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欽英. 조선 영조 51년, 1775년부터 정조 11년, 1787년까지 13년간 유만주(兪晩柱)가 쓴 일기. 총 161권 24책.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당대 문인 유만주가 13년간을 살아오면서 그날 그날 일어난 일들을 연, 월, 일의 순서로 배열하여 매일 적어놓았다. 한 해의 일기를 일부(一部)로 삼아 모두 13부로 구성해 놓았으며, 각 부 앞에는 저자의 서문을 적었다. 하루하루의 기록은 맨 처음에 그 날의 날씨를 적었으며, 이어서 그 날 있었던 일을 기사내용에 따라 동그라미 표시로 구분하며 적어 나가고 있다.
내용은 자신이 창작한 시문, 그날의 행적, 집안의 일, 그날 공부한 내용들, 나라 안팎에 일어나는 일들, 선배 문인들과 당대 문인들의 글에 대한 문장론 등 광범위하다.
특이한 점은 유만주는 자신이 일기를 쓰게 된 이유와 끝내게 된 원인까지 모두 일기에서 해명을 하고 있다. 유만주가 20세이던 1774년 겨울에 친구 임로와 함께 경전을 공부하면서 토론하다 찬록의 방식 가운데 일기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내년 맹춘 상일부터 함께 시작해보자"고 약속한 후 일기 쓰기를 시작한다고 밝히고 있다. 마찬가지로 일기를 끝내기 몇달 전부터 자신의 일기를 끝낼 1787년 12월 14일을 미리 지정해 두면서 "나에게 일기 쓰기는 본디 지식을 수습하여 저술을 진행해나가는 수단이었으나, 십여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내면을 토로하는 곳으로 변모하였고 저술과 입언을 통한 자기구현의 희망을 담은 행위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를 돕고 계승할 아들이 죽어 처음의 동기가 좌절되었고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았으니 절필함이 마땅하다"고 일기를 끝내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3 일기에 나타난 생애
일기의 내용은 1775년 1월 1일부터 시작한다. 계획을 세워 과거에 응시하고 훗날 훌륭한 문인이 되길 꿈꾸는 내용이 20대 초반 내용의 대부분이며, 그러다 1777년 7월에 아버지 유한준이 군위 현감으로 부임하자 유만주는 1779년 1월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군위에서 생활한다. 이 당시 제천 현감인 종숙부 유한갈을 방문하여 단양 지역을 유람하기도 하는데 서울을 거의 벗어나본 적이 없던 그는 처음에는 전형적인 서울내기의 시선으로 그곳을 세련된 서울의 문화와 비교하며 마뜩찮아하지만, 점차 수험생이 처한 단조로운 삶을 벗어나 그곳에서 만나게 된 질박한 자연과 사람들을 아름답다 여기게 되고 주변 지역에서 내려오는 선배의 문집들과 불교 경전들을 자유롭게 읽어나가며 자신과 세계를 고요히 성찰할 시간을 얻게 된다. 결국 서울로 돌아간 후에도 군위의 경물을 사랑하여 종종 인편을 통해 군위 동헌 앞의 매화가 잘 있는지 물어보고 말년에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군위 땅을 다시 밟아볼 수 있을까" 등을 시름하며 생각하게 된다.
1779년 1월에 아들 구환이 천연두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상경하게 된다. 이후 서울에서의 일상은 예전처럼 시험공부와 과거응시에 열중하는 것과 달라지지 않았으나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서울을 보게 된다. 자신이 아름다웠다 여겼던 타지에서 체류한 경험과 여행체험이 그의 의식에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보이며, 자신이 나고 자란 서울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게 되고, 거자로서 자신의 처지를 자의식을 가지고 돌아보기 시작하며 이 모든 것을 일기에 남긴다.
1782년 8월 아버지가 해주목 판관으로 부임하게 되자 유만주는 1784년까지 해주와 서울을 왕복하면서 부친 대신 집안일을 돌본다. 해주목은 풍요로운 곳이라 부친이 서울로 보내주는 생활비와 물품도 넉넉해졌고 이에 집안 형편이 전보다 훨씬 나아졌음을 일기로 묘사하고 있다. 1783년에는 이사를 결심하는데 1년여간 남촌의 여기저기에 집을 보러 다니지만 공부만 하다보니 물정에 밝지 못한 그를 두고 집주릅이 여러차례 농간을 부려 자꾸 무산되다가 1784년 8월에 이르러서야 명동에 새집을 가지게 된다. 이때 어릴때부터 아무것도 못한채 공부에만 매진해 왔지만 번번히 과거에 낙방만 하고 집안일에 치여 자존감이 낮아지고 있던 그에게 명동 새집의 정원은 큰 위안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원을 직접 정돈하고 초목을 가꾸었으며 정원에 있는 초목들의 장부를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방과 창문과 정원에 있는 나무들에게 자신이 지은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주고 정원을 "나의 세계"라 일컬으며 군위에 있던 때 다음으로 생애 두번째의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1785년 8월에 아버지가 익산 군수로 부임해있던 중 해주 판관 재직시 발생한 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된다. 집안의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하고 명동 새집 대신 창동의 작은 집으로 이사가게 되며, 이 이후 유만주는 악화된 집안 사정과 번번이 낙방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과 함께 "나의 세계"였던 명동의 정원을 잃은 상실감에 시달리고 죽음을 생각할 정도의 극심한 우울증을 겪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원래부터 병약했던 아들 구환이 1786년 여름부터 코피를 자주 흘리며 좋지 않은 징조를 보였고, 만주 자신도 건강이 악화되어 지병인 치질과 안질이 극심해진다. 과거 응시 도중 치질의 고통이 너무나도 극심하여 일찍 나오기도 했고 안질로 눈이 나빠져 좋아하던 책을 보기가 힘들어지자 명동 시절에 안경을 하나 사두지 않았던 것을 몹시 후회하는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유만주는 희망 없이 고통스럽게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하기를 반복하는데 그러다 1787년 1월 24일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와보니 둘째 아들 돈환이 태어나 있었다. 이 이후로 그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유일한 위안이 된 것이 독서와 첫째, 둘째 아들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1787년 5월 4일 첫째아들 구환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12일에 숨을 거둔다. 6월 24일 폭우 속에서 경기도 광주 지동의 선산에 아들을 묻은 후 흠영일기를 아들에 대한 복이 끝나는 1787년 12월 14일까지만 쓰기로 하고 자신의 저술활동을 끝낸다.
이후 유고에 따르면 유만주가 세상을 떠난 것은 1788년 1월 29일로 마지막 일기를 쓴 후 한달 후였다. 향년 34세. 죽기 전에 자신의 일기를 태워 달라는 유언을 아버지께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버지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고 덕분에 흠영일기가 지금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4 의의
일기 곳곳에 정통 고문은 물론 소설, 소품문(小品文)에 관한 문장론이 풍부하게 개진되어 있으며, 역사가로서의 지향과 심미주의적 몽상가로서의 지향을 보여주는 높은 수준의 글들이 개재되어 있다. 특히 유만주 특유의 심미주의적 취향과 몽상가적 면모가 드러난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분열되고 모순된 자신의 면면을 직시하여 일기에 기록하고 있으며, 외부 현실에 의해 확정되거나 경직되지 않은 상상력을 지닌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그러나 유교적 현실주의가 지배적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예술적 이상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 또한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1]
또한 저자 유만주가 생존한 당시의 생활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18세기 사회, 경제, 문화사 연구에 기초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문인 화가들의 화론(畫論)을 초록하고 있어 중국과 우리나라의 서화(書畫)에 대한 논의도 풍부하여 조선시대 예술사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5 일기의 작품 구성
2015년 7월에 번역 완료된 흠영 선집 : 일기를 쓰다 1, 흠영 선집 : 일기를 쓰다 2에 나오는 목차 기준.
- 나, 유만주
- 오늘 처음 쓴 일기
- 통달의 정원
- 책 속의 아름다운 이들을 흠모하여
- 정체성
- 나의 본분
- 내가 좋아하는 것들
- 지도|역사책|주렴|여행|다례
- 나의 특별한 욕망
- 내 마음을 밝히는 역사
- 재야 역사가의 임무
- 오뇌와 풍경
- 모멸감의 근원
- 『흠영』이 없으면 나도 없다
- 담배가 싫은 몇 가지 이유
-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호랑이
- 자신을 속이지 마라
- 바람에 나부끼는 마음
- 어디에도 없는 나라
- 아무것도 아닌 사람
- 우울과 몽상
- 노자를 닮았다고?
- 30살
- 성균관을 배회하는 32살의 거자
- 거자일기(擧子日記)
- 생원시 합격만이 성취인가
- 시골 선비의 시험 고생
- 도깨비가 된 거자들
- 어떤 시험 날
- 거자는 달린다
- 합격을 위한 꼼수
- 수험생의 농담
- 시험을 앞두고
- 성균관 유생들의 전쟁
- 이 전쟁에서 나는 패배자
- 나는 여기에 뜻을 둔 자가 아니다
- 수만 가지 재능, 한 가지 시험
- 새로운 과거제를 기대한다
- 벼루가 얼지는 않았다
- 내일은 치욕의 날
- 하찮은 인간들
- 성균관을 배회하는 32살의 거자
- 우주 간의 한 벌레
- 겨울잠을 자는 벌레처럼
- 개미굴 속의 삶
- 저마다의 인생, 저마다의 세계
- 조물주가 나를 조롱한다
- 곡식을 축내는 벌레
- 인간은 환경의 동물
- 헛되이 죽는 것
- 남자는 가련한 벌레
- 무명(無明)의 벌레여
- 불행은 무능해서가 아니다
- 천자도 불행한 사람
- 세상에 태어난 아이
- 영웅 본색
- 세계라는 극장
- 연극의 구경꾼으로 살아가기
- 마음의 영토
- 세상을 안다는 것
- 소설 같은 인생은 오지 않는다
- 시간을 들여다보며
- 접시꽃 단상
- 쓸쓸한 이름들을 적는다
- 나를 위한 책 읽기
- 연꽃 같은 아이야
- 20살 아버지
- 연꽃 같은 아이야
- 아들의 이름
- 아이를 기른다는 것
- 아들의 글공부
- 아들의 병록을 적다
- 운명
- 심장에 못 박힌 채로
- 하얀 연꽃의 기억
- 그래도 글을 쓰는 이유
- 장지로 가는 길
- 착한 아이
- 다시 아들의 무덤에서
- 꿈에서 나오지 못하고
- 희망 없는 나라
- 여기, 조선의 사람들
- 낯선 곳에서 쓴 일기
- 서울 풍경
- 구름과 숲과 꽃과 달에 쓰다
- 달과 꿈
- 박달나무 아래 핀 작은 꽃들
- 서리꽃
- 나뭇잎 아래
- 구름 풍경
- 행복한 달밤
- 진달래 골짜기
- 나는 꿈에 산과 강물이 된다
- 내 정원의 사계
- 정원의 가을밤|정결한 겨울|봄은 나의 벗|여름의 기쁨
- 그리운 소나무
- 벗의 정원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