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62년 12월 조선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국방에서의 자위」 원칙으로 채택된 북한의 국방/군사 정책이자 조선인민군의 군사 전략.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어떻게 하면 미국에게 맞기 전에 혹은 최대한 덜 맞으면서 남한을 먹어버릴 수 있을까?" 결국 이룩한건 전인민의 거지화
2 내용
4대 군사노선은 총 네 개의 주요한 정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정책은 6.25 전쟁 때의 전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1 전인민의 무장화
6.25 전쟁 발발 당시 조선인민군은 15만 명 정도였다.[1] 아무리 정예고 훈련도가 높다고 하지만[2] 이 정도로 전쟁을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도 초반에는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지속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손실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북한이 6.25 전쟁 때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예비대 부족이었다. 춘천-홍천 전투 초전에 춘전을 통해서 조공인 2군단이 경기도 한강 이남으로 우회기동하여 퇴로 차단, 포위 섬멸전을 펼치려고 했지만 국군 제6보병사단의 분전으로 2사단이 괴멸적인 타격(전투력 40% 손실)을 받자 순조롭게 공격 중이던 7사단을 돌려서 춘천 공격에 투입한다. 덕분에 6사단에 주력이 몽땅 묶인 2군단은 계획대로 공세에 나서지 못한다.
낙동강 방어전 때는 팔로군 출신의 방호산이 지휘하는 정예부대인 인민군 6사단이 미군의 정찰을 피해서 순조롭게 기동하였다. 당시 미군은 마땅하게 방어에 투입할 병력이 없어서 그냥 패닉 상태였고 방호산은 그대로 마산 방면으로 진격했으면 낙동강 방어선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광주에서 항구로 부대를 분산시켜서 재보급을 받아야 했고 그동안 병력을 추스린 미군을 6사단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춘천-홍천 전투는 그렇다 치더라도 6사단의 공세는 마땅하게 공세에 투입할 사단 하나가 부족해서 실패한 경우였다. 사단 하나만 더 있었어도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해서 부산까지 진격할 수 있었는데 그게 안된 것이다.
예비대 부족은 전방에 병력의 손실과 피로도 심각하게 누적시켰다. 계속된 전투로 정예병이 손실이 되었고 휴식이 없이 계속된 공격으로 이미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을 때는 조선인민군도 지친 상태였고 공세종말점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예비대가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전 병력을 낙동강 전선에 쏟아부었고 후방에 방호나 안정화 작전은 꿈도 못 꾸었다. 막장화 된 인민재판이나 강제적 징집이 이루어진 건 역으로 보면 북한이 제대로 후방에 신경을 써서 관리를 하거나 남한 사람을 징집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병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는데 북한도 인천상륙작전 자체는 예상을 했다. 문제는 병력이 부족해서 인천은 커녕 이북지역도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예비대가 없었고 그나마 있는 병력은 낙동강 방어선을 어떻게 해 보겠다고 몽땅 부산으로 어택땅 찍은 상태였으니 인천 상륙작전이 실시되자 마땅한 방어 병력이 없던 인천과 서울은 그냥 털렸고 모든 주력이 낙동강에 있던 북한은 낙동강의 주력이 무너지자 한방에 쓸려버리게 된다. 거기다 이후에 미군의 또 다른 상륙작전 가능성 때문에 대규모 인민을 동원한 방어준비에 나서는 등 예비대 부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 결과로 북한군은 정규군을 꾸준하게 증강시켰다.[3] 우선 예비대 증강으로 제파식 전술을 바탕으로 꾸준하게 끊임없는 공세를 지속하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대규모 병력을 초반에 투입해서 전쟁 초반에 국군을 섬멸하여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도 위해서이다. 즉 초반의 대규모 전력투사로 국군 섬멸 혹은 중대한 타격을 입히고 대량의 예비대를 이용해서 후방을 방호, 안정화 작전을 실시하고 차후에 미군의 상륙 등에 대비하여 방어전을 펼칠 때 종심을 유지한다.
수많은 여러 준군사조직도 이를 위한 것인데 유사시 군을 지원해서 후방을 방호하거나 미군의 직접적인 북한 공격시 방어시설 건설과 민방위 개념으로 지역을 방어하고 예비대로써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어서 점령지를 방어하는 등 다양하게 임무를 수행가능하고 유사시에는 이들도 조공으로 공세에 투입될 수 있다.
2.2 전국토의 요새화
북한은 세계 최고 수준인 미군의 상륙전 능력과 미칠 듯한 미군의 화력을 온몸으로 겪은 후 우주방어가 답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전국토의 요새화는 단순한 방어시설 건설을 넘어서 전시생산 체계 자체를 정립한다. 6.25 전쟁 시 후방 방호가 전무한 상태로 인천상륙 작전 한방에 훅 가버린 경험은 상륙전에 대한 대비에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양면이 바다인 북한 입장에서 세계 최강의 해군을 배경으로 제해권을 잡고서 자유롭게 공격 지점을 택할 수 있는 미군에 대한 공포가 상당했다. 당장에 평안남도에 상륙하면 수도 평양이 코앞이다. 평양은 서해라서 중국이 있으니 좀 낫지만 북한 제 2도시이자 평양과 직통으로 연결된 원산은 동해안의 대표 항구도시이다. 당연히 언제든지 역으로 상륙전을 통해서 2전선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미군에 대한 대비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여기다 6.25 당시에 부랴부랴 상륙전에 대비하느라고 방어시설을 건설하기 위해서 공장을 돌려서야 할 노동자까지 동원해서 군수품 생산도 차질을 빚었기 때문에 나중에 당해서 또 그러느니 미리 준비해서 대규모 동원으로 전시경제에 차질이 없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방호 시설은 전시생산 시설의 요새화와 지하화까지 포함한 대규모 전시체제 정비의 일부이다. 덕분에 북한의 군수공장과 군사시설은 지하에 요새화한 경우가 많다. 미 공군의 전략폭격을 전쟁내내 당하면서 그야말로 멀쩡한 건물이 하나도 안 남은 상태에서 북한은 전쟁은 커녕 일상도 제대로 영위할 수 없었다. 매일 폭탄비가 내리는데 무슨 수로 공장을 돌리고 군수품을 만들어서 보급을 할 수가 있나? 덕분에 후방의 군사시설과 군대는 아작나고 북한의 전시경제는 개박살났고 전방의 병참수준을 최악으로 변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북한은 미군의 제공권을 상대로 전쟁을 하려면 어떻게든 맷집을 키워서 몸빵하면서 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동시에 우주방어를 위해서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중저고도 방공망을 만들었다. 문제는 제일 중요한 고고도 방공망을 돈 없어서 제대로 못만들었다는 것이다
2.3 전군의 간부화
북한은 6.25 전쟁 직전까지 대규모 군대를 양성해서 훈련을 시켰고 사단급까지 작전 수준을 향상시켰다. 당시 대대급 수준이었던 국군보다는 대단하지만 실전과 훈련은 다른 법이고 조선인민군도 창군된지 얼마 안된 신생 군대였고 당연히 대부분의 간부가 급하게 양성된 상황이었다. 고위 지휘관이야 화려한 경력자가 많지만 중하급 지휘관은 국군이나 조선인민군이나 고만고만 수준이었다. 거기다 조선인민군도 군단급 훈련은 안한 상태였다. 사단급까지 훈련 한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사단급까지 훈련을 해냈다가 가까운 편. 그나마 숫자는 많은가 하면 이런 오합지졸들이 15만명밖에 없었다는게 포인트.(...) 전쟁준비 한거 맞음?
공세 순조로울 때는 이런 면이 잘 안 드러났지만 낙동강 방어선의 심각한 상황에 마주치자 간부들의 질적 문제가 나타났다. 융통성 없는 공격, 지휘없는 퇴각,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이동, 지휘관의 지휘소 방기 등등. 이런 상황에서 간부가 능력이 안되니 제대로 지휘와 통제가 될리 없었다. 거기다 인력이 부족하다보니까 점령지에서 징집한 병력이 섞이고 신병들을 그대로 전장에 투입하면서 병력의 질적하락도 같이 대두되었다. 전장에서 임무 대리 및 현지 진급, 부대 확장 등으로 간부화 된 인원이 즉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전후에 대규모로 군을 증강시키는 것과 더불어서 준군사조직도 대거 증설되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준군사조직을 예비군 개념으로 정규군 작전에 맞춰서 운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간부 확보와 교육은 필수적이었다.
한마디로 간부를 넘어서 전군의 교육훈련을 통한 정예화가 목표였다.
2.4 장비의 현대화
6.25 전쟁 때 조선인민군의 무기가 국군보다 월등했고 관련해서 교육 수준도 높았다. 무기의 차이가 전쟁의 승패는 못 가르지만 전투의 승패를 가른다는 점에서 북한이 국군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런데 장비가 낙후된 것도 아닌데 왜 현대화를 부르짖었냐면 이것은 전투용 무기만이 아니라 군 전반의 기계화를 목표로 한 것이다.
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당연히 탱크였다. 문제는 이 탱크가 전투력을 발휘하는데 제한사항이 많았다는 점이다. 산악 지형에 도로도 좁고 하천이 많은 한반도에서 탱크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공병의 지원, 그중에서도 도하장비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원래 보병 중심의 군대였던 조선인민군이 기계화부대에 필요한 전투지원까지 세심하게 준비할 시간은 없었고 평탄한 의정부 방면, 도로가 정비된 수도권 일대를 벗어나자 당연히 기계화 부대의 기동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당장 한강만 해도 도하장비가 없어서 한강철교만 제대로 폭파했어도 도하를 막았을 거라는 의견이 있다.
기계화 부대만이 아니라 일반 보병부대도 하천과 제한된 도로 사정, 장애물 거부 제한으로 기동이 중단되거나 우회해야 하는 등 작전에 차질을 빚었다. 서울에서 3일이 지체되었다지만 그후로도 지속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추격전에서 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허용한다. 전반적인 군의 기동력 제한으로 작전지속이 이어지지 않았고 추격 및 포위섬멸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점을 반영해서 조선인민군은 공병을 대단히 중시한다. 총참모부 직속으로 공병국이 있어서 공병부대를 보유하고 있고 각 군단, 사단에도 공병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단순 숫자로만 보면 국군보다 많은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도하장비 역시 다량 보유하고 있어서 교량전차의 종류도 여럿된다. 또한 꾸준히 기계화를 추진해서 보병 중심에서 장갑 차량 중심의 기계화부대로 군을 편성한다.
3 한계와 문제점 : 붉은 여왕 효과
4대 군사노선은 그 시작은 어째든 전훈의 분석과 문제점 인식과 대응이라는 점에서 방향은 올바르게 잡았다. 세부적인 문제점까지 잘 확인했고 그것을 네 개의 큰 분야로 묶어서 전반적인 군사 전략과 결합해서 군사력 건설하는 체계도 잘 되었다. 그러나 4대 군사노선은 당시 국제정세에서 소련과 중국의 대립에서 국방에서 자위를 내세우며 자력갱생적인 정치적인 목표를 세우고 시작이 되었다. 무엇보다 4대 군사노선은 그 자체가 군사 전략이자 군사 전략에 맞춘 군사 정책이지 종합적인 국방(防) 정책과는 거리가 한참 있었다. 목표부터가 무력적화통일을 위한 구상의 현실화로 당장의 공세적인 군사 작전에 맞춰서 국가의 국방 정책이 따라가는 형태였다. 왠지 이런 게 예전에도 있었던 거 같은데? 당연하지만 육군에 집중되는 형태였지 해군과 공군을 포함해서 종합적으로 군을 육성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이나 목표는 없었다. 남이나 북이나 육방부 심지어는 제대로 된 방어계획조차도.
당연히 당장의 무기도입과 군사력 증강, 군사시설의 건설 등으로 군사력을 통한 국방력은 일시적으로 강화되었지만 장기적인 국방 정책의 부재로 시간이 지나면서 한계가 드러난다. 무기도입 면에서도 자위권을 강조한 것과 반대로 공산권에서 넘겨받은 무기를 면허 생산, 복제를 한 수준에서 개량에서 멈추었지 핵무기나 장거리 미사일을 제외하면 재래식 무기의 개발 등의 계획은 전무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북한이 경제발전을 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 한국도 경제개발에 나서면서 경제력이 향상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즉 북한은 국군의 수준을 보고 미국을 주적으로 보고 준비를 했는데[4] 만만하던 국군도 북한이 공산권에서 무기를 도입했듯이 미국을 비롯해서 외국에서 무기를 도입했고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전투력이 증대된다. 당장에 패튼 시리즈를 1960년대에 도입했고 1968년에 M16도 제식화 한다. 그래도 아직은 국군이 아직 한참 조선인민군에 밀리는 편이었지만 60년대는 북한도 준비가 덜 되었고 북한의 경제력이 최상이자 4대 군사노선도 완성된 1970~1980년대에는 한국도 경제력이 북한과 대등하거나 넘어선 수준이었다. 여기에 닉슨 독트린의 발표로 미국에 의존한 국방에 한계를 느끼고 1970년대부터 자주국방을 내세우며 율곡 사업 등 무기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K-1,K-2 소총, K-1 전차가 이 시기에 개발을 시작해서 1980년대에 제식화된다.
여기서 붉은 여왕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데 북한은 군비 증강으로 남한을 압도하고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일설에 김일성은 10일 안에 항구 도시를 모조리 점령해서 미국의 증원 막아서 전쟁을 막거나 서울을 신속하게 점령해서 지연전 후 수도권 일대를 점령한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협상을 하는 구상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6.25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국군이 최소한 3일 안에는 무너진다고 가정하고 미군의 증원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때보다 군비를 더 증강하면 더 빠르고 손 쉬울 것이라고 여긴 것이고.
그러나 북한이 경제발전을 하고 군비를 증강시키는 그 시기에 남한도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군비를 꾸준히 증강시켰고 남북한의 군사력 격차는 북한의 우위에서 일정한 수준을 계속 유지한다. 당장의 군사력은 북한이 우세하기는 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격차는 안나게 된다. 거기다 북한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전면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한 1970년대는 한국도 이미 어느 정도 경제 수준이 올라와 있었고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 신무기 개발에 나선다. 즉, 북한이 전면전에 대한 준비가 된 시점에서 한국도 그 맞춰서 전투할 준비가 되어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군의 이런 투자는 1980년대에 성과를 보이면서 군사력 격차를 크게 줄인다. 반대로 북한은 군사력 우위를 유지하는 원동력인 경제력이 1970년대부터 성장이 둔화되었고, 1980년대 정체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군비 증강만큼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도 1980년대에는 북한이 경제력도 충분했고 공산권 우호국도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투자와 더불어서 격차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군사적인 우위는 일정 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한국의 경제성장이 계속 호황기를 맞이하고 1990년대 들어오면서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울 정도로 눈부신 성장을 보인 반면에 북한은 1980년대에 한계에 다다르고 하향곡선을 그리던 경제가 1993년의 고난의 행군이 터지면서 한방에 훅 가버린다. 군사력 경쟁의 원천인 경제가 무너지고 거기다 무기도입 선이었던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몰락하자 무기도입도 불가능해지면서 군비 증강이 원천 차단된다. 여기다 김영삼 정부 때 해군과 공군의 군비가 너무나 막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둘마저 증강시키고 불곰 사업과 지속된 신무기 도입과 배치로 2000~2005년부터는 아예 역전이 되었고, 이제 대한민국 사람들은 북한 따위와 전쟁하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일본이나 중국을 가지고 떡밥을 물고 대양해군이니 항공모함이니 랩터니 이야기를 한다. 이미 북한군 이전에 북한이라는 나라 전체가 막장이 된 상황에서, 남한이 전쟁에서 질거라는 생각은 이제 아무도 안한다. 북한은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지니고 싸울 생각이었지만 막상 현실은 북한이 군비 증강하는 만큼 남한도 했기 때문에 북한은 오히려 남한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 군비를 증강해야 했다. 그러다가 군비 경쟁의 원천인 경제력이 박살나자 역전이 된다. 이로 인해 이론적으로는 효율적이고 실리적이었던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은 각자 특유의 부작용을 매우 잘 드러내면서 완전히 막장이 되어버린다.
- 전 인민의 무장화 :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인구수가 급감했고, 급감한 인구수로는 자연히 이전의 군세를 유지하지 못한다. 또한 인구대비 5%에 복무기간 10년, 실질적으로는 무기한인 막장 조건의 징병제를 실시하다보니 징병제의 단점인 '군 복무층의 생산율 저하'가 매우 극명하게 드러났다. 기본적으로 생산성이 없고 물자와 인력만 소모하는 집단인 군대를 국가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하게 유지하다보니 경제 상황이 개선될리가 없다. 기본적으로 이런 군국주의 사회는 전쟁을 통한 외부로의 진출 및 약탈(= 식민지 경영)로 연명하는것을 기본 골자로 삼고 있는데, 북한은 수십년동안 외부 진출은 커녕 전쟁 한번 하지 않았다. 전쟁하지 않는 군국주의 국가의 결말은 멸망밖에 없다.
- 전 국토의 요새화 : 북한이 한국전쟁 이후부터 죽어라 증강해놓은 중저고도 방공망은 정작 현대전에선 별 쓸모가 없다.[5] 이미 현대 공군의 지상공격 트렌드는 고고도 정밀폭격으로 바뀌었는데, 미칠듯이 건설해놓은 저고도 방공망의 유지비용 때문에 정작 현대 공군에 대응할수 있는 고고도 방공망은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6] 애초에 고고도 방공병기의 가격이 비싸기도 하지만. 그리고 전 국토를 요새화 하는것 또한 필요 이상의 비용이 들어갈 뿐이다. 국토를 요새화할 돈으로 자본 경영을 하게 된다면 생산성 증대와 이윤 창출을 기대할수 있으며, 전 국토를 요새화하는것보다 훨씬 나은 군대를 양성할 국방비 증대를 노릴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북한도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주제에이런것들을 시도해보기는 했지만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부조리함과 경제 분야에 별로 전문성도 없었던 독재자가 마음대로 해먹다 다 말아먹었다는게 문제.
- 전군의 간부화 : 북한 특유의 신정정치에 가까운 국가 운영 때문에 간부를 육성한다 해봤자 군인으로서의 자질이 중요한게 아니라 당에 대한 충성심과 인맥이 모든걸 결정하게 될 따름이다. 여기에 더해서 북한의 상황이 점점 열악해지며 전근대 왕조시절 귀족흉내 혹은 동물농장화가 나타나고 심화되면서 군인 양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군인으로서의 능력이 얼마나 졸렬하건 핵심계층 출신이고 노동당과 인맥이 깊으며 당에 아부를 떨고 뇌물을 바치면 높은 자리가 보장된다. 반대로 군사적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뇌물을 바치지 않거나, 노동당과 별 인맥이 없거나, 혹은 동요/적대계층 출신이면 한직에나 머물면 다행이고 까딱하단 누명쓰고 정치범 수용소로 직행할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선 정예 간부는 커녕 제대로 된 병사조차도 양성하기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극한의 경제문제까지 겹치면서 간부 양성은 물건너갔고 이제는 군인의 신분을 가진 도적떼들이나 양성하는게 한계인 실정이다.
- 장비의 현대화 : 막장 경제상황 때문에 현재 북한군은 현대화는 커녕 오히려 철저하게 구식화 되어있다. 육군은 전세계에서 전쟁좀 할만하다는 나라들이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는 3.5세대 전차는 커녕, 3세대 전차조차도 없고 현대 전차의 세계에서는 좋지않게 취급되는 2세대 전차나 겨우 보유할 따름이다. 해군, 공군은 차라리 없는게 낫다 칠 정도로 세력이 미약하다. 이게 다 선군정치를 통한 생산성 저하와 1인 독재자 체제에서 기인한 경제적 실책들 때문에 이렇게 된거다. 북한군으로서는 차라리 이들 무기들이 최신형이었을 시기에 바로 전쟁을 벌이는게 승산이 조금이라도 더 높았을 것이다.
- ↑ 전쟁 진행하면서 추가로 징집했지만 다 긁어모아도 총합 26만명선에 그쳤다. 60만명 넘게 동원한 국군에 비하면 심각하게 인적자원에서 밀렸던 셈.
- ↑ 단, 어디까지나 국군에 비해서... 타 선진국 군대와 비교하자면 여전히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 ↑ 그냥 증강시키는 것도 아니고 거의 맹목적일 정도로 전투인원 숫자 불리기에만 치중하고 있다. 보다보면 병력 부족으로 남한을 밀어버리지 못했던 한국전쟁때의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은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 ↑ 다만 현실은... 북한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남한이 주적이었고 미국을 주적이라 부를수 있을만한 전력을 갖춘적은 없다. 한국전쟁 당시의 국군은 줄패배를 했었기에 만만하게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북한 입장에선 한국전쟁 당시의 국군도 만만찮은 상대였다. 국군이 비록 졸전기록을 많이 남기긴 했지만 북한군의 2배 넘는 물량을 선보이며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계속 손실을 입으면서 UN군의 방패역할 하나는 확실히 해낸 군대였다.
- ↑ 물론 저고도가 주 활동영역인 헬기에게는 주효한 방공망이기는 하다. 하지만 전면전에서 중요한것은 고고도에서 활동하는 적 공군의 고정익기 편대, 특히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저지하는것이다. 그리고 현대전에서 저고도 방공망은 이 역할을 절대로 수행할수 없다.(...)
- ↑ S-300의 중국카피판을 구입했을것으로 추정되는 등 나름대로 갖춰지고는 있다. 하지만 당초 목표로 삼은 남한+미국의 공습에 대응하기에는 정말로 턱없이 부족한 숫자일 뿐더러 그나마도 대부분 구식 기종들이라 남한+미국의 순항 미사일, 탄도탄, 전자전이나 SEAD 작전으로 허무하게 파괴될 확률이 높다.