서 신사참배와 내선일체를 합리화하는 데 힘썼다. 오히려 거꾸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일부 이단 취급 받던 시절. 이 얼마 없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개신교 교단으로는 고신 교단이 있다. 고신 교단은 이를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하는 [이종록 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의 칼럼]에서 인용된 내용의 일부를 재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소위 "개신교인이 친일을 해야 하는 성경적 이유". 아무 생각없이 들으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북미합중국의 워싱턴 동상이 있는데 합중국 국민으로는 그 동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고, 합중국 국기에 합중국 국민으로 누구나 다 경의를 표합니다. 합중국은 기독교국이니만치 기독교인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다 우상숭배자로 간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일본 황국신민만이 국조숭모(國祖崇慕)하는 의식에 기독교인이 어찌 참례할 수 없으며 황국(皇國)을 대표한 일본 국기에 경의를 표함이 어찌 기독교인에게 죄가 되겠습니까. 전화위복(轉禍爲福)하는 자 있으나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 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례(參禮)함이 당연한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是認)한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애국지심(忠君愛國之心)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집니다. 사신우상(邪神偶像)은 금수 곤충 어별(魚瞥)의 형상으로 된 것인데 어찌 우리의 조상이 그 우상과 동류(同類)가 될 수 있으랴? 그런즉 신사참배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此)는 불경죄(不敬罪)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
 
《청년》 9, 10호, 1939년 2~3월호. 김승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p.410
기독교의 설립자라고 칭할 만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 제국의 공민(公民)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반도인들은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것이 반도인의 유일한 활로입니다. 반도인들은 이 기회에 죽은 과거를 청산하고 산 장래를 위하여 활동하여야 되겠습니다. 선각자가 된 기독교도들은 민중에게 이 활로를 지시할 책임이 있습니다.
 
같은 책, p.432

여기에 일본 측 개신교에서도 당연히 거들고 나섰다.

조선 전도부의 어용적 성격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대한 반응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났다. 3․1독립운동을 목격한 와타세는 즉각적으로 '조선 소요 사건과 그 선후책'을 《新人》 4월 호에 기고해, 3․1운동에 참가한 조선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정신이 농후하고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 없는 유대교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즉, 만일 기독교인들이 산상수훈의 정신을 안다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반행해서는 안 될 것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형제로서 더 포용적으로 내선일체를 대성하는 정신'에 근거하여 행동했어야만 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건전한 신앙을 근거로 해 건전한 사상'을 배양함으로써 유다주의를 극복하고 '양 민족의 새로운 영적 일치'를 달성하기 위한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의 의의를 더욱 강조하였다.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5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양현혜, 〈일본 기독교의 조선 전도〉, pp.195~196

그러나 위의 문제들은 어디까지나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가결했을지는 몰라도 개개인이 모두 신사참배를 했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당시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들이나 교인들 중에서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친 사람들도 많다. 특히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수많은 유명 목사들이 당시 신사참배한 사실을 공석에서 밝히고 용서를 비는 것이 유행했다.

참고로, 저 병크를 터뜨리도록 유도한 조합교회(組合教会)[11]는 해방 이후 완전히 퇴출돼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유독 대한민국의 개신교에서 장로제와 목사의 개인적 권위가 강조되는 데는 이런 역사적 병크로 인한 회중제에 대한 반감이 한몫 했다는 설도 있다.

1.3 해방 이후

해방이 되고 북한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종교가 탄압을 받자, 믿음의 자유를 찾아 평양에서 활동하였던 종교 관련인사들이 대거 월남한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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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 장로와 이기붕 권사를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는 포스터.

남한에는 감리교 신자인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개신교는 보수적 기치를 내걸고 반공을 외치기 시작했다.[12]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은근히 불교를 탄압하였는데, 개신교회에서는 세금을 받지 않았던 것과 달리 사찰에는 세금을 따로 받고 승려들의 환속을 권장했다. 그럼에도 일부 승려들은 당시 이승만에게 아첨데레데레하며 "또 다른 부처님"이라는 망언까지 해댔다.(...)[13] 지금도 한기총에선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며 조선일보뉴라이트와 같이 동상을 만들자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극과 극은 통한다?

1970년대 근대화와 새마을 운동을 계기로 해서 개신교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회들이 굉장히 근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서 개신교 믿으면 서양식으로 잘 살 수 있을 거란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하고[14] 이러한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기복신앙적인 면과도 결합하게 되었다. 지금도 평야지대와 도시 중심가들이 대부분 뱀파이어 헌터 십자가로 점거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한 전통 문화들 중에서 비합리적, 비생산적, 미신적인 악습이라고 여겨질 만한 문화들을 모조리 타파하고 없애는데도 개신교의 영향이 컸다.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에만 하도 도시산업 선교회 등 친 노동운동적인 교회단체가 존재했으나 정부의 탄압과 친정부적 교파의 압박으로 소멸당하거나 규모가 축소되었다. 다소 예외일 수 있겠으나, 70-80년대 빈민선교활동과 두레 공동체 운동으로 대중에게 알려졌고 10월 유신 반대로 옥고를 치렀다가 뉴라이트 연합 상임 이사가 된 김진홍 목사 같은 경우도 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보수화가 많이 진행되어 있는 한국 개신교는 최근 들어 더더욱 신앙적인 보수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신본주의'와 '성경주의' 등의 근본주의를 외치고 있는 교단도 있다.

민주화 운동에 관한 것으로는,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학문적으로 민중신학, 해방신학처럼 기독교 신학을 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진보적인 신학들을 한국 상황에 맞게 해석하여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을 실천한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종교다원신학을 주장함으로써 종교간의 대화 곧 다른 종교를 개종과 정복의 대상이 아닌 기독교와의 공통점을 찾아 대화하려는 노력을 실천했으며, 기독교 교파에 따른 전통들의 다양성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공동신조에 근거하여 존중하고 일치하려는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교회분열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였다. 또한 개발독재시기에는 자본가들의 착취와 노동운동 탄압 곧 노동자들의 권리가 자본가에 의해 짓밞혀지는 불의한 현실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려는 산업선교가 실천되기도 하였다. 저명한 개신교 신학자 장공 김재준 목사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에서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스스로 분신한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예배/미사를 집전하자, "이 자리는 전태일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나태를 추모하는 자리이다."라고 설교한 일, 도시산업선교회가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자본가들의 비방과 형사를 보내 감시하는 경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도시산업선교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일이 그 흔적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 기독교인 역시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그 예로 도시산업선교회는 오늘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1.4 21세기

우상숭배가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첨탑과 빨간 십자가 행렬

"안에서의 불신도 문제지만, 교회 밖에서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훨씬 참혹했다. 무종교인의 한국 개신교 신뢰 비율은 8.4%, 불신 비율은 56%로 부정적인 평가가 7배에 달했다.(...) 세부 항목에서 개신교인의 신뢰 지수는 4.4%, 목사는 11.5%, 한국 개신교는 18.8%를 기록했다. 이 교수는 한국 개신교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교인들만의 신앙적 게토로 변질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가톨릭불교에 비해서도 한국 개신교는 무종교인들에게 가장 믿을 수 없는 종교였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 항목에서 개신교를 꼽은 무종교인들은 8.6%에 불과했다. 반면 가톨릭과 불교는 32.7%, 26.6%의 신뢰를 받았다. 기윤실은 나이별 신뢰도에서 20대에게 최저 수준의 신뢰(12.9%)를 받은 것을 언급하며, 한국 개신교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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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뉴스링크 출처. 자료제공 기독교윤리실천운동.[15]

주지하듯이 가톨릭이 사회적으로 신뢰받고 존경받는 종교집단으로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가운데, 불교 역시 완만한 신뢰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개신교의 체감 신뢰도는 급전직하하고 있다. 같은 기독교끼리 왜 이리 극과 극인지(...) 이에 대한 원인을 찾기 위해 시행된 통시적 설문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시사점이 발견되었다. 과거만 하더라도 개신교의 신뢰회복을 위한 첫째 과제는 봉사 및 구제활동이었으나, 2013년 현재에 이르러서는 윤리와 도덕 실천 운동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결론이 나온 것. 과거에는 개신교가 사회적으로 뭐 하는 게 있느냐는 공기취급? 반응이었다면 이제는 "너나 잘 하세요" 정도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개신교가 맛 잃은 소금이 되었다는 사회적 컨센서스가 모아진 것. 현대 개신교계 내에서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있어 개신교의 위상은 시궁창 수준이며, 교회 내부의 어린이 및 청년 교육도 부실한 상태이다. 이는 청년들이 교회 밖에서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교회에 오지 않고, 교회 안에서는 교회가 싫고 잘 몰라서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교계에서는 다음세대(Next Generation) 문제라 하여 중요한 화두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 불과 2007년만 하더라도 "평양대부흥 100주년" 이니 뭐니 하여 샴페인을 터뜨리고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던 것과 대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의 분위기 변화. 놀라울 것도 없는 것이 이 때만 하더라도 부흥이 실제로 핵심적 화두였었다.[16] 하지만 이 해 개신교의 외적 성공에 겨워 정신줄을 놓으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다가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았다. 피랍된 개신교인들이 극단적 무장단체인 탈레반에 납치된 상황에서 여론은 피랍된 개신교인들에게 상당히 나쁘게 작용했다. 이는 기존의 무차별적이고 타문화 존중이 없는 국내전도와 해외선교에 대한 염증, 배려심 없고 반성 없는 기존의 한국 개신교에 대한 반발, 그리고 교회 목사들의 각종 불법, 편법적인 행위나 사건, 사고 등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는 온라인에 숨어있던 반기독교 여론이 수면 위로 노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20세기 말부터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이전에는 교회 내부에서 쉬쉬하고 넘어간 개신교의 문제점이 온라인 상으로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온라인은 이미 반기독교, 특히 다른 교파들보다 반개신교 여론이 대세인 상태였다. 성도수 늘리기에만 집중한 성장 위주의 개신교에 대한 염증과 우려는 이미 나타나고 있는 상태였다.

때마침 서점 종교코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기독교 문제 진단서적들이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무신론 관련 서적들도 이 무렵에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특히 만들어진 신의 경우 15만부나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전통적인 유교의 무신론적 성향과는 달리 9.11 테러 이후 나타난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대니얼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같은 종교에 비판적인 신 무신론(New Atheism)의 영향으로 21세기에는 무신론자도 급증하는 추세이다. 앞서서 설명된 20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무신론자가 되는 추세는 높은 편이다. [서울대에는 무신론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2007년 한국 개신교 최악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등을 겪으면서, 비로소 개신교 내에서 이런 대책없이 교세를 늘리기에만 급급하는 내실없는 '부흥' 이야기가 다소 사그라들고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평양 대부흥 건에 대해서도, "부흥" 자체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이제는 "평양 대각성" 이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래서 빠른 스포닝 풀 후 저글링이랑 오버로드만 오지게 뽑으면 초반에는 이겨도 후반가면 털리는것이다.

2016년에 급기야는 부천 여중생 살인 사건이 발생해서[17] 개신교의 이미지에 제대로 먹칠을 해버렸다.

다행히 개신교를 비판하는 진영에서도 하나 둘 문제점과 병폐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개신교에 대한 평가가 다시 좋아지긴 했다.

한국 개신교회는 앞으로 20~30년간 청/장년층의 감소, 55세 이상 교인 증가, 교회 성경학교의 완전한 쇠퇴가 맞물리면서 '늙고 작은 교회'가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과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큰 교회 건물 짓기 같은 하드웨어 중심에서 사회 봉사활동을 늘리고 유년, 청소년 교육 중심으로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사]

2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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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가 본래 종교개혁으로 시작했으나 지금 한국의 개신교는 개혁은 커녕 썩어가는 고인 물로 전락했다는 걸 감안해 보자.[18] 오히려 그들이 비판하던 가톨릭이야말로 가장 깨끗하고 개혁적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는 실정.(…) 이 정도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슬로건이 무색할 지경.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대형 교단들이 싸놓은 '것'들 때문에 그나마 건전하고 원래의 개혁적 취지를 제대로 살리는 교회들까지 욕먹는 실정이다.

2.1 기복신앙

국내에서의 개신교는 상대적으로 기복신앙적인 측면이 강한 편이다. 한국인의 정서에 적절히 어필한 이러한 믿음은 개신교가 국내에서 부흥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으나, 기복의 의미가 참된 '영적인 복'과 '현실의 물질적인 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된 것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기복 때문에 개신교의 다른 가치인 선행이 다소 묻히는 경향이 생겨서 이에 대한 많은 내외부적인 비판이 존재한다. 그래서 교인 수평이동 같은 일도 일어난다.

한국에서의 개신교는 종교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정치적인 의미 등 기존의 토속신앙 등과도 결부되어 "을 내려주십시오."라는 식의 기도문을 쉽게 들을 수 있으며, 대부분의 기도의 주체는 '내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되는, 상당히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평범한 여느 목회자보다는 특별히 방언기도나 40일 금식 등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목회자를 선호하는 현상은 이러한 무속적 정서에 기인한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에서는 소위 용하다는 목사를 찾아다니는 현상이 있다. 한국 개신교 안에 카리스마적이고 다혈질적이며 절대권위를 가지고 독재를 행하는 목회자를 따르는 교인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오히려 지금의 개신교의 정립에 많은 영향을 주고 또한 현재 개신교가 가장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인 미국[19]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이쪽은 선교활동에는 힘쓰나 전도활동은 그 규모가 매우 낮고, 또한 사생활 침해가 되지 않는 선이며, 나, 혹은 나와 관계된 사람에게 기도하는 것보다는 지적 구원자하나님의 존재나 그 의미를 깨닫는 활동에 힘을 쓰고 있다. 물론 그 교리 자체는 흡사하기 때문에,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미국에서도 들을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한국 개신교 형성 초기에 영향을 끼친 평양지방의 분위기와 결부지어서 생각해야 한다. 초기 개신교를 받아들인 길선주 장로를 비롯한 서북(평양) 지역 신도들의 사상적 기반이 기복 사상과 도교적 영향력을 받은 것이라는 것.[20] 여기서 파생된 것이 통성기도, 새벽기도, 기복신앙이며 이들이 한국전쟁 당시 월남하여 개신교 주류의 자리로 들어서면서 한국 개신교의 특성으로 나타나게 된 것[21]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극단적인 근본주의, 신본주의, 보수[22] 성향 군소교단 교회들은 이 기복주의 신앙을 엄청나게 깐다. 하지만 정작 그러한 기복주의 신앙으로 교회가 성장하고 극단적인 목사 및 교회에 대한 헌금을 비롯한 여러 부작용이 일어남을 부채질하고 겉으로 엄청나게 까곤 속으로 권장했다는 게 함정. 극단적으로 세속주의를 타락의 상징으로 보고 엄격한 금욕을 요구하지만 정작 지도부는 심한 부패를 보이는 이중잣대를 보여주는 중동 이슬람 왕조들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2.2 가톨릭과의 관계

한국 개신교의 반가톨릭 역사는,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기 시작한 18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본주의 신학을 등에 업은 선교사들은 가톨릭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선교 활동을 펼쳤다. 국가 권력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개신교를 한국 사회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미국 종교로 소개했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개신교보다 100년 일찍 선교해 온 가톨릭은 제국주의 종교로 부각했다.

기본적으로 미국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에게는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이 깔려 있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 종교계는, 유럽에서 대거 유입되는 가톨릭계 이민자들로 인해 적개심을 가지게 됐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실장은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출발했기 때문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톨릭을 바라보는 시선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특히 다른 교단들과 달리 근본주의 색채가 강한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한국 개신교에 반가톨릭 현상이 자리한 것으로 봤다.

미국 북장로회 출신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1892년 토론토에서 열린 제5차 장로교 총공의회에서 가톨릭이 선교지의 왕실과 친밀을 도모하고, 권력층이나 세도층과 결탁해 정사나 조정의 문제에 수시로 개입한다고 비판했다. 선교 초기, 언더우드는 한국어에 능통한 신부들과 높은 인쇄술, 부지 매입에 적극적인 가톨릭을 언급하며 로마 가톨릭교회가 한국을 손에 넣으려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는 개신교인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훗날 불신자가 아니라 가톨릭교인을 회심하게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잇달아 방한하자 가톨릭은 교세 확장을 우려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인 프랑스인 블랑 백 요한 주교는 "오류를 설교하는 열교 목사들이 활보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교리 논쟁도 일어났다. 1907년 가톨릭이 개신교 비판을 위한 호교론 책을 펴내자, 이듬해 감리회 신학자 최병헌이 번역한 <예수텬쥬량교변론>(정동예수교회)에는 교황의 무류성, 고해성사, 성모 마리아의 전구, 성직자/수도자의 독신 생활 등을 언급하면서 가톨릭이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거나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개신교 선교 초기 두 기독교 교파가 항상 갈등 양상만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개신교는 한국 선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100여 년 앞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왔던 가톨릭의 역사적 경험을 자료삼아 나름의 한국 선교전략을 수립했다. 개신교가 '간접 선교', 즉 학교나 병원을 중심으로 간접적인 교육선교와 의료선교를 우선적으로 펼치는 선교 전략을 채택했던 것도 가톨릭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적극적인 반추(反芻)를 통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개신교 지도자들은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야당 부통령 후보로 장면이 출마했는데, 여당은 장면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를 들며 공세를 퍼부었다. 당시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 사무장이었던 박영출 목사는 선거 연설에서 "가톨릭 교인인 민주당 부통령 입후보 장면 박사가 당선되는 날에는 우리나라를 바티칸교황청에 팔아먹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정권의 공보실장을 역임한 전성천 목사는 1956년 4월 <한국기독시보>에 가톨릭 신자가 집권할 경우 한국이 교황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된다면서 개신교 신자들은 장면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썼다.

불신과 대립으로 얼룩졌던 개신교와 가톨릭의 역사는 1960년대 이후 교세 확장에 치중하면서 직접적인 충돌에서 벗어나게 된다. 가톨릭은 1964년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개신교단들을 "갈라진 형제"라고 칭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후 한국 가톨릭은 1966년 '일치 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같은 해에 개신교 쪽에서도 아카데미 하우스 준공을 계기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 간의 대화' 모임을 가지면서 가톨릭 신부들과 신자들을 초청하였다. 이와 같은 대화의 노력은 구체적인 '일치운동'으로 귀결되었다. 이후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은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1977년 공동번역성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일치기도주간'을 제정하여 번갈아 가면서 일치기도운동을 벌였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인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두 가지 인식이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구성하는 두 전통의 형제애가 강조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서로 상대방을 폄하(貶下)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단시(異端視)하기까지 하는 흐름이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교단별로 살펴보자면, 성공회와 기장 교단은 전자 입장에 있고, 천주교 내 보수파, 예장합동, 예장고신 및 기타 군소 장로교 보수 교단, 침례교, 순복음은 후자 입장에, 천주교 내 에큐메니컬파[23], 예장통합과 감리교(기감회)는 중간 입장에 있다.

1982년에 실시된 <한국교회 성장과 신앙양태에 관한 조사 연구>는 개신교인들의 각 교단 및 타종교에 대한 ‘친소도’(RDI=the relative degree of intimacy)를 조사한 바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신교인들은 가톨릭교회에 대해 33.8%가 친근감을 나타낸 반면에 45.5%가 경원하는 태도를 보여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여전히 상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3 정치성


[관련 기사]

한국의 개신교는 기본적으로 정치와 깊게 관여되어 있다. 교회에는 항상 교인이 모이고, 같은 종교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인맥화하기 매우 쉽기 때문이다. 정치색은 대체로 보수적이며 최근에 들어서는 미국식 기독교 우파를 그대로 벤치마킹 하고 있다.

전두환의 쿠데타 당시 여러 교회의 목사들이 참여한 기도회가 TV로 생중계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오히려 불교계에서 10.27 법난이 일어나는 등 저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전두환의 독재에 반대하여 박해받은 교회도 있었다.)

또한 선거철마다 특정 대형 교회의 특정 정치 세력 지지가 문제가 되곤 하는데, 주로 보수적 성향의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들이 나온다. 이러한 특정 교회의 특정 세력 지지 발언의 영향력을 통계학적으로 검토해보면, 현재까지의 선거에서 단 한 번도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친 적이 없다. 하지만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정교분리를 초월하려는 일부 교회의 위와 같은 행위는 부적절하므로 지양되어야 한다. 이는 다른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내용이나, 다만 개신교 쪽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좀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 개신교에서 이를 일부 이단의 문제로만 치부하지 않고 전체적인 성찰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역대 대통령 중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종교로, 이명박, 김영삼, 윤보선은 장로교 신자였으며 이 중 이명박과 김영삼은 장로였다. 이승만은 감리교 신자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가톨릭이지만 영부인 이희호 여사는 개신교. 특히 최근들어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대통령으로 평가하면서 숭앙하는 작업에 보수 개신교 세력이 상당히 연관되어 있다. 뉴스앤조이 [기사]

반면에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며 보수 진영 정권들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교회 또한 상당수 공존한다. 대표적인 진보 진영 교단으로는 교단과 신학의 보수화에 반발하여 떨어져 나온 김재준 목사에 의해 설립된 한국기독교장로회(한신대학교의 재단)[24]와,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학풍을 가지고 있는 대한성공회가 있다. 이쪽 계열에서 사회운동을 한 사람들로 문익환 목사와 정계 입문 이전의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25] 신정통주의 계열의 교단은 정치적으로도 진보적인 경향이 있으나 신학적으로 보수인 경우에는 정치적 입장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노선을 따르는 경우, 정치 스펙트럼은 문자 그대로 걷잡을 수가 없다. 또한 그 반대도 될 수 있기에, 일반화해서는 안된다.[26]

다만 어느 정도 높은 직급을 가지지 않은 신자들은 보수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편인데, 한국에서는 어느 종교이든 간에 정치 성향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별 문단이나 기불릭, 김대중교(…) 참고.

3 교세

개신교는 한국에서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훨씬 먼저 들어온 가톨릭을 뛰어넘는 신자 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불교보다는 적은 숫자이고, 개신교라는게 실상은 여러 교파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교파별로 세세히 나누어 비교했을 때 도리어 단일 교파인 가톨릭이 더 크다. 그런데 개신교가 교세 자랑할 땐 가톨릭 신자 수까지 끌어들여 자랑한다.

[이 지도]는 각국의 개신교 신자 비율을 나타낸 것인데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색이 칠해져 있다.

참고로 2014년 12월 11일 JTBC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에서 나온 말인데 한국의 개신교 교회 숫자는 무려 78,000개라고 한다. 편의점은 25,000개. 그 많다는 편의점보다 3배는 더 많다.참고로 인구 95%가 이슬람터키가 인구 7,500만이고 여기서 이슬람 성원인 모스크 수가 63,000여개인 걸 생각하면 한국에 개신교 예배당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할 수 있다.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정관계에서는 개신교 신자 비율이 한국 전체 인구 내 개신교 신자 비율보다 높은 편이다.

한국의 개신교의 교단들 중에 장로교가 가장 교세가 강한데, 장로교 선교사들이 근대 시기의 한국으로 많이 유입하여 선교한 것도 있지만, 평신도 입장에서 장로라는 감투가 있는 것도 장로교의 교세 성장에 기여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본래 장로가 없는 감리교 등에서도 장로교의 영향을 받아 장로라는 직책을 만들었을 정도(...).

3.1 지역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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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서고동저 그러니까 서해안으로 갈수록 많아지며, 반대로 동해안으로 갈수록 줄어든다.[27]

위의 대한민국 각 지역별 종교인 통계에 의하면 호남지역에서 가장 강세라고 한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는, 전봉준이 민중봉기를 일으켰던 지역 답사중 지나가는 할머니께 "할머니, 전봉준이 누군지 아세요?" 라고 물었더니 "몰러, 교회나 가. 교회 안 가면 지옥에 간디야."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다.(...)[28] 실제로 목사들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부흥회를 하면 호남 지역의 신도들이 믿음이 깊은 편이고, 설교에 대한 반응이 제일 열렬하다고 한다.

물론 신자 수로 따지면 수도권 지역의 개신교 신자 수가 훨씬 많다.[29] 수도권 일대 도시 지역에서는 과천시(29.86%), 계룡시(28.59%), 의왕시(26.59%), 용인시 수지구(27.82%), 고양시 일산서구(25.16%), 성남시 분당구(25.06%) 등이 개신교인 비율이 25%를 넘는 지역으로 집계됐다. 반대로 (울릉군을 제외한) 영남 지방에선 개신교도의 비율이 매우 낮은데, 이는 영남 지방이 멀리는 신라의 중심지였던 오래 전부터 불교, 유교가 뿌리깊게 정착되어 있어서 그런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제주특별자치도 역시 개신교 신자의 비율이 매우 낮다. 이유는 해방 직후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서 저지른 범죄 때문. 당시 서북청년단의 주축이 영락교회 출신자들이었다. 다만 충청권은 조선 유력 사대부들이 많았던 지역임에도 대전광역시, 충청남도는 개신교 세가 약하지는 않다. 수도권과 비슷한 정도. 이는 충북 지역은 전통적 사대부들이 많았던 지역이지만 대전과 천안 지역은 근대에 들어서 도시가 급성장하여 외지인들이 많이 유입된 지역이며, 충남의 다른 지역은 본래 천주교인들이 도피지로 삼았던 곳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전방의 여러 군들(화천군, 인제군 등)이 신자 비율이 높다. 아무래도 군에서 진급을 하려면 교회에 다녀야 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에 그런 듯. 그리고 초코파이교 신자들도 있고

다른 종교들에 비하면 서서히 신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조사도 존재하는데, 1995~2005년 사이에 전체적으로 큰 폭으로 감소하였고, 호남 지역에서만큼은 신자가 증가하였다. 그런데 위의 지도를 보면 호남권에서도 농촌 지역의 경우 개신교의 교세가 감소세로 반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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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전국에서 개신교 신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시/군으로 인천광역시 강화군[30], 옹진군, 전라남도 신안군, 경상북도 울릉군[31] 등 주로 서해안 쪽 지역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엉뚱하게도 이들 지역에서는 육지처럼 교회가 난립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육지에서 경쟁적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개신교 교단들이지만, 섬 지역에서는 여건상 각 교단별로 선교 구역을 분담하는 경우가 많아 대개 섬 하나에 교회가 하나 꼴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자 수 확보를 위한 교회, 교단 간 경쟁이 육지에 비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3.2 교단별

2002년2008년2011년
교단신도수교단신도수교단신도수
1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2,300,327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2,896,967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2,953,116
2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2,283,107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2,686,812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2,852,311
3기독교대한감리회총회1,394,515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1,800,000제칠안식일예수재림교회2,201,868
4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개혁)1,169,572기독교대한감리회총회1,557,509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1,800,000
5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1,106,712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정통)866,599기독교대한감리회총회1,586,063
6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32]960,459기독교한국침례회801,437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여의도순복음)총회1,016,036
7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정통)823,469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564,260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백석)[33]870,583
8기독교한국침례회692,767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474,047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566,500
9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503,991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대신)452,314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개혁)[34]551,857
10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427,832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337,570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464,799
출처 : 이혜정, 통계를 통해서 본 종교인구와 개신교단의 변화(2015) - 문화관광부 한국의 종교 현황(2002, 2008, 2011)

위의 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 개신교의 대다수는 무지막지하게 분열된 장로회 교단이다. 그중에서도 합동과 통합측의 교세가 가장 크다.

그 외에도 감리회, 오순절교회(하나님의 성회), 침례회, 성결교회 등의 교세가 크다. 반면 진보성향인 기장과 성공회, 루터회는 예나 지금이나 최하위권에서 맴도는 수준.아 잠깐 눈물 좀 닦고

또 한 가지 주목해 볼 만한 점은, 십여 년간 급격한 교세 확장으로 오순절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마찬가지로 거대 교단이 되었지만 한국에서만 이단 취급 받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이다.

4 선교

4.1 국내

극성 예수쟁이를 위시하여 보편적 사회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선교 활동이 문제시된다. 이들 예수쟁이와 일반 개신교인들의 포교활동 간의 범위가 모호해 전반적인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한꺼번에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다. 태도를 막론하고 전도 자체가 타인이 종교를 믿지 않을 권리를 침해할 요소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내 개신교의 역사적 특성상 종파가 매우 다양하고, 각 종파 간의 차이가 성경 해석부터 시작하여, 정치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극과 극에 이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개신교는 어떻다고 단정하기는 곤란한 바가 있다.

이러한 선교 활동이 비기독교인들이 수용 가능한 선에서 건전한 자원 봉사활동 등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사회에서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사회의 전통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지나치게 배타적인 선교 활동의 경우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병크가 곪고 곪아 터지는 한 예가 바로 땅밟기. 참고로 원래는 이단 신학이다. 해당 문서 참조.


4.2 국외

한국에서 신자가 많이 늘고 교세가 많이 확산되었기에, 짧은 역사도 불구하고 국외로의 활발한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였다.[35] 조용기(…)의 자랑에 의하면 무려 190개 나라에 3만 명이 있다 카더라.(출처는 월간 중앙에 조용기가 쓴 광고(…))

국외 선교활동에 대한 현지에서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좋은 편이다. 이는 해외에서의 선교활동이 봉사라는 형태로 시작하기 때문으로서, 구호품 전달, 학교나 병원 설립 등 현지인들이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부분에 도움을 많이 주고 있어 이에 대한 현지인들의 평가가 높다. 또한 이러한 선교와 봉사에 태권도, 한국 요리, 국악한국 문화 전파도 함께 이루어져 외국에 한국을 알리는 데에도 기여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봉사와 개신교에 대한 호감은 전혀 다르다. 봉사라는 형태의 재화와 서비스만 수용하고서 개신교 신앙 자체는 거부해 버리는 경우먹튀가 흔하다고. 이로 인해 물정 모르고 들어온 선교사 중에는 충격을 먹고 떠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안습

국외에서의 개신교 선교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이 다음 단계이다. 일단 이런 선교단체에서의 봉사라는것이 기본적으로는 선교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선교가 근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선교 없이는 봉사활동도 없다는 소리. 때문에 봉사를 통한 감화라는 장기적인 계획 없이 단기간에 성과를 거두려고 하거나, 현지의 문화와 종교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배타적인 포교활동을 하여 봉사와의 밸런스를 맞추지 못하게 될 경우 큰 문제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36]

문제를 만드는 것은 일부만의 문제인가? 현지인과 문제없이 지내며 조용히 헌신하는 선교사들이 다수라고 주장되며 인터넷에서 까임의 대상으로서 언급될 때처럼 절대 다수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이런 선교사들조차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조급증과 우월감, 배타성에서 비롯된 온갖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꽤 많은 숫자로 발생하고 있다. 사건사고 면은 선행보다 기억에 강하게 남기 마련이다.

한편, 이러한 국내외에서의 선교 및 포교 목적의 봉사 활동을 국내 개신교인들에 대한 과시, 보여주기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봉사 활동을 위해서는 돈과 물자와 사람이 필요한 법이니 당연히 홍보야 필요하기 마련이지만, 이런 비판은 봉사에 대한 홍보가 실제보다 지나치게 부풀려지는 경우가 왕왕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은 인터넷과 거리의 전단물 등을 통해 무차별로 확산되어 문제를 부풀린다. 국외에서 선교과정에서 일어난 수두룩한 사건들이 이를 증명하며, 이에 관련된 책으로는 〈개독교를 위한 변명〉,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등의 목사선교사에 의해 쓰여진 내부 증언담이 있다.

교단들이 이런 잘못된 행동들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지 않는 것 또한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일부만 그렇고 대부분은 좋은 소리 듣는다면 좋은 쪽만 홍보하고 선전하며 잘못은 모른 척 하는 문제를 넘기면 안 된다.

대한민국 개신교는 더 이상 국내에서 교세 확장 등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이미 교세가 늘어날 만큼 늘어났으며, 교회는 너무 많아서 경쟁이 심하다. 출생률 감소 추세와 맞물려서 교세의 성장이 둔화되었거나 마이너스로 접어들었다는 분석. 이것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선교를 무조건 반대하는 시각도 옳지 않다. 어찌 보면 종교 집단의 당연한 활동이며, 불교천주교정교회원불교도 선교하고 봉사단체도 얼마든지 보낸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에 선교 목적으로 나가는 사람 중에 한국에선 수십여 년 사이 50년대 대비 40년 만에 10배 이상 급속도로 교인이 증가하는 유례 없는 성장세를 거두었으니 국외에서도 이와 같은 성공이 반복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각국에는 그 나라의 종교가 뿌리내리고 있으며, 예수천국 불신지옥이슬람 국가에서 그렇게 했다간? 코로 할랄푸드를 먹는다. 코랄푸드

순례 목적으로 기독교 성지를 방문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성지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이나 이슬람 국가들의 영토다. 터키에선 중요한 성지들을 경비원들을 통해서 지켜준다곤 하지만, 터키의 동부는 보수적인 이슬람 동네이다. 다른 곳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개신교 찬송가를 부르면서 울부짖으면서 기도어그로하는 것은 주위의 이목을 끄는 일이며,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한국어니까 모를 것 같은가? 손에 들고 있는 것과 분위기만 봐도 뻔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거기 가서 땅밟기를 해대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똑같이 하려나 극과 극은 통하는 법

게다가 왠만한 성지들은 전부 가톨릭 아니면 정교회 등 개신교 아닌 타 기독교 종파의 소속이다. 엄연히 가톨릭인 가르멜 수녀회가 운영하는 주님의 기도 성당에는, 기도문을 수정해야 한다는 어느 한국인 개신교 목사의 주장에 따라 1960년대부터 40여 년 넘게 자리하며 순례자들을 맞이해온 가톨릭 주님의 기도문이 갑자기 철거되고 개신교식 주기도문이 설치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어 주님의 기도문을 봉헌한 천주교 부산교구는 이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원상 복구를 바라는 공문을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가르멜 수도회 총장, 주님의 기도 성당을 관할하는 이스라엘 주재 프랑스 대사관과 해당 가르멜 수녀원 등에 보냈다. 이에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2월 9일자로 원래대로 복구할 것이라는 답변을 보내왔고, 한국어 가톨릭 주님의 기도가 다시 설치되었다. 문제는 개신교 주기도문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가 2개나 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예루살렘이나 시나이 산과 같은 다종교의 공동 성지에서 새해 첫날 찬송가 불러대며 울부짖는 건 민폐의 결정판.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넘어 국가 이미지 손실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종교의 자유는 있으나,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하면 안된다는 것. 예를 들어 지하철 포교는 법에 어긋나므로 하면 안되는 것이다. 헌데 지겹게 하고 법적으로 어긋난다고 해도 종교 탄압이라며 발악하잖아

그나마 21세기 들어서 개신교 신자가 늘어난 나라가 중국이다. 이미 중국 내 개신교도 인구는 일각에서는 한국 인구를 능가했다고도 전해진다.[37] 물론 중국 정부의 탄압은 나날이 거세지면서 세금을 늘린다든지 국외 출국을 금하고 목사나 교회에 대하여 세금 탈세라든지 여러가지로 딴지를 걸거나 교회를 폐쇄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를 두고 국내 개신교 선교층의 반응은 여러가지인데 우선은 같은 개신교로서 환영하는 분위기. 반대로 중국에서도 국외 선교를 하기에 한국 교회의 국외 선교에 라이벌이 된다고 반발하는 반응도 있다.

2016년 터키 동부에서 또 한국인인 개신교 선교단이 논란이 되고 있다..결국 현지 터키인들의 욕설과 빗자루로 처맞고 모욕당하는게 당당하게 유튜브로 올라와있다. [[1]]

5 봉사활동

한국 개신교는 국내외 봉사활동에 절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개중에는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봉사활동은 물론이거니와, 포교를 표면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후원하는 봉사활동도 많다. 봉사활동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지역사회 기여 같은 것도 점차 제도화되어 가는 추세라, 신도시에 지어지는 신설 교회들 중 적지 않은 수는 지역 사회를 위해 족구장이나 풋살장 같은 레저/스포츠 센터, 헬스장, 대강당, 공연장 등을 함께 무료로 운영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봉사 활동의 경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참고로 모든 종교활동의 대외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포교다.


6 교포 사회에서의 역할

개신교 국가인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이외에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가톨릭과 정교회가 강세인 유럽, 기독교가 거의 없는 일본 등 대부분의 이민지에서 한인교회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국외 각지의 교포 사회에서는 교회 본연의 역할에 더하여 교인들 간의 커뮤니티 역할도 한다. 특히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한인 교포들이 개신교 신자들이다. 새로 이민을 오게 되는 사람들이나 유학생들이 현지에 적응하는 데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교회를 나가지 않던 사람도 해외에서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러나 이민 사회에서 교회가 비대하게 커지면서, 비신자들에 대한 배타성이나 교회 내부에서의 힘싸움 및 교회 간의 다툼 등과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게 가볍게 볼 게 아닌 점도 있는데 LA 폭동 당시 한인교회는 몇몇 교회파끼리 나뉘어져 서로 한인 교포 피해에 대해 나몰라라 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이걸 종교 드립으로 선전하는 일도 벌어졌다.

7 목사 임명에 대한 논란

목사로 임명받는 과정은 각 교단 별로 차이가 있지만, 정통적이라고 여겨지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신학대학원 과정(3년)을 이수해야 하고, 자신이 소속된 교회에서 전도사로서 봉사를 하여야 한다. 참고로, 미국과 같은 경우는 youth pastor나 assistant pastor로 칭하는데, 미국의 경우는 교회에서 사역을 공식적으로 하는 사람을 pastor라고 부른다. 대다수의 교단은 미혼인 사람은 목사로 임명조차 하지 않으며 전도사로서 봉사를 시키는 것은 해당 인물이 적합한 인물인지 평가를 위해서다. 이는 바울의 서신(디도서 1장, 디모데전서 3장)에서 나온 감독으로 합당한 자에 대한 설명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교단 등록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을 이용, 기존 교단들의 이름과 비슷한 교단을 만들어 그럴 듯하게 장로교감리교침례교니 하는 이름만 빌렸을 뿐 전혀 관련이 없는 자체적인 교리와 시스템을 가지고 사이비 단체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으며, 혹은 돈을 노리고 자체적으로 목사를 임명하는 프로그램을 돌리기 시작해 이른바 속성으로 목사 안수를 받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한두 달은 양반이고 3일 속성, 7일 속성코스나 심지어 인터넷만으로도 국가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목사가 될 수 있다. 물론 신학대학을 다니지도 않고 이런 단기간의 안수로 제대로 된 목사가 될 수 있을리가 만무하기에 기존 교단들은 이러한 교단과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기와 같은 범죄를 조금 더 쉽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방향으로 목사 '타이틀'을 취득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출소 후 자신이 종교에 귀의하여 개과천선했다는 빌미로 자금을 끌어모으거나 범죄를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로 삼는 것인데,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가 전직 고문기술자 겸 목사 이근안[38], 한때 대도로 유명했던 조세형의 경우이다. [관련기사] 그 외에 옥중에서 안수를 받아 수감자 상태에서 목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8 관련 링크


9 관련 문서

  1. 예외적으로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우리나라와 개신교 구성이 엇비슷하며, 특히 네덜란드는 같은 칼뱅주의란 공통점 때문인지 단 한번도 한국에 직접적인 선교사 파송이 없었음에도 한국 신학계와 의외로 긴밀한 연관이 있다. 추가로 덧붙이자면, 헝가리도 개혁교회가 절대 다수고 나머지 소수를 루터회가 차지하는 식의 구성이며, 프랑스 개신교단 역시 개혁교회 위주에 나머지를 루터회가 차지하는 식이다. 두 나라 모두 카톨릭 우세 국가이긴 하지만,
  2. 이 대학의 후신을 자처하는 대학이 장신대학교총신대학교이다
  3. 당시엔 가톨릭도 제사는 금지였다.
  4. 다만 이 과정에서 한국 토속 샤머니즘 요소가 개신교 내부에 남게 된다.
  5. 독립운동을 이끈 교회를 이어받은 신학교나 교회를 주축으로 친일 연구가 활발한다. 재밌는것은 개신교 학계는 물론 반기독교 성향의 일반인들도 이 자료들을 자주 애용을 한다는 점이다. 개독들 자료들은 못 믿는 다면서??
  6. 일반 사법 경찰과 달리 정치범과 중요사건을 다루는 경찰조직
  7. 현재 연구로는 1933년 이전에 한국 천주교 내부적으로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는 연구도 있다.
  8. 대표적으로 반대한 선교사와 기관은 언더우드, 풀러 신학교
  9.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40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인 방인성 목사의 친할아버지이다. 광복 후에 강단에 인공기를 걸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10. 이때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주기철, 손양원 등은 실제로도 개신교계에서 위인급으로 존경받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절대로 그들이 주류가 아니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분들 이외에는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인물 자체가 애초에 거의 없었다.
  11. 명목상 평신도 회중제로 운영하는 교회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조합교회는 어용교단 노릇을 하면서 한국의 개신교를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었다.
  12. 상대적으로 민주당, 그 가운데 신파는 부통령 장면을 중심으로 가톨릭 성향이 강했다. 이런 분위기는 김대중, 노무현까지 이어졌다. 다만 민주당 구파의 대표 인사인 윤보선 전 대통령은 장로회 신자였다.
  13. 고려원 "한국의 불교".
  14. 개신교를 믿는 나라들은 모두 잘 산다는 주장도 사실 이때부터 나왔던 것이다. 물론 반개신교 측에서는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예시를 들어 개신교 국가임에도 못 사는 나라들이 수두룩했다는 반론을 편다.
  15. 그런데 기윤실은 1996년에 마이클 잭슨의 내한 반대 운동을 벌인 적이 있는 집단이며 게다가 마릴린 맨슨은 물론 레이디 가가 내한 공연 반대 운동까지 시전은 물론 각종 문화예술들 탄압을 주도하는 선두주자인 셈이다. 갱생은 개뿔... 오히려 NGO같지 않은 배후세력 집단들을 몸집늘리면서 광기어린 짓만 골라서 한다. 잭슨의 소송크리를 맞고 나서 정신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더 심하게 정신줄 놓고 개소리를 시전하니 개독인증받고 낙인찍힌 셈이다.
  16. 하지만 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상암서울대회에서 故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타락을 비판하고 목회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17. 딸을 죽인 아버지가 다름아닌 목사였다. 그것도 사이비, 이단 종파의 목사가 아닌 정통 교단의 목사(...).
  18. 단, 이 짤 자체는 인도의 부패문제에 대해 만들어진 것이다. 출처는 [이쪽].
  19. 한인교회를 제외한 순수하게 미국의 개신교의 사상 아래에 있는 교회. 형식상으로 개신교가 미국의 국교는 아니다. 설문조사 등의 자료에서 미국인들이 매우 종교적이고 미국이 개신교 국가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국가적으로는 법으로 정교 분리를 규정했기 때문에 (혹시 헌법을 개정하지 않는 이상) 국교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개신교 전통의 영향이 국가적으로 강한 건 사실이라 대통령 선서 등에는 성경 위에 손을 얹고 하기는 한다. 물론 이것도 절대적이지는 않아서 쿠란에 선서한 하원의원의 경우도 있다.
  20. 길선주 장로는 회심하기 전 관우를 섬기는 관성교의 신자였다. 새벽기도 역시 관성교의 새벽기도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21. 참조 : 평양 대부흥운동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단, 해당 논문에서는 도교적 기복신앙이 사회 공동체 구원의 신앙으로 진화하였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 영향 그대로 그 대상과 방법만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현재 관점에서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22. 신학, 정치 모두
  23. 타 교파 신자에 대한 영성체 허용 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이라 이쪽으로 분류하였다.
  24. 물론 떨어져 나오기 전에 먼저 교단에서 축출당한 것. 김재준 목사는 모세오경을 쓴 것이 모세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등 성경비평에 입각한 신정통주의 신학을 펼치다가 근본주의 신학을 하는 이들에게 비판을 받는 등 큰 소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기장과 예장이 갈라섰다. 하지만 그 어떤 교단보다도 기장, 한신측의 전신인 조선신학교 계통 교단이 신사참배에 가장 호의적이었던 탓이 가장 크다.
  25. 전통적인 자유주의가 아님에 유의. 성경의 권위를 깎아내리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며 인간 이성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고, 성경을 그냥 좀 클래스 있는 도덕책 정도로만 간주하던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에는 거의 몰락했는데, 인간의 이성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와 패권주의적 제국주의를 지지했고 독일의 경우 대놓고 히틀러를 지지하는 극우적 행보를 보였다.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것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은 자유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죄와 심판, 속죄와 부활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즉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안티테제로 등장한 것이며, 애초에 이름 자체가 신'정통주의'인 이유가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구)정통주의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근본주의와는 달리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면서도 성경 본문 비평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관계로 근본주의 계열에선 자유주의로 매도를 하곤 한다. 이러한 오해는 한국의 대표적인 근본주의 신학자로써 현재 한국 개독과 예수쟁이의 원조가 된 박형룡 박사가, 칼 바르트의 신학적 라이벌이었던 꼴통 근본주의 신학자 메이첸의 직계 제자였기 때문. 메이첸은 칼 바르트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 시기심에 사로잡혀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자라 카더라는 허위사실을 신나게 유포시키고 다녔으며, 이것을 박형룡이 그대로 배워 와서 철덕후들에게 쿼크가 되도록 까이고 있는 대학교 강단에서 신나게 유포시켰다. 정작 칼 바르트 본인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신정통주의 신학을 개발했으며, 이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놀던 마당에 떨어진 폭탄'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아무튼 신학적으로 진보적이라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인 것은 아니다. 마치 현대에는 레닌, 스탈린식 공산주의를 더 이상 진보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정치 스탠스는 수꼴이다.
  26. 또한 신정통주의를 표방하거나 NCCK 소속 교단이라 하여 모두 진보적인 것만은 아니다.
  27. 이런 추세는 일제강점기 이전 이북 지역도 마찬가지라서 서북지역과 달리 함경도나 개마고원에는 원래부터 개신교인이 별로 없었다.
  28. 물론 해당 지역(정읍시) 같은 군들은 전북 내에서 개신교 신자가 낮은 편이긴 하니 일반화하지는 말도록 하자.
  29. 초기 서울의 교회는 이북(특히 평안도)에서의 실향민들의 영향이 컸다. 적어도 분단 이전에는 평안도가 기독교 신자 비율이 가장 높았고 현대 개신교 원로들의 출신지가 이북, 특히 평안도 지역 출신지가 많다. 또한 1960년대 이후 호남 출신의 이주민들이 많이 이주하면서 호남 출신의 신자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또한 호남 출신들 다음으로 호서 출신들도 꽤 많은 편이다.
  30. 육지에서는 마이너 교단인 성공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31. 동해권에서 유일하게 개신교 교세가 강하다 볼 수 있다.
  32. 일명 통일교, 전 교주 신격화로 인해 현재는 기독교와 관계가 없다.
  33. 구 합동정통
  34. 서울 관악구 남현동 소재
  35. 다만 지금은 6위이다.
  36. 그 이전에도 인터콥이라든지 극단적인 선교단체가 이스라엘이나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에서 대규모 부흥회를 한다고 설치다가 외교부나 대사관은 물론, 그 나라 정부에서 무슨 일 터져도 일절 한국 정부가 책임지라고 으르렁거렸던 바 있다. 특히 이스라엘 부흥회 시도 당시 이스라엘 측이 반이스라엘 폭도로 규정하고 무차별 발포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었다. 결국 모조리 무산되었거늘 인터콥 측은 이게 종교 탄압이라고 적반하장으로 발광하여 개신교 선교에 대한 어그로를 부채질했다.
  37. 그러나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통계가 정확하지 않고 워낙에 제각각이라 실제로는 한국 인구만큼은 아닐 수 있다. 일단 공식적인 숫자는 2012년 기준 약 2천만 명이다. 물론 중국 교회는 인구 비율과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어느 통계를 기준으로 보나 중국 사회에서 미미한 현실이다.
  38. 이후 논란이 되자 목사직 박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